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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섭이어(呫囁耳語)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거리며 하는 귓속말
呫 : 소곤거릴 첩(口/5)
囁 : 소곤거릴 섭(口/18)
耳 : 귀 이(耳/0)
語 : 말씀 어(言/7)
출전 : 사기(史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남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작은 소리로 하는 말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 붙이고 소곤거리면서 하는 말은 대개 비밀스럽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어 하는 말이 새어 나갈 수 있으므로 비밀 유지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혹은 사랑하는 연인끼리 사랑의 표시로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도록 두 사람만 귀를 가까이 소곤거리는 귓속말은 좋은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에 대고 조용히 말한다는 것은 남의 장단점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면 바로 조선 초기 황희(黃喜) 정승을 떠올린다. 길가다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는지 묻자 다가와 귀엣말로 했다는 부이세어(附耳細語)가 그것이다.
짐승이라도 못한다는 소리 들으면 기분 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희가 좋다, 나쁘다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아 호호선생(好好先生)이 됐다. 반면 자신은 따돌리고 앞에서 두 사람이 소곤거리며(呫囁) 귀에다 대고 말을 한다면(耳語) 기분 좋을 수가 없다.
하기 쉬운 귓속말이 이처럼 어려운 성어로 나오는 곳은 '사기(史記)'에서다. 위기무안후(魏其武安侯) 열전에서 후한(後漢)의 장군 관부(灌夫)가 속삭이는 상대를 보고 호통 칠 때 사용됐다. 관부는 강직하고 아첨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6대 황제 경제(景帝)의 외척인 두영(竇嬰)이 오초(吳楚)의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우고 이후 부자처럼 가까이 지냈다.
경제의 처족으로 이복이라 미천했던 전분(田蚡)은 처음 두영을 섬기다 7대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 권력이 집중됐다. 세력을 잃었다고 두영에 함부로 대하는 것을 관부가 좋게 볼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사달이 벌어졌다.
전분이 권세가의 딸을 맞아 연회를 베풀었을 때 두영의 강권으로 관부도 내키지 않았지만 참석했다. 술을 좋아하는 관부가 안하무인의 전분에게 잔을 올렸을 때 주법에 어긋나게 반만 채우라고 말했다. 관부는 화가 나 씩씩거리다 옆 자리의 친척 조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폭발했다. "오늘 어른의 축배를 권하는데도(今日長者爲壽/ 금일장자위수), 그대는 계집애처럼 소곤대고만 있는가(乃效女兒呫囁耳語/ 내효녀아첨섭이어)."
술자리에 참가한 고관들은 엉망이 된 분위기에 하나둘씩 떠나버렸다. 위기후(魏其侯)는 두영이, 무안후(武安侯)는 전분이 후일 봉해진 이름이다.
소곤거린다고 엉뚱한데 화를 냈던 관부는 그렇지 않아도 전분의 눈 밖에 나 있었는데 잔치를 망치고 성할 수가 없었다. 관부를 구하려 노력한 두영과 함께 전분이 누명을 씌워 처형시켰다. 관부가 분에 못 이겨 일부러 한 일이긴 해도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귓속말을 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남의 험담은 물론 안 하는 것이 좋고 없는 자리서는 더욱 피할 일이다. 비밀을 지킨다고 약속한 말일수록 더욱 빨리 퍼진다고 주의시킨 말이 많다. 장유이(牆有耳)는 '벽에도 귀가 있다', 주어조청 야어서청(晝語鳥聽, 夜語鼠聽)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대로다.
■ 史記 第47 魏其武安侯列傳
(1)
魏其侯竇嬰者, 孝文後從兄子也. 父世觀津人. 喜賓客.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은 효문제(孝文帝) 황후(皇后)의 종형(從兄)의 아들이다. 조상 대대로 관진(觀津) 사람이다. 두영은 빈객을 좋아하였다.
孝文時, 嬰為吳相, 病免. 孝景初即位, 為詹事.
