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계만리도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① 해석 [수정]
즉 ‘향고도 선생’께서는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서 공개하지 않은 서문(序文)이 -이는 장문(長文)의 주기(注記)를
1. 압록강(鴨綠江)의 흐름을 실록은 왜 갑문(閘門)을 활용, 산(山)을 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가?
‘조선(朝鮮)사람들이 만든 지도’ 가운데, ‘양계 만리도’는 이미 그 전(前)에 나온 ‘조선인(朝鮮人)들이 만든 지도’를
통합해서 거론하고 있는 지도입니다.
따라서 그 전(前)에 만들어진 지도(地圖)를 ‘제대로 독도(讀圖)하지 못하는 까닭’을 주로 서문(序文)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朝鮮)사람들이 만든 지도’들은 한 결 같이 실록(實錄)의 지리(地理) 묘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만주(滿洲)에
자리 잡았던 여러 도호부(都護府)의 지리(地理) 묘사를 ‘표준(標準)’으로 삼아서 ‘국가기밀을 지키면서도 이 <표준
(標準)을 확대 적용시키는 방법>을 비밀-코드(code)의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미 전회(前回)에 설명했듯이 조선의 대해(大海) - 즉 길목해(吉木海)에서 북류(北流)하는 소하강(蘇下江), 서류
(西流)하는 흑룡강, 남류(南流)하는 압록강(鴨綠江), 그리고 동류(東流)하는 두만강(豆滿江)을 연해주(沿海州) 한
복판에 있었던 나단해(羅端海)에 적용하는 범례(凡例)를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 초)>에서 이미
오소흑강(烏蘇黑江)과 희록하(喜綠河)로 보여주어도 이를 근거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자’ <방위(方位) 문제>를
집중적으로 ‘양계만리도’의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에서는 처음 거론한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朝鮮)사람들이 만든 지도’는 실록(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왕명(王命)에 의해서 만든 기록(記錄)
을 - 이는 공신력(公信力)의 상징입니다. - 그 ‘바탕’으로 하되, 이런 지리(地理) 기록(記錄)을 “어찌 해석(解釋)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선(朝鮮)사람만이 알아먹게끔 비밀-코드(code)’를 삽입(揷入)해서 만든 지도입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실록(實錄), 신증국여지승람 등의 기록(記錄) 자체 만을 보아서는 한문(漢文)의 구조상,
문단(文段)의 나눔, 절구(絶句)하는 방법에 따라 그 해석이 전혀 다르게 되기 때문에, 이를 명쾌히 하기 위한 ‘비밀
코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두만강(豆滿江)의 흐름을 ‘2개의 경원(慶源)도호부 부청(府廳)’이 있는 곳에서 동북(東北)쪽에서 흐르는
흐름 - 즉 길목해(吉木海)에서 ‘시반두대도(時反豆大島)’의 북(北)쪽으로 길목해(吉木海)의 동문(東門)으로 나와서
오소리강(烏蘇里江)을 타고 북류(北流)해서 ‘회령부(會寧府)(=하바로브스크)’로 해서 알목하(斡木河=Amur river)로
흐르는 흐름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2개의 부청(府廳)’이 있는 곳의 남(南)쪽으로 해서 흐르는 흐름 - 즉 길목해(吉木海)의 수위(水位)를 해발
210m로 높여서 오늘날 화라하(和羅河)인 조선의 계강(系江)으로 해서 흘려보내서 사차마도(沙次亇島)를 형성하는
보(堡)를 통해서 오늘날 키야(Kiya)강, 오보르(Obor)강, 넴프투(Nemptu)강, 무첸(Muchen)강 등을 통해 북류(北流)해
보내는 흐름이라는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양계만리도’의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에서 강조하는 것은 극동(極東) 두만강(豆滿江)과 극서(極西)압록강입니다.
이 극동(極東) 두만강(豆滿江)은 오늘날 알목하(斡木河: Amur river)의 해구(海口)가 바로 조선(朝鮮)의 <극동(極東)
두만강(豆滿江)>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서(極西)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기록 역시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 실려있는데,
이 주변에 관하여 ‘조선(朝鮮)사람이 만든 지도’ 가운데서 묘사한 지도는 ‘양계만리도’가 유일(唯一)합니다.
(*) 여기서 말하는 “유일(唯一)하다”는 의미는 ‘향고도 선생’께서 수집한 ‘한국고지도’중에 “유일(唯一)하다.”는 의미
입니다. ‘향고도 님’보다 더 많이 한국고지도를 공개(公開)한 사람은 아직까지 발견 못하였습니다.(*)
이 ‘극서(極西)-압록강’의 문제가 까다로운 것은 이미 ‘솟대 선생’께서 이미 논구(論究)하셨듯이 조선(朝鮮)의 의주
(義州)는 2곳으로써 그 중에 <극서(極西)-압록강>이 있는 의주(義州)는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의현(叉縣)>이기
때문에 <극서(極西)-압록강(鴨綠江)>은 분명 대능하(大陵河)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 솟대님 요녕성 수계지도에서 의주(義州)인 의현(叉縣)과 압록강인 대능하(大陵河)를 볼 수 있는 곳.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조선(朝鮮)사람들이 만든 지도(地圖)’는 한결같이 그 바탕을 실록(實錄)의 기록과 일치
하고 있는데, 압록강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①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서 압록강의 전체 흐름을 언급하고 있고,
결국에는 “암림곶(暗林串)을 경과(經過)해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②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의주목)에서는 “(의주목이 거처하는 부청(府廳)을 기준(基準)으로 네 방향의 거리인)
사경(四境)은 동(東)쪽으로 삭주(朔州)까지가 97리(里)이고, 서(西)쪽의 압록강 암림곶(暗林串)까지가 20리(里),
남(南)쪽으로 인산(麟山)까지가 23리(里)이고, 북(北)쪽으로 압록강에 의거(依據)한다. (四境, 東距朔州九十七里,
西距鴨綠江暗林串二十里, 南距麟山二十三里, 北據鴨綠江。)”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능하(大陵河)는 오른쪽으로 눕혀진(↘) 엣취(H)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엣취(H)의 오른쪽 지류
(支流) - 다시 말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 서(西)쪽에서 남류(南流)하는 강의 이 강(江)가에 ‘청하문구(淸河門區)’가
있기 때문에, 이 지류(支流)의 명칭은 청하(淸河)임이 틀림없습니다. 대능하(大陵河) 본류(本流)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경(冂)자처럼 흐르는데, ‘기울어진 엣취 (H)자’의 왼쪽 지류는 오늘날 망우하(忙牛河)라고 칭하고 있
습니다.
이 ②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의주목)에 나오는 말 - 즉 “의주목(義州牧)이 있는 부청(府廳)이 있는 북(北)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이 의거(依據)한다(北據鴨綠江)”라는 말을 위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지도‘를 보면, “압록강이
오늘날의 망우하(忙牛河)인가?” 하는 느낌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울어진 엣취(H↘)자>모양으로
되어 있고, 조선조(朝鮮朝)의 의주(義州)가 오늘날 의현(叉縣)이기 때문에, 그 북(北)쪽이면 망우하(忙牛河)가 해당
되기 때문입니다.
(*) 의주(義州) 북(北)쪽의 강이 망우하(忙牛河)임을 보여주는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①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서는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른 흐름을 하는 3 압록강’을
한군데서 기술(記述)하고 있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 압록강(鴨綠江) 관련 원문(原文) 발췌(拔萃) (*)
[1] 鴨緣江在義州西, 古名靑河, 云龍灣。
: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 서(西)쪽에 있다. 옛 명칭이 청하(淸河)이다. 용만(龍灣)이라고 말한다.
[2] 其源出自白頭山, 行數百餘里,
: 압록강(鴨綠江)의 원천(源泉)은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인 백두산(白頭山)의 아수달하(阿水達河)에서 연원
(淵源)하며, (남(南)쪽으로 내려가서 일단) 수백여리(數百餘里)를 간다.
[3] 過咸吉道甲山郡, 歷閭延、江界、理山, 與禿魯江水合, 經碧潼、昌城、小朔州, 至于州之城西,
: ‘(압록강이)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을 경과(經過)하는 것’은 여연(閭延)、강계(江界)、이산(理山)을 거쳐서
(=역(歷)) 독로강(禿魯江) 강물과 합(合)하는데, 벽동(碧潼)、창성(昌城)、소삭주(小朔州)를 경유(經由)해서 의주
(義州) 성(城)의 서(西)쪽에 이른다.
[4]爲鴨緣江, 過暗林串入海。
(의주(義州)성(城) 서(西)쪽에서) 압록강이 되는데, 이는 암림곶(暗林串)을 통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 각설(却說)
위 문단에서 [1]과 [4]에서 묘사한 ‘압록강’은 오늘날 대능하(大陵河) 서(西)쪽의 의현(叉縣)에 있었던 의주(義州)
근방의 압록강(鴨綠江)을 뜻합니다.
