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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공군 작전 소개
제 1 절 해군작전 소개
1. 지상군 전선개항
중공군과 북한군의 신정공세(제3차 공세)는 '50. 12. 31일 시작되어 유엔군은 후퇴하고, 중공군이 '51 1. 4일에 서울을 점령함으로로서 서울은 전쟁발발 6개월만에 세번째 주인이 들어왔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남한의 중북부 지역인 원주에서 공방전을 벌이다 1월 중순 지상군 전선은 서쪽 평택에서 동쪽으로 삼척에 으르는 선이었다.
미 제8군의 반격작전인 선더볼트 작전은 1월25일부터 2월 9일까지 진행되어 수원-원주-삼척 선으로 진격해 갔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새로운 공세준비를 좌절시키기 위해 "라운드 업 작전"을 2월 5일 개시하여, 미 제10군단이 횡성으로 진격해 갔고 유엔군은 2월 10일에 인천항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동해안에서는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양양을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 2월 11일부터 횡성과 지평리 일대에서 대 격전이 벌어져 국군 제8사단과 미 제2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더한 것이였다.
미 제8군은 2월 21일부터 킬러작전으로 2월 28일 한강 이남에서 공산군을 완전히 격멸하였다. 유엔군은 3월 7일 서울 동부 한강을 도하하여 공산군의 반격준비를 분쇄하기 위해 리퍼작전을 개시하여 3월 15일 서울에 입성하여 4번째 서울의 주인이 되었다.
캔사스선과 와이오밍선으로 진출을 개시하던 4월 11일 미 행정부는 맥아더원수를 전격해임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으며 미 제8군사령관은 밴플리트 장군이 보직되었다.
공산군의 4월 공세는 4월 22일 시작되어 서울 북부 골든선까지 남하하였고 중부와 중동부는 노네임선까지 밀려왔다. 또한 5월 16일부터의 5월 공세는 주로 중동부에 집중되어 현리에서 국군 제3군단이 와해되어 평창, 대관령까지 밀렸지만 운두령에서의 첨단을 포위 격멸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밀고 올라가 5월 말에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유엔군은 6월초에 공산군의 춘계공세(4,5월 공세)에서 피탈된 지역을 다시 회복하고 캔사스선(38도선)으로 진출한데 이어 철의 삼각지대를 견고히 확보하기 위한 와이오밍선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공산군측은 그들이 거부하던 휴전회담을 6월 23일요구했고 전쟁전 상황(38도선)으로의 원상 회복을 요구했다.
유엔군은 현 전선에서의 접촉선을 중심으로한 휴전선을 기조로하는 대안을 들고 '51. 7. 10일 개성에 설치된 판문점에서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원래 공산군측의 목적이 휴전이 아닌 전투력 복원을 위한 시간벌기 작전이었으며 유엔군 또한 반전요구에 부응해야 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기에 휴전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하계제한적 공격작전(밀어올리기 작전)을 미 제10군단의 중동부지역에서 진행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의 와이오밍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역곡천까지 전선을 끌어올리는 코맨도 작전이 주로 10월에, 중서부의 미 제9군단은 미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과의 전선 조정을 위해 폴라선 진출작전을 10월부터 11월어간에 실시하게 된다.
2. 북한해군 및 유엔군해군 작전 개요
북한해군은 전쟁초기 보유햇던 전투함정은 거의 물력화되어 작전 중점은 남한 후방지역에 대한 게릴라 침투를 위한 상륙기습 침투작전에서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방어작전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북한해군은 상륙작전임무를 하던 육전대(해병대)를 육군으로 전환시켰다. 대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기뢰를 도입, 기뢰부설교육을 시키고 선박들은 기뢰부설이 가능토록 개조하여 원산항 및 진남포항 등 주요항구에 기뢰를 부설하였다.
또한 유엔 해군은 이 기간에 북한지역 동. 서해안의 전략도서를 확보하여 해상봉쇄작전, 상륙기만작전, 전략도소 확보작전, 교량폭파 및 화천댐 폭파작전 등을 실시하였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 12. 7~31일까지 인천에서 부산으로 수송된 인원은 32,428명, 차량 1,103대, 화물 54,741톤이며, 중공군이 인천으로 진입하자 '51. 1. 1~5일까지 병력 37,000명, 피난민 64,200명과 수백 대의 차량, 수천 톤의 화물을 철수시켰다.
중공의 남진을 제한 또는 지연시키기 위해 함포지원 및 함재기를 이용한 근접항공지원, 중공군 병력에 대한 직접 공격, 철도 및 도로 파괴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한반도 주요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 작전으로 공산군이 보급물자 및 병력이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였고 반대로 유엔군의 해상활동은 보장하였다.
상륙기만 작전으로 '51. 1. 30~31일 까지는 동해안 간성해안, 2월 10일에는 인천지역에 실시하고 4월 7일에는 청진지역에 기습 상륙하여 주요철로를 폭파하였다.
전략도서 확보작전을로 초도, 백령도, 덕적도, 군산 인근 도서 및 원산항 내 도서들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의 보급망과 군수체계를 와해시키기 위해 교량폭파작전으로 원산과 청진을 연결하는 동해안 철로를 폭파함은 물론 홤경도 길주의 주요 철로교량을 항공차단으로 '51. 3월 내내 폭격하여 폭파시켜 만주에서 북한 동부로 들어가는 보급물자를 차단시켰다.
북한군의 수공작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화천댐 폭파작전을 실시하였다. 북한군은 '51. 4월에 화천댐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진격시 수몰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유엔군이 6.25전쟁 발발 이후 최초로 항공기에서 어뢰를 투하하여 화천댐 중간 수문을 완전 파괴하였다.
한편 한국 해군은 유엔군에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했지만 단독작전도 실시하여, 황해도 피난민 철수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략도서 확보작전, 소해작전 등이 있으며 다음과 같다.
'51. 1. 5일~31일까지 서해안 일원에서 황해도 피난민 구출작전으로 62,082명을 구출하여 서해안 도서지방에 분산시켰고,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51. 2. 1일 실시되어 유엔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인천에 상륙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시를 장악하였다.
북한군은 주요항구에 기뢰를 부설하였는데 우리 해군은 1950. 10월 23일 제1소해정대를 창설하여 적극적인 소해작전을 실시하였다. 동해안에서는 '51. 1. 4일부터 양양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구역에서, 영흥만 일대에서는 유엔해군과 연합작전으로 기뢰 49개를 식별하여 폭발시켰다.
3. 유엔 및 한국 해군작전
가. 유엔해군 작전
(1) 인천철수 및 지상군 지원작전
중공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50. 12. 28일에 38선을 돌파하여 수도 서울로 남진하고 1월 4일에는 서울이 피탈되고 한강다리가 폭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인천항에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인원 32,428명, 차량 1103대, 화물이 54,741톤이 해상작으로 철수되었다.
'51. 1월 5일 중공군이 인천시에 진입하자 인천항을 폭하시키고 선박들은 모두 출항시켰다. 1월 1일부터 5일까지 병력 37,000명, 피난민 64,200명, 수백대의 차량, 그리고 수천톤의 화물을 인천으로부터 철수시켰다.
또한 동서해상에서 함재기들이 출격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고 인천에서 한강으로 로체스터함 등 2척이 진입하여 후퇴하는 지상군을 지원하고 김포 비행장을 폭격하였다.
(2) 해상봉쇄작전
유엔 지상군을 위한 함포지원, 함포사격, 기뢰 대항전 실시, 호송, 대잠전, 연안 어로 통제, 정보 수집을 위해 제95기동부대에 동해와 서해의 두 개의 봉쇄전단이 봉쇄를 담당했다.
유엔군은 상륙양동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제1차 양동작전은 '51. 1.30~31일까지 동해 간성해안에 실시되었다. 함포사격과 수해작전과 수척의 LST들이 상륙기만을 실시하였다.
인천지역에 대한 기만상륙은 '51. 2. 10일에 계획되었다. 미주리함이 2.8일 함포사격을 실시하였지만 실제는 한국해군이 먼저 인천을 탈환하여 취소되었다.
1951. 4. 7일 청진 남방에서 영국 제41 독립해병중대 250명이 청진남방 8마일 지점에 있는 해안철로를 파괴하기 위해 상륙하여 철로 및 인근 터널, 옹벽터널 등을 파괴했다.
'51. 2월 중순부터 원상항, 3월 8일 성진항, 4월 26일 흥남항도 해상봉쇄하였다.
그러면서 북한군도 해안포를 이용하여 사격을 가해와 때로는 갑판 위에 포탄이 떨어져 인명피해가 나기도 한다.
(3) 동해안의 교량폭파작전
북한의 철도체계는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산맥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동쪽과 서쪽 두개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양쪽에 각각 3개씩 6개의 철로가 만주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지나서 연결된다.
만주에서 신의주까지는 단선으로, 신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복선으로 구성되었다. 단선 3개의 철로로 하루 6천톤이 수혈되지만 북한내부에서는 공습으로인한 철로 파괴와 교량 파괴 등으로 하루 약 500~1,500톤정도가 전선에 수혈된다고 판단되었다.
북한의 동부 철도망은 만주에서 3개의 철도가 길주에서 합쳐지고 그곳에서 단선으로 남쪽의 고원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철로는 평양, 원산 그리고 원산에서 동해안으로 철원간의 철로를 다라 서울로 연결된다. 이곳으로는 하루 약 5천톤 정도가 수혈될 수 있지만 해군항공기의 차단 작전 등으로 약 500톤 이할로 감소된다고 판단 되었다.
한편 북한의 육상 도로망을 이용하여 매일 약 1,500톤 규모가 이동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여기서 보급망은 우마차와 사람을 이용한 운송수단이었다. 말과 소, 그리고 인부들이 지게를 지고 보급품을 전선으로 나르고 있었다.
