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기대어 외 1편
박복영
금요일 오후의 한 낮은 지루하다 아니, 촘촘하다 골목길을 뛴 발걸음이 그렇고
열리다 만 창문을 헤집는 햇빛이 그렇다
나는 창가에 반쯤 몸을 기댄 그림자가 되고 싶었다
툭, 내 등에 묻은 햇빛을 털면서 공중에 흩날리다 떨어지는 그늘을 주워 약속에 밑줄을 긋고 싶었으나
열린 창문을 닫으면 등에 박혀 속살거리던 햇빛들이
금방이라도 골목길을 빠져 나갈 것 같아
접혀있는 우산을 뒤적이는 결핍이 내게 있었다
때론 햇빛의 발자국을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창문을 열어두기로 했지만
그림자는 기울어 넘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쓸쓸했다
그림자는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었으므로
햇빛은 그림자를 안아주려 했으나
어둠은 단단해져 불빛들을 찾고 있었다
비파나무 잎사귀가 눕고 있다 주말은 불빛으로 찾아와 쉴 테지만 우리는 비로소 약속을 찾아 밑줄을 그을 수 있을까
햇빛은 아직도 지루하고 촘촘한데
너에게 하고픈 말들이
책을 읽다 코피를 쏟았다
부욱, 찢은 페이지에서
글자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쥔 손을 펴 보니
손 주름을 따라 읽었던 글자들이 보였다
헝클어져 일렬로 세울 수는 없었지만
찢어진 면에서
글자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넝쿨처럼 번져왔다
손안의 체온이 글자들을 흔들고
지들끼리 부딪는 글자들이 깨지는 소리를 냈다
체온은 더 올랐고
나는 피 묻은 손바닥으로 글자들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수돗물로 손을 씻었다
손 주름들이
빠져나온 글자들을 수챗구멍으로 돌려보내는 동안
글자들이 비워진 자리
하고픈 말들처럼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박복영
전북 군산 출생. 1997년 월간문학 등단.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와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한국해양문학상 외. 시집 아무도 없는 바깥 외, 시조집으로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