효문제 때 두영은 오(吳)나라 승상(丞相)이 되었었는데 병으로 사임하였다. 효경제(孝景帝)가 막 즉위하였을 때 첨사(詹事)에 임명되었다.
(2)
梁孝王者, 孝景弟也, 其母竇太后愛之.
양 효왕(梁孝王)은 효경제의 동생인데, 어머니인 두태후(竇太后)가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梁孝王朝, 因昆弟燕飲.
한번은 양 효왕이 입조하였는데 황제와 형제간이었으므로 사사로운 술자리가 벌어졌다.
是時上未立太子, 酒酣, 從容言曰: 千秋之後傳梁王.
이때 황제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었는데 주흥이 무르익자 황제가 별 생각 없이 양 효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 제위(帝位)를 양왕(梁王)에게 전해야지."
太后驩. 竇嬰引卮酒進上, 曰: 天下者, 高祖天下, 父子相傳, 此漢之約也, 上何以得擅傳梁王.
태후는 이 말을 듣자 기뻤다. 그러나 두영이 술잔을 들어 황제에게 술을 올리며 말하기를 "천하는 고조 황제의 천하로서 부자간에 서로 전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漢)나라의 규정입니다. 황제께서 무엇을 근거로 마음대로 양왕에게 전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太后由此憎竇嬰. 竇嬰亦薄其官, 因病免.
태후는 이 때문에 두영을 미워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그 관직을 가벼이 여기고 있었으므로 병이라고 칭하고 사임하였다.
太后除竇嬰門籍, 不得入朝請.
그런데 태후는 아예 두영을 문적(門籍)에서 삭제시켜버려 봄, 가을로 조회에 들어오는 것조차 막아버렸다.
(3)
孝景三年, 吳楚反.
효경제 3년, 오(吳)와 초(楚)가 반란을 일으켰다.
上察宗室諸竇毋如竇嬰賢, 乃召嬰.
황제가 종실(宗室)과 두씨(竇氏) 일족을 두루 살펴보아도 두영만큼 현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두영을 불렀다.
嬰入見, 固辭謝病不足任. 太后亦慚.
두영이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고는 병 때문에 중책을 맡기에 부족하다고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태후 역시 부끄러워 하였다.
於是上曰: 天下方有急, 王孫寧可以讓邪.
이때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는 바야흐로 위급한 시기이다. 왕손(王孫)은 어찌 겸양만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乃拜嬰為大將軍, 賜金千斤.
이에 두영을 대장군(大將軍)에 배수하고 금 1,000근을 하사하였다.
嬰乃言袁盎欒布諸名將賢士在家者進之.
두영은 곧 원앙(袁盎), 난포(欒布) 등 집에 머물러 있는 여러 명장현사(名將賢士)를 추천하였다.
所賜金, 陳之廊廡下, 軍吏過, 輒令財取為用, 金無入家者.
또 하사받은 금은 궁전의 행랑에 진열해두고 군리(軍吏)가 가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 쓰게 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져간 금은 하나도 없었다.
竇嬰守滎陽, 監齊趙兵.
두영은 형양(滎陽)에 주둔하여 제(齊), 조(趙) 지역의 한나라 군사를 감독하였다.
七國兵已盡破, 封嬰為魏其侯.
일곱 나라의 군대가 이미 다 격파되자 황제는 두영을 위기후(魏其侯)에 봉하였다.
諸游士賓客爭歸魏其侯.
여러 유사(游士)들과 빈객들이 다투어 위기후에게 의탁하였다.
孝景時每朝議大事, 條侯魏其侯諸列侯莫敢與亢禮.
효경제 때 매번 조정에서 큰 일을 의논할 때면 여러 열후(列侯)들은 조후(條侯), 위기후를 감히 자신들과 동등한 예로 대하려 들지 않았다.
(4)
孝景四年, 立栗太子, 使魏其侯為太子傅.
효경제 4년에 율태자(栗太子)를 세워 위기후를 태자부(太子傅)로 삼았다.
