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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대는 가죽, 나무, 종이 등의 띠 바탕을 비단으로 싸서 만든다. 대를 감싸는 비단은 지위에 따라 왕은 홍단, 왕세자는 흑단, 왕비와 왕세손은 청단을 사용하는데, 그 위에 5선의 금줄로 장식하였으며, 대의 안쪽 뒷허리 둘레에는 다른 색의 비단을 대었다. 대는 금속판을 서로 끼워서 만든 날름쇠로 열고 닫았다. 대에 부착하는 장식옥판을 띠돈이라 하는데, 중앙의 날름쇠를 가리는 직사각형 세 개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으로 부착하였다. 그 종류는 앞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좌우로 각각 복숭아형 세 개, 직사각형 한 개, 좁다가 넓어지는 형의 띠돈 한 개씩이다. 띠돈 사이에는 묶음쇠와 꽃모양 금속판이 위치하며, 뒷허리 쪽에는 일곱 개의 직사각형판을 배열하였다.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도설이나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 보이는 왕의 면복 혁대는 둥근 형태이나 지금의 유물은 사각형인데, 18세기 이후 국속화로 그 형태가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 옥대와 왕비, 왕세손 옥대를 살펴보면, 왕의 옥대는 용문양을 투각한 띠돈을 사용하였고, 왕비와 왕세자의 것은 조각하지 않은 옥을 사용하였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옥대는 나무틀 띠를 홍단으로 감싸고 백옥판을 달았으며, 안쪽 뒷부분은 황색단을 대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옥대는 겉은 흑색, 안쪽 뒤는 비취색단으로 대를 싸고 옥판을 달았다. 조선왕실 어진과 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에서 왕이 착용한 옥대를 확인할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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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보 중 하나인 '진평왕의 천사옥대' 에 대한 삼국유사의 이야기입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런데 이 옥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라의 3보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
그렇다면 그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왜 하늘에서 내려준 것일까요?
무슨근거로 그 처럼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근거나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천사 옥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주인공인 진평왕이 금척설화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함께 옥대가 금척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같이 금척설화에 의하면
금척이란 물건은 박혁거세가 알 수가 없는 노인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진평왕이 이 금척을 숨긴 것으로 등장합니다.
중국에 뺏기지 않으려고...
그러나 급작스럽게 서거함으로 인하여 금척은 행방이 사라집니다.
혹시 천사옥대가 금척과는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금척을 옥대로 하여 자신의 허리춤에 항상 챙기게할 수가 있는 것이니...
아무튼 이 옥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라3보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의 왕건은 신라의 3보를 슬슬 탐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신라 3보 중 '이동' 이 가능한 천사옥대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5년>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 “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
‘聞新羅有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
臣不能答” 王聞之 問?臣曰 “聖帶是何寶物耶” 無能知者 時有皇龍寺僧 年過九十者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 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別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5년(921) 봄 정월에 김률이 (경명)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사옥대의 존재에 대해 신라 왕실에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옥대는 오랫만에 '발견' 되었고, 이것의 존재여부를 신라 왕실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왕건이 신라3보를 가치를 중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야사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 후에 高麗王(고려왕)이 新羅(신라)를 치려고 꾀하다가 말하기를 新羅(신라)에 세 보배가 있으니 犯(범)하여서는 안된다. 무엇이냐 하면 皇龍寺(황룡사)의 丈六尊像(장륙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九層塔(구층탑)이 둘째요 眞平王(진평왕)의 天賜玉帶(천사옥대)가 셋째이다 하고 이에 그 計策(계책)을 그치었다.
정말로 왕건이 신라 공격을 꾀하다가 고작 3보 때문에 그치지는 않았겠지만,
민간에서는 저렇게 믿었던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라3보는 국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왕건은 신라병합시에 신라의 정통성을 삼보의 인수인계를 통해 넘겨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순왕 김부는 왕건에게 항복하던 무렵,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왕건에게 바치게 됩니다.