따라서 제77기동함대의 항공차단 작전으로 공산군측의 철로망이 무력화 되고 공산군의 군수징원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가) 도곡리 철교 폭파사건
제77기동대가 '51. 1월부터 6월까지 한반도 북동부 지역 철로폭파 는 함경북도 길주의 도곡리에 위치한 교량 폭파가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이 표적은 만주에서 오는 철로 3개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가는 길주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따라 3월 2일 1차 폭격에서는 부분 파손되었다. 다시 3월 3일 함재기 8대가 동원되어 폭파되고 다시 3월 7일에 폭격하였다.
그러나 3월 14일 항공 촬영결과 야간 위주로 복구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3월 14일 네이팜탄으로 공격을 하여 6개의 교폭중 2개만 남게 되오 철로망을 두절시켰다.
그런데 북한군은 야간 위주로 복구작업을 하여 2주만에 완전 복구되어 제77기동부대 항공기들은 4월 2일 2차에 걸친 폭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51. 4. 7일 성진 남쪽의 소래동에 영국 특공대원들이 상륙기습을 감행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질문을 한 결과 40일 동안 한번도 기차가 가는 것을 보지못했다고 답변한다. 4월부터 그들의 철로교통량은 30%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철로망 파과활동은 다음 2가지 사건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
첫째는 제7함대 작전구역인 대만해협의 위기였다. 바로 중공군이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는 정보에 따라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전력이 돌아가야 했다.
두번째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였다. 4월 22일 밤 10:00시에 시작된 공새는 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무력화 되었고 미 제1해병사단이 투입되어 진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5월 공세가 임박하면서 수천 대의 차량들이 남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제77기동부대의 임무가 미 제8군을 근접항공으로 지원해야 했다. 따라서 북동부 철로에 대한 공격이 제한을 받는 틈을 이용하여 공산군은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였다.
그러다 5월 1일에 다시 차단 작전에 나섰지만 '51. 6월까지 대규모 보급품이 북한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중공군이 다른 방법으로 보급품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보급품의 이동로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불행하게도 미 제5전술공군은 2,000파운드 폭탄을 가지고 정밀 조준으로 교량을 파괴할 항공기가 없었다. 둘째, 서부의 철로망이 동쪽보다 커서 가용한 항공기로 철로를 차단하기는 역부족 이었다. 셋째는, 중공군이 점점 차량 수송에 비중을 높혀서 '51. 1월에 트럭 7,300대가 5월에는 54,000대로 대폭 증가하였다. 넷째는, 수송을 야간에만 실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공산군이 기술적이고 고도로 조직화된 보수능력은 아군의 파괴속도와 비슷해지고 있었다.
(나) 화천댐 폭파 작전
공산군은 '51. 4월 초순에 두차례에 걸쳐 250피트의 화천댐 수문을 닫고 북한가의 수심을 낮게 만들어 유엔군이 진격할 때에 수문을 열어 아군의 활동을 제한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반대로 유엔군의 공격시에 수문을 닫아 도하에 유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산군의 의도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 제8군의 요청으로 B-29기가 고공폭격을 실시했으나 파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77기동부대에 파괴를 요구하였으며 제193비행대대 비행기 6대가 2,000파운드의 폭탄을 적재하고 댐을 폭파하려 했으나 반파되었다.
이에 두번째는 이번 전쟁 처음으로 어뢰가 사용되었다. 5월 1일 8대의 비행기가 100~500파운드의 VT폭탄을 투하하여 공산군의 대공포를 제압하고 이어서 2대의 비행기가 2개의 어뢰를 투하하여 중간 수문 1개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다른 수문도 10피트 정도의 파공을 만들었다.
화천댐의 수문이 폭파됨으로서 6월의 미 제1해병사단의 진격이 순조롭게 되었고 수문을 경비하던 공산군도 165명이 사살되었다.
나. 한국해군 작전
(1) 옹진 . 연백지구 철수작전
(가) 황해도 피난민 철수작전
중공군의 침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하여 38선 이남으로 후퇴하자, 북한의 수많은 주민들이 아군의 이동을 따라 남으로 피난길에 올랏다. 그러나 신속한 군의 이동을 따르지 못하고, 중공군에 진로가 막히자 부드ㅡㄱ이 중도에서 황해도 서해안 즉 은율, 송화, 장연지구로 몰리게 되었다.
공산 치하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남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 북한주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도로 애국청년들이 재령, 신천, 안악, 장연, 송화, 은율 등 각 마을에 9천여 명에 달하는 청년의용군을 조직하고 곳곳에서 공산군과 싸웠다.
그러나 북한군이 서쪽으로 진출하자 황해도 일대의 주민과 피난민들이 해안지대로 집결하여 서해의 우리 해군함정에 구원을 요청하여 해군의 구출작전과 청년의용군 지원이 개시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은 구출된 피난민을 백령도 대청도 초도 등 도서로 수송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26해안보병독립여단 제5대대 약 800명이 송화읍을 공격한 후 덕동을 향하여 남진하였다. 이때 청년의용군이 방위대를 구축하고 분전하였고, 아군 함정의 긴밀한 협조와 엄호사격에 힘입어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점차 증가하여 10일에 다시 침공하여, 무장 경찰 80명과 육군 대위가 지휘하는 무장의용군 350명이 분투하였으나 결국 월사리로 후퇴하였다.
소수의 의용군은 1월 15일 이후 광대한 산악지역으로 분산하여 수년간 장기적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무장의용군 350명, 산악지대의 무장의용군 550명, 비무장 의용군 3000명으로 게릴라작전이 수행되었다.
한편 초도와 백령도로 이동시켰던 청년의용군을 훈련시켜 황해도 각 해안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활동을 더욱 곤란하게 하고 양민구출과 양곡반출 작업을 계속하였다.
진남포 대동강
석도
초도 은율 안악 사리원
풍천 재령
신천
장연
덕동 해주
백령도
대청도
해군본부에서는 수용된 피난민을 보호하는 한편, 애국청년 2만명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인근 도서의 방어와 함께 항해도 연안에 상륙을 감행하여 유격활동 및 정보수집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여 30~50명 당위의 특공대(동키부대 애칭 : 차후에 미군 통제 유격부대가 됨)를 조직하였다.
(나) 제2차 인천상륙작전
북한군과 중공군은 '51. 1. 5일 각 1개 대대, 합계700명의 병력으로 인천시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월미도에 82mm야포 8문 등 중기관총을 배치하였고, 해안선 일대는 지리를 매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YMS-510정(정장 함덕창 해군 대위)은 '51. 1. 11일 인천항에 돌입하여 피난민 500명을 덕적도로 수송하였다. 그 뒤 25일에는 인근 도서를 왕래하는 범선 10척을 격침하였다.
YMS-510함정은 1월 27일 미군 함정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만조 대를 이용하여 인천항으로 침투하여 구명보트를 이용하여 특공대를 상륙시켰다. 1개 소대 규모의 적중 47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여 귀함하였다.
이후에도 인천외항과 강화도 해역을 봉쇄하는 경게임무를 수행하던 해군은 PC-701, JMS-310정 등이 미 해군함정과 협조하에 임무를 수행하여 2월 10일에는 특공대원 70명이 302정 및 발동선 2척에 편승하여 인천시로 침투해 들어가 공산군을 소탕하게 되고 뒤이어 310정이 2월 11일 덕적도에서 해병대를 편승하여 인천에 도착 특공대와 함께 잔적을 소탕하여 인천시를 장악하게되었다.
(다) 전략도서 확보작전(여도 상륙작전)
월성리 호도반도
문평리 영흥만 웅도
신도 여도
대도 소도
성북리 갈마반도
원산시 황토도
여도는 영흥만에 있는 도서 가운데 가장 크고, 또한 영흥만의 입구에 있어 그보다 안쪽의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점령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곳이다.
LST 801함은 2월 7일 오후에 진해에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를 탑재하고 묵호로 출항하여 2월 9일 묵호에 입항하였고 , 2월 10일에 YMS-505정과 합류하였다. 묵호사령관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1월 16일 북한군 87명이 범선에 분승하여 상륙을 기도하였으나 애국청년 300명에게 전멸된 사실이 있다고 한다.
미 소해함이 11일 야간에 여도에 도착하여 소해작전을 실시하고, 우리 해군들은 2월 12일 묵호를 출항하여 2월 13일 여도 근해에 도착하였다. 미군이 헬기로 정찰결과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환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당일 해병대 수색대 13명이 은밀히 상륙하여 정보를 취득결과 1월 16일 북한군 87명을 섬멸한 애국청년 300며은 범선으로 남한으로 피난했다. 그후에 북한군 10명 정도가 이 섬에 왔으나 주둔하지는 안했고 주민 200명과 피난민 200여 며이 거주하고 있었다.
상륙작전은 2월 14일 07:30분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에 아군은 2월 18일 원산지구에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함재기는 원산시 고지에 파상공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도 부근의 신도와 갈마반도 고지에 있는 공산군이 아군측에 간헐적 포격을 계속했다.
미 해군은 2월 24일 07시에 신도 상륙작전에 앞서 강력한 함포사격으로 공산군은 거의 전멸하여, 해병대가 상륙하여 섬을 점령하고 이어서 소도에도 상륙하여 점령하였다. 이후에도 계속하여 주변 도서를 모두 확보하였다.
(라) 서해도서(교동도, 백령도,석도) 확보작전
국군과 유엔군이 '51. 3울 하순에 반격을 전개하여 서부전선에서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 때 서해안의 여러 도서는 아직 공산군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곳에는 해군이 북한지역에서 구출한 청년의용군을로 편성된 유격대와 이를 통제하는 육. 해군의 기관이 활동하고 있었다.
서해안의 도서를 점령하기 위해 3월28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중대장 이동호 중위)가 LST-801함 편으로 진해를 출항하여, 제41중대는 4월 2일 강화도 서쪽 교동에 상륙하게 된다. 중대는 다시 4월 23일 백령도에 상륙하여 피난민 청년 약 300명을 훈련시켜 이 섬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고, 5월 7일에는 북상하여 대동강 입구에 위치한 석도에 상륙하였다.
그 이후 황해도 연안 일대에 대한 해군의 작전이 계속되었다. 백령도 주둔 부대로부터 파견된 각 유격대가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공산군 사살 약 1,000명, 생포 111명, 기타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5명 부상자 150명이었다.