孝景七年, 栗太子廢, 魏其數爭不能得.
그후 효경제 7년에 율태자가 폐해지자 위기후는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魏其謝病, 屏居藍田南山之下數月.
그러자 위기후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남전(藍田)의 남산(南山) 기슭에서 몇달을 머물렀다.
諸賓客辯士說之, 莫能來.
여러 빈객들과 변사(辯士)들이 그를 설득하였으나 누구도 그를 돌아오게 하지 못하였다.
梁人高遂乃說魏其曰: 能富貴將軍者, 上也; 能親將軍者, 太后也. 今將軍傅太子, 太子廢而不能爭; 爭不能得, 又弗能死. 自引謝病, 擁趙女, 屏間處而不朝. 相提而論, 是自明揚主上之過. 有如兩宮螫將軍, 則妻子毋類矣.
이러던 차에 양(梁)나라 사람 고수(高遂)가 위기후에게 유세하여 말하였다. "장군을 능히 부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이십니다. 장군을 능히 친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태후 마마이십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태자의 스승이 되어, 태자가 폐위되었는데도 간하지 못하셨고, 간하였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하셨으며, 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병을 핑계로 조희(趙姬)를 끼고 한적한 곳에 물러나와 입조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서로 비교하여 의론하고 계시니 이는 스스로 황제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령 두 궁궐에서 장군에게 분노하신다면 장군의 일족은 살아 남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魏其侯然之, 乃遂起, 朝請如故.
위기후는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마침내 몸을 일으켜 옛날과 같이 조회에 참석하였다.
(5)
桃侯免相.
도후(桃侯)가 승상에서 해임되었다.
竇太后數言魏其侯, 孝景帝曰: 太后豈以為臣有愛, 不相魏其. 魏其者, 沾沾自喜耳, 多易. 難以為相, 持重.
두태후가 여러 차례 위기후를 천거하자 효경제가 두태후에게 말하였다. "태후께서는 어찌 제가 자리에 인색하여 위기(魏其)를 승상에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위기라는 사람은 경박하여 스스로 득의만만할 따름입니다. 경솔한 면이 많으므로 승상으로 써서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 어렵습니다."
遂不用, 用建陵侯衛綰為丞相.
마침내 위기후를 등용하지 않고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을 승상으로 삼았다.
(6)
武安侯田蚡者, 孝景後同母弟也, 生長陵.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효경제 황후의 아버지가 다른 동생으로 장릉(長陵)에서 태어났다.
魏其已為大將軍後, 方盛, 蚡為諸郎, 未貴.
위기후가 이미 대장군이 되고 난 후에 바야흐로 위세가 드높을 때 전분은 제랑(諸郎)으로 존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往來侍酒魏其, 跪起如子姓.
그는 위기후의 집에 드나들며 위기를 모시고 술자리를 함께 하곤 하였는데 꿇어앉고 일어서는 행동거지가 마치 자식이나 손자와 같았다.
及孝景晚節, 蚡益貴幸, 為太中大夫.
효경제 만년에 이르러 전분은 차츰 존귀하게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蚡辯有口, 學槃盂諸書, 王太后賢之.
전분은 언변이 뛰어났고 '반우(槃盂)' 등의 여러 책들을 공부하여 왕태후(王太后)가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孝景崩, 即日太子立, 稱制, 所鎮撫多有田蚡賓客計筴.
효경제가 붕어하자 당일로 태자(太子)를 세우고 왕태후가 섭정하였는데, 이때 신하들과 백성을 누르고 달래는 데 전분 문하의 빈객들이 낸 계책을 많이 사용하였다.
蚡弟田勝, 皆以太后弟, 孝景後三年封蚡為武安侯, 勝為周陽侯.
전분과 전분의 아우 전승(田勝)은 모두 태후의 동생이라고 하여 효경제 후원(後元) 3년에 전분은 무안후(武安侯), 전승은 주양후(周陽侯)에 각각 봉해졌다.
