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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프로야구는 일천한 역사에 비해
양적.질적으로 괄목상대할 만큼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 연원과 원동력을 찾아보기로 하자
한국프로야구 성공은 고교야구 활성화에 따른 프랜차이즈 조기정착으로 꼽고 있다.
고교야구 역사를 보자.
1946년 청룡기(자유신문 주최.조선일보 인계받음)
1947년 황금사자기(동아일보 주최)
1967년 대통령배(중앙일보 주최)
1971년 봉황기(한국일보 주최)가 메이저급으로 대표적이다.
(cf.지방대회는 1949화랑대기 부산일보. 1979 대붕기 대구매일.1994 무등기 광주일보)
고교야구 역대 랭킹5위를 보자(1946~81년: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배.봉황기 우승팀 기준)
1위=경북고:우승19회
2위=경남고:우승10회
3위=선린상고:우승8회
4위=대구상고:우승7회
5위=동산고:우승6회
(82년 프로야구출범으로 고고야구 인기는 뒷전으로 밀려났으므로, '81년까지 우승팀 기준한 것임)
한국야구역사(고교)는 3기로 분류할수 있다.
최초팀은 1905년 한성고교(현.경기고)가 야구를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
한성고,경성중(현.서울고),휘문고,동산고,인천고가 돋보였으며, 서울.경기권이 중심이었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국민 스포츠로 자리잡지 못한 관계로 일단 제외한다.
[1기 1946~'66년 :고교야구 초창기] (전국민적 인기는 없었지만, 실업.대학보단 훨씬 높았음)
해방후 1946년 자유신문 주최 청룡기 고교야구(현.조선일보 주최)가 효시가 되었고,
이어 1947년 동아일보 주최 황금사자기대회가 창설되면서 한국야구는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신문사 주최의 전국대회라지만 국민스포츠로 자리메김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청룡기.황금사자기 대회상황은 해당신문에서만 상세이 보도되고, 라디오.TV등의 중계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1946~'66년(총34회 청룡.황금사자대회)까지 우승랭킹을 보자면
6회 우승: 인천동산고, 경남고
3회 우승: 인천고, 경동고, 경기공고
2회 우승: 성동고, 선린상고, 부산상고
1회 우승: 성남,중앙,동대문,부산,부산공고,대구상고,광주일고
최강팀은 동산고와 경남고였으며, 특히 인천야구 전성기였는데, 이후 인천야구의 몰락은 지금도 수수께기다.
최고 명승부는 청룡기4회 최강 경남중(장태영)과 무명의 광주서중(김양중)의 결승대결이 전설로 남아있다.
최고스타로서는 투수엔 장태영(경남고)와 신인식(동산고)이 무적.철완이었음을 알수 있고,
타자로서는 백인천(경동고)이 전설로 남았다.
특히 장태영은 고교3년(47.48.49)간 37승1패 전적으로 무적함대 경남고를 이끌었으며(전설1), 성적도 우수하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합격했다(전설2). 졸업후 실력으로 은행에 입사후 야구도 병행하며 타자로 전향했다. 1957년 백호기 5회대회는 타자로서 전대미문의 8할1푼8리 타율(11타수9안타)을 기록했다(전설3)
1기 초창기에도 수많은 스타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시대를 앞서간 탓으로 전국구 유명세보다는 지역구(야구인과 당해지역)스타에 머무는 한계점이 있었다.
[2기 1967~'81년 :고교야구 황금기] 최고인기 스포츠로 정착, 지역연고 프로야구창단 원동력됨
1967년은 한국야구 황금시대를 여는 해였고, 오늘의 지역기반 프로야구 잉태원년이라해도 무방하다.
청룡기('46)와 황금사자기('47)에 이어 중앙일보에서 대통령배대회를 주최하면서 고교야구는 황금시대를 열었다. 대통령배는 4~5월 개최되면서 매년 고교야구의 서막을 알렸고, 라디오중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전국민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박종세.임택근아나운서와 이호헌해설위원도 이때부터 널리 회자된다.
전국민 최고인기 스포츠로 자리메김한 한국야구 황금시대를 열면서, 전국구 스타와 전설이 배출된 시기였다.
황금기 1967~81년(총56회 청룡.황금사자.대통령.봉황기 대회기준) 우승랭킹을 보자면
19회 우승(34%) : 경북고
6회 우승(11%) : 대구상고.선린상고
4회 우승(7%) : 경남고
3회 우승(5%) : 부산고, 군산상고
2회 우승(3%) : 광주일고,광주상고,부산상고,신일고
1회 우승(2%) : 성남,중앙,배명,공주,충암,서울,북일
고교야구 황금시대 특징을 보자
1.경북고 독주시대 였다고 해도 과언아니다.(경북고.대구상고가 50% 우승차지)
2.우승청부사.우승제조기 서영무 전설과 전국구 스타 임신근.남우식 탄생이다.