이렇듯 해군은 시기적절하게 도서지역에 상륙함으로써 공산군의 기뢰부설을 방해하였고, 조직된 유격대 도는 청년방위대원을 활용하여 적진에 침투시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동향을 파악하여 항공 폭격을 유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적의 집중을 분산시키고 전투력을 전방에서 해안으로 끌어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 동. 서해안 소해작전
1)소해작전 이전 상황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아군이 부득이하게 38도선을 넘어 한강이남으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되자 해군의 기뢰전에도 새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북한의 전 해안을 다시 차지하게 된 공산군은 반드시 주요항만과 해안에 기뢰를 부설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낙동강 전선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에 인천상륙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압록강--두만강변가지 밀렸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해안포대의 증강 배치보다는 많은 기뢰를 부설할 것으로 판단되엇다.
지난 인천, 지남포, 원산 등지에서 부설된 계류기뢰와 동. 서해역의 도처에 표류하는 기뢰로 함정 운용에 커다란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공산군의 이러한 대응조치에 맞서기 위해 우리 해군도 여러모로 발전이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첫째는, 소해작전을 전담하기 의하여 한국 해군에 제1소해정대가 창설되었다. 이전에도 우리 해군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소해정과 일본으로부터 접수한 소해정이 있었으나 주로 연안경비에 전력하고 있엇다.
둘째는, 장비와 기술면에서 질적 향상을 들 수 있다. 당시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그러나 소해정대가 창설되면서 우리는 10월 26일, 필요 인원들이 일본의 사세보항에 파견되어 미 해군으로부터 소해장비의 보강과 승조원의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다음 해인 '51. 1. 6일에 2차, 4월 25일에 3차로 사세보에 파견하여 장비개선과 기술연마를 받았다.
2)소해활동 개요
소해작전의 최초는 '51.1.3일 소해정대는 창설된 이래 처음으로 양양으로 출항하여 29일간의 소해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해안지역에서 피난민의 후송과 육군의 군수 물자 수송에도 협력하였으며 29일간의 임무를 마치고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에도 '51. 2월부터 인천항 점령이나 원산 앞바다 여도 상륙작전 등에 선행하여 기뢰제거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4월 16일가지 기뢰 46개를 식별하여 폭발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2 절 공군작전
1. 개 요
가. 전선개항
1950. 12. 3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과 북한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로 인해 유엔군은 서울과 인근의 수원, 김포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51. 1. 3일 대규모의 중공군이 서울 동부와 서부의 결빙된 한강을 건너자 미 제8군은 서울 철수를 시작했고,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했다.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한 국군과 유엔군은 1월 25일에 썬더볼트을 2월 9일까지 진행되어 수원-원주-삼척 선으로 진출하여 인천항과 수원비행장을 재탈환하게 된다.
2월 5일, 유엔군은 "라운드 업 작전"을 개시하여 미 제10군단이 중부지역의 원주 북서족 횡성으로 근접항공지원과 함께 진격하였다. 유넨군은 2월 10일 인천항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였으며 동해안의 38도선을 돌파하여 양양을 점령하였다.
2월 11~12일에 서울 동부 50마일상 중부전선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이 횡성 북부와 북서부에 위치한 국군 제3,5,8사단을 공격하여 이틀만에 횡성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2월 13~16일간에 중공군 3개 사단이 미 제23연대전투단과 프랑스 대대를 지평리에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미 제8군은 2월 21일 대규모의 공산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킬러 작전"을 개시하여, 2월 28일 한강 이남에서 공산군을 격멸하였다. 3월 7일 유엔군은 서울 동부 한강을 건너 공산군을 격멸하고 "리퍼작전"을 개시하였다.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3월 23일 처음으로 맥아더 유엔군 사룡관이 정전회담을 제의하였고, 3월 31일 미 제8군의 일부 제대가 38도선을 확보하였다.
유엔 지상군은 4월 1주~3주 동안 중부전선 화천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와이오밍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4월 11일 미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전격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제8군 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중장이 부임하였다.
4월 22일, 중공군과 북한군이 춘계 공세를 중서부지역(사창리)에 집중하여 서울 외곾 골든선까지 진출하고 중동부와 동부는 노네임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다시 공산군은 5월 16일 총공세를 국군 제3군단지역인 현리지역에 집중하여 국군 제3군단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신장된 보급로를 공중공격으로 무력화시켜 결국 중공군은 38도선 북으로 후퇴하게 되며 여기서 유엔군은 춘천북방(화천저수지)일대에서 중공군 1개군(군단규모)을 괴멸시켜버리고 와이오밍선,철의 삼각지까지 확보하여 결국 소련 유엔대사 말리크로부터 휴전제의를 끌어내고 7월 10일에 개성근처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나. 북한 및 소련공군 작전
1950. 12월 31일부터 '51. 7.9일까지의 북한과 소련 공군전력은 더욱 확대되고 증강되었다.
먼저 '50. 11. 1일 북한은 혼성비행단을 배치해 유엔지상군에 대한 소규모 공습과 대지공격을 실시했다. 이 외에도 중국 훈춘에 LA-9 30대로 구성된 추격기 연대를 보유하고, 신의주에 PO-2기로 구성된 독립비행대대를 두어 야간 폭격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군은 중국 둥팽에 Mig-15기 조종사 및 기술요원 양성을 위한 항공기술사단과 연길에 비행 기술항공학원을 설치하였고, 후방지원부대로 항공기술대대와 독립항공경비대를 편성하였다.
이로써 "50. 12. 25일부터 '541. 1. 24일까지 전선 서부에서 중요시설물을 방오하고 지상전투부대를 지원함은 물론 유엔공군과 공중전을 치렀다. 특히 평양-남포 이북 상공과 남포-신의주를 잇는 해안선에 대한 방공활동에 치중하였다.
'51.1.25~4. 21일 기간은 추격기들을 4~8대로 편대를 구성, 전투초계 비행을 통해 유엔 공격기들에 방공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습격기와 야간 폭격기는 아 지상군의 방어전선 종심에 있는 주요시설에 대한 공격과 정찰활동을 하면서 서울,인천,평택,수원,천안,이천 등지에 전단살포임무도 수행하였고 '51. 6월 이후는 야간에 주로 수원, 김포 등의 아군 비행장과 아군 집결지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대공방어에 노력하여 '50. 11월 말 2개 대공포 연대만을 보유했던 북한은 '51. 4월에는 추가적으로 3개 독립 대공포연대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북한군은 각 보병사단 지원을 위한 고사포대대로부터, 군단 지원을 위한 독립 대공포연대가 창설되었다.
소련공군 제64전투비행군단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엔공군의 공습과 공중정찰로부터 중국 동북부지역의 중요 목표에 대한 엄호임무에 치중하면서 중국 및 북한군 조종사 양성에 주력하였다.
소련은 조중지원군에 공중엄호와 근접항공지원을 시향해 달라는 중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그회랑내에서만 작전임무를 수행하여 중국과 갈등이 노출된다.
다. 유엔 및 한국공군 작전
1950. 12. 31일부터 '51. 7. 9일까지의 유엔공군 작전형태는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고 1, 2차 공세를 펼치던 '50. 11월 및 12월과 유사한 작전환경과 조건하에서 이루어졌다. 즉 밀려오는 중공군을 지연시키기 위한 아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그들의 병력과 보급물자를 차단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극동유엔군 공군 사령부는 제5공군사령부(한국 공군 비행단), 제315전투공수비행단, 폭격사령부로 편제되어 있었다. 한반도 상공에서의 제공권은 유엔공군이 지속 유지하였다. 다만 '51.1월 말부터 서울을 수복한 3월 중순까지 유엔공군은 미그회랑지역에서 일시젃 소련공군에게 제공권을 상실한 적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지상전 상황 악화로 인해 제트전투기들이 전면적으로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서 미그회랑지역에서 체공가능시간이 최대 20분을 넘지 못하게 되자 발생한 일시적인 문제였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공군은 전체 비행의 35%를 중공군의 병력, 물자, 수송 맟 통신선과 비행장 파괴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공군이 '51. 1~4월 어간에 연인원 약 200만명과 시멘트 3만톤, 철제 포장제 3만 6천톤, 기타 장비를 투입하여 북한 내 비행장 복구 및 건설공사를 포기하게 하여 중공군의 전략적 효과를 지연시키고 파괴하는데 두었다.
다음 임무로는 근접항공지원작전(CAS)으로 이 시기에 실시된 근접항공지원은 전체 비행 주에 14%로 이전 시기의 20%보다는 낮은 비율이지만 레이더 이동 유도반을 운용하고 폭발시 15,000개의 파편이 비산하는 인마살살용 근접신관폭탄을 사용하고 야간에도 타격정밀성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전투임무외에도 유엔공군은 공수임무를 전체 비행의 30%수준으로 높았다. 이는 특히 미 제10군단의 중동부 작전같은 경우에 탄약, 유류, 식량 등 보급품의 공중 투하와 공수연대전투단의 보급지원, 그리고 전방지역에서 부상병의 후송, 통신 중계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공군비행단은 '50. 12월 말 제주기지(K-40)로 이동하여 '51. 6월 말까지 조종사 양성 교육에 전념하였고, '51. 3. 15일 서울 수복시에는 제주기지에서 F-51 전투기로 여의도 기지로 파견하여 5월 말까지 중부전선에서 공산군 증원차단을 위한 후방차단작전을 수행하였다.
한편 정찰비행전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육군 3개 군단 파견대를두고 군단과 전선을 이동하면서 군단 작전지역에 대한 정찰, 포병관측, 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 한국공군 단독작전의 전력 확충이 요구됨에 따라 사천기지(K-4)로 작전부대 통합과 전개 계획이 확정되어 공군비행단은 1950. 5. 31일부로 여의도기지 작전을 전격 중지하고 6월 하순 사천기지로 전개하였다. 또한 군단 파견대의 임무를 육군 항공대에 이관하였다.