(7)
武安侯新欲用事為相. 卑下賓客, 進名士家居者貴之, 欲以傾魏其諸將相.
무안후는 새로 정권을 잡아 승상이 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몸을 낮추어 빈객을 대하고 집에 머물러 있는 명사(名士)를 추천하여 그들을 존귀하게 함으로써 위기 등의 여러 장상(將相)들을 누르고자 하였다.
建元元年, 丞相綰病免, 上議置丞相太尉.
건원(建元) 원년에 승상 위관이 병으로 사임하였다. 황제는 승상, 태위(太尉)의 임명을 논의하였다.
籍福說武安侯曰: 魏其貴久矣, 天下士素歸之. 今將軍初興, 未如魏其, 即上以將軍為丞相, 必讓魏其. 魏其為丞相, 將軍必為太尉. 太尉丞相尊等耳, 又有讓賢名.
적복(籍福)이 무안후에게 말하였다. "위기후는 존귀하게 된 지가 오래입니다. 천하의 선비들이 평소부터 그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지금 막 일어나는 중이므로 위기후만 못합니다. 만약 황제께서 장군을 승상으로 삼으려 하시면 반드시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위기후가 승상이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될 것입니다. 태위와 승상은 존귀하기가 동등합니다. 아울러 장군은 어진 인사에게 승상의 자리를 양보하였다는 명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武安侯乃微言太后風上, 於是乃以魏其侯為丞相, 武安侯為太尉.
이에 무안후는 태후에게 에둘러 말하여 은연중에 황제에게 전달되게 하였다. 그래서 위기후가 승상이 되고 무안후가 태위가 되었다.
籍福賀魏其侯, 因吊曰: 君侯資性喜善疾惡, 方今善人譽君侯, 故至丞相; 然君侯且疾惡, 惡人眾, 亦且毀君侯. 君侯能相容, 則幸久; 不能, 今以毀去矣.
적복이 무안후를 축하하러 가서는 조의(弔意)를 표하면서 말하였다. "군후(君侯)께서는 품성이 선한 것을 좋아하시고 악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지금 착한 사람들이 군후를 칭송하므로 승상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후께서는 장차 악한 것을 미워하실 것입니다. 천하에 악한 사람은 많습니다. 이들 역시 장차 군후를 비방할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능히 악인도 겸하여 포용하셔야 다행히 지위를 오래 보전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곧 비방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시게 될 것입니다."
魏其不聽.
그러나 위기후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8)
魏其武安俱好儒術.
위기후와 무안후는 모두 유학을 좋아하였다.
推轂趙綰為御史大夫, 王臧為郎中令, 迎魯申公, 欲設明堂.
조관(趙綰)을 추천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 왕장(王臧)을 추천하여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으며, 노(魯) 땅의 신공(申公)을 맞아들여 명당(明堂)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令列侯就國, 除關, 以禮為服制, 以興太平.
열후들을 자기들의 영지로 돌아가게 하였고 관(關)을 폐지하였으며 예법에 따라 복식(服飾)을 정하는 등, 태평정치를 진작시켰다.
舉適諸竇宗室毋節行者, 除其屬籍.
외척과 종실(宗室) 가운데서 행실이 옳바르지 못한 자를 들추어내어 견책하고 그를 족적(族籍)에서 삭제하였다.
時諸外家為列侯, 列侯多尚公主, 皆不欲就國.
이때 많은 외척들이 열후가 되어 있었는데, 열후들은 대부분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모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以故毀日至竇太后.
그래서 비방하는 소리가 나날이 두태후에게 들려왔다.
太后好黃老之言, 而魏其武安趙綰王臧等務隆推儒術, 貶道家言, 是以竇太后滋不說魏其等.
태후는 황로(黃老)의 말을 좋아하였는데 위기, 무안, 조관, 왕장 등은 유가(儒家)의 학술을 높이고 도가(道家)의 말을 깎아내렸으므로 이 때문에 두태후는 더욱 위기 등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及建元二年, 御史大夫趙綰請無奏事東宮.
