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 6:2, 4)
욥기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힌다. 욥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사단이 벌이는 대쟁투이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 고통의 주체는 사단이다.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엘리바스의 말처럼(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은(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는 기별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한 이런 구절들은 무엇인가?(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이 마치 사랑하는 자를 직접 징계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가?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신다. 그러나 이 말은 그분이 필요에 따라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의미이다.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래서 고난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마치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가르침으로 다시 한 번 죄책감과 고통을 가중시켰다. 욥기가 밝혀주는 분명한 진실은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되 고통을 초래한 존재는 사단이다. 오늘날 인간들에게 고난과 슬픔을 안겨준 존재는 사단인데 사람들은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들은 외치기를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하고 소리친다. 당연히 욥도 동일한 생각으로 고통의 신음을 발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이 독한 화살을 하나님이 쏜 화살로 오인하고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욥 6:5)며 자신의 이 비참한 처지를 토로하며 그런 친구에게 동정은 못할망정 죄인 취급하는 엘리바스와 친구들의 무정함을 공격한다.
(욥 6: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욥 6: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는 구나
욥의 고난은 과연 욥의 입장에서는 까닭 없는 고난이었고 그의 신음의 고통은 이유 있는 고통이었다. 원인도 이유도 모를 고난을 만났지만 그 고난으로 자식을 잃고 모든 재물을 잃고 건강마저 잃어버렸으니 어찌 신음하지 않겠는가? 어찌 절규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에 한 가지 이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때로 그분이 고난을 지켜만 보신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즐기시지 않는다. 오히려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함께 우시는 분이다. 만일 그것을 안다면 우리의 고통이 얼마나 경감 되겠는가? 고통도 아픈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라고 믿을 때 고통은 가중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만일 욥처럼 고난과 시련의 한 복판에서 운신할 틈도 없이 갇힌 자가 되었다면 아플 때 부르짖고 소리칠 수 있다. 고난이 화살처럼 맨살을 헤집고 들어오는데 어찌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만 삼킬 수 있겠는가? 울고 부르짖어라!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그대를 버림이 아니며 그대의 고통에 무심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
하나님
때론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우리 삶을 급습하고 숨을 쉴 수조차 없을 만큼 고통이 가중 될 때면 나도 모르게 원망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향할 때 주여, 그것이 우리의 속마음이 아니라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어 부르짖는 신음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 허락하시어 고통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의심치 않을 강철 같은 믿음 지켜가도록 우리 손을 붙들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