임신근.남우식은 20여년전의 철완 장태영(경남고)과 신인식(동산고)처럼 전대회를 석권했다.
3.야구 불모지인 호남에서 '72년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호남야구의 저변확대가 시작되어,
이후 광주일고.광주상고가 등장했고, 무적함대 자랑했던 인천야구의 침몰은 지금도 수수께기로 남아있다.
4.충청도에서도 70년후반기 공주고.세광고.북일고 등장으로 지역구도는 완성돼 프로야구 토양이 되었다.
5.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야구인기보다 훨씬 높았다고 볼수 있다.
당시 고교야구 인기와 지금의 프로야구 인기도를 비교해보면
메이저(청.황.대.봉)대회 16강이나 8강만 진출하더라도 초등학생.중학생까지 포함한 전국민이
투수는 물론 야수까지 이름을 줄줄꿰는 형편이었다.
당시 8강만 진출하면 TV중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8강.4강만 오른다면 대단한 팀으로 여기고 소속선수 신상까지 줄줄외우는 초등학생들이 많았다. 우승팀은 물론이고 몇년전의 8강팀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고교야구 중계하는 날이면 TV앞에 모이거나, 아니면 라디오 중계목소리에 모두 귀기울이던 시대였다.
당시는 게임.오락.특별한 놀이거리가 없었기때문에 전국민이 열광했던 것도 주요인이었다.
고교야구가 열렸던 동대문구장은 예선부터 거의 만원이었고, 4강.결승전이 열리는 날엔 암표상도 횡행했었다.
또한 1982년 프로야구 출범으로 고교야구인기는 예전의 대학.실업야구보다 못한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16강.8강은 물론이고 우승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걸 본다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3기 1982~2011년 :고교야구 유명무실] 프로야구 출범으로 고교야구 인기 사라지다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역연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당시도 대학.실업야구가 있었지만, 대학.실업야구는 고교야구 인기의 1/100도 미치지 못했다.
고교야구 열기와 인기는 고스란히 프로야구로 이전되고,
현재는 우승을 해도 선수이름은 커녕 팀이름조차 기억에 없는 것이 고교야구 현주소다.
프로야구 인기에 힘입어 많은 고교팀이 창단되었고,
그중에서 여러번 우승으로 신생명문(덕수상고)으로 자리잡은 팀이 여러팀이 있지만 예전의 인기가 아니므로
경북고.대구상고.경남고.선린상고.동산고처럼 기억에 남는팀이 없다.
요즘 고교야구 최고명문으로 자리잡은 덕수상고가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야구의 전설 : 서영무
고교야구의 스타 : 임신근,남우식,황규봉,,,
전대미문의 경북고 독주시대.황금시대를 열다.
67~74:경북고 야구신화
75~77:한양대 야구신화(2년 5회우승)
78~80:서울고 야구감독(78봉황기우승.전국대회 첫우승. 11년간 서영무50회우승 마지막)
81~81:중앙대 감독(준우승)
82~83:삼성 초대감독
84년 뇌경색 입원 87년 53세로 사망
[서영무...그가 왜 레전드인가?]
그는 대구상고.경북대를 졸업했다.
선수로서는 평범했었지만, 지도자로서는 한국야구 레전드의 첫째반열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지않다.
66년경 첫지도자로서 모교인 대구상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해 청룡기 준우승이란 큰성과를 올렸음에도, 젊은나이와 경험부족이란 이유로 경질되었다 한다.
1967년 경북고 야구부가 재창단되어 서영무가 스카웃되어 초대감독으로 부임한다.
당시 경북고에 임신근이라는 걸출한 투수와 서영무가 만나 경북고 야구신화와 고교야구 인기시대를 열었다.
고교야구의 인기는 오늘날 프로야구 프랜차이즈의 주춧돌이 되었다.
임신근이라는 철완의 경북고 무적함대가 2년동안 전국을 제패하고, 이어
남우식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또 탄생한다.
71년 남우식이 이끄는 경북고 무적함대는 전대미문의 전국대회 모두 석권하고,
서영무와 경북고는 일본침공을 감행한다.
당시 일본 갑자원 우승팀과 한국우수 고교팀의 교환경기가 있었는데
71년 서영무의 무적함대는 남우식을 필두로하여 일본열도를 침몰시켜 버렸다.
일본원정 교환경기 6전전승이라는 또 한번의 전대미문 기록을 양산하였다.
콧대높던 일본이 한국야구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이 71년 경북고 일본원정 6전전승이었다 전해진다.