건원(建元) 2년에 어사대부 조관이 동궁(東宮)에 정무 보고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자고 황제에게 청원하였다.
竇太后大怒, 乃罷逐趙綰王臧等.
두태후는 크게 노하여 곧 조관, 왕장 등을 내쫓았다.
而免丞相太尉, 以柏至侯許昌為丞相, 武彊侯莊青翟為御史大夫.
그리고 승상과 태위를 해임하고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을 승상으로 삼고 무강후(武强侯) 장청책(莊靑翟)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魏其武安由此以侯家居.
위기후와 무안후는 이로써 후의 신분을 가진 채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9)
武安侯雖不任職, 以王太后故, 親幸, 數言事多效, 天下吏士趨勢利者, 皆去魏其歸武安. 武安日益橫.
무안후가 비록 직책은 맡지 못하고 있었지만 왕태후와의 연고로 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 정사에 관해서 말한 것이 많이 채택되어 성과를 보니, 천하의 권세와 이익을 좇는 선비들과 관리들은 모두 위기후를 떠나 무안후에게 돌아갔다. 무안후는 날로 더욱 방자해졌다.
建元六年, 竇太后崩, 丞相昌御史大夫青翟坐喪事不辦, 免.
건원 6년에 두태후가 붕어하였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책은 두태후의 상례(喪禮)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다 하여 해임되었다.
以武安侯蚡為丞相, 以大司農韓安國為御史大夫.
그러고는 무안후 전분을 승상으로 삼고 대사농(大司農) 한안국(韓安國)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天下士郡諸侯愈益附武安.
천하의 선비와 군국의 제후들은 더더욱 무안후에게 모여들었다.
(10)
武安者, 貌侵, 生貴甚.
무안후는 키가 작고 못생겼으면서 매우 거만하였다.
又以為諸侯王多長, 上初即位, 富於春秋, 蚡以肺腑為京師相, 非痛折節以禮詘之, 天下不肅.
또 혼자 생각하기를 "제후들과 왕들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많다. 주상이 막 즉위하여 아직 나이가 어리니 전분이 외척으로서 경사의 승상이 된 이상 그들을 매섭게 깎아내려 예로써 굴복시키지 않으면 천하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當是時, 丞相入奏事, 坐語移日, 所言皆聽.
이때에 이르러 승상 전분이 입조하여 정무을 아뢸 때에는 앉아서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황제가 다 들어주었다.
薦人或起家至二千石, 權移主上.
사람을 추천하는 데에도 때로는 집에 머물러 있는 자를 세워서 단숨에 2,000석(二千石)의 신분에 이르게 하기도 하여 실권이 황제로부터 그에게로 옮겨갔다.
上乃曰: 君除吏已盡未. 吾亦欲除吏.
이에 황제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관리 임명이 끝났는가, 아직 남았는가? 나도 관리를 임명하고 싶은데."
嘗請考工地益宅, 上怒曰: 君何不遂取武庫.
한번은 승상이 집을 늘리려고 고공(考工)의 땅을 청하자 황제가 화를 내며 "그대는 어째서 숫제 무기고를 가져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是後乃退.
이후로 그는 약간 행동을 삼가게 되었다.
嘗召客飲, 坐其兄蓋侯南鄉, 自坐東鄉.
또 일찍이 손님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벌였는데 그의 형 갑후(蓋侯)는 남쪽을 향하고 앉게 하고 자신은 동쪽을 향하고 앉았다.
以為漢相尊, 不可以兄故私橈.
그는 "한나라 승상은 존귀한 자리이니 형이라고 하여 사사로이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武安由此滋驕, 治宅甲諸第.
무안후는 이로부터 더욱 교만하여 집을 수리하고 꾸미는 데 귀족 저택 중에서 으뜸가게 만들었다.
田園極膏腴, 而市買郡縣器物相屬於道.
밭이나 임야는 아주 비옥하고 군현(郡縣)에서 기물(器物)을 사들여 오는 행렬이 길에 서로 이어졌다.
