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사 1800~1830
THE CULTURE OF THE EUROPEANS
Donald Sassoon 도널드 서순 지음
뿌리와 이파리 刊
모처럼 수준이 높은 책을 골라서 끙끙대며 2주를 읽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간다. 내용도 인명이 많이 나오고 나라도 유럽을 마구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머리에 남는 것이 없지만 몇 마디로 요약을 한다.
우리에게 문화적 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부터 200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거나 쓸 수 없었고, 학교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퇴직할 직장도 없었지만 어차피 일찍 죽었다. 책 살 돈도 없었고 도서대여점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들이나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읽지도 듣지도 못했다. 음악이라고 해도 1년에 몇 번 열리는 축제나 장터에서 경험하거나 동네 교회에서 찬송가 듣는 것이 전부였다. 1800년대의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2000년대의 평범한 상점의 종업원보다 문화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문화라는 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급격히 확산되었는데 이때는 보통 정체성의 의미로 쓰였다. 특정한 나라 내부에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다문화’사회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때 문화라는 말은 그저 일군의 믿음, 어떤 경향. 어떤 상황을 가리킬 뿐이다. 작가들이 생성된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배포 된다. 책은 대출 도서관, 신문은 연재물, 서점을 통해 유통된다. 영화는 영화관과 TV로 배급된다. 음악은 연주회장에서 공연 뒤 음반과 방송으로 유통되며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내려 받는다. 한시대의 ‘고급문화’는 다른 시대의 ‘대중문화’가 된다. 르네상스의 걸작 모나리자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의 하나다. 민요는 한때 낭만주의자들이 숭배했고, 지금은 몇몇 민중지향적인 중간계급 모임에서 숭배한다.
문화는 자기 자신을 먹이로 삼아 움직여나간다. 문화생산자, 작가 예술가는 동시에 소비자다. 문화는 전에 생산된 것들 가운데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이로 삼아 몸집을 기운다. 문화는 자신의 시장을 창조한다. 문화의 생산은 더 많은 문화를 향한 욕망을 부추긴다. 구매행위는 흔히 정체성을 암시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어서 성서를 샀다. 나는 지식인이어서 프루스트를 샀다. 나는 젊은 건달이고 여자를 좋아하니까‘플레이보이’를 샀다. 문화를 본뜨고 번안하고자 하는 유인은 오래된 것이며, 과거에도 주목을 받았듯이, 보수와 지속을 뒷받침하는 큰 힘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200년 전보다 살림이 나아지고 돈과 시간이 더 많고 교육도 더 많이 받기에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양쪽의 소비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문화의 팽창의 근원은 인구의 증가이다. 1800년대에 도서대여점에서 책을 빌리고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고, 극장에 가 오페라를 보고, 악기와 악보를 사서 집에서 음악을 연주할 의도와 능력이 있었던 유럽인은 어느 나라 누구일까?
문화시장은 가난한 나라보다는 부자나라에서 성장한다. 당시 유럽은 가난했다 인구도 적었다. 전체 1억 9천 만 명, 러시아가 4,000만 명 프랑스가 2,930만 독일이 2,450만 이태리 1,830만 스페인 1,060만 대영제국은 불과 860만 명이다. 당시에는 독서가 핵심적인 문화 활동이었다. 독서는 대체로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으로 제한된 활동이었다.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문맹자가 많았다. 빈곤층의 교육은 영국에서도 불필요하거나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다. ‘꿀벌의 우화 심판’에서 묘사된 내용을 보면 “사회가 행복하려면 사회 다수가 가난할 뿐 아니라 무지할 필요가 있다. 일하는 것보다 학교에 가는 것이 게으른 일이다”라고 생각을 했다. 노동계급에 교육을 시키면 그들은 파당을 짓고 고집을 부릴 것인데, 이 점은 제조업이 활달한 곳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우리나라 세계최초 활자로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심체요절의 인쇄술은 유럽에서 꽃을 피우는데 당시 성서 번역인쇄가 시초이다. 나라의 문화 척도를 따라간, 발간된 년대를 보면 독일이 1466년, 이탈리아 1471년, 프랑스 1487년, 네덜란드 1526년, 영국 1535년, 스웨덴 1541년, 덴마크 1550년에 각기 자국어로 인쇄하여 발간된다. 애국적인 지식인들은 문자를 통해 자기네 언어를 고귀하게 만들고자 생각한다. 각 나라의 사전이 발간되기 시작한다. 1854년 독일이 독일어 사전을 펴낸다. 자극을 받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서 사전이 줄줄이 나온다. 유럽 남동부는 여러 민족의 말이 있다. 헝가리어, 슬라베노세르비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코스보어로, 알바니아어는, 유럽 남방 방언이 언어로 독립을 얻은 것은 1980년대 중반으로 알바이아가 독립을 한 뒤 70년 후다. 폴란드민족은 우크라이나어, 벨로루시어어, 리투아니아어를 쓰는 민족과 혼재되어 국가가 아닌 시기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국가였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낀 약소국이고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 스웨덴에 넘어갔다 1905년에야 독립을 한다.