영토를 넘김으로써 땅에 붙어있는 부동산이나 다름없는 2개 보물에다,
동산인 천사옥대까지 바침으로써 신라의 정통성을 넘긴다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천사옥대 (天賜玉帶 ;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과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옥대(玉帶)
진평왕(眞平王) 원년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띠[玉帶]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교제(郊祭)와 묘제(廟祭) 등 큰 제사에 모두 착용하였다. 그때 사람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에서 하늘이 옥띠를 하사하니, 임금의 곤룡포와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우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드리라.”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고려 태조에게 바치니, 바로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 사자 김률(金律)이 고려에 왔을 때에, 태조가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가?” 하였다. 김률이 대답하기를, “성제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찌 모르는가?” 하니, 김률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은 황룡사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역대의 임금들이 보배로 전해 와서 남고(南庫)에 간직해 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고 찾으려 하니,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대낮이 캄캄하게 되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 일컫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바친 것이다.
자, 이로써 천사옥대가 신라 왕실 금고에서 고려의 왕실 금고로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사옥대의 여정은 어디까지 이어졌을까요?
아래에는 재밌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래 기록대로라면 천사옥대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도 이어졌던 모양이고, 이후 이것이 조선왕조의 왕실 금고로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 후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에게 장가든, 영조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에게 이 옥대를 하사한 모양입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3권
고려의
금양전단품대(金??檀品帶)>
고려 태조 20년(937)에
김부(金溥)가 바친 옥대(玉帶)는 크기 10위(圍)에 62개의 장식판[?]이 있는데, 곧 진평왕(眞平王)이 이른바 ‘성제옥대(聖帝玉帶)’라는
것이다. 대대로 나라의 진보(鎭寶)로 삼아오다가 400년 만에 바쳐진 것이다.
복주(福州)는 지금의 안동(安東)인데,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여기에서 피하면서
전에 띠던 여지금대(?支金帶)를 태사묘(太師廟)에 간직하였는데, 향리(鄕吏)로서 호장(戶長)이 된 자가 이것을 띠었으니, 이것이 고대(古帶)의
유래이다.
금양전단대에는 운룡(雲龍)의 형상을 새겼는데 극히 정교하였다.
띠의 장식판 뒷면에는 ‘왕씨원년추칠월 궁인윤영화(王氏元年秋七月宮人尹英花)’라는 열두 글자로 된 관지(款識)가 있다. 이 띠는 궁중에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사하였는데, 박명원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든 사람이다.
자, 자기가 반남 박씨(박명원은 반남 박씨임)이고 금성위의 후손이라면, 혹시 집안이나 종갓집에 웬 낡은 허리띠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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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의 천사옥대, 그 후 누가 가졌을까?
진평왕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이상은 잘 알려진 신라삼보 중 하나인 '진평왕의 천사옥대' 에 대한 삼국유사의 이야기입니다.
신라시대 금동요대(고려장터 경매 출토품)
그런데 이 옥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옥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라3보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의 왕건은 신라의 3보를 슬슬 탐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신라 3보 중 '이동' 이 가능한 천사옥대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5년>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 “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 ‘聞新羅有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 臣不能答” 王聞之 問羣臣曰 “聖帶是何寶物耶” 無能知者 時有皇龍寺僧 年過九十者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 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別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5년(921) 봄 정월에 김률이 (경명)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사옥대의 존재에 대해 신라 왕실에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옥대는 오랫만에 '발견' 되었고, 이것의 존재여부를 신라 왕실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정기룡장군의 옥대
왕건이 신라3보를 가치를 중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야사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 후에 高麗王(고려왕)이 新羅(신라)를 치려고 꾀하다가 말하기를 新羅(신라)에 세 보배가 있으니 犯(범)하여서는 안된다. 무엇이냐 하면 皇龍寺(황룡사)의 丈六尊像(장륙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九層塔(구층탑)이 둘째요 眞平王(진평왕)의 天賜玉帶(천사옥대)가 셋째이다 하고 이에 그 計策(계책)을 그치었다.