前堂羅鍾鼓, 立曲旃; 後房婦女以百數.
전당(前堂)에는 종과 북을 벌여두고 곡전(曲旃)을 세워두었으며, 뒤채에는 부녀가 100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諸侯奉金玉狗馬玩好, 不可勝數.
제후들이 진상한 금과 옥, 개와 말 그리고 완호물(玩好物) 등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11)
魏其失竇太后, 益疏不用.
위기후는 두태후라는 의지처를 잃고 나자 더욱 황제와 소원해져서 쓰이지 않았다.
無勢, 諸客稍稍自引而怠傲. 唯灌將軍獨不失故.
세력이 없어지자 여러 빈객들도 자연 차츰차츰 멀어지며 그를 대하는 것이 태만하고 방자해졌다. 오로지 관장군(灌將軍)만이 홀로 옛 정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魏其日默默不得志, 而獨厚遇灌將軍.
위기후는 매일 침묵한 채 뜻을 얻지 못하면서 단지 관장군만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12)
灌將軍夫者, 潁陰人也.
관장군 관부(灌夫)는 영음(穎陰) 사람이다.
夫父張孟, 嘗為潁陰侯嬰舍人, 得幸, 因進之至二千石. 故蒙灌氏姓為灌孟.
관부의 아버지 장맹(張孟)은 일찍이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가신(家臣)이었는데 관영의 총애를 받아, 관영이 그를 추천하여 2,000석의 신분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관씨(灌氏) 성을 따서 관맹(灌孟)이 되었다.
吳楚反時, 潁陰侯灌何為將軍, 屬太尉, 請灌孟為校尉.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음후 관하(灌何)가 장군이 되어 태위의 휘하에 속하게되었는데 관맹을 교위(校尉)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夫以千人與父俱.
관부는 1,000명을 이끌고 아버지와 동행하였다.
灌孟年老, 潁陰侯彊請之, 鬱鬱不得意.
관맹은 이미 나이가 많았는데 (그래서 태위가 그를 기용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을) 영음후가 강하게 그를 추천하였던 것이므로 그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故戰常陷堅, 遂死吳軍中.
그래서 싸움이 나면 항상 적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오나라 군대 속에서 죽게 되었다.
軍法, 父子俱從軍, 有死事, 得與喪歸.
당시의 군법에는 부자가 함께 종군하여 한 사람이 전사하면 유해와 함께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灌夫不肯隨喪歸, 奮曰: 原取吳王若將軍頭, 以報父之仇.
그러나 관부는 유해를 따라 돌아가려 하지 않고 분연히 말하였다. "원컨대 오나라의 왕이든 장군이든 목을 얻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십시오."
於是灌夫被甲持戟, 募軍中壯士所善原從者數十人.
이때 관부는 갑옷을 입고 창을 쥐고는 군영 중에서 자기와 친하면서 따라나서기를 원하는 장사 수십명을 모집하였다.
及出壁門, 莫敢前. 獨二人及從奴十數騎馳入吳軍.
그러나 영채(營寨)의 문을 나설 때 감히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단지 두 사람과 관부를 따라온 하인 십 수명만이 말을 달려 오나라 군영 속으로 달려들었다.
至吳將麾下, 所殺傷數十人.
오나라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수십명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다.
不得前, 複馳還, 走入漢壁, 皆亡其奴, 獨與一騎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다시 말을 달려 돌아왔는데 한나라 영채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 하인들은 모두 죽고 단지 다른 한 기(騎)의 장사만 더불어 돌아왔을 뿐이었다.
夫身中大創十餘, 適有萬金良藥, 故得無死.
관부 자신도 몸에 10여 군데의 큰 상처를 입었는데 마침 만금의 가치가 나가는 좋은 약이 있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夫創少瘳, 又複請將軍曰: 吾益知吳壁中曲折, 請複往.
관부는 상처가 조금 치유되자 또다시 장군에게 청원하여 말하였다. "저는 이제 오나라 영채의 정황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다시 가게 해주십시오."