[2]에서 묘사한 압록강은 바로 세종실록(/지리지/함길도/경원도호부)에서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에서
해발 450m에서 발원해 영어의 유(U)자처럼 유-턴(U-tern)해서 북류(北流)해서 길목해(吉木海) 즉 대해(大海)에 들어
가기도 하지만, 대파고호(大巴庫湖)와 서로 이어지면서 남류(南流)하는 압록강(鴨綠江)을 뜻합니다.
그리고 [3]에서 묘사한 압록강은 바로 오늘날의 압록강의 흐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조선조(朝鮮朝)에서는 두만강(豆滿江)은 물론 압록강(鴨綠江)까지도 서로 다는 ‘흐름’을 한꺼번에 표현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갑문(閘門)과 제방을 활용해서 산(山)을 넘어서 강물의 흐름을 변경시키는 것을 조선조(朝鮮朝)에서는
당연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왜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이라고 칭하는 강(江)들이 유독 ‘서로 다른 강(江)을 갑문과
제방을 활용해서 이어지면서 흐르는 강(江)으로 그 명칭(名稱)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두만강(豆滿江)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경원(慶源)도호부’ 편(編)이 있는데, - 이 때의 <경원(慶源)도호부>
의 부청(府廳) 위치가 연해주(沿海州)에서 화라하(和羅河)의 본류(本流)가 브이(V)자 꺽여서 흘러나가는데, 별(丿)
자로 내려오는 끝부분에 있는 것을 원점(原點)으로 삼고 있습니다. - 산천(山川) 조(條)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진(女眞)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 위 기록이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경원(慶源)도호부’을 볼 수 있는 곳(원문(原文)은 없음)
http://cafe.daum.net/kimyouth/EmSY/303?docid=1ENv6|EmSY|303|20101215110131&q=%B5%CE%B8%B8(%D4%E7%D8%BB)%20%D8%BF
즉 두만강(豆滿江)에 대한 정의(定義) 자체가 ‘갑문(閘門)과 제방을 활용’해서 만(萬)개라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강(江)이 합해져서 흐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갑문(閘門)과 제방을 활용해서 원래 서로 다른 수계(水系)가
합쳐져서 흐르는 강을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압록강(鴨綠江)입니다.
압록강(鴨綠江)의 뜻에 어떤 의미가 있기에, 갑문(閘門)과 제방을 활용해서 ‘원래 서로 다른 강(江)들을 갑문과 제방
을 활용해서 흐르는 것에 유독 압록강(鴨綠江)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①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서 말하는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4문단(文段)의 흐름과 또
등장하는 중요한 지명(地名)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鴨緣江在義州西, 古名靑河, 云龍灣。
: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 서(西)쪽에 있다. 옛 명칭이 청하(淸河)이다. 용만(龍灣)이라고 말한다.
위 문장에서 청하(淸河)는 오늘날 대능하(大陵河)가 오른쪽으로 눕혀진 엣취(H↘)자처럼 지류(支流)를 통합해서
흐르는데, 오른쪽 지류(支流)의 이름이 오늘날도 ‘청하(淸河)’임을 통해서 아직 살아 있는 수명(水名)이란 점을 유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능하(大陵河) 주변에 갑문(閘門)을 형성해서 ‘매우 큰 호수(湖水)’ 즉 만(灣)을 형성하였는데,
그 이름이 용만(龍灣)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만주(滿洲)-한반도(韓半島)>에 용만(龍灣)이 2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능하(大陵河)근처의 용만(龍灣) 이외에도 오늘날 송화호(松花湖)에도 용만(龍灣)이 있었음이 아래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에 보면 나타납니다.
이 지도에는 채룡강(寨龍江)과 황룡강(黃龍江)이 마치 아라비아 숫자 8처럼 또 여와(女媧)와 복희(伏羲)가 용신(龍神)
을 교차(交叉)하는 것 같은 곳에 ‘황룡부(黃龍府)’라는 봉건체제에는 등장하지 않는 어떤 부서(府署)가 있습니다.
채룡강(寨龍江)의 채(寨)는 ‘울타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여덟 8자 밑에 있는 용만(龍灣)을 <채룡만(寨龍灣)>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록(實錄)에는 용만(龍灣)에 있었던 부서(府署)를 <만부(灣府)>로 칭하고 있는데, 아래 <18C 숙종(肅宗) 초 조선
(朝鮮)지도>를 보면 채룡만(寨龍灣) 우측에 ‘여진(女眞)의 땅’을 의미하는 여진지(女眞地)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2개의 용만(龍灣) 가운데, 채룡만(寨龍灣)은 주로 여진인(女眞人)들이 주축(主軸)이 되어서 관리하였음이 들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와(女媧)와 복희(伏羲)가 용신(龍神)을 교차(交叉)하는 모습
http://blog.naver.com/bagahi/40016045538
(*) 채룡만(寨龍灣) 우측에 여진지(女眞地)라고 쓰여진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___JPEG_mode.JPG
따라서 대능하(大陵河)쪽에 있었던 용만(龍灣)을 이 채룡만(寨龍灣)과 구별해 주기 위해서 우리는 명칭을
<차(叉)-용만(龍灣)>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그런데 차(叉)의 뜻은 원래 “깍지끼다” “교차(交叉)하다.”라는 의미인데, “정의(正義)롭다. 올바르다.”는 의(義)
개념을 지니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맛있는 떡을 공평하게 나눌 때에, 먼저 한 아이가 자르고, 이를 지켜본 아이가 먼저 선택해서 떡을
집는 방법으로 ‘분배(分配)의 공정성’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쌍방향적인 첵크(check)’가 있어야만 정의(正義)이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합당한 글자가 바로 차(叉)입니다. 먼저 한 쪽이 별(丿)자로써 제안(提案)을 하면, 다른 쪽이 불(乀)
자로 상호 첵크(check)가 되게 살펴보고, 이것이 낙점(落點)이 된 것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차(叉)라는 글자
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義)자 대신에 매우 드물게 차(叉)라는 글자를 대용하고 읽기는 ‘의’로 읽기도 하였는데,
중국에서 간자체(簡字體) 운동이 잃어나면서 차(叉)가 의(義)를 대신하다시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즉 오늘날 의현(叉縣)은 ‘조선(朝鮮)의 의주(義州)’의 명칭이 의현(義縣)으로 남아있는 것이 의현(叉縣)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무튼 조선(朝鮮)은 개국(開國)때부터 조선(朝鮮)의 영토 속에 ‘여진인(女眞人)들이 살 수 있는 자치구(自治區)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朝鮮)은 ‘조선인과 여진인의 연합국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채룡만(寨龍灣)은 주로 여진인(女眞人)이, 그리고 차용만(叉龍灣)는 주로 조선인(朝鮮人)이 관리하긴 하지만,
이 둘을 봉건체제가 종속되지 않는 만부(灣府)가 통합해서 관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 나타나는 2번째 문장은 다음과 갈습니다.
[2] 其源出自白頭山, 行數百餘里,
: 압록강(鴨綠江)의 원천(源泉)은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인 백두산(白頭山)의 아수달하(阿水達河)에서
연원(淵源)하며, (남(南)쪽으로 내려가서 일단) 수백여리(數百餘里)를 간다.
그런데, 위의 해석에서 괄호( )속에 주(注)를 집어넣어서 그렇지 원문(原文)자체는 “압록강(鴨綠江)의 원천(源泉)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와서 수백여리(數百餘里,)를 간다.”입니다.
문제는 조선조(朝鮮朝) 때 백두산(白頭山)으로 치는 산(山)이 2개 - 즉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와 오늘날의
백두산(白頭山: 2,750m)가 있음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문(原文) 그대로 표현하면, “도대체 어느 백두산을
뜻하지?”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왜 세종실록에는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당시대 조선(朝鮮)사람들은 “아!!
이 때의 백두산은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이고, 또 이 때의 압록강은 아수달하(阿水達河)가 갑문(閘門)과
제방을 타고 남류(南流)해서 내려가는 바로 그 압록강을 뜻한다.”라고 인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양계만리도’는 보여준다는 면에서 지도(地圖)로써의 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양계만리도’에서 오늘날 백두산(白頭山: 2,750m)에서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지역이 분수령(分水嶺)
이 되어서 서남류(西南流)하는 ①동요하(東遼河), ②혼하(渾河), ③태자하(太子河)와 동북류(東北流)하는
①이통하(伊通河)-채룡강(寨龍江) ②유하(柳河)-휘발하(輝發河)를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즉 ‘양계만리도’에서 오늘날 백두산(白頭山: 2,750m)에서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인 분수령(分水嶺)
이 불(乀)자 방향으로 길게 나가는 것 끝 - 이 ‘끝’부분 위에 바로 좌상단(左上端) 주기(注記)에 적혀 있습니다.
