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되고서야 연필로 쓰던 집 주소가 생각난다
맨땅에 쪼그리고 앉아서야 기웃한 의자가 보인다
떠나고 나서야 구석구석 묵은 멍들이 선명해진다
갈 길을 잃고서야 낡은 수첩 속 빽빽한 약속들이 생각난다
이방인이 되어서야 봉래산 할매바위를 기억한다
풍경이 낯설어지자 익숙해지는 귀신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수평선이 있었다 돌아 나오는 흰 여울
그물을 깁던 가난한 마고들, 어깨마다 햇미역 수북하다
오래된 슬픔을 걸치고 아직도 키가 자라는 영도 봉래산
기슭마다 물고기들 퍼덕인다 시퍼런 비탈이 그물을 친다
낡은 뉴스 덜컹대는 산복도로 마을버스 안
홀로 되고서야 잎눈 돋는 곳곳이 고향이었음을 안다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5.02.18. -
영도는 바다의 용왕과 봉래산의 마고할미를 섬기는 신화의 섬입니다.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마고(麻姑). 영도가 고향인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바꾼다’는 뿌리 정신과 함께 최근 원도심에서 인문 정신을 나누어 온 '백년어'를 영도 신선동으로 옮기고 ‘신선시사(新仙詩社)’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신선들이 시를 읽으며 시대를 논하다”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버려진 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잊힌 것이 다시 기억되는 읽고 쓰기, 그 비움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함이랍니다.
이동은 새로운 생성의 땅을 만들어가기 위한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고향은 든든한 위로가 아닐는지요. 시를 통해 사고하고 실천하려는 이 움직임이 새로운 응시가 필요한 시대에 빛이 되어주길 바래봅니다.
〈신정민 시인〉
Camille Thomas – Chopin: Nocturne in C Minor, Andante sostenuto, B.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