將軍壯義之, 恐亡夫, 乃言太尉. 太尉乃固止之.
장군은 그가 담력과 의협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관부를 잃게 될까 두려워 곧 태위에게 이 일을 말하였다. 이에 태위가 굳이 그를 말려 중지시켰다.
吳已破, 灌夫以此名聞天下.
오나라가 패하고 나자 관부는 이 일로 하여 천하에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13)
潁陰侯言之上, 上以夫為中郎將.
영음후가 그를 황제에게 추천하여 황제는 그를 중랑장(中郎將)으로 삼았다.
數月, 坐法去.
그러나 몇달 만에 범법행위로 물러났다.
後家居長安, 長安中諸公莫弗稱之.
이후로 장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장안의 여러 공(公)들 중에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孝景時, 至代相.
효경제 때에는 대(代)나라의 승상 자리에 올랐다.
孝景崩, 今上初即位, 以為淮陽天下交, 勁兵處. 故徙夫為淮陽太守.
효경제가 붕어하고 지금의 황제가 막 즉위하였을 때, 황제는 회양(淮陽)이 천하 교통의 요충지로서 강대한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관부를 옮겨 회양의 태수(太守)로 삼았다.
建元元年, 入為太僕.
건원 원년에 관부는 조정에 들어가 태복(太僕)이 되었다.
二年, 夫與長樂衛尉竇甫飲, 輕重不得, 夫醉, 搏甫.
건원 2년에 그는 장락위위(長樂衛尉) 두보(竇甫)와 술을 마셨는데 대우하는 예절의 존비(尊卑)가 온당하지 못하여 관부는 술에 취하자 두보를 때려버렸다.
甫, 竇太后昆弟也.
두보는 두태후와 형제간이었다.
上恐太后誅夫, 徙為燕相.
황제는 태후가 관부를 징벌할까 두려워서 그를 연(燕)나라 승상으로 옮기게 하였다.
數歲, 坐法去官, 家居長安.
몇년 뒤에 그는 다시 범법행위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안의 집에 머물렀다.
(14)
灌夫為人剛直使酒, 不好面諛.
관부는 주벽(酒癖)이 있으나 사람됨이 강직하여 면전에서 기분을 맞추어 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貴戚諸有勢在己之右, 不欲加禮, 必陵之.
귀척을 비롯하여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를 표하려 하지 않았고 반드시 그들을 업신여겼다.
諸士在己之左, 愈貧賤, 尤益敬, 與鈞.
그보다 신분이 낮은 선비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빈천할수록 특히 더 공경하며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稠人廣眾, 薦寵下輩, 士亦以此多之.
빽빽히 들어찬 군중 속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을 추천하여 그를 드러내었으니 선비들도 또한 이로 인해서 그를 칭송하였다.
(15)
夫不喜文學, 好任俠, 已然諾.
관부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협기(俠氣)를 좋아하였으며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꼭 실천하였다.
諸所與交通, 無非豪桀大猾.
무릇 그와 더불어 교유하는 자는 호걸이나 도적의 두목이 아닌 자가 없었다.
家累數千萬, 食客日數十百人.
집안에는 수천만 금을 쌓아두었으며 식객이 매일 수십에서 100여 명을 헤아렸다.
陂池田園, 宗族賓客為權利, 橫於潁川, 潁川兒乃歌之曰: 潁水清, 灌氏寧; 潁水濁, 灌氏族.
저수지와 밭이며 농장이 많았는데 그의 종족과 빈객들이 권세를 확장하고 이익을 독점하며 영천(穎川)에서 세도를 부렸기 때문에 영천의 아이들은 그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영수(穎水)가 맑으면 관씨(灌氏)는 편안하네. 영수가 흐리면 관씨는 멸족당하리."
(16)
灌夫家居雖富, 然失勢, 卿相侍中賓客益衰.