- 부분에 ‘굵은 글씨’로 “대맥(大脉)”이라고 굵은 글씨를 쓴 우측(右側)에 다음과 갈은 주기(注記)가 적혀있음을 발견
하게 됩니다.
“자곤륜산(自崑崙山) 역북막(歷北漠)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
: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북막(北漠)을 거쳐서 백산(白山)을 향(向)해가는 대맥(大脉)”
(*) “자곤륜산(自崑崙山) 역북막(歷北漠)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 적혀있는 ‘양계만리도’
http://blog.daum.net/sabul358/13171237
이 주기(注記)가 의미하는 것은 백두산(白頭山: 2,750m)를 곤륜산(崑崙山)으로 생각해 왔음이 드러나고 있는데,
‘규원사화’에서 태백산(太白山)이라고 칭해온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백두산(2,750m)는 <태백(太白)-곤륜산
(崑崙山)>으로 불러왔음을 의미합니다.
또 ‘또 하나의 백두산’인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를 백두(白頭)-곤륜산(崑崙山)으로 칭해왔음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런데, 이 <태백(太白)-곤륜산(崑崙山)>즉 오늘날 백두산(2,750m)가 역북막(歷北漠) - 다시 말하면 ‘북(北)쪽 사막
(沙漠)’을 거쳐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북(北)쪽 사막(沙漠)’이라는 것은 ‘고비 사막(沙漠)’ 같은 사막(沙漠)이 아니라, 오히려 갑문을 설치
해서 물을 채웠다가 빼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흙이 씻겨나가서 “물(水)을 채우지 않았을 때 사막(沙漠)으로 나타
나는 북(北)쪽 지역”을 뜻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북막(北漠)이라고 표현된 것은 3곳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는 동북(東北)쪽에 길목해(吉木海)를 지니고 있는 오늘날의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인 백두산(白頭山)을
뜻하는데, 이 주변이 사막이 되는 까닭은 대해(大海)-즉 길목해(吉木海)의 수위(水位)를 해발 210m로 올렸다가 다시
내리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배달화백’을 이 대해(大海)에서 할 때에 ‘천독(天毒)들 께서 앉아계시는 허브(herb)
밭’인 청구(靑丘)가 ‘모래’로 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나단해(羅端海) 주변을 뜻합니다. 이곳도 인공으로 갑문을 만들어서 계강(系江) 즉 오늘날의 화라하
(和羅河)가 수위(水位)가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역시 청구(靑丘)가 ‘모래’로 변해서 북막(北漠)이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북막(北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채룡만(寨龍灣)인 것입니다.
이곳 역시 갑문과 제방으로써 채룡만(寨龍灣)에 물을 가득 채웠다가 때로는 비우는 과정을 반복하였기 때문에,
청구(靑丘)가 역시 ‘모래’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을 ‘갑문과 제방’의 시설을 활용해서 넘는 것을 ‘압록강(鴨綠江)’이라고 칭하는 어떤
관습(慣習)이 있었음이 확인된다면, 우리가 문제 삼는 점 - 즉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서 “압록강의 원천이
백두산(白頭山)으로 부터 나와서 수백여리를 간다. (其源出自白頭山, 行數百餘里,)”라고 할 때의 백두산(白頭山)은
오늘날의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이고 백두(白頭)-곤륜산(崑崙山)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왜냐?
<태백(太白)-곤륜산(崑崙山)>이 ‘북막(北漠)을 거쳐서 오는 것’ 가운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 칭하는 것은 3개의
북막(北漠) 가운데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중국전도’를 보면, 백두산(2,750m)은 ① 오늘날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境界)인 분수령(分水嶺)이
서남류(西南流)하는 강들과 (↙) 동북류(東北流)(↗)하는 강들의 분수령이 됨과 아울러,② 발해(渤海)쪽으로 남류
(↓)하는 요하(遼河)와 눈강(嫩江)이 니은(ㄴ)자로 꺽이면서 송화강에 합류해서 동류(→)하게 하는 분수령(分水嶺)
으로 정확히 불(乀)자 방향으로 뻗고 있음이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 백두산(2,750m)가 불(乀)자 방향으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의 원점(原點)이 되어 ①,②의 분수령(分水嶺)이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이러한 이야기는 ‘양계만리도’가 조선(朝鮮)사람들끼리 통용되었던 <지리(地理)에 관한 공리(公理)>에 기초한
비말-코드(code)만 읽을 줄 알면,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현대의 지도’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전달하는 지도임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의 뜻이 ‘백산(白山)을 향(向)해 나가는 대맥(大脉)’이기 때문에, 도대체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境界)에서 대맥(大脈)이 서북(西北)쪽으로 뻗으면 다다르게 되는
백산(白山)이 어떤 산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을 ‘갑문과 제방’을 통해 강(江)과 강(江)을 서(耳亇)로 연결하면서 넘나드는 것을
특벽히 ‘압록강’이라고 조선(朝鮮)사람들이 인식해온 사례(事例)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솟대 님’께서 발견한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입니다.
이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는 “조선(朝鮮)사람이 만든 지도” 가운데, 이상하게도 지도(地圖)-제목
(題目)이 없지만, 품고 있는 내용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지도(地圖)에 대한 존칭을 붙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좌계는 이를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라고 존칭 합니다.
좌계가 이 지도를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라고 부르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왕(王)이
임명한 관리>인 - 이를 ‘우러러봐야하는 관리’라는 의미에서 앙관(仰官)이라고 칭합니다. - 앙관(仰官)을 파견해서
봉건-체제로써 다스리지 않고, “까마득한 고대(古代)에서 부터 내려온 관습법(慣習法)이라는 내재율(內在律)에
맡겨(=임(任)) 다스리는 지역”을 임내(任內)라고 칭하였습니다.
이 임내(任內)에 맡기는 형식이 바로 폐군(廢郡), 폐현(廢縣)인데, 임내(任內)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여진(女眞) 임내(任內)인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 요동반도에 있었던 이른바 폐사군(廢四郡)이 바로 여진(女眞) 임내(任內)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과 여진 쌍방향에서 모두 배달국(倍達國) 때부터 내려오는 화백회의를 비롯한 고제(古制)에 의해서
운영되는 ‘또 하나의 조선(朝鮮)’이 있는데, 이를 표현하자면 청구(靑邱) 임내(任內)입니다.
이 청구(靑邱) 임내(任內)의 차원에서 그린 지도이기 때문에 이름을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라고 칭한 것입니다.
‘양계만리도’의 좌상단(左上端) 서문(序文)의 내용들과 또 ‘양계만리도’에서 놀라운 주기(注記)- 예를 들면 “각화도
(覺華島)는 영원(寧遠) 남(南)쪽 10리(里)에 있다. 이는 곧 우리나라가 무오(戊午)년 이후(以後)로 천하(天下)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던 곳이다. (覺華島在寧遠南十里 此卽我國戊午後 水路朝天下)” 등(等)이 있게되는 주체(主體)는
바로 <청구(靑邱)-조선(朝鮮)>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청구(靑邱)-조선(朝鮮)>의 차원에서 만주(滿洲)와 한반도(韓半島)의 지리(地理)를 그린 지도(地圖)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양계 만리도’를 해석할 수 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 즉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에서 살펴볼 것은 일단 아래 5가지 지명(地名)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먼저 채룡만(寨龍灣)의 북(北) 쪽에 황룡부(黃龍府)가 있는 곳의 북(北)쪽에 “새로운 것을 연다(=조(肇))”는 의미
의 조주(肇州)라는 지역이 있는 곳에 산(山)이 있는데, 이 산(山)에서는 황룡부(黃龍府)를 총괄하는 북루(北樓)가
있었고,
(참고: 이 지도를 해설(解說)한 ‘솟대님의 지도’에 보면 <조주(肇州)-현(縣)>이 아직까지도 그 지명(地名)에 남아있
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둘째는 채룡만(寨龍灣)이라는 거대한 ‘인공호수(人工湖水)’를 내려다 보는 산(山)에 관청(官廳)이 <동루(東樓)>란
이름으로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동루(東樓)>는 북루(北樓)에서 남(南)쪽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북루(北樓)→남(南)→동루(東樓)’의 지리적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는 서요하(西遼河)가 흘러나오는 연원(淵源)이 와이(Y)자 처럼 왼쪽의 호천(芦川)과 오른쪽의 임황(臨潢)이
합수해 나오는데, 이런 두 강(江)의 연원(淵源)이 되는 ‘높은 산(山)’에 또 북루(北樓)가 있고, 두 강(江)의 사이에
서루(西樓)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곳 역시 북루(北樓)의 남(南)쪽에 서루(西樓)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북루(北樓)→남(南)→서루(西樓)’가 되기 때문에, 이런 ‘지리(地理)-패턴(pattern)’의 동쪽에 있는
‘북루(北樓)→남(南)→동루(東樓)’과 대응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강 사이에 있는 서루(西樓) 왼쪽의 호천(芦川)과 오른쪽의 임황(臨潢)이 와이(Y)자처럼 합수되는 곳의 위치가
대능하(大陵河)가 기역(ㄱ)자처럼 껵이는 곳 북(北)쪽에 있는 ‘칠로도산(七老圖山)-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이 브이(V)자처럼 생긴 곳에서 여러 하천(河川)이 합류해 나와서 서요하(西遼河)의 원천이 되는 곳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밑이 대능하(大陵河) 본류(本流)를 갑문으로 막아서 형성된 것이 바로 차용만(叉龍灣)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북루(北樓)→남(南)→동루(東樓)’가 있는 곳에 채룡만(寨龍灣)이 있고, 또 ‘북루(北樓)→남(南)→서루
(西樓)’가 있는 곳에 차룡만(叉龍灣)이 있기 때문에, 대조(對照)가 됨을 알수가 있습니다.