2. 북한 및 소련공군 활동
가. 북한공군
개전초기에 북한군은 약 2,800여 명의 병력과 Yak-9, IL-10 등 총 226대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김포, 여의도, 수원, 등의 아군의 전방소재 비행장과 서울, 인천,부평,영등포, 수색 등 주요 철도역과 주변 군수공장 및 군용창고, 막사 등에 활발한 공격을 감행했던 북한공군은 '50. 6. 27일 전격적인 미 공군의 참전과 더불어 궤멸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50. 11월 1일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안동기지에서 소련의 지도아래 혼성비행사단을 창설하고 Yak-9기 24대로 추격기 연대를, P0-2기 6대와 조종사 10명, IL-10기는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10명으로구성하였다. 이 혼성비행사단은 111월 중에 신의주로 전개하였다.
'51. 4월에 이르러 혼성비행사단에 이어 추격기 사단, 항공기술사단, 비행기술항공학원, 독립비행대대 등이 추가로 편성되면서 유엔공군기에 대응하여 공중전을 수행하고 지상표적에대한 공격과 독립비행대대는 주로 야간 중고도 폭격임무도 담당하게 되었다. 북한군 조종사에 대한 Mig-15기 전환교육은 '50. 12월 25일 동펭에 전개한 소련 제324전투비행사단에 부여되어 되었지만 북한군에 비행기가 보급되지는 안했다. 이 밖에도 소련 연해주에서 '51.4~6월까지 LA-9 조종사 100명이 교육받았다.
주요할동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51. 1. 16일 평양상공에서 북한 추격기가 유엔공군의 B-26폭격기를 요격하였고, 1월 22일에도 유엔 공군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두번째는, 중공군 4차전역기간('51.1.25~4.21) 중에는 서부전선의 시설방호와 방공임무에 주력하였는데 추격기들은 4~8대로 전투초계비행을 실시하여 유엔 공군기들에 방공임무를 수행하였고 습격기와 야간 폭격기는 서울, 인천,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이천지역에 대한 정찰과 선전물 살포임무를 수행하였다.
북한공군 활동 주에 유엔공군을 괴롭힌 것은 6월중순에 시작하여 7월 12일까지 이어진 PO-2기활동이다. '51. 6. 14일 03:00시경 미 제606항공통제 및 경보중대 레이더에 포착된 비행물체가 수원비행장과 서울 서남부 10마일 지점인 독산리 미 제8군 주차 차에 각각 40파운드와 200파운드 폭탄 4발을 투하한 후에 북으로 도주하였다.
이 후에 북한공군은 수원, 김포비행장 등에 저공으로 침투하여 포탄을 투하하였으며 이중에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6월 17일 새벽에 수원비행장에 01:40분경 PO-2기 1대가 폭탄 4발을 활주로에 투하하여 미 제335전투비행대대 주기장에 있던 F-86기 1대가 완파되고 8대에 손상주어 이중 4대는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저고도 야간에 저고도 침투가 이루어졌다. 6월 23일에는 제8폭격대대 소속 B-26폭격기가 00시15분 PO-2에 대한 추격을 실시하여 격추시키는 등의 적극적 활동에 주춤해졌다.
이등 PO-2기는 자정 전후 시간대에 1~2개 편대를 지어 아군 비행장과 지상군 병력 숙영지 및 시설들을 공격했지만 6월이후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아군에게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어 미군 병사들에게 "취침점호관"으로 불리엇다.
이 PO-2기는 소련제로 지금의 AN-2기로 고려하면 되는 기종이다. 항속거리는 268(NM), 운항속도는 80(mph), 기장은 8.2m, vhrdms 11.4m,높이는 3.1m로 2인승으로 판단되었다.
나.북한의 대공방어력 증강
북한은최초 속전속결의 남침전략에 따라 북한지역에 대공방어는 애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따라서 개전초 그들의 대공 전력은 37mm 대공포 24문, 85mm 중구경 대공포 12문을보유한 대공포연대 2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 바로 유엔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전선에 관계없이 북한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날인 29일에 미 공군 B-29 중폭격기 21대가 평양 비행장에 약 200여발을 투하하였고, 7월 3일에는 F-80및 F-81 전폭기 76대가 평양시내 공항과 철교를 공격하였으며, 7월 5일에는 B-29기가 평양시내를 폭격하는 등 김일성의 지상전 승리 선전과는 달리 공중에서는 완전한 패배를 체험하고 있었다.
이에 북한군은 대공포부대를 증가시키는데 '50. 11월가지 1개 대공포연대와 독립대공포 대대 10개, 대공기관총 중대(12.mm 대공기관총보유) 2개를 신설하엿다. '51. 4월에는 3개 독립포병연대가 추가 신설되어, 연대는 편제상 군관 170여 명을 포함하여 1,440여 명의 병ㄹ력에 12.7mm 대공기관총 36~41문, 37mm 소구경 대공포 24문을 보유하였다.
또한 북한군은 각 보병사단에 고사포대대로부터 군단지원을 대공포연대가 창설됨으로서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어느정도 대공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북한군은 숫적인 열세 극복을 위해 경량화와 기동성을 갖춘 이동포대로 운용할 것을 지시하고, '50.12월 중순부터 하순까지는 1개 소구경대공포 이동대대가 평양-강계 간 도로에서 항공기의 상시 비행경로를 따라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이를 인지 못한 유엔 항공기들이 피해를 입었다. 유엔 항공기에 위협적인 무기는 37mm 대공포였으며 피해 항공기의 70%가 피해를 입었고 12.7mm 고사기관총의 피해는 2%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대공방어력을 극복하기 위해 북한군은 '51 1월 이후에 "연대별로 2~3개의 비행기 사냥꾼 조"가 구성되어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포함한 보병 소화기로 항공기에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지상 군단 모든 부대와 동 . 서해 연안을 방어하는 전 부대에서 대규모로 운용되었다. 이들 비행기 사냥꾼 조는 아군 항공기를 유인하기 위하여 배치지역을 은폐하고 모의차량과 대포들을 설치 하는 등의 기만활동을 하였으며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바로 유엔공군 조종사들에게 지상 대공화기의 위협이라는 작전 장애요소가 발생하였고 북한군은 무방비상태에서 미미하나마 대응수단을 일부 보유하게 되었다.
다. 소련동군
소련 자료들은 6.25전쟁기간 소련 공군은 3단계로 나누어, 1단계 기간은 '50. 11월부터 '51. 3월가지로 이시기에 소련 공군은 압록강 상공에서 유엔공군에 대해 제한적인 소극적 방어제공작전으로 Mig-15기의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F-80, F-84, F-86기 전투기에 대항하여 제트기 실전 경험을 늘리며 공중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제64전투비행군단에 배속되어 실전에 투입된 부대는 제28,50,151비행사단이다.
2단계는 이전에 참전했던 부대를 대체하여 '51. 4월에 제324전투비행사단, 5월에 303전투비행사단이 교체 투입되어 '52년 초까지 이어졌다. 이들 2개 비행사단은 거의 모든 조종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실전경험이 풍부, Mig-15기 비행시간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일시적이나마 유엔공군을 압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3단계는 '52년 초에 시작되어 전쟁 종료시까지로 이 기간 중 소련은 13개 비행연대를 전쟁에 참전시켰으나 2단계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을 대체하여 투입된 조종사들이 경험이 부족하여 Mig기의 대량 손실이 발생하고 유엔공군의 피해는 미미한 상황이었다.
스탈린은 최초 제64비행군단 소속 2개 비행사단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소련의 개입을 확대하려 했으나 안주와 평양 사이의 공산군 비행장 건설에 대한 유엔공군의 지속적인 공중 공격이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고, 중국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압록강상의 철교와 수력발전 설비의 안전에 우려를 표명하고 그 지역의 방공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 과업은 각기 30대의 Mig-15기를 보유한 3개 비행연대로 편성된 제303전투비행사단에 부여되었다.
라. 소련공군 활동
'50. 12. 31일 조. 중 연합군은 제3차 공세를 개시하여 지상군이 대단한 기세로 38도선을 넘었다. 이에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서울로부터 전격적인 후퇴를 고려하여, 새해가 시작된 '51.1.2일날 제4전투비행단 소속 세이버전투기는 김포기지로부터 일본 존슨기지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제51비행단의 F-80기는 서울이 점령되기 몇 시간전에 일본 쯔이끼 기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유엔군 후퇴과정에 가장 놀라운 것은 공산군측 공군이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Mig기의 작전이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이다. 제64전투비행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중국 동북지역 주요지역에 대한 유엔공군으로부터 방어, 북한지역에 진입한 중공군의 주요 후방시설물 방호와 부가적으로 중국 및 북한군의 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중공은 게속적인 근접지원을 요망했지만 스탈린과 공군 지휘부는 참전 초 구상대로 미국과의 직접적인 접전회피 전략을 지속하였다.
'51. 1월 초순이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고 1월 19일~31일까지 유엔공군의 미그회랑 지역 내의 철교, 보급품 야적장에 대한 격렬한 공격이 재개돠자, 같은 시기 소련 제50전투비행사단 전투기들이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ㅣ
1월 21일, 소련 조종사들은 안주와 순천 상공에 나타나 미군기와 격돌하게 되었다. 1월 23일, 미군기가 신의주 비행장을 공격할 때에 소련 제29요격전투연대 소속 Mig-15기 14대와 중공 전투비행연대 소속 Mig기가 비상 이륙했고 소련은 미군기 F-84기 8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Mig기가 7대 격추되고 4대가 손상을 입었고 미군기는 손실이 없었다.
'51. 1월 말에서 2월동안 유엔 공군은 지상전투상황이 불리해 제트기들이 일본으로 철수하는 관계로 공산군 미그기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이 기간에 소련 제50전투비행사단은 유엔공군기 61대를 격추하고 소속 전투기 7대만을 손실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고 2달간의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쳤다.
낮은 수준의 유엔공군 활동과 겨울 기간의 북한 북서부 지역의 불량한 기상으로 인해 3월 1일까지 대규모 공중전은 없었다.