관부가 비록 재산은 많았지만 집에 머물면서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경상(卿相), 시중(侍中), 빈객들이 차츰 줄어들었다.
及魏其侯失勢, 亦欲倚灌夫引繩批根生平慕之後棄之者.
위기후도 세력을 잃은 뒤에는 관부를 의지처로 삼아 평생 그를 사모하다가 뒤에 가서 그를 버리는 자들을 배척하고자 하였다.
灌夫亦倚魏其而通列侯宗室為名高.
관부 역시 위기후에 의지하여 열후나 종실과 왕래하여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다.
兩人相為引重, 其游如父子然.
두 사람은 서로 이끌고 존중하며 그 교유하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과도 같았다.
相得驩甚, 無厭恨相知晚也.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매우 기뻐하며 싫증내지 않았고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17)
灌夫有服, 過丞相.
한번은 관부가 거상중(居喪中)에 승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丞相從容曰: 吾欲與仲孺過魏其侯, 會仲孺有服.
승상은 별 생각 없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중유(仲孺)와 더불어 위기후를 방문하고 싶은데 마침 중유가 상복을 입고 있으니‥‥"
灌夫曰: 將軍乃肯幸臨況魏其侯, 夫安敢以服為解. 請語魏其侯帳具, 將軍旦日蚤臨.
관부가 말하였다. "장군께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의 집에 행차해주려 하시니 부가 어찌 감히 거상중임을 핑계삼겠습니까? 원컨대 제가 위기후에게 연회준비를 하도록 알리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내일 아침에 와주십시오."
武安許諾.
무안후가 허락하였다.
灌夫具語魏其侯如所謂武安侯.
관부는 무안후에게 말한 바와 같이 위기후에게 상세히 말하였다.
魏其與其夫人益市牛酒, 夜灑埽, 早帳具至旦.
위기후와 그 부인은 술과 고기를 많이 사고 밤에 청소를 하여 새벽 무렵까지 접대준비를 마쳤다.
平明, 令門下候伺. 至日中, 丞相不來.
날이 밝아오자 사람을 시켜 영접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오도록 승상은 오지 않았다.
魏其謂灌夫曰: 丞相豈忘之哉.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하였다. "승상이 어찌 잊었단 말인가?"
灌夫不懌, 曰: 夫以服請, 宜往.
관부는 기분이 상하여 말하였다. "부가 상복을 입고서도 청하였는데 승상은 마땅히 왔어야지."
乃駕, 自往迎丞相.
이에 수레를 타고 자신이 승상을 맞으러 갔다.
丞相特前戲許灌夫, 殊無意往.
승상은 단지 농담삼아 승낙하였던 것으로 딱히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及夫至門, 丞相尚臥.
관부가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승상은 아직 자리에 누워 있었다.
於是夫入見, 曰: 將軍昨日幸許過魏其, 魏其夫妻治具, 自旦至今, 未敢嘗食.
이때 관부가 들어가서 승상을 보고는 말하였다. "장군께서 어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고 허락하셨으므로 위기후 부부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놓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감히 식사도 못하고 있습니다."
武安鄂謝曰: 吾昨日醉, 忽忘與仲孺言.
무안후는 놀라 사과하며 말하였다. "내가 어제 취하여 중유와 하였던 말을 잊어 먹었구려."
乃駕往, 又徐行, 灌夫愈益怒.
이에 수레를 타고 갔는데, 또 가는 것도 느릿느릿 하였으므로 관부는 더더욱 화가 났다.
及飲酒酣, 夫起舞屬丞相.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관부가 일어나 춤을 추고는 승상에게 권하였다.
丞相不起, 夫從坐上語侵之.
승상이 일어나지 않자 관부는 앉은 자리에서 승상을 자극하는 말을 하였다.
魏其乃扶灌夫去, 謝丞相.
위기후는 이에 관부를 부축하여 데리고 나가고 승상에게 사과하였다.
丞相卒飲至夜, 極驩而去.
승상은 마침내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셔 즐거움을 다하고서 돌아갔다.
(18)