(*) ‘칠로도산(七老圖山)-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산맥이 브이(V)자처럼 생긴 곳을 볼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즉 용만(龍灣)은 동루(東樓)가 관장하는 채룡만(寨龍灣)이 있었고, 서루(西樓)가 관장하는 차용만(叉龍灣)이 있었고
이 두 용만(龍灣)이 모두 북루(北樓)로써 통합(統合)을 하고 있음이 은연중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4] 넷째는 조주(肇州)쪽을 향해 영의 브이(V)자 처럼 꺽여서 동북류(東北流)(↗)하는 오늘날의 조아하(洮兒河)의
명칭이 -이를 조이하(洮尒河)라고도 표기합니다.- 조선조(朝鮮朝)때에는 압료하(鴨了河)였으며, 이 조아하(洮兒河)
의 연원이 되는 오늘날의 노두산(老頭山: 1392m)의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태령산(泰寧山)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 태령산(泰寧山) 남록(南麓)은 한인(韓人)들이 많기 때문에 그 명칭이 한주(韓州)로 칭해졌다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압료하(鴨了河)의 명칭의 뜻이 “오리(=압(鴨))가 그 임무(任務)를 완료(完了)하는 하천(河川)”
이란 의미를 띠는데, 이 압료하(鴨了河)가 흐르는 곳이 ‘양계만리도’의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의 서(耳亇)에서 연원
한다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 참고: 오늘날의 지명(地名)에 대비한 것은 ‘솟대님의 해설지도’의 지명(地名)에 근거한 것입니다. (*)
[5] 다섯째는 이런 조선조(朝鮮朝)때 태령산(泰寧山)인 <오늘날의 노두산(老頭山: 1392m)> 서북(西北) 쪽에 ‘산(山)
표시’를 전혀 하지 않은 채, 평지에 ‘장백산(長白山)’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장백산(長白山)이 중요한 것은 ‘양계만리도’의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로고 할 때의 대상이 되는 백산(白山)이
바로 이 장백산(長白山)임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 위 [1],[2],[3],[4],[5]를 볼 수 있는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___JPEG_mode.JPG
(*) 위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를 해설한 ‘솟대님의 해설(解說) 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그런데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서 장백산(長白山)으로 표현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지도’에서 도대체 “어떤 산(山)
일까?”를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중국전도’를 보면,
① 바로 고구리(高句麗)때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 칭한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과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태평령(太平岭: 1712m)임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② 또 압료하(鴨了河)인 오늘날의 조아하(洮兒河) 원류(源流)가 나오는 곳을 살펴보면, 호륜호(呼倫湖: Hulun lake)
쪽으로 들어가는 동(東)쪽에서 길게 서북류(西北流)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의 지류(支流)인 ‘하루바칸토-카
(Harubakanto-ka)’와 맞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위 ①,②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그런데,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 - 즉 ‘18C 숙종(肅宗)초 조선지도’에 “오리(=압(鴨)) 혹은 압록강(鴨綠江)이 그 임무
(任務)를 완료(完了)했다.”는 의미로 붙여진 압료하(鴨了河)를 ‘현실지도’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압료하(鴨了河)인 오늘날의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의 원류(源流)인 칠도구(七道溝)가 동남류(↘)가 동남류
(東南流)해서 형성되고, 이 칠도구(七道溝)와 호륜호(呼倫湖)로 서북류(西北流)(↖)해 가는 아이선하(阿尒善河)의
지류인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 사이에 해발 1,200m로써 서(耳亇)가 형성되어 있음을 미군사지도(1950년대)
를 보면 살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곡(溪谷)의 높이는 해발 900m~1,000m 의 ‘사이’이기 때문에, 이를 950m로 보면, 1,200m 되는 서(耳亇)는 마치 250m
되는 ‘섬돌 갈은 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넘기 위해서는 ‘경첩 갑문’을 터트려서 넘는 이른바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해발 1,200m로써 서(耳亇)’는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의 원류(源流)>가 있는 곳에 삼광산(三光山:1508m)
이 있고, 또 아이선하(阿尒善河)의 지류인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가 있는 쪽에는 소악(燒岳: 1515m)가 있
어서 이 두 산(山) 이름을 따서 <삼광소(三光燒)-서(耳亇)>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서(耳亇)입니다.
삼광소(三光燒)는 ‘삼광(三光)’인 태양(太陽), 달(月), 북극성(北極星)을 나타내기 때문에, 삼광소(三光燒)는 “태양
(太陽), 달(月), 북극성(北極星)이 함께 불타는”이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곳 서(耳亇)를 <삼광소(三光燒)-서(耳亇)>로 특별히 불러야하는 까닭은 개마대산 - 즉 대흥안령산맥 동(東)쪽의
만주(滿洲)에서 중추가 되는 수로(水路)인 송화강(松花江)에 의거해서 ‘바이칼’쪽으로 갈수 있는 ‘최단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이칼’는 입헌(立憲)소도(蘇塗)로써 ‘북극성’으로 상징되는 옥청(玉淸)-배달화백, ‘태양’으로 상징되는 상청(上淸)
-태달화백, ‘달(月)’로 상징되는 태청(太淸)-배달화백이 열기는 곳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흑룡강 수계(水系) 지도’를 보면, ‘호륜호(呼倫湖)(Hulun lake)’ 바로 북(北)쪽으로 개마대산(대흥안령
산맥‘쪽에서 서남류(西南流)하면서 들어가는 하천(河川) 이 있는데, <하이얼(Hailar)하(河)>로 적혀 있는데,
- 이를 Hai-la-erh로 표기도하기도 합니다.
- 이를 한자(漢字)로 옮긴 것이 해납이하(海拉爾河)입니다. 그런데, 송화강은 눈(嫩)강 [Nen river]에서 니은(ㄴ)자로
꺽여나가는데,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는 눈(嫩)강 [Nen river] 중상류 쪽이어서 서남류(西南流)
합니다.
그런데, 이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와 눈강(嫩江)으로 합류하는 낙민하(諾敏河)는 서(耳亇)를
이루고 있지만, 서로의 흐름이 여덟 팔(八)자처럼 되기 때문에 그 밑의 지류(支流)끼리 서(耳亇)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낙민하(諾敏河)가 눈강(嫩江)의 중상류(中上流)에서 서남류(西南流)하기 때문에, 송화강이 니은(ㄴ)자로
꺽이는 곳에서 올라가는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가 아이선하(阿尒善河)와 서(耳亇)를 이룬 곳으로
해서 연결되는 것보다 우회(迂回)하는 것이 됩니다.
(*) 흑룡강 수계에서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a/Amurrivermap.png
(*) ①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와 낙민하(諾敏河)가 여덟 팔(八)로 되어 있어서 서(耳亇)를 형성
하기 좋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해납이하(海拉爾河)가 바로 북(北)쪽에 도달함과
② 오란호특(烏蘭浩特)- 때로는 ‘오란합달(烏蘭哈達)’로 기재 -을 지나서 동남류(↘)하되 중간에 유(U)같이 흐르는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와 서(耳亇)를 형성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는 호륜호(呼倫湖)에 직접들어감을
살필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그런데, 아이선하(阿尒善河)는 참으로 묘하게도 그 흐름이 패이호(貝爾湖: Buir lake)가 호륜호(呼倫湖: Hulun lake)가
연결되는 하천(河川)의 바로 북(北)쪽에 연결됨을 ‘미군사지도 (1950년대) 전체 조감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군사지도 (1950년대) 전체 조감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
그런데 ‘흑룡강 수계 지도’에서 보면 잘 알수 있듯이 호륜호(呼倫湖)는 긍특산(肯特山)에서 유-턴(U-tern)해서 동류
(東流)(→)하는 ‘케루렌(Kherlen) 강’이 있기 때문에, 에 ‘케루렌’ 상류에서 바이칼(Baikla)쪽으로 북류하는 여러
하천(河川)- 즉 난하(難河)와 만나기는 매우 쉬운 것입니다.