'51. 4월 2일, 제324전투비행사단이 임무교대 투입되어 4월 3일 첫 유엔공군과의 교전에서 Mig기들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당시 소련지도자들의 근심은 장거리 핵 폭격기의 위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에 독일의 대공습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어 이것이 소련으로 하여금 방공체제 구축에 거액의 비용을 소모하게 하였다. 6.25전쟁에서 소련 공군부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B-29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전쟁기간 B-29기는 계속하여 Mig기를 격추하였고 북한 주요표적에 공습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4월 12일에는 상황이 달라졋다. 이날 소련 조종사들은 Mig-15기 36대로 압록강을 따라 표적을 향해 비행하고 있는 B-29기를 상방과 하방에서 자동 기관포로 퍼부어 많은 수의 유엔기가 추락하였다.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50. 11~'51.9.15일까지 유엔공군기 300대를 격추했고 본인들은 25대만 손실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유엔 및 한국공군 작전
가. 유엔공군 작전
1950. 10월 말에 중공군의 참전 이후 두 차례의 공세를 통해 북한지역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고 작전의 주도권ㅇ늘 장악햇다고 판단한 중국 지도부는 전과확대를 위해 제3차 공세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병력손실과 진지전으로 벼화된 전장상황의 극복을 위해 휴식과 부대 재편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엿다.
그러나 모택동 등 중국의 지도자들이 유엔 참전국들이 이익이 상충하여 충동ㄹ하고 있는 지금 혼란이 있을 때에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섬멸하여 국군 과 유엔군을 고립시키고 이어서 미군의 여러개 사단을 섬멸하면 한반도 문제가 쉽게 해결 될 것이라 판단하고 1950. 12. 19일 공격개시 명령을 내리게 된다.
한편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1950. 12. 26일 취임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부산으로 철수를 주장하던 워커 장군과는 달리 38도선에서 부산까지의 공갖지역에 방어에 유리한 6개의 방어선을 설정하고 지연전을펼쳐 적의 출혈을 강요한 후 공세 이전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100만명의 중공군이 들어왔다고 발표한 가운데 리지웨이가 부임하여 미 제8군 사령부 지휘소 상황판에 확인한 중공군 위치는 "커다란 붉은 점"하나로 표시되어 적군의 이동에 관한 정보가 한심한 정도였다.
1950. 12. 20일 스트레이트메이어 극동공군 사령관은 이러한 상황에 제5공군 사령관인 패트리지 장군에게 가용한 자산을 총동원하여 중공군의 위치를 파악할 것을 지시하여, 10일만에 분석한 내용은 별거 없었다. 12월 말이 되어서야 촬영된 사진들을 분석한 결과 중공군은 28만여 명 수준이고 북한군은 4만여 명 수준이었다.
극동공군사령부는 당시 중국군 전투기가 400~500대 수준으로 공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만약 중국 공군이 전면적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장비 및 인력을 공수하는데 심각한 우려가 발생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러한 우려속에 공군과 해군 수뇌부는 연속회의를 통해,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은 제77항모전단 조종사들이 통상 임무인 현 전선의 동단에 대한 항공지원 수행은 물론 긴급 상황시 함재기들이 서울 지역에서의 근접항공지원임무를 수행할 것과 만약 공군 통제관으로부터 할당된 표적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에는 전선 이북으로 나가 무장정찰 활동을 실시할 것을 통보하였다.
극동공군사령부는 B-29 중폭격기 운용에 관해서 미 제8군이나 제5공군살령관의 요청에의한 평양 공습과 같은 사례를 제외하고는 폭격사령부 예하 전력의 1/3 또는 1/4을 철로차단작전에 사용하고 잔여전력은 전선 근처의 병력과 보급품이 집중된 도시에 대한 공격에 운용할 것을 구상하였다.
작전형태별 비행운영은 '51.1~6월까지 근접항공지원작전 18,530소티(14.2%), 무장 정찰 및 항공차단작전 45,259소티(34.7%), 제공(요격)작전 7,494소티(5.7%), 수송작전 33,993소티(30.6%)로써 기간중 주목할 만한 것은 '51. 3월부터 제공작전이 이전 월 500~700소티 규모에서 월 1,500소티 이상으로 늘어난 점인데 이는 소련공군의 적극적인 요격시도 증가와 맞물려 늘어난 것이다. 또 하나는 무장정찰 및 항공차단 작전의 월단위 지속적인 7,000~8,000소티 유지와, 근접항공 지원이 3월까지는 2,000~ 5,000소티 였으나 4월부터는 2,000~3,000소티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는 전선이 혼전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전력증강과 병참 및 통신선을 차단하고 북한내의 비행장 복구와 건설을 포기시키는 후방차단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 이후 '51. 6월 말까지 극동공군(유엔공군)이 거둔 전과로 병력 살상은 약 156,500여 명, 항공기 약 300대 파괴, 차량 19,000대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주목할 만한 성과 이면에는 유엔공군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항공기 총 손실은 기간('50. 6.27~'51.6.30) 중 702대이며 이중 공산군에 의한 손실은 245대로 약 35% 비율을 차지하였다.
(1) 제공(요격)작전
소련 공군이 참전을 개시한 '50. 11월 이후 소위 "미그 회랑"이라고 불리는 북한 서북부 상공은 피.아 공군간의 공중우세 확보를 위한 격렬한 전투공간이 되었다. '50. 12월 30일 이후의 소강상태가 개진 것은 '51.1.20일로 군우리 상공에서 F-84기 한 대가 Mig-15기 5대의 공격을 받아 날개에 손상을 입고 귀환하면서부터다.
이어서 1월 21일, 소련 공군 과 중공공군 소속 미그-15기 12대가 신의주 상공에, 또 16대가 청천강상의 교량을 폭격하고 있는 유엔공군 F-84기를 공격해 왔다.
1월 23일에는 평양폭격과 신의주비행장을 동시에 폭격하는데, 제49전투비행단 소속 F-80 46대가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 21대를 엄호하고, 신의주 공격은 제27전투비행단 소속 F-84기 33대가 동시에 공격하기로 하고 새벽시간대 대구에서 이륙하여 신의주 상공에 나타나 기습이 시작되자 압록강 건너 안동기지에서 미그-15기 30대가 이륙하여 공중전이 벌어져 미그기 7대가 격추되고 4대를 파손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동시에 평양 폭격은 먼저 F-80기가 대공포진지를 기총, 폭탄, 로켓으로 무력화하자 이어 도착한 B-29기가 평양 비행장에 집중 투하하였다.
이러한 공중전 우세 중에 지상작전에서 계속적인 후퇴로 제5전술공군이 일본으로 철수함에 따라 한국 내에는 전투기는 없고 프롭 전투기인 F-51만이 진해와 대전 기지에 잔류하게 되었다. 이후 미그회랑지역에서의 공중전 상황은 회피하게 되었다.
다시 지상전의 상황이 호전되면서 제5공군은 한국으로의 제트전투기 배치를 서둘러 2월 22일 대구로 전개하고 중간 기지로 활주로 피폭이 심한 수원 비행장을 사용하면서 미그화랑에서의 공중전 열세를 극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대량 유입되늕 물지와 병력을 차단하기 위한 출격을 3월 1일부로 재개하였다.
3월 1일, B-29기 18대가 F-80기 22대의 엄호하에 정주부근 교량을 폭파하기 위해 이룩하였으나 B-29기가 늦게 도착하여 F-80기의 연료부족으로 일찍 귀환해 버렸다. 이로인해 B-29기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다 미그-15시 6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2대가 피해를 입고 귀환하였고 미그-15기 1대를 격추시켰다. 이에 앞서서 F-80기 4대와 Mig-15기 12대가 선천부근 상공에서 조우하여 미그기 3대가 손상을 입었다.
이러한 작전의 결과로 3월 6일 수원기지를 중간기지로 압록강상에 대기 하면서 초계활동을 시작했다.
3월에 들어 소련 공군의 요격활동은 주로 성능이 덜어지는 F-80기종에 집중되어 3월 12일에는 남시, 17일에는 선천 상공에서 교전으로 미그기만 추락하였다. 3월 23일에는 F-86 45대가 압록강 상공에서 Mig기들과 교전하는동안 B-29기 22대가 고군영과 정주지역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미그회랑으로 진압했지만 소련 공군의 저항은 없었다.
3월 말이 되어 해빙에 따른 대량의 병력과 물자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청성진, 만포진, 남산리 철교를 폭격하였다.
4월 공중전 양상은 이전보다 소련군의 전투의지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4월 3일과 4일에 공중전이 벌어져 F-86에 의해 4대의 Mig기가 격추되었다. 4월 7일에는 F-84기 48대의 엄호하에 B-29기가의주의 국도교량과 신의주 철교를 폭격하는 가운데 Mig-15기 30대가 공격을 해왔으나 B-29기 한대만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되면서 소련공군의 공격형태가 과감해 졌다. 신의주 철교를 폭격하는 B-29 39대에 F-84, 86기가 엄호임무를 수행하는데 Mig-15기 40~50대가 공격을 가해오는 등의 적극적 공세로 유엔공군의 피해가 늘어나 극동공군사령관은 폭격기를 보호할 수 있는 조치가 강구될 때까지는 F-86만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4월 16일 극동공군의 영상 판독관들이 북한지역 내 비행장 복구 및 건설공사가 완료단계에 있어 이들 비행장공격 싯점이 되엇다는 보고에 그동공군사령관은 폭격사령부에 전 역량을 투입하여 4월 17일부터 북한 내 비행장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임무수행의 전제조건이 "미그회랑지역"에서의 F-86기에 의한 제공권 확보가 우선이라는 것을 일고 있었던 제5공군은 F-86기의 초계비행의 수적 증가가 절실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4월 22일ㅇ부터 제4요격비행단은 F-86기 4기 2개 편대에서 6기 2개 편대로 증강하여 초계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 초게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F-86편대를 안동에서 출격한 Mig-15기 36대가 공격을 가해왓다가 공중전에서 4대가 격추되고 4대가 심한 손상을 입고 공중전이 종료되면서 소련공군이 일시적으로 소극적 전술행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미군 조종사들은 북한지역 비행장 폭격임무를 "오리사냥'만큼이나 쉽다고 했다.
