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안도 - 인물이 많은 정주
인기멤버
hanjy9713
2024.01.01. 22:08조회 1
댓글 0URL 복사
인물이 많은 정주
곽산 동쪽은 정주군이다. 고려 때 이곳에서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정주는 정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목(牧)이 되었으나, 순조 11년(18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이후 반역향으로 몰려 정원현으로 강등되었다. 그 뒤 복권되었고, 여러 번의 변천 과정을 거쳐 1952년에 정주군이 되었다. “서남쪽으로 바다가 드넓게 펼쳐지고 크고 작은 섬이 바둑돌같이 깔려 있다”라고 『고려사』에 실려 있고, “고전 읽기를 좋아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부지런하다”라고 『여지도서』「풍속」조에 실려 있는 정주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 정신을 일깨웠던 대표적인 민족 사학 기관인 오산학교와 용동교회가 있었다.
정주군의 진산은 마산이다. 중국 사신 예겸은 그의 시 「당어령」에서 정주에 대해 “당어령에 굳이 오르니, 작은 돌은 모나고 큰 바위는 완악하다. 말 달려 곧장 마루에 오르니 앞길에 아직도 만 겹의 산이 있다. 바다 따라 아득히 길이 머니, 잠깐 평야를 가다가 또 언덕을 올라간다. 산 밖에 산이 이어져 아직도 천 겹이요, 서늘한 산 찬 풀밭에 석양지기 몇 번인가”라고 노래하였다. 현재(2003년)는 인구 1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어염(생선과 소금)과 사냥의 이(利)가 있다”라고 기록된 정주의 당시 호수는 1033호, 인구는 5466명이었다. 정주는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 『국조방목』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정주 사람들은 모두 277명이었다. 서울 출신이 292명인 것을 볼 때 정주 지역에서 과거 급제자가 얼마나 많이 배출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근현대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곳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1907년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이 있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명룡ㆍ김병조가 있으며, 또 오산학교에서는 조만식이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김소월ㆍ김억ㆍ백석 등이 있고, 교육자 현상윤, 언론인 방응모, 의사 백인제, 화가 이중섭 등도 이 고장 출신이다.
인물이 많은 정주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은 순조 11년(1811)이었다. 조선은 그 무렵 사회ㆍ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무관으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계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수용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 전해오는 말에 ‘할 뻔 댁(宅)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벼슬한 사람이 귀하기 때문에 벼슬을 할 뻔했던 사람에게도 ‘할 뻔 댁’이라는 존칭을 붙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벼슬을 할 뻔하다가 못한 사람을 높이는 일까지 벌어졌을까.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주도층이 비록 과격한 소론 중심의 지배층이었지만 중간층 및 하층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층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하여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서북지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때 평안도 용강군 출신인 홍경래가 나타났다.
정주성 © 권태균
홍경래의 난의 근거지가 되었던 정주성. 일반 농민들과 양민들이 대거 참여해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정주성에서 잡혀 참수되었다.
용강의 평민 출신으로 유교와 풍수지리 등을 익힌 지식인이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홍경래는 용력을 갖춘 장사(壯士)였다. 그는 봉기 10년 전부터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성격의 지식인이자 상인인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가 출신의 지식인 김사용ㆍ김창시, 역노 출신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 장사로서 평민 출신의 홍총각과 몰락한 향족 출신인 이제초 등과 함께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신분과 생업은 매우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용력을 갖춘 지식인이 총지휘를 하고 저항적 지식인이 참모를 맡았으며 부자들이 봉기 자금을 대고 뛰어난 장사들이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가산의 대령강 인근 다복동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세력을 포섭하고 군사력과 군비를 마련한 주도층은 순조 11년(1811) 12월 18일에 봉기하였다. 봉기군은 가산ㆍ박천ㆍ안주 방향과 정주ㆍ곽산ㆍ선천ㆍ철산을 거쳐 의주로 향하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각 고을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홍경래가 지휘하는 부대는 19일에 가산을, 20일에 박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내분이 생겨 안주 병영의 집사(執事)인 김대린과 이인배가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홍경래를 죽여 정부 쪽에 공을 세우려 하였다. 이 사건으로 홍경래가 큰 부상을 입었다. 김사용, 김창시가 이끄는 부대는 짧은 시일에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지를 무혈점령하고 의주를 위협하였다.
중앙정부가 이들의 봉기 사실을 안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진압군은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였고, 29일 박천 송림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국 봉기군은 패하였고, 그날 밤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ㆍ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모여 있었다. 그 후 정주성의 봉기군은 서울에서 파견된 순무영(巡撫營) 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성을 지켰으나, 1812년 4월 19일에 진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는데,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독립운동가 이승훈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여 재직 중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물이 많은 정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