(*)흑룡강 수계 지도에서 ‘케루렌(Kherlen) 강’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a/Amurrivermap.png
이런 사실은 아이선하(阿尒善河)와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와 서(耳亇)를 통해 이어지게 하기만 하면,
이른바 ‘법률제정의 3호수’인 ①바이칼(Baikal) ②후룬(Hulun) ③보이르(Buri) 호(湖)에 가장 가깝게 갈수 있는 길임
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서(耳亇)를 <삼광소(三光燒)-서(耳亇)>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삼광소(三光燒)-서(耳亇)>는 양쪽 골짜기에 ‘섬돌’같은 해발 1200m가 막혀 있기
때문에,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에 의하지 않으면 넘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 “이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이 언제 개발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주몽(高朱蒙)-동명성왕(東明聖王)께서 태어나신 차릉(岔陵)이 있는 곳 - 다시 말하면 고조선(古朝鮮) 이전
(以前)부터 ‘동(東)아시아(Asia)문명의 코아(core)’ 역할을 하였던 비서갑(斐西岬) 계곡이 고리(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때 - 태백 곤륜산이 폭발해서 용암(鎔巖)이 덮쳐 사라지고, 발해(渤海)가 이 여파로 무너지게 되는 세기
말(世紀末)적인 충격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고리인(高麗人)들이 이런 충격을 이겨내고, 바로 이 비서갑(斐西岬) 계곡 부근에서 오늘날의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토문강(土門江)이 서로 넘나들을 수 있는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을 개발하여서 발해(渤海)
옛 땅을 무혈(無血) 점령한 <요(遼)>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압록강-두만강-토문강(土門江)이라는 3강(江)이 서로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로써 넘나들을
수 있는 것이 해발 1,200m 였던 것입니다.
(*) 이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이 개발되기 까지의 과정과 또 이를 적용한 것을 ‘현실지리’에서 파악하는
것은 나중에 따로 회(回)를 만들어서 거론하기로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실록(實錄)을 읽어보면, 이 압록강-두만강-토문강(土門江)을 선박을 타고 넘나드는 것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자주 나오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께서는 이를 백두산(2,750m) 주변 지리에 상세하게 그
흔적을 완벽(完璧)히 그리신 쾌거(快擧)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이 완성된 것은 고리(高麗)가 이 기술을 활용하여서 여진(女眞)으로 하여금
요(遼)를 축출하게 하게한 직전(直前)에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삼광소(三光燒)-서(耳亇)>가 개척되어서 오늘날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와 아이선하(阿尒善
河)가 이어져서 ‘선박을 타고 서로 오갈 수 있는’ 이른바 압료하(鴨了河)가 생긴 것은 고리조(高麗朝)때 여진(女眞)이
<요(遼)>를 물리치기 전(前), 쉽게 말씀드려서 윤관(尹瓘)도원수께서 나중에 금(金)의 시조(始祖)가 되는 아골타
(阿骨打)를 체포하였다가 풀어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前)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와 낙민하(諾敏河)를 갑문과 제방으로써 연결하는
서(耳亇)는 과연 개척되었는지?” “또 개척되었다면 언제 개척되었는지?”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를 보면, 조선(朝鮮)의 경역(境域)을 의미하는 목책(木柵)이 쳐진 밖에
‘낙니강(諾泥江)’이라는 강이 하나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 ‘낙니강(諾泥江)’을 볼 수 있는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http://blog.daum.net/sabul358/13708581
바로 이 강이 오늘날 <하이얼(Hailar)하(河)=해납이하(海拉爾河)>와 낙민하(諾敏河)이 갑문과 제방을 연결해서
서(耳亇)로써 연결된 강(姜)의 명칭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한자(漢字)의 의미로만 보아서는 이 해납이하(海拉爾河)와 낙민하(諾敏河)는 갑문과 제방으로써 연결하는
서(耳亇)로써 연결됨이 ‘잘 드러나도록 이름’을 붙인 강입니다.
왜냐?
해납이하(海拉爾河)는 ‘길목해(吉木海)와 나단해(羅端海)’ 즉 대해(大海)를 이곳에(=이(爾)) 데려오게(=납(拉))하는
하천(河川)이란 의미이고 또 낙민하(諾敏河)는 ‘(선박이 개마대산을 넘어가고져 할 때에, 이를) 재빠르게 응낙(應諾)
하는 하천(河川)’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합해서 부르는 명칭이 ‘낙니강(諾泥江)’으로 붙게 된 까닭은 이 두 강이 실제로는 이곳이 대흥안령
산맥 한 가운데 임에도 불구하고, 비(雨)만 오면 쉽게 하나로 이어질수 있는 해발 800m의 서(耳亇)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선박이 다닐수 있을 정도로 강(江)의 깊이를 보장하기 위해서 주변에 제방(堤防)과 갑문을 쳐주다
보니, 자연 강물이 불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하면서 주변의 흙을 빨아들여서 ‘진흙 물’이 많이 흐러는 강이 되었기
때문에 불려진 명칭인 것입니다.
이는 해납이하(海拉爾河)의 남(南)쪽 지류(支流)가 북두하(北頭河)이고, 낙민하(諾敏河)의 남(南)쪽 지류가 필납하
(畢拉河)인데 - 이는 ‘데려오는 것을 마치는(=필(畢)) 하천’이란 의미임 -, 이 필납하(畢拉河)의 지류(支流)가 납맹하
(拉孟河)-이는 ‘데려오는 맞이(=맹(孟)역할을 하는 하천’이란 의미임 -인데, 그 원류는 북대하(北大河)입니다.
그런데 북대하(北大河)의 최상류는 북류(北流)해서 동류(東流)하고 북두하(北頭河)는 남류(南流)해서 서남류하고,
그 사이에 서(耳亇)가 있기 때문에 (↙↓ ↑→) 이는 약간만 비(雨)가 와도 연결되는 지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쉽게 연결되게 되는 지류(支流)인 하천(河川)을 지나고 있지만, 본류(本流)와 지류(支流)가 갈라서는
곳에 갑문을 쳐주어서 본류(本流)가 지류(支流) 쪽으로 역류(逆流)케 하고, 또 주변의 강폭(江幅)을 크게 잡은 제방
(堤防)을 쳐주어야 하여야합니다.
그런데 모든 갑문(閘門)을 활짝 열었을 때에는 진흙물이 흐르지 않고 맑은 물이 흐르지만, 갑문을 닫아서 물이 불어
나서 배가 다닐 정도로 되면, 자연 쌍방향으로 진흙물이 이런 (←---→)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해납이하(海拉爾河)와 북두하(北頭河)가 합수하는 곳의 북(北)쪽에는 춘운산(春雲山: 849m)가 있고, 그 맞은 편
에는 아흑산(犽黑山: 721m) ‘사이’에 갑문을 자반(雌盤)과 웅반(雄盤)으로 4Km 간격으로 쳐주면, 수량은 배가 통과
할 때마다 약간씩 줄어들지만, 통과히자 않을 때에는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두하(北頭河)가 서북류(西北流)(↖)하면서 해납이하(海拉爾河)와 합류하는 직전의 북안(北岸)에 보면
소사산(小砂山: 982m)가 있습니다.
이 소사산(小砂山: 982m)은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모래 산’이 된 까닭은 흙이 씻겨내려가서 인 것입니다.
(*) 해납이하(海拉爾河)-북두하(北頭河) 쪽 미군사지도(1950년대)
① 춘운산(春雲山: 849m)과 아흑산(犽黑山: 721m)이 있는 곳 [經度표시: 2~3, 위도(緯度)표시: 54(7)~54(6)]
② 서(耳亇)가 있는 곳 : 경도(經度)표시 4(2)와 위도(緯度)표시: 54(6)의 교차점(交叉點)
(지도 좌하단(左下端)(↘)에서 약간만 올라가면 찾을 수 있음)
③이 서(耳亇)는 덕리산(悳利山: 1026m) 바로 위에 있긴 하나, 이 산 밑에 평정산(平釘山: 1146m)가 있고 이 서(耳亇)
북쪽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산의 높이가 1147m로 있는데, 평정산(平釘山: 1146m-1147m)의 뜻이 “옆으로 못(=釘)을
박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두 산이 모두 평정산(平釘山: 1146m-1147m)으로 불려져 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평정산(平釘山)-서(耳亇)라고 옛날부터 이름불러져온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m51-7.jpg
반면 낙민하(諾敏河)쪽에서는
① 납맹하(拉孟河)가 시작하는 곳 즉 동류하는 북대하(北大河)와 남류(南流)하는 이근하(二根河)와 합류하는 곳
[경도(經度)표시 7~8, 위도(緯度)표시: 8~7]‘사이’와
② 납맹하(拉孟河)와 필납하(畢拉河)가 만나는 곳 [경도(經度)표시: 9 위도(緯度)표시 9~8]에 갑문을 쳐주면 될
것입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m51-8.jpg
그렇다면, 이 <평정산(平釘山)-서(耳亇)>는 언제 개발되었겠는가?
