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동 계곡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다.
무르익은 봄날 화림동 계곡을 찾아갔다. 나라 안의 계곡 중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서 그런지,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등의 정자가 우뚝 우뚝 서 있는 화림동계곡을 거닐며, 잠시나마 나를 잊고 돌아다닌 하루였다.
“옛 시절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은 달 바위라고 불린 너른 반석 위 패인 구멍에다 술을 따른 뒤 동그랗게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우리들 역시 가을쯤에 이곳에 와 단풍잎을 띄우고서 한잔 술에 가는 세월을 노래할 수 있을지... 우리들은 계자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주변 풍광을 바라다본다. 하지만 이 정자는 몇 년 전에 일어난 알 수 없는 화재로 불에 타고 말았고, 근간에 다시 지었다.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냈다는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었다는 이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이 만들어져 있다. 농월정 뒤편의 소나무 숲도 숲이지만 천여 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 너른 반석을 흐르는 물길너머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여오는 듯하다.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氣)가 따르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던 박명부의 기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화림동 계곡을 지나 안의에 접어든다.
비단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금천 변에 광풍루가 우뚝 솟아 있고 하늘은 짙푸르다.
안의의 광풍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태종 12년(1412) 안의 현감 전우가 객사의 누각으로 초창하며 선화루라고 하였던 것을 성종 25년 정여창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중건하며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다시 복구하고 숙종 때 중건하였다.
안의의 신라 때 이름은 마리현이었고 조선 태종 때에 안음으로 고치며 현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 때 소론이었던 이인좌의 반란에 안의 출신 정희량이 원수라는 직책으로 되어 반란을 꾀하다 실패한 후 그 벌로 안의는 함양과 거창에 쪼개주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안의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1815년에야 다시 복권이 되었지만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안의군은 면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기질이 드센 안의 사람
함양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사람 열을 당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안의 사람의 강한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고, 또한「동국여지승람」의 안의현 편에도 “그 기질이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였다.”라고 적혀 있는 그것 역시 정희량의 반란사건 뒤로 중앙 정부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던 차별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안의에 중요민속자료 제 207호로 지정된 옛집 허삼둘 가옥이 있다.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였던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집주인의 이름은 윤대흥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여자 주인인 허삼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이 집에 들어서 보면 여늬 집과는 달리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안주인의 의견이 존중되어 지어졌음을 첫눈에 알 수 있다. 남사리의 옛집들이나 악양의 조부자집처럼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철폐와 신흥 부농층이 출현하면서 1920년대에 나라 곳곳에 세워진 상류 주택 계층 주택의 건축요소와 서민계층의 주택이 결합된 형태를 따르고 있다.
특히 허삼둘 가옥의 부엌문은 ㄱ자형 안채의 꺾인 모서리 부분에 들어서 있어 독특한 관습을 표현하고 있다.
허삼둘 가옥에서 50m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옛 시절 안의현청이 있던 안의 초등학교에 이른다.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사상가인 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동안 머물면서 40여권의 서술을 남겼다. 박지원의 사적비가 서 있는 안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땅을 다질 때 썼던 도구를 비롯한 대형 맷돌과 여러 종류의 민속자료들이 세워져 있다. 하나 하나 그 작품들을 바라보며 나라 곳곳에 늘어만 가는 폐교에다 자그마한 민속박물관(문, 옹기, 농기구, 짚 풀 공예품 등)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안의에서 지곡면의 개평리 정여창(鄭汝昌) 고택으로 가는 길옆마을 마다의 교회에는 “단군 상 건립을 철폐하라”는 프랭카드가 내어 걸리고, 그렇다.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나 자신에게 나는 묻는다. “곁방살이가 안방을 차지한다.”는 우리 옛 속담은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는 말이었던가. 그렇다면 흔히 ‘뼈대 있는’ 고장을 말할 때 “좌안동左 安東, 右 함양”이라는 말을 쓰는 그 역사성이 돋보이는 이 고장에서 단군을 멀리하는 상황을 우리들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서로가 머리 맛 대면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지 않을까?
좌안동이라고 부를 때 낙동강의 동쪽인 안동은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할 땅이고 낙동강 서쪽인 함양에서 빼어난 인물들이 태어난다는 설이다. 이러한 우‘함양’의 기틀이 된 사람이 안의 현감을 지냈던 정여창이었다. 鄭如昌은 조선 성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고 자는 백욱佰勖, 호는 일두一蠹였다. 그의 아버지는 함길도 병마 우후증한성 부좌윤을 지냈던 육의였지만 정여창이 여덟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 독서하던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특히 그는《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섬진나루에서 한 평생을
성종 임금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에 밝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널리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 먼저 천거하였지만 사양하였고 1483년 8월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였지만 어머니가 죽자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하동 악양동에 들어간 정여창은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식은 후 한평생을 그곳에서 지내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휘가 효행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라 하여 정여창을 천거하여 소격서 참봉에 재수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정여창의 사직상소문의 글에다 “경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경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에 별사문과에 합격한 정여창은 예문관검열을 거쳐 다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그의 성품 때문에 연산군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1년(1495)에 안음현감에 제수된 정여창은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고 원근에서는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세자에게 강론하는 시강원 설서를 지낼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그의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면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난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 하게 할 것이나 이름을 여창이라 하라”고 했던 말처럼 그의 학문과 덕망이 출중하여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5현으로 추앙 받는 정여창은 댓잎 네 개가 붙어있는 개(介)자 현상이라 개평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는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중요 민속자료 186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집은 그의 후손인 정병호씨의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 집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대하소설 ‘토지’가 TV 드라마 화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에서 최참판댁을 구하지 못한 제작진들이 이곳 정병호 가옥을 최참판 댁으로 설정하였고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ㄱ자 팔작지붕집인 이집 사랑채가 사람들의 머리속에 각인된 것이다.
서슬 푸른 최치수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던 곳도 이곳이고 최치수를 살해했던 평산 영감과 귀녀가 붙잡혀 왔던 곳은 이곳이었다. 돌을 모아서 산과 골짜기를 만들고 갖가지 나무가 심어졌었을 사랑채 앞마당에는 늙은 소나무가 을씨년스레 집을 지키고 있다. 안채로 들어섰지만 예감대로 아무도 없다.
마루에 앉아 따스한 겨울 햇살을 받는다. 따뜻하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 집의 구석구석은 바라볼수록 안쓰럽기만 하고 나는 뒤 안으로 들어가 장독대의 장독들을 하나하나 떠 들어본다. 장 내음이나 된장 냄새와 그리고 김치 냄새가 물씬 풍길 것 같지만 텅 비어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함양편에서
그 사이 정여창 고택은 미스터 선샤인이 촬영되는 바람에 유명세를 얻었고, 새로지은 농월정은 단청이 화려하고, 함양 상림에는 꽃 양구비 꽃이 보리밭 사이에 피어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2023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