소련의 소극적인 태도는 5월 9일 신의주 비행장 폭격시에도 나타났는데,신의주 기지 페쇄를 목표로 제5공군 및 제4전투요격비행단에서 총 312대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게 되고, 제4요격비행단의 F-86기를 대신하여 제27비행단의 F-84기와 미 제1해병비행단의 F-9F 전투기가 엄호를 담당했다.
이에 대응하여 안동에서 Mig-15기 약 50대가 이륙하여 18대만 압록강을 건너와 접근했으나 적극적인 전투행위는 없이 지나쳤으며 이날 폭격으로 신의주 비행장에 있던 항공기 대부분이 파괴되고 건물 106동, 대규모 유류 저장고 1개소, 보급창고 및 탄약고 29개소가 폭파되고 상당수 병력이 사살되었다.
5월 20일에는 유엔공군 F-86기 36대와 Mig-1기 50대가 맞붙은 공중전이 미그회랑에서 벌어져 소련 비행기 10여 대가 손실되었다. 5월 20일 이후 중지되었던 소련공군의 활동은 5월 31일 시작되었으며 6월 1일 신안주 서남방 철교를 폭파하고 있던 제98폭격전대 소속 B-29기 4대를, 호위하고 있던 F-86기가 기지로 귀환한 틈을 이용하여 Mig-15기 25대가 B-209기를 공격하여 1대를 격추했으나 소련비행기도 1대가 격추되고 구조요청으로 긴급출동한 F-86기에 의해 2대가 추가 격추되었다.
6월 17일 F-86기가 미그회랑 초계비행중에 Mig-15기 36대와 5차례 공중전으로 7대에 손상을 입혔고, 6월 18일에는 약 40대 이상의 Migh-15기와 F-86기 32대가 교전하여 미그기 4대가 격추되고 미군기도 1대 격추되었다.
6월 이후 소련공군의 활동이 넓어져 평양-진남포 이님가지 확장하였다. 그러나 게속되는 비행장 복구 시설 폭격과 이에 대한 미그기의 도전이 게속되었지만 미 공군의 한수위 기량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공중우세는 여전히 유엔공군이 지배하였다.
(2) 근접항공지원작전
'51년도 1~6월까지의 근접항공지원은 총 18,530소티 중에, 3월에 가장 많은 5,405소티 였으며, 나머지 달은 3,000소티 미만이었다. 이는 월평균 3,088소티로 아군의 방어기('50.6~9월)의 월 평균 약 5,600소티, 북진기('50,10~12월)의 3,440소티와 비교시 낮은 수준이다. 이는 낮은 기간은 그만큼 지상에서의 접전의 정도가 긴박성이 감소되었다고 볼 수 있어 유엔공군의 대응이 적절했다고 판단 되었다.
워커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51.1.20일 "지상군의 안전을 위해 지역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공산군을 찾아서 격멸해야 한다"는 새로운 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공군과 지상군의 보다 긴밀한 협조와 치밀하게 계산된 전술행동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51. 1월 초에미 제8군과 제5공군은 이러한 공 . 지 합동작전 목표 달성을 위해 대구에 함동작전본부(JOC)를 이동 설치하고, 육군 장교가 전술항공지원을 요청하면 공군장교가 항공기의 출격을 지시하는 작전윤용기구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제5공군의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51. 1. 25일 미 제1, 9군단이 한강 이남지역에서 위력적인 수색정찰 작전인 선더볼트 작전을 개시하자 제5공군은 이들 2개 군단에 근접항공지원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전술항공통제대대 소속 모스키토(T-6) 전술항공통제기를 대전기지로 전진배치하였고 이로서 합동작전본부 및 제5공군 전술항공통제본부(TACC)와의 통신망 연결을 위해 전선과 대구기지 간에 1월 26일부터 고주파(VHF) 20개 체널을 중계할 수 있는 C-47 공중중계기를 체공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모스키토 항공통제기는 전선 20마일 후방에 체공하면서 이동하거나 은거 중인 공산군을 발견하면 SCR-300 무전기로 지상군 부대 및 전투비행부대와 연락하여 전폭기를 표적지역으로 유도하고 전술항공토제반(TACP), 전술항공통제소에 통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2월 3일 래빈대위가 조종하는 모스키토기는 미 제25사단 진로상의 대규모 공산군을 발견하고 약 2시간 동안 체공하며 10개 전폭기 편대를 안양, 인천, 영등포 지역으로, 2월 6일에는 윌킨스대위가 양평 인근에서 대규모 병력을 식별하여 전폭기 편대를 병력집결지점으로 유도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약 3,000여 명 이상이 살상되었다.
2월 10일 이후에는 미 제10군단 지역으로 항공전력이 집중되어, 12일에는 횡성지역에서 중공군이 국군을 공격하자 에딘버그중위가 조종하는모스키토기가 공산군 400여 며을 발견하여 5개 편대로 네이팜탄과 로켓공격을 유도하고, 이날 오후에는 윌킨스대위가 조종하는모스키토기가 공산군에 포위된 국군 1개 대대를 발견하고 3개 편대를 유도하여 포위망을 벗어나게 하였다.
2월 13일부터 16일까지는 지평리 전투에서 모스키토기는 매일 10회 이상 출격하여 미 제23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를 포위한 공산군을 격멸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3월은 유엔군이 다시 38도선으로 진격하는 상황에서 한강도하를 지원하고, 3월 16일에는 홍천에서 북상하는 공산군 병력 1,200명을 발견하여 모스키토 2대가 저투기 6개 편대를 유도하여 600여 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 부상을 입혔다.
38선으로 후퇴하여 증편을 마친 중공군이 4월 공세를 감행하자 야간 공습으로 지상군을 지원했지만 중공군의 위력에 국군 제6사단이 와해되는 등 골든선과 노네임선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벤플리트 장군은 미 제9군단의 근접지원은 미 해군 제77기동함대 항모 탑재기가 전 전력을 동원한 근접항공지원으로 서울-간성간 도로 확보를 위해 반격에 났고, 미 제1군단은 극동공군 포격기와 전폭기를 동원하여 서울 북방 3마일까지 유엔군이 안전하게 후퇴할 때까지 엄호토록 하였다.
특히 중공군 6,000여 명이 한강도하를 시도하는 것을 발견하여 기총소사로 많은 피해를 주었고 일부 도강한 인원은 쉽게 제압되었다.
이 시기에 특이한 점은 지상에 위치하여 폭격기를 표적에 근접 유도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한 MPQ-2레이다 파견대의 활약이다. 이 레이더 유도반은 미 제1,9,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이동반을 구성하여 차량에 레이더를 탑재하고 임무 군단의 이동에 다라 전선 가가운 곳에 주둔하면서 야간 폭격기 유도 임무를 수행했는데 표적 425개소에 450회의 폭격기 유도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B-29기의 경우 500파운드 근접신관폭탄 40발을 투하하는데 1발 폭발시 직경 150피트 넓이와 15,000개의 철제 파편이 비산되어 인명살상에 대단한 효과를 가져왔다.
중공군의 제5차 2단계 공세(5월 공세)가 동부전선의한국군 2~3개 사단과 미 제2,7사단 일부를 섬멸하여 차후 작전의 유리한 기반을 조성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제3군단(3, 9사단)이 와해되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제5, 7사단이 와해되는 대규모 공습이었다.
이때 유엔공군은 미 제10군단 관할 지역에 5월 17일부터 매 시간당 3~4회의 근접지원 공격을 실시 했으며, 5월 17일 하루 동안 미 제2사단 정면에서의 근접항공지원을 통해 최소한 중공군 약 5,000여 명을 사살하엿다. 또한 5월 18일ㄷ부터 미 해군 제77특별기동함대 항공모함 3척이 근접항공지원 준비가 완료되고 극동공군이 공산군의 공세저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가운데 유엔군 지상군의 견고한 방어와 포병화력이 더해져 중공군의 제5차 2단계 공세는 초기 일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것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미 제10군단장은 MPQ-2레이더 유도에 의한 B-29기의 근접지원을 선호하였으며, 5월 19일 공격준비중이던 중공군에 B-29기 8대가 근접신관폭탄 80톤을 투하하였고, 5월 20일에도 b-29기 15대가 미 제2사단 정면에 집결 중인 중공군에게 공격을 가해서 약 1개 댇대병력을 사살하였으며 5월 21일에도 B--29기 13대가 한계와 춘천지역에 집결중인 공산군에 각각 공격을 가해 많은 병력을 살상하였다.
이러한 유엔군의 대응으로 공산군의 예봉이 5월 20일 부터 꺽이기 시작하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의 공세전환 지시로 일본에 주둔한 제19, 307폭격전대 소속 B-29기 22대와 제3폭격전대 소속 B-29기 11대를 출격시켜 5월 22일과 23일 야간에 지상 MPQ-2 레이더 이동반의 지원을 받아 전 전선에 걸쳐 폭격을 가항여 중공군 2개 연대와 1개 대대 병력이 살상되는 전과를 올렸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5월 28일 미 제1군단이 의정부와 문산을 점령하였고,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이 화천저수지 남쪽의 공산군을 차단하기 위해 화천에 진입하였는데 고지에 대한 유엔 지상군의 포격이 이루어진 후 유엔 공군 전폭기 편대가 도착하여 폭격을 시작하려하자 공산군이 고지에서 백기를 들고 내려와 항복했다. 유엔지상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5월 말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이 11,526명이 유엔군에 투항하였다.
(3) 무장정찰 및 항공차단작전
중공군의 3차 공새가 둔화된 51. 1월 둘째 주부터 극동공군사령관은 제5공군과 폭격사령부에 공산군의 병참지원선을 차단할 것을 지시하엿다. 이 기간 동안에 실시된 무장정찰 및 후방차단 작전은 월 평균 7,543소티로 6.25전쟁 발발 이애 가장 높은 수준으로 수치상으로는 2.5배가 증가하였다.
이렇게 무장정찰 및 후방차다니 증가한 것은 전선의 이동이 빈번한 가운데 중공군의 고정표적보다는 이동표적공격이 증가한 결과다. 이점은 작전기간 동안 제5공군 전폭기들이 공산군의 보급수송차량 공격에 무장정찰 전력의 대부분이 할당되었다는 것이다.