이는 아주 까마득한 고대(古代) - “배달국(倍達國) 이전의 구다천국(句茶川國) 말기(末期)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좌계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살펴보다시피,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께서 ‘갑문과 제방’을 활용 서(耳亇)를 개척한 장본인
(張本人)으로써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갑문 기술은 구다천국(句茶川國) 때 부터 있었던
기술이 거발환(居發桓) 환인(桓仁)께서 확대 적용하였음을 뜻하는 기록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언급되기 때문
입니다.
아무튼, “고조선(古朝鮮)시대나, 관경사국(管境四國) 시절에는 만주에서 낙민하(諾敏河)-해납이하(海拉爾河)로
선박이 서로 오갈 수 있는 이른바 낙니강(諾泥江)을 활용하고 있었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주(滿洲)-한반도(韓半島)에 계속 살아오면서 갑문과 제방을 활용해서 서(耳亇)를 넘나다니는 원천(源泉)
기술을 지키고 있는 구다천국(句茶川國) 후예(後裔)들은 이 평정산(平釘山)-서(耳亇)를 넘는 것을 결코 ‘압록강이
넘어야할 임무를 완료한 강’ 즉 압료하(鴨了河)로 칭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
압록강은 ‘가장 빠르게 험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을 넘어야하는데, 이 낙니강(諾泥江)은 해납이하(海拉爾河)와
낙민하(諾敏河)를 마지 여덟 팔(八)자 처럼 불필요한 우회를 통해서 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태백(太白)-곤륜산(崑崙山)이 폭발한 후에, 고리(高麗) 장인(匠人)들께서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을
개발해서 <압록강-두만강-토문강>을 넘는 것이 성공한 후에, 드디어 이를 삼광소(三光燒)-서(耳亇)에 적용해서
흑룡강 상류와 송화강을 최단거리에 연결하면서 또 ‘법률제정의 세 호수(湖水)’에 가장 빨리 갈수 있는 길을 완료하자,
고리(高麗)-장인(匠人)들께서는 “흠.. 이제 압록강(鴨綠江)의 임무는 끝났다.”는 뜻으로 압료하(鴨了河)란 명칭을
오늘날의 아이선하(阿尒善河)와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가 연결된 강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밑-지도>
(A) 경도(經度)표시: 2(8)~2(9)로 ‘윗-지도’와 연결됨.
① <압료하(鴨了河)>인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가 칠도구(七道溝)와 연결되는 서(耳亇)의 형성하는
남(南)쪽의 삼광산(三光山: 1508m).
② 조이하(洮尒河) 쪽의 자반(雌盤)-갑문을 쳐줄 위치는 동북류(↗)하는 오차구(五叉溝)와 그 맞은편에서 남류
(南流)하는(↓) 쌍마구(雙馬泃: Shuang-ma-kou)마 만나는 곳의 바로 우측(밑)
[경도(經度)표시:TM9~UM0, 위도(緯度)표시:9~8 ‘사이’]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l51-4-2nd-ed.jpg
<윗-지도>
(A) 경도(經度)표시: 2(8)~2(9)로 ‘밑-지도’와 연결됨.
아이선하(阿尒善河) 남(南)쪽 지류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가 있고, 조이하(洮尒河)의 원류(源流)인 칠도구
(七道溝) 그 ‘사이’에 해발(海拔) 1,200m의 서(耳亇)가 있는데, -철도(鐵道) 터널이 뚫혀 있는 곳입니다.- 지도(地圖)-
하단(下端)에서 삼광산(三光山: 1508m)과 대응되는 광정산(光頂山)[계관산(鷄冠山): 1500m]이 있습니다.
① 조이하(洮尒河) 쪽의 <웅반(雄盤)-갑문>을 쳐줄 곳은 칠도구(七道溝)와 팔도구(八道溝)가 만나는 곳(왼쪽에
1403m의 산(山), 오른 쪽에 1413m의 산(山)이 있어서 ‘수문장(守門將) 역할’을 하는 곳임.
② 이곳은 서(耳亇)의 해발 높이가 해발(海拔) 1,200m로써 워낙 높기 때문에, 팔도구(八道溝)쪽에서 두 지류(支流)가
이런(<)식으로 만나는 좌측에 ‘경첩 갑문’을 만들고 물을 저장하였다가 <웅반(雄盤)-갑문>에 들어온 선박이 갑문을
닫고, 수위(水位)가 어느 정도 올라 갔을때 ‘경첩 갑문’을 터트리는 이른바 ‘서북(西北)두입지술(斗入之術)로써 넘을
수 있는 지역임.
문제는 “이 곳의 수량(水量)이 적다.”는 것입니다.
③ 따라서 오늘날 ‘터널’이 있는 <삼광소(三光燒)-서(耳亇)>가 있는 곳에서 북(北)쪽으로 30Km(눈금마디 3마디)를
올라가면 서류(西流)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의 풍부한 수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서류(西流)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에 북류(北流)하면서(↑) 합류하는 사루한-고루(Sharuhan-goru)하(河)가
있는데, 그 발원지(發源地)의 해발 고도는 1,200m입니다.
‘사루한-고루’의 어원(語源)은 “모든 것을 내어놓다.”라는 의미의 “사르다.”와 관련있어 보입니다. 즉 ‘사랑’은 헌신
(獻身) - “모든 것을 내어놓는 정신‘에서 그 용례를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루한-고루’는 “하나(=한)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은 골(=고루)”이 변음(變音)이 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 ‘사루한-고루’하(河)와 이런(<)모양으로 합류하는 팔도구(八道溝) 사이에는 해발 1557m의 산(山)이 있는데,
이 산(山)을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사루한-산(山)’이라고 불렀다고 봅니다.
이 ‘사루한-산’이 ‘사루한-고루’하(河)와 팔도구(八道溝) 사이에는 1200m 고도(高度)를 기준으로 할 때에, 가로막는
남북(南北)길이가 약 10Km정도가 됩니다.
좌계는 고리(高麗)장인(丈人)들 께서 이 10Km 되는 남북을 ‘사루한-산:1557m)’을 꿰뚫는 터널(tunnel)을 뚫었다고
봅니다.
이 <‘사루한-고루’하(河)>가 아이선하(阿尒善河)에 합류하는 곳의 좌측(左側)에 보면, 남안(南岸)에 1279m의 산이
있고 북안(北岸)에 1315m의 산이 있는데, 이 두 산을 연결하는 갑문을 2Km정도의 간격으로 웅반(雄盤)과 자반(雌盤)
을 설치하였다고 봅니다.
이곳에 갑문을 쳐주어서 아이선하(阿尒善河)의 물줄기를 죄다 ‘사루한 산(山)’‘터널’을 통해서 팔도구(八道溝)쪽으로
보내도 반대편에서 ‘서북(西北)두입지술(斗入之術)’을 펼칠 수원(水源)은 충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루한
-고루’ 좌측에서 남류(南流)하는 고이반하(固爾班河)가 있기 때문입니다.