책을 출판하려면 작가, 출판업자, 인쇄업자, 서적상으로 구성된다. 18세기 말까지는 출판업자가 도련과 제본을 거치지 않은 인쇄지를 서적상에 팔면 서적상이 제본을 해서 판매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평균 인쇄부수는 1500부 이내다. 1612년 까지 모스코자 공국은 총 발행된 책이 30종이 안되지만 1700년에는 500종으로 늘었다. 잉글랜드는 1500년 46종이던 신간이 1640년에는 577종으로 늘었다. 새로운 문학시장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이미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패권을 장악한 국가의 문제는 구제불능일 만큼 자기중심적인 편협성이다. 패권국의 문화, 책, 희곡은 다른 나라로 수출되고 패권국의 여러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 모방되며, 사상은 다른 나라에서 응용된다. 패권국은 다른 나라의 경배를 받으며 그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가 모든 나라의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는 중요한 것이 없고 우리 문화에 들여오거나 적용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영국 작가 ‘월터 스콧’의 작품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포르투갈은 이를 다시 번역하여 발생하는데 30년 뒤다. 스페인 소설의 부흥도 스콧의 번역에서 시작된다. 스콧 작품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대단하여 스콧에 관한 에세이나 책이 792편이나 출간된다. 늘그막에 괴테는 세계문학 시대가 동텄다고 선언하곤 했다.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같은 말을 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엉청난 성공을 거둔다. 덕분에 하룻밤 사이에 온 유럽의 유명인 이 된다.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나폴레옹 황제는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괴테에 말을 한다. 독일은 영국처럼 이처드슨 같은 이도, 스몰릿과 필딩 같은 이도, 스턴과 스콧 같은 이도 없었다. 그러나 괴테가 나옴으로 프랑스 같은 패권을 쥔 나라도 혹시나 독일에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후진국이라는 현실은 찬란한 과거를 지닌 나라들을 격분시킨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영광과 찬란한 르네상스의 황금시대가 있었는데, 서글픈 눈으로 다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잡으려면 남에게 배워야 했고, 그러다보면 외국의 지배력이 커진다. 이탈리아 문학계는 본질적으로 프랑스를 모방하고 의존하고 있었다. 1832년 이탈리아의 실비오펠리코의 ‘나의 옥중기’라는 회고록이 나와 다른 나라어로 중역된다. 스페인도 문화적 후진성에 지식인을 괴롭힌다. 스페인 국민이 읽는 책은 외국 소설이었고 번역본이었다. 러시아는 이탈리아나 스페인과는 달리 문자해독율이 낮았어도 잠재적으로는 더 넓은 시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급귀족은 희극, 오페라, 멜로드라마를 즐겼고, 하층민은 소극을 보고 행상이 파는 소설, 교회 성부들의 생애, 도덕적 교훈을 담은 이야기를 읽었다. 러시아는 마침내 광활한 땅덩어리, 교양 있는 귀족, 두터운 지식층을 밑천으로 탁월한 소설가를 배출한다.
문학에서 큰 주제는 바로 사랑과 유혹이다. 젊은 여자가 자신에 어울리는 남편감을 얻으려 쓰는 전략의 묘사다. 이 주제는 지금도 쓰인다. 오늘날은 그때 보다 이혼이 쉽기에, 상대를 쉽게 찾고, 또 찾을 수 있다. 이 남자다 싶었는데 아니다 싶으면, 모퉁이만 돌아가면 더 멋진 사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배필을 얻는 것, 그리고 결혼 뒤에 주변에는 더 훌륭한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여성독서인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최초의 정식 신문 일간신문 ‘아인코멘데 차이퉁’은 1650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창간된다. 영국은 1702년 ‘데일리 쿠란트’가 창간된다. 스페인은 1758년에 ‘디아리오 노티시오스’가 발행된다. 1782년 영국은 일간지가 50종이나 되었다. 영국은 검열법이 폐지되면서 인쇄업자가 교회의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750년대 프랑스에서 가장 화려한 극장 ‘파리오페라’의 1등급 박스 회원은 135명이었다. 2등급 3등급의 박스석은 하층귀족, 부유한 성직자, 변호사, 잘사는 부르주아 영역이었다. 스톨석은 술 취한 하인, 장교, 멋쟁이 신사, 엘리트가 되기 위해 꿈꾸는 사람들 차지었다. 군중은 늘 아수라장 직전이었다. 군중의 노래가 늘 공연자 소리보다 컸고, 애완동물은 아무데나 똥오줌을 갈리며 날뛰었다. 맨 꼭대기 관람석 박스 ‘파라디’는 더 심했다. 작은 벽장마다 나무 양동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간이 화장실 요강이었다. 그 냄새는 여간해서 참기 어려웠다. 다른 품의 있는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공개 교수형은 1868년 폐지될 때까지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다. 템스 강가에서 글러브 없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권투와, 소곯리기, 곰곯리기도 했다. 닭싸움과 개싸움은 1849년 금지되기 전까지 벌어졌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문학작품은 이용하지 않았다. 주로 빅토르 위고, 스콧, 괴테, 셰익스피어를 선호했다. 로시니는 이탈리아가 낳은 빛나는 별인데도 그의 39편의 오페라는 13편은 프랑스를 3편은 영국을 1편은 독일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로시니의 포폐라 공연을 본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1819년에 베네치아에 있던 ‘바이런’은 “최근에 산베네데토 극장에서 로시니의 멋진 오페라 공연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녔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기념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로시니는 황제도 따를 수 없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바이런은 로시니에 소네트를 지어 바쳤다고 썼다. 1868년 로시니가 죽었을 때 타임스는 ”19세기의 가장 비범한 천재이자 가장 온화한 영혼이 떠났다‘고 썼다.
문화의 팽창 근원과 승리한 언어들 출판 이야기, 나라별 인쇄시작 시점, 문화적 패권과 오페라 이야기, 청중과 공연자들 이야기를 요약했다. 오페라를 백화점이라면 연극은 그 앞에 있는 쇼핑몰 정도라서 생략했다. 다음 권이 연속적으로 있는 모양인데 다음 편을 사봐야겠다.
2018 08 22
유럽문화사
도널드 서순 지음
뿌리와 이파리 刊
첫댓글 세계최초의 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유럽에서 인쇄술로 꽃 피었다하니
우리에게는 뼈아픈 일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