기간내 무장정찰 및 후방차단 작전은 3가지 공격목표에 집중했는데, 그 첫재는 도로, 교량, 철도, 보급창, 철도조차장, 등수송로와 병참지원선에대한 차단이며, 두 번째는 보급품을 운반하는 수송차랴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통ㅎ란 차단이고, 세 번째는 북한 지역내 복구되거나 건설되고 있는 비행장에 대한 폭격을 통한 작전능력 차단이었다.
(가) 수송로 및 병참지원선 차단 작전
1951. 1월 둘째 주부터 시작된 극동공군의 항공차단작전계획은 북한전역을 11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모두 172개소의 파괴대상 목표물을 선정, 철교 45개소, 교량 12개소, 터널 13개소,철도조차장 39개소, 보급소 63개소가 망라되었다.
'51. 1. 19~31읽까지 제5공군과 폭격사령부는 6.25전쟁 기간중 가장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차단작전을고 13일동안 80개소 이상의 철로와 도로를 공격하여 파괴 하였다.
이러한유엔공군의 서북부 공격으로 공산군은 동부지역 해안에 인접한 철도와 도로망을 이용 보급품 수송을 계속했으며 병력의 이동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유엔공구는 2월 1일 이 지역에 대한 폭격을 제307폭격전대 B-29기가 발진하여 즈을온천-흥원-단천에 이르는 9개 철교의 교랴응ㄹ 폭격하여 경간을 파괴하였다.
2월 6일, 맥아더사령관은 북한 중부와 동북부지역에서 활동중인 공산군에 폭격을 명령하였고, 2월 7일 폭격사령부는 교량, 도로교차점, 터널입구를, 제5공군은 이동 혹은 정지 중인 철도 화차에 대한 공격을 분담하여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지상작전의 호전에 다라 2월 16일부터 근접항공지원작전에 투입되었던 해군 함재기들이 차단작전으로 전환됨에 따라 북서부 및 동부에 이르는 전 지역의 차단 목표에 대한 작전이 가능했다. 이에 달 해군은 3월 8일 동해안의 차단목표가 모두 파괴되엇다고 보고 하였다.
폭격사령부는 미 해군이 차단작전을 담당하고 있는 동부지역의 일부지역내에 교량 60개소, 조차장 39개소, 보급 및 수송분부 35개소에 대해 예하 제98폭격대대에서 1일 24회의 출격으로 차단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 고군영에서 Mig-15기의 공격으로 B-29기 10대가 피해를 입은 후에는 일시적 신의주 근방의 차단목표에 대한 B-29기의 공격을 중지시키고 그곳에 대한 공격은 F-86기가 MIG-15기에 대한 공중우세를 확보하면서 3월 26일부터 재개되어 신의주에서 만포진간의 철도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차단작전에 맞선 공산군은 대단한 복구능력을 과시하였는데, '51. 1월에 신안주에서 청천강을 건너는 3,500피트의 철교의 경우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철도의 경간 수개를 폭\파하였는데 공산군은 2월 4일 차량통행이 가능하게 보조 교량을 거설하였다. 다시 3월 1일 유엔공군이 보조교량 경간 몇 개를 폭파햇는데 3월 12일 보수를 진행하면서 또 다른 우회통로를 만들었다.
3월 하순이 되자 압록강이 해빙되어, 극동공군사령관은 3월 27일 폭격사령관에게 압로강상의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모든 교량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다라 3월 29~4월 12일까지 5차례 실시된 B-29기의 신의주, 청성진, 만포진 등의 교량을 파괴하였으나 신의주 철교는 파괴하지 못했다.
당시의 폭격에 가담한 B-29기가 8대가 손상을 입게되는데 이에 따라서 폭격사령부는 인가된 전력 99대(현제 75대 가용)를 충족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제5공군은 2월 이래 수송로와 병참지원선 차단을 위해 제452폭격비행단 소속 B-26 경폭격기들은 원산-평양선 이남의 경량급 철교에 대해 낙하산 부착 저고도폭발신관폭탄으로 공격하였고, 일부는 3월 중에 한반도를 종횡으로 관통하는 철도선상의 많은 터널을 500파운드 및 1,000파운드 지연신관폭탄을 사용하여 공격, 은익된 장비와 인원을 살상하였다.
5월 31일, 제5공군은 공산군의 교통선ㅇㄹ 차단하기 위해 제1해병사단비행단, 미 해군 77기동함대와 합동으로 이들 부대 작전구역에서 동시에 개시하였다.
그러나 6월 중순부터 휴전회담 준비등과 맞물려 공산군에 대한 압력을 감소시키면서 공산군이 파괴된 수송로를 복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게되어 작전 성과를 감소시키고 말았다.
(나) 수송수단(이동차량) 차단 작전
중공군과 북한군은 보급물자 수송수단은 철도화차와 트럭(소련제 GAZ-51)이외에도 전근대적이지만 우마차, 손수레, 노새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였다.
1950년 말 기준 북한지역으로 들어오는 보급물자를 포함하여 1일 총 2,000톤으로, 각 사단이 1일 필요한 량은 1일 유류 8톤, 식량 10톤, 탄약 30톤 등 총 50여 톤으로 추정하였다.
보급물자에 대한 공격임무는 제5공군에 부여되었고, 주간에는 전폭기를이용한 무장정찰임무를 통해서, 야간에는 주로 B-26기의 야간정찰 및 공습 임무를 확대함으로서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1월 중 공산군 수송차량에 대한 무장정찰 주 전력인 F-80기와 F-84기가 일본 이다즈케 기지에서 발잔함으로서 체공시간이 체30분 밖에 안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동 차량을 식별하기위해 적진에 침투시킨 t-6기가 적의 대공포화에 노출됨으로서 공격성과가 부진하였다. 이에 따라서 2월 둘째 주부터는 제5공군은 폭격선 이북 50마일 지역을 3개 지역으로 할당, 제18, 35비행단과 미 제1해병비행단이 각각 1개 구역을 맞고, 이들 비행단은 F-51, F-4U(코세이어)전투기로 담당구역을 초계비행하고 표적이 식별되면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공군의 횡성지역 공격시 제5공군 F-51기들은 2월 13일 차량 236대를 완파하고 83대를 파손시켰다.
3월 초 제5공군은 연료소모율로 인해 초계비행에 제한을 받는 제트전투기를 지원하기 위해 제45전술정찰대대 소속 RF-51기를 차량 에상지별지역에 미리 출격시켜 10마일 반경의 지역을 선회하면서 차량표적을 발견하면 F-80기와 F-84기를 이 지역으로 유도하여 차랴을 공격하는 "서클-10"작전을 시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공산군이 2월 이후 유엔공군에 대한 대공포를 현저히 중강시키자 특히 F-51기들이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제5공군은 4월 15일부터 모든 작전에 RF-51기 2대를 발진시켜 1대가 지상에서 정찰을 하면 1대는 고공에서 공산군의 대공포진지를 감시하게 하고 F-51기 무장정찰 편대는 4기 편대로 구성하여 1개조가 300피트 저공에서 표적을 확인하면 다른 1개조는 3,000피트 상공에서 공산군의 대공진지를 제압하고 공산군 전투기 내습에 대비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3월 31이 중공군은 대구모 차량을 철원-김화-평강 지역에 집결시키고 있었고 이들은 연대별로 저고도 항공기에 효과적인 12.7MM 대공포로 무장한 방어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5월에는 그들의 고통스런 병참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수송망과 수송수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공화기를 증강시켜, 37mm M-1939 자동대공화기를 보유하고 트럭에 탑재하여 주보급로를 다라 이동하면서 유엔공군기에 사격을 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공산군의 대공방어능력은 유엔공군을 피해로 이어져 3월부터 6월까지 대공포에 제5공군 항공기 손실은 81대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경에도 제5공군은 '51.1~6월까지 공산군 차량 14,500여 대를 파괴 또는 손상시켜 전선으로 이어지는 보급물자를 차단함으로서 공산군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발전은 야간 이동표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야간 표적을 식별하고 타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육안에 의한 식별이었다. 따라서 제5공군은 조종사의 시계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조명탄 투하만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이를 위해서 제5공군은 C-47이 선도하여 조명탄을 투하하면 이를 이용해 B-26폭격기가 폭격하는 방안을 시행하였다.
또한 야간 표적을 식별하면 C-47기에서 도로상에 쇠못을 살포하여 바퀴에 손상을 주어 이동을 지연시키고 이를 이튼날 아침에 공격하는 방법을 적용하여 14,500여 대를 파괴시켜 후방지역에 대한 전선으로의 병력 및 보급품의 지원을 차단하였다.
(다) 비행장복구 및 건설 저지 작전
북한 공군은 개전초 비행장 모두가 유엔공군의 폭격에 의해 운용불능상태가 되어 와해 되었다. 따라서 이후의 공산군 비행기는 모두 만주지역에서 발진하게 된다. 이에 공산군은 '50. 12월부터 북한지역내 비행장 복구와 건설에 중점을 두고 우선 Mig-15기 회랑지역인 청천강 북서부지역부터 복구 및 건설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엔공군은 4월부터 미그회랑지역에서의 공중우세가 장악되어 북한 지역에 대한 비행장 공격은 평양, 평양 미림, 안악, 사리원, 강동, 연포, 함흥, 신막, 순안 비행장 활주로에 지연신관폭탄을 투하하여 수많은 폭파구를 형성하여 무력화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안동비행장에 주둔한 소련 Mig-15기의 완벽한 엄호를 받는 신의주비행장에는 시설확장이 계속 이루어지고, YAK-9기 38대를 포함한 IL-10기, LA-5기 등의 항공기 추가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극동공군은 5월 9일 14시경 제5공군과 제1해병비행단 소속 전폭기 총 312대를 출동시켜 신의주비행장을 공격하여 활주로에 있는 모든 항공기는 파괴되었다. 이때 안동에서 Mig-15기 50여 대가 이륙하였으나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18대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전투의지를 피하고 스쳐지나갔다.