④ 이 ‘사루한-고루’하(河) 좌측에 2개의 갑문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증명하는 지리(地理)적 흔적도 아래 미군사지도
에는 나타나는데, 그 것은 ‘사루한-고루’하(河) 우측(右側)의 아이선하(阿尒善河) 원류(源流)쪽을 살펴보면,
합이합하(哈爾哈河)라는 강이 태평령(太平岭) -이를 미군사지도에서는 (TERUMO SHAN:1725m)로 표기 했는데,
1717m의 높이와 약간 상위가 있습니다. 즉 조선조(朝鮮朝)에서 장백산(長白山)이라고 칭한 산의 바로 우측에서
발원(發源)해서 남류(南流)해서 , 이 강은 달이빈지(達爾彬池)라는 호수(湖水)로 들어가는데, 놀랍게도 ‘넘어야할 턱’
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이합하(哈爾哈河)는 아이선하(阿尒善河)와 고립(孤立)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합이합하(哈爾哈河) 북(北)쪽에는 실위산(室韋山: 1681m)가 있고, 합이합하(哈爾哈河) 동북(東北)쪽으로
보면 해발(海拔) 1100m로써 쉽게 넘을 수 있는 서(耳亇)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실위(室韋)-서(耳亇)>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실위(室韋)-서(耳亇)>를 넘어가면, 곧 사이하(査伊河)가 동류(東流)해나가고, 이 사이하
(査伊河)는 다시 남류(南流)하는 작이하(綽爾河)로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이하(査伊河)(Chai-ho)와 작이하(綽爾河)가 만나는 곳인 ‘차이손(Chaison)’지역이 작이하(綽爾河)를 수평
(水平)으로 가로지르는 웅반(雄盤)-갑문을 쳐주고, 그 밑(=남(南))으로 5Km 되는 지점에서 서(西)쪽의 925m 되는
산과 동(東)쪽의 982m되는 산(山)을 기점(起點)으로 작이하(綽爾河)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자반(雌盤)-갑문을 쳐
주면,
선박은 <작이하(綽爾河)→ 사이하(査伊河)(Chai-ho)→[<실위(室韋)-서(耳亇)>]→합이합하(哈爾哈河)→아이선하
(阿尒善河)라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이하(綽爾河)의 작(綽)은 ‘너그럽다’라는 의미로써 물(水)이 풍부한 하천인데,
아래 ‘몽고자치구 지도’에서 보다시피, 태평령(太平岭) 우측에서 괄호[(]모양 둥그럽게 흘러가는 강인데 가운데 乀자
모양으로 흐르는 아륜하(阿倫河)와 우측에서 괄호[)]모양으로 흘르는 격니하(格泥河)와 합쳐져서 마치 복숭아 모양
의 ‘하트(heart)’를 연상시키는 강인데,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 바로 윗 쪽의 강인 것입니다.
(*) 내몽구자치구 지도에서 작이하(綽爾河)를 볼수 있는 곳.
http://parkchina.com.ne.kr/map/mongo.JPG
(*) 작이하(綽爾河)-아륜하(阿倫河)-격니하(格泥河)가 이런 왼쪽으로 눕혀진 봉숭아 모습 -[ (丨)]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아무튼 고리(高麗) 장인(匠人)들은 아이선하(阿尒善河)와 조이하(洮尒河)[=조아하(洮兒河)]를 연결시키는 1,200m의
높은 턱이 있는 <삼광소(三光燒)-서(耳亇)>를 넘기 위해서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을 쓰기 위해서 팔도
구(八道溝) 뒷 산인 ‘사루한-산(山)’의 터널(tunnel)을 뚫어서 물을 공급하다보니깐, 결국 <실위(室韋)-서(耳亇)>를
통해서 아이선하(阿尒善河)와 작이하(綽爾河)까지 연결되게 한 것입니다.
⑤ 그런데, 달이빈지(達爾彬池)를 ‘우리 말’로 읽으면 ‘다리 빈 지(池)’가 되는데 이는 “다리(=교량(橋梁))을 빌렸다.”
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즉 <삼광소(三光燒)-서(耳亇)>를 넘다보니,
“갑문을 막아서 ‘사루한 하(河)’의 물이 불어나게 하다보니, ‘다리 빈 지(池)’ 역시 늘어나서 <실위(室韋)-서(耳亇)>
를 넘게 되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리 빈 지(池)’ 남(南)쪽에 보면, 1686m의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등자산(鄧子山)
이라고 이름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조금 후에 설명합니다.)
⑥ 위도(緯度)표시 281로 좌측 옆으로 <옆지도> 와 연결됩니다.
(*) 위 ①,②,③,④,⑤,⑥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l51-1.jpg
<좌측 옆-지도>
(A) 아이선하(阿尒善河)의 지류(支流)인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가 조이하(洮尒河)의 원류(源流)인 칠도구
(七道溝)와 서(耳亇)를 형성함을 확인할수 있는 곳.
(위도(緯度)표시 281로 찾아야합니다.)
① 아이선하(阿尒善河)쪽에서 웅반(雄盤)-갑문을 쳐줄 위치는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와 ‘부루힌-카(Burhin-ka)’가 합류해서 서북류(西北流)(↖)하는 곳의 서(西)쪽에
있는 기암령(奇岩嶺) 북록(北麓)과 서류(西流)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 본류의 북안(北岸)에 있는 화견산(花見山:
1284m)의 남록(南麓) 사이를 곤(丨)자 모양으로 갑문을 쳐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선하(阿尒善河) 본류에 ‘경첩
갑문’을 설치해서 이런(<)모양 즉 서남류(↙)한 물결을 동남류(↘)로 변환시켜서 ‘서북(西北) 두입지술(斗入之術)
로써 해발(海拔) 1,200m의 서(耳亇)르 넘기 위한 것입니다.
② 아이선호(阿尒善河) 쪽에서 ‘경첩 갑문’을 쳐줄 위치는 상미산(尙尾山: 1200m)와 합륜산(哈倫山:1200m)를 불(乀)자
모양으로 갑문을 쳐줍니다.
③ 아이선하(阿尒善河)쪽에서 자반(雌盤)-갑문을 쳐줄 위치는 서류(西流)하는 아이선하(阿尒善河)에 서남류(西南流)
하는 도로루-카(Tororu-ka)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천염산(天鹽山: 1,000m)와 맞은 편 동남(東南)쪽 십승산(十勝山:
1,000m) 사이를 불(乀)자 모양으로 갑문을 쳐줍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l50-3.jpg
아무튼 압료하(鴨了河)가 적어도 윤관(尹瓘) 도원수(都元帥)께서 여진(女眞) 정벌을 하면서, ‘아골타’를 완전 포위
(包圍)해서 “고리인(高麗人)과 싸우는 것은 자멸(自滅)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시킨 후에 풀어주어서 요(遼)를 밀쳐
내어서 금(金)을 세울 때에는 이미 이런 압료하(鴨了河)가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과정을 비록 개괄적(槪括的)으로만 살핀 흠은 있지만, 그래도 이런 인식이 중요한 까닭은 청구조선도
(靑邱朝鮮圖) 즉 <18C 숙종(肅宗) 초 조선(朝鮮)지도>에서 ‘조선인(朝鮮人)들의 지리(地理)-공리(公理)>는 기본적
으로 고리조(高麗朝)때 부터 전래(傳來)되는 지리적인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오래된 지리적 인식’에서 압록강에 관해서 가정(假定)된 사실은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산맥의 근원이
태백(太白)-곤륜산(崑崙山)인데, 이는 3개의 만주(滿洲)에 있는 북막(北漠)중에 백두(白頭)-곤륜산(崑崙山)을 건너서
결국 오늘날 대흥안령산맥인 고구리(高句麗) 때의 개마대산의 장백산(長白山)인 오늘날의 태평령(太平岭)과 연결
되는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즉 압록강(鴨綠江)은 이러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산맥이 북막(北漠)을 거쳐오는 과정”의 백산(白山)들을 ’갑문
과 제방‘을 설치해서 서(耳亇)로써 선박이 넘나들어서 ’법률 제정의 세 호수(湖水)‘로 최대한 빨리 닥아가게 하는
임무가 있였다고 가정(假定)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압록강의 임무는 개마대산의 <삼광소(三光燒)-서(耳亇)>를 넘어야 비로소 오리(=압(鴨))의 임무가 끝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우 놀랍게도 태백(太白)-곤륜산(崑崙山)이 북막(北漠)인 ‘오늘날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인 백두(白頭)-곤륜산
(崑崙山)을 거쳐서(=역(歷)) 오게 되는데, 이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의 바로 우측(右側)에는 ‘오리의 산’이 2개가
있습니다. 즉 쌍압산(雙鴨山)인 것이지요.
즉 쌍압산(雙鴨山)과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사이’에서 오늘날 아수달하(阿水達河)로 칭하는 홀하강(忽河江)이
북류(北流)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바로 우측에 쌍압산(雙鴨山)이 있음을 보여주는 흑룡강성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huklong.JPG
(*) 칠성납자산(七星磖子山) 바로 우측에 쌍압산(雙鴨山)이 남북(南北)으로 있고, 아수달하(阿水達河)가 유-턴
(U-tern)해 북류(北流)함을 보여주는 미군사지도(1950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l52-6.jpg
결국 이러한 사실은 조선조(朝鮮朝) 때 까지의 <지리(地理)-공리(公理)>로써는 압록강은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
역북막(歷北漠)해서 오늘날의 태평령(太平岭)인 장백산(長白山)까지 그 산세(山勢)를 형성하는 가운데 서(耳亇)를
통해 ‘압록강’은 뭇 강을 이어지게 하는 임무가 있고, 이 임무가 마감하는 것이 바로 압료하(鴨了河)로 여기고 있었음
을 의미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 즉 태평령(太平岭)부근을 ‘조선여진분계도’에 의하면, “조선조(朝鮮朝)의 영토(領土)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래 ‘조선여진분계도’를 보면, 낙니강(諾泥江) 남(南)쪽에서 서북류(西北流)하는 강이 있는데, 이는 바로 아이선하
(阿尒善河)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원류가 시옷(ㅅ)자 모양 두갈래로 해서 흘러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조선여진분계도’는 전체 지도를 위에서 아래로 눌러서 방향이 이그러지게 일부러 트릭(Tric)을 그려서 그린 것입
니다.