모교인 대구상고에서 버림받아 경북고에서 야구전설을 이룬 서영무는
75년 한양대 야구감독으로 스카웃되어 한양대 야구전성시대를 이루고,
78년 야구 불모지인 서울고 감독으로 스카웃되어,
그해 봉황기 우승으로 11년동안 50번째 우승의 마침표를 찍는다.
81년 야구 불모지인 중앙대 감독으로 스카웃되어, 그해 준우승이 아마추어 감독 마지막 이었다.
만약 프로야구가 몇년 늦게 출범했다면, 중앙대가 대학야구 최강팀으로 군림했으리라 본다.
전세계 야구사를 통털어서라도 11년동안 50번 우승한 야구감독이 있었단 말인가?
[비운의 레전드...서영무]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다.
서울:MBC청룡(백인천)
인천.경기:삼미슈퍼스타즈(박현식)
대전.충청:OB 베어스(김영덕)
광주.호남:해태 타이거즈(김동엽)
대구.경북:삼성 라이온스(서영무)
부산.경남:롯데 자이언츠(박영길)
자타공인 누구나 삼성이 절대최강자임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국가대표 절반이상과 경북고.대구상고.한양대 출신의 서영무감독의 기라성같은 제자들이 넘쳐났다.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서영무 내정이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우승은 기대와는 달리 김영덕 감독과 철완 박철순의 OB베어스가 차지했다.
전기는 김영덕OB가 우승하고, 후기는 서영무 삼성이 우승하여 한국시리즈 결전에서 OB가 우승했다.
우승은 최강삼성이라고 여겼던 기대가 무참히 깨졌고, 서영무 전설도 끝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3년 4월 경기초반 서영무는 삼성으로부터 경질당한다.
그리고 대행은 작전수석코치였던 한국말 하나도 할줄도 모르는 재일교포 이충남이 지휘봉을 잡는다.
그것은 삼성프런트의 성과에 급급한 엘리트주의가 빚어낸 레전드의 비극이었다.
감독의 고유권한은 작전권에 있다.
삼성의 작전권은 이충남 코치에 있었으니, 애시당초 서영무는 자기색깔의 야구를 할 수 없다보니
원년우승을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선수.감독.코치)에서 최고 연봉자가 누구였단 말인가?
이만수.장효조.김시진도 아니고,서영무 감독도 아니고,,,
이충남 작전코치가 최고액 연봉자(세계 프로야구사 기네스북감)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작전코치가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감독이 제대로 야구를 할수 있었겠는가?
구단에선 일본에서 코치경험있는 이충남을 모셔오면서, 최고연봉에다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그 엘리트주의와 우승의 조급함이
한국 야구의 전설인 서영무 감독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서영무를 쫒아낸 구단프런트는 최고연봉의 이충남에게 지휘봉을 맡겼지만,
경기성적은 안봐도 엉망진창, 이후 재일교포 이충남은 일본으로 떠나가 버렸다.
84년 OB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오고, OB에선 서영무 레전드를 고문으로 영입한다.
84년 봄 서영무감독은 뇌졸증으로 입원, 87년 전설의 비운을 남기고 이승을 떠난다.
[서영무 레전드 후기]
전국민이 즐겼던 고교야구 황금기를 이룩했고, 그 인기를 기반으로 프로야구 프랜차이즈가 정착되었다.
우승제조기.우승청부사란 별칭처럼 가는 곳마다 우승을 제조했고,
전인미답의 전국대회 석권과 11년간 50회 우승이란 레전드 금자탑을 세우고,
무적함대 남우식호 앞세워 일본침공 감행하여 6전전승으로 일본열도를 침몰시켰다.
프로야구의 전설인 야신 김성근 감독(충암고)과도 고교야구 감독으로 몇시즌 조우했었다.
서영무 감독의 레전드가 비운인 것처럼
그의 수제자인 최초의 전국구스타 임신근 또한 비운의 감독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수려한 미남자였던 남우식은 롯데그룹의 임원으로 근무했다.
인천항을 통해 야구가 수입되었다.
초창기 전국제패한 동산.인천고의 야구몰락이후 다시 인천야구를 부흥시킨 주인공은
인천SK와이번스의 야신 김성근 감독이다. 그는 훌륭한 감독이고, 두번째 전설이 되었다.
두번째 전설이된 김성근 감독이 야인에서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최근몇년 꼴찌대명사가된 한화이글스가 올해 어떤 비상을 하게될지 자못 궁금하다.
첫번째 전설인 우승제조기.우승청부사였던 서영무 감독의 재조명을 통해
다시는 레전드의 비극은 없어야 겠다는 마음이다.
[글.표.자료. 獨魂]끝.
첫댓글 프로야구 초창기때 인기 짱이었죠
70년대 고교야구 인기가 짱이였는데.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