※ 개천절(開天節, 영어: Gaecheonjeol 또는 National Foundation Day)
※ 개천절은 5대 국경일인만큼 각 가정에 태극기 게양 위치는 주택이나 아파트나 동일한데요. 집 밖에서 보았을 때 대문의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합니다.
■ 의의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국경일.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되었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족의 기념일로 채택되어 음력 10월 3일을 기념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연호로 단기를 채택했으며, 이듬해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서 국경일로 공식 제정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이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의식을 행하고 있다.
■ 정의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을 기념하되,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을 정해 개천절이라고 명명했다.
■ 서기(西紀)와 단기(檀紀)
서기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연도표기법으로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합니다. 단기는 단군왕검이 왕위에 오른 해인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우리나라만의 연도표기법입니다. 2333년에 현재 연도 2023년을 더하면 단기 연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2023년 기준으로 올해는 단기4356년입니다.
■ 역사
개천 및 개국의 연대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은 실제 개천은 단군의 개국보다 124년 앞선 상원갑자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신화적 연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개천절이 경축일로 제정된 것은 1909년 중창된 나철의 대종교에 의해서이다. 이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음력으로 10월 3일을 민족의 기념일로 제정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단군 연호를 채택하여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제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로서 우리의 고유한 제천행사의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부여의 영고·예맥의 무천 등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서도 국난 때마다 단군신앙이 부활되고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지역의 민속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10월에 제천의 형식을 띤 동제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개천절을 10월로 정한 기본적 근거가 되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로 되어 있으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다.
■ 단군신화 이야기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홍익인간[弘益人間])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하니 이로부터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善),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에 살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웅(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모습이)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忌)하였는데 삼칠일(三七日 :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기하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전해지고,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가지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해 결혼하였다. 웅녀는 출산한 아들의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왕검(唐高, 요[堯])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칭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옮겼으니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며달(今㫆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리기 1천 5백 년이었다.
주(周)나라의 호왕(虎王,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수(壽)가 1천 9백 8세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