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외 1편)
장이지 파 프롬 “나 혼자 연습해서 이만큼 탈 수 있게 됐어 앞으로 일요일마다 자전거 타고 놀러 갈 거야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어 다음 학기엔 자전거 타고 등교해야지 수업 빼먹고 서문정에서 영화도 봐야지…… 있잖아, 내가 얼마나 자전거 배우고 싶었는지 넌 알지?…… 자전거 타게 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가 주나, 나는 또 누구를 멀리 데리고 가서 혼자가 되나 유령 내 심장 속에는 호우豪雨 벌레가 살아서 나는 머지않아 죽으리라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가끔 시가 병을 낫게 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궁금해진다 나는 의사 앞에만 가면 어디가 아픈지 잘 말할 수 없다 꾀병이 아닌데 이 아픔을 어떻게 말해야 당신이 믿을까 로스트 인 스페이스** 밤이 깊으면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알기 위해 잊는다 살갗에 망각의 극피棘皮가 돋은 어둠이 된다 바다 밑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 달빛만이 꿈인 듯 옛날인 듯 내 뒤를 따른다 먼저 자요 먼저 자요 당신, 편지를 쓰면서 나는 차츰 알게 되리라 편지를 받게 되리라 여드름도 가라앉고 아름다운 주름도 생기리라
*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光陰的故事〉(1982) 중 에드워드 양 감독의 “지망指望” 편 ** 이 시의 소제목은 짐 자무시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미스터리 트레인〉(1989)의 세 에피소드 제목 “파 프롬 요코하마” “고스트” “로스트 인 스페이스”를 차용함 첩첩산중
여기 나쁜 게 있어요? —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거기에는 어떤 흔적이 남지 내 생각에 이 호텔엔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구나 다 좋은 일만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걸 샤이닝하는 사람은 볼 수 있단다* 오버룩 호텔에서는 끔찍한 일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잊고 울리는 이곳으로 돌아온다 타자기가 호텔 라운지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눈보라의 백서가 첩첩산중의 빈 곳을 채우면서 쌓여간다 산은 우리를 목구멍 안에 넣고 입을 닫는다 우리가 쓴 하얀 편지도 산의 먹이가 된다 오버룩 호텔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호텔은 우리를 삼키고 반추한다 겨우내 눈보라의 고립 속에서 우리는 말하는 법을 잊고 이 방 저 방 쫓겨다닌다 방만 바꾼다 우리는 먹거나 먹힌다 마음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다 식인종이 뜨겁게 운다 눈이 덮이면 우리는 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어도 본다 그 일은 세대가 바뀌어도 일어난다 어두운 유산이다 미로 속에서 타이핑 소리 울린다 눈 위에 쓴 편지는 어떤 밤보다 두껍다 아무도 없는데 많은 발자국, 미로 속에는 우리 마음의 피 묻은 무늬 *스탠리 큐브릭 영화 〈샤이닝〉(1980) —계간 《포지션》 2023년 겨울호 ---------------------- 장이지/ 1976년 전남 고흥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시선집 『안국동울음상점1.5』, 문학평론집 『환대의 공간』 『콘텐츠의 사회학』 『세계의 끝, 문학』, 영화평론집 『극장전: 시뮬라크르의 즐거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