정말로 왕건이 신라 공격을 꾀하다가 고작 3보 때문에 그치지는 않았겠지만, 민간에서는 저렇게 믿었던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라3보는 국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왕건은 신라병합시에 신라의 정통성을 삼보의 인수인계를 통해 넘겨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순왕 김부는 왕건에게 항복하던 무렵,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왕건에게 바치게 됩니다. 영토를 넘김으로써 땅에 붙어있는 부동산이나 다름없는 2개 보물에다, 동산인 천사옥대까지 바침으로써 신라의 정통성을 넘긴다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천사옥대
(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과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옥대(玉帶)
진평왕(眞平王) 원년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띠[玉帶]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교제(郊祭) 와 묘제(廟祭) 등 큰 제사에 모두 착용하였다. 그때 사람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에서 하늘이 옥띠를 하사하니, 임금의 곤룡포와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우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드리라.”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고려 태조에게 바치니, 바로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 사자 김률(金律)이 고려에 왔을 때에, 태조가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가?” 하였다.
김률이 대답하기를, “성제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찌 모르는가?” 하니, 김률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은 황룡사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역대의 임금들이 보배로 전해 와서 남고(南庫)에 간직해 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고 찾으려 하니,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대낮이 캄캄하게 되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 일컫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바친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요대( 보물 326-3호)
자, 이로써 천사옥대가 신라 왕실 금고에서 고려의 왕실 금고로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사옥대의 여정은 어디까지 이어졌을까요?
아래에는 재밌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래 기록대로라면 천사옥대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도 이어졌던 모양이고, 이후 이것이 조선왕조의 왕실 금고로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 후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에게 장가든, 영조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에게 이 옥대를 하사한 모양입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3권 고려의 금양전단품대(金驤栴檀品帶)>
고려 태조 20년(937)에 김부(金溥)가 바친 옥대(玉帶)는 크기 10위(圍)에 62개의 장식판[銙]이 있는데, 곧 진평왕(眞平王)이 이른바 ‘성제옥대(聖帝玉帶)’라는 것이다. 대대로 나라의 진보(鎭寶)로 삼아오다가 400년 만에 바쳐진 것이다.
복주(福州)는 지금의 안동(安東)인데,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여기에서 피하면서 전에 띠던 여지금대(荔支金帶)를 태사묘(太師廟)에 간직하였는데, 향리(鄕吏)로서 호장(戶長)이 된 자가 이것을 띠었으니, 이것이 고대(古帶)의 유래이다.
금양전단대에는 운룡(雲龍)의 형상을 새겼는데 극히 정교하였다. 띠의 장식판 뒷면에는 ‘왕씨원년추칠월 궁인윤영화(王氏元年秋七月宮人尹英花)’라는 열두 글자로 된 관지(款識)가 있다.
이 띠는 궁중에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사하였는데, 박명원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든 사람이다.
자, 자기가 반남 박씨(박명원은 반남 박씨임)이고 금성위의 후손이라면, 혹시 집안이나 종갓집에 웬 낡은 허리띠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옥대의 옥조각과 금조각은 누가 빼서 팔았을 지도 모르죠. 그러니 금속제 낡은 허리띠라도 보이면....) 만약 박씨 집안에서 당신이 이걸 발견한다면, 당신은 국보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인용문 참고 : 엠파스 한국학 삼국사기, 아무데서나 잘 검색되는 직지 프로젝트 삼국유사, 고전번역원 등)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발굴된 금동허리띠꾸미개
박명원(朴明源)
1725(영조 1)~1790(정조14)
조선 영조의 사위.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보亭), 參判(참판) 師正(사정)의 아들.
1738년(영조14) 영조의 딸 和平翁主(화평옹주)와 결혼, 錦城尉(금성위)에 봉해졌고, 품계가 綏祿大夫(수록대부)에 이르렀다.
1776년(영조52) 謝恩使(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세 차례나 사은사가 되었다.筆札(필찰)을 곱게 써서 나라의 慶哀事(경애사) 때 여러 번 金玉寶冊銘旌 書官(금옥보책명정서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죽은 뒤 정조는 친히 글을 지어 坡州(파주)에 神道碑(신도비)를 세웠다. 시호는 忠僖(충희).
박명원은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다
박명원의 직책이 금성위(錦城尉)라고 하였는데 금성(錦城)은 경상북도 경주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라남도 나주시를 말한다. 박명원이 반남 박씨라고 하였는데 반남 또한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을 일컬는다
금성(나주)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인물은 왕건이다
다음은 <고려사절요> 의 태조 기록이다.
"(왕건이) 또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군을 쳐서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이어서 금성을 나주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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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옥대는 금척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