우리는 이 아이선호(阿尒善河)로 넘어가는 길이 (1) 조이하(洮尒河)쪽에 대응하는 삼광소(三光燒)-서(耳亇)를 통
해서 ‘하루바칸토-카(Harubakanto-ka)’로 가는 수로(水路)가 있고, (2) 작이하(綽爾河)쪽에서 ‘실위(室韋)-서(耳亇)’
를 통해 넘어가는 수로(水路)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시옷(ㅅ)자 처럼 곳에 “다리 빈 지(池)”가
있음을 역시 알고 있는데,
‘조선여진분계도’를 보면, 어떤 산(山) 밑에 있는 마을 이름이 등자촌(鄧子村)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등자촌(鄧子村)은 바로 등자산(鄧子山)이 있음을 그려놓았는데, 이 산이 우리가 ‘다리 빈 지(池)’ 남(南)쪽
에 보면, 1686m의 높은 산인 바로 그 산인 것입니다.
(*) ‘조선여진분계도’의 등자촌(鄧子村)과 등자산(鄧子山: 1686m)를 볼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sabul358/13708581
어찌해서 이 산이 등자산(鄧子山: 1686m)인가?!
말(馬)을 탈때에 등자(鐙子)라는 도구(道具)를 밟고 올라타는데, 이는 ‘발(趾)을 끼우는 둥근 고리’입니다.
따라서 등자(鐙子)는 ‘쇠 금(金)’ 변(邊)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광소(三光燒)-서(耳亇)나 또 실위(室韋)-서(耳亇)나 따지고 보면 언덕에 불과합니다.
한자로 언덕을 부(阜)라고 표현하는데, 이를 부수(部首)나 변(邊)으로 쓸 경우는 부(阝)로 표기합니다.
따라서 ‘언덕을 통해서 오르는(=등(登)) 것’을 한자(漢字)로 쓰자면 <등자(鄧子)>라고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등자산(鄧子山: 1686m) 위에 오르면, 이 곳 주변에 있는 2개의 서(耳亇) - 즉 삼광소(三光燒)-서(耳亇)나
또 실위(室韋)-서(耳亇)에 물(水)이 차오르는 현황(現況) 파악을 가장 쉽게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산(山)의 이름을 등자산(鄧子山: 1686m)으로 하고, 수위(水位)가 불어나서 ‘다리 빈 지(池)’가 ‘다리 빈 호
(湖)’로 변할 때에, 이 등자산(鄧子山: 1686m) 북록(北麓)에서 선박을 타고 가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거(寄居)
하는 마을 이름이 등자촌(鄧子村)이었던 것입니다.
이 ‘조선여진분계도’는 조선(朝鮮)의 임내(任內)인 여진(女眞)과의 분계(分界)를 그린 것이지, 양쪽을 모두 관할하는
청구(靑邱)-임내(任內) 입장에서 분계도를 그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등자촌(鄧子村)을 ‘조선여진분계도’에 그린 까닭은 적어도 ‘흑룡강 상류’로 넘어가는 갑문과 제방 등의
시설에 대한 장악을 청구(靑邱)-조선(朝鮮)이 맡고 있었음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 각설(却說)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脈)을 넘나드는 것이 ‘압록강’의 임무이고, 이런 압록강의 임무가 완료(完了)
되게 한 강이 압료하(鴨了河)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 보면, 세종실록 지리지(/평안도)에서 압록강(鴨綠江)을 언급하는 것이 모두 향백산대맥
(向白山大脉)를 넘는 순서(順序)대로 되어 있음을 우리는 직감(直感)할 수 있습니다.
즉 압록강 관련 원문(原文)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은데, ‘압록강’이 넘어야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를 <*주(注)*>로 표기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 압록강(鴨綠江) 관련 원문(原文) 재인용(再引用)(*)
[1] 鴨緣江在義州西, 古名靑河, 云龍灣。
: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 서(西)쪽에 있다. 옛 명칭이 청하(淸河)이다. 용만(龍灣)이라고 말한다.
<*주(注)*> : 이는 이미 압료하(鴨了河)가 ‘개마대산’을 넘나드는 ‘갑문과 제방시설’이 청구조선(靑邱朝鮮)에서는
완료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 연결되어야하는 것이 차용만(叉龍灣)임을 밝힌 것입니다.
[2] 其源出自白頭山, 行數百餘里,
: 압록강(鴨綠江)의 원천(源泉)은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인 백두산(白頭山)의 아수달하(阿水達河)에서 연원
(淵源)하며, (남(南)쪽으로 내려가서 일단) 수백여리(數百餘里)를 간다.
<*주(注)*> : 이는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 역북막(歷北漠) 즉 ‘백두(白頭)-곤륜산(崑崙山)’을 거쳐서 남류(南流)
하는 압록강이 있음을 거론하고 ‘올바른 첫 시발(始發)임’을 밝힌 것입니다.
[3] 過咸吉道甲山郡, 歷閭延、江界、理山, 與禿魯江水合, 經碧潼、昌城、小朔州, 至于州之城西,
: ‘(압록강이)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을 경과(經過)하는 것’은 여연(閭延)、강계(江界)、이산(理山)을 거쳐서
(=역(歷)) 독로강(禿魯江) 강물과 합(合)하는데, 벽동(碧潼)、창성(昌城)、소삭주(小朔州)를 경유(經由)해서 의주
(義州) 성(城)의 서(西)쪽에 이른다.
<*주(注)*>: 이는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 수계 지도’에 보다시피 오늘날의 압록강은 적어도
(1) 동요하(東遼河)-[개원(開元)]-동요하(東遼河)의 근원 -[서(耳亇)]- 이통하(伊通河)-채룡강(寨龍江)
(2) 혼하(渾河)- [서(耳亇)]- 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채룡만(寨龍灣)
(3) 태자하(太子河)-[서(耳亇)]- 대이하(大二河)-부이강(富爾江)-박작호(泊汋湖)로(오늘날 환인수고(桓仁水庫)를
뜻함) 연결되는 서(耳亇)를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이들 3가지 [서(耳亇)]는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인 혼강(渾江)이 - 동가강(佟家江)을 뜻합니다.
- 박작호(泊汋湖)(오늘날의 환인수고(桓仁水庫)보다 규모가 컸던 고구리(高句麗)때 명칭임)에서 혼강(渾江)의 ‘통
(通)하여 변화(變化)시킨다.’라는 의미를 지닌 <통화(通化)>의 바로 서북(西北)쪽에
(*) 압록강(鴨綠江)-혼강(渾江)-노령구(老岺泃)-[서(耳亇)]-삼도하(三道河)-삼통하(三統河)-채룡만(寨龍灣)으로
넘어가는 것이 벼리(=강(綱))로써 위 (1),(2),(3)을 꿰뚫고 있음을 의미하기 위해서 거론하고 있음을 직감(直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여기서 우리는 위 (1) 동요하(東遼河) (2) 혼하(渾河) (3)태자하(太子河)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의 분수령(分水嶺) - 즉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脈)의 서(耳亇)를 넘기 위해서는 이 분수령 좌측에 갑문(閘門)을
쳐주어야하는데, “갑문을 쳐주면 자연적으로 수위(水位)가 올라가서 이 3 강을 “불(乀)자 방향으로 하나가 되게
수로(水路)가 연결되도록 하는 제방(堤防)이 있었고 여기에 석벽(石壁)을 쌓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를 우리는 다음 회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우리는 지금까지 “①조선(朝鮮)사람들이 기록한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기록과 ②조선(朝鮮)사람
들이 그린 지도(地圖)를 연관시켜서 압록강(鴨綠江)이 무엇인지? 두만강(豆滿江)이 무엇인지? 또 이들 강들은 어떻게
흐르는 것인지?”를 규명(糾明)해 보지 않고, 엉뚱하게도 일제강점(日帝强占)때, 만주(滿洲)를 괴뢰(傀儡)국가(國家)로
만들고, 그들에게 ‘조선의 영토’와 각종 광산(鑛山)의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을 교환한 일인(日人) 학자(學者)들이 만든
허구(虛構)의 역사-지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