미 공군 분석관들은 5월에 공산군이 평양에 길이 7,000피트, 폭 375피트의 견고한 포장된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판명하여 제5공군이 5월 24일, 25일 경폭격기를 출동시켜 공사를 방해하였다.
6월 6일 항공사진 판독결과 비행장은 사용 불능상태로 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비행장 대부분을 포장이 아닌 잔디나 흙으로 이루어진 활주로로 1주 사이에 복구하여 경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지속적인 타격이 진행되었다.
지속적인 유엔공군의 비행장 파괴작전으로 결국 북한내에 중국이나 소련 공군의 진입은 좌절되었고 지원도 받지 못했다.
(라) 공수작전 : 북한지역 연포비행장으로부터 미 제10군단 철수를 위한 공수작전이 종료된 '50. 12. 17일 이후 약 2주간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3차공세, 신정공세"가 시작되자 1월 1일부터 긴급철수를 위한 공수작전이 시작되었고 서울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하는1월 5일 전날인 1월 4일까지 4,757톤의 화물과 2,297명의 부상자를 후방지역으로 공수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전투공수사령부는 '51. 1~6월가지 공수비행은 총 39,993소티로 월평균 6,665소티로 이전 작전기간의 월 평균 4,275소팅에 비해 56%가 증가한 것이고 가장 많은 비행을 실시한 '50. 11월의 6,772소티와 대등한 수준이다.
당시에 비행장은 대형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곳은 대구와 김해 비행장 뿐이었고 대전 비행장은 동계에는 착륙이 가능했지만 활주로가 미끄러워 '51. 1. 14일 대형항공기 C-54수송기가 활주로를 이탈하여 조종사가 순직하고 비행기가 대파되는 사고도 발생하여 미 제10군단은 원주와 충주에 길이 2,000피트 비상 활주로(충주는 차후 400피트 연장)를 건설하였으며 노면이 흙으로 되어있었으나 긴급상황을 고려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나 충주비행장이 1월 11일 결빙되면서 착륙간 활주로 이탈로 C-46기 6대가 손실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결국 C-46기의 직접적인 공수는 취소되고 C-119에 의한 공중투하로 전환되었다. 충주기지에 68대의 C-119기가 5일동안 연료, 침낭, 식량, 통신선 등 1,162톤을 공중투하하였다.
전투공수사령부는 '51. 1월에 미 제10군단에 대한 공수지원을 포함하여 미 제8군에 7,445톤, 제5공군 병력 및 화물 5,041톤을 공수하고 10,489명의 환자를 후송하였다.
2월은 한 달 동안 수원기지를 통해 3,000톤의 보급품이 공수되고, 4,000명 이상의 부상병이 후송되었으며, 지평리 전투에서는 C-119기 24대가 2월 13일 출동하여 탄약을 공중투하였고, 15일에도 30대가 동원되어 탄약을 공중투하하여 지평리를 방어할 수 있었다. 지평리 전투간 C-119기는 총 84회 공중 투하를 통해 400톤 이상의 탄약을 보급하였고 공산군 대공포에 6대가 손상을 입었다.
또한 제314공수비행전대는 킬러작전이 시행되면서 이른 봄비와 해빙으로 육상수송로가 진창이 되어 보급품 수송이 어려워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과 10군단에 2월 23~28일 어간에 총 256회에 걸쳐 1,358톤의 보급품을 원주지역에 공중 투하하였다.
3월 중에 제315전투공수비행사단의 화물공수는 줄어든 반면 인원 수송은 증가하엿다. 극동공군은 미 육군 공병대가 서울과 김포기지를 재건할 기간도안 새롭게 건설된 원주기지로 공수를 시작하여, 수송기는 2,300톤의 장비, 보급품, 심리전단을 공중 투하하였다. 3월 4일 C-119 41대가 미 제1해병사단에 260톤의 보급품을 투하혀 3월 중 치대의 공중투하다.
3월 21일 187공정연대전투단의 공수투하를 위해 제314공수비행전대 C-119기 80대와 제437공수비행단 C-46기 55대가 대구기지에 집결하였다. 6.25전쟁 기간중두번째로 규모가 큰 공수작전으로 3월 23일, 일본 기지에서 출격한 제452폭격비행단 소속 B-26 폭격기 32대와 제3폭격비행단 소속 B-26기 24대는 서울과 문산에 이르는 도로지역과 강하지역 주변의 공산군 병력과 대공기지 소탕에 나섰고 수송기가 상공에 나타나자 16대의 F-51기가 엄호를 시작하였다. 이날 C-119기 는 2,011명과 보급품 204톤을 투하했고, C-46기는 1,436명과 탄약, 식량 등 15.5톤을 공수투하하였다. 이날 작전의 손실은 공정요원 착지부상 84명, 전투부상 18명, 강하중 적의 사격에 1명 전사하였고 C-119기 5대가 지상허ㅘ기에 경미한 손실을 입었고, 1대가 대공포에 손실되어 조종사 2명이 전사하였다.
4월에는 C-119기 개조와 보수를 위해 운항중지를 하다 4월 19일이 되어서야 투입되엇고, 주로 C-46기에 의존하여 4월 중 총 15,900톤을 공수하였다.
5월에는 16~26일 간에 제315전투공수비행사단은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는 유엔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일 평균 1,000톤의 보급품을 수송하였는데 특히 5월 23일 가용수송기 총 222대를 총동원하여 409회 비행을 실시하여 1,534톤의 화물을 공수하였는데 이는 사단의 1일 최대수송능력인 1,291톤을 초과하는 것이었고 5월 중 21,300톤을 수송하였다.
6월에들어서 진격 중에 미 제8군의 육상수송로가 폭우로 곤경에 처했고, 이에 보급품의 수송을 전적으로 공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6월 중에 제315전투공수비행사단은 총 22,472톤을 공수하여 전쟁 발발 이후 '51. 6월까지 화물 176,000톤과 인원 427,000명을 공수하였다.
나. 한국공군 작전
이 시기 한국공군 비행단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채 미 제6146기지부대의 자문과 지원을 받으며 제5공군사령부의 작전통제하에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기간에 특이할만한 성과는 공군본부 예하 정보국 특수임무부대와 니콜스 대위가 지휘하는 미 제6004항공정보대대가 실시한 한. 미 연합 정보작전이다.
이는 '51. 4. 17일 공산군 후방지역인 개천지역 청천강 변에 추락한 Mig-15기에 대한 정보획득을 위한 정보획득작전에 한국 공군 특무대원 9명이 함께 참여하여 제315전투비행사단 C-119기에 탐승하여 약 80대의 극동공군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며 북상하여 군우리 청천강 변에 14시경 공수투하되어되었다.
이는 이미 3주간의 사전훈련을 통해 숙달된 기술로 미그기를 2시간동안 핵심부품 분리와 사잔촬영, 실측을 통한 장확한 제원을 측정하였다. 임무 수행중 공산군 공격으로 한국 특무대원 1명이 전사했지만 핵심부품을 미 제3항공 구조대 YH-19 헬기에 실고 귀환하다 공산군의 지상사격으로 프로펠러 1개가 파괴되어 초도기지에 비상착륙하엿다가 영국 함정편으로 서울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 작전으로 소련의 Mig-15기의 상세한 기술정보를 획득하여 대응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 공군비행단 작전
(가) 제주기지 조종사 양성훈련('50.12월 말~'51. 6월)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서울 여의도기지 및 대전기지(K-5)로 이동했던 공군 비행단은 12월 19일 공로와 해군 수송선으로 제주기지(K-40, 현 제주공항)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미군의 협조하에 3차에 걸처 24명이 훈련을 마쳤다. 이렇게 양성된 조종사는 기존 조종사와 같이 일본 존슨기지에서 약 2주 과정으로 2차례에 걸쳐 시계비행에서 계기비행교육을 4월 2일~5. 12일 까지 29명이 수료하였다.
(나) 대전기지(K-5) 작전('51. 1~3월)
1950. 12월 초순 미림기지로부터 대전기지로 철수한 공군 비행단과 미 제6146기지부대는 대전기지의 활주로가 열악하여 작전에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전투임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다 미군 부대는 잔류하고 한국 공군은 제주기지로 이동하고 김신 중령을 부대장으로 8명의 정비지원 병력을 대전기지에 잔류시켰는데 이를 일명 "백구 부대"라 불렀다.
1951. 1. 25일 미 제8군이 총반격을 개시하여 2월 10일 경 한강변으로 진출하자 대전기지는 여의도기지로 이동하게 된다.
(다) 여의도기지 작전('51. 4.3~5.31)
미 제6146기지부대의 여의도기지로의 전개가 이루어지자 한국 공군비행단은 제11전투비행중대 소속 조종사 4명이 3월 31일 여의도 기지에 도착하였으며 이어서 4월 20일 전 요원이 여의도기지에 전진배치 되었다.
여의도기지는 1.4후퇴 당시에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 공군이 B-26경폭격기로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여 활주로에 폭파구가 형성되어(직경 5미터, 깊이 2미터, 32개) 진해기지에 있던 관구병력 전원을 서울로 올려 트럭 25ㄷ대 분량의 몰래와 자갈로 메운 후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3월 31일에 작업이 종료되었다.
'51. 4. 1일 여의도기지에 제101기지전대(전대장 김신 중령)이 편제병력 100명으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4월부터 2개월 동안 여의도기지 확장 공사로 활주로 500m 연장 등 F-51기 10대가 적시적인 작전이 가능토록 했다. 여기서 미군 제6146부대와의 연합 출격은 5월 31일까지 지속되었지만 보유한 전력은 F-51기 4대(대전기지에 4대)로 당시 전투조종사는 8명에 불과했다.
(2) 정찰비행전대 작전
정찰비행전대는 유엔군 북진 반격시기와 마찬가지로 제2차 후퇴작전 이후에도 육군 제1,2,3군단에 각각 파견대를 설치하여 지상군 작전에 기여하였다.
'51. 3. 28일에 여의도기지에서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동승하여 이륙한 비행기가 강릉기지로 이동하던 중 기상불량으로 추락하여 탑승자 모두가 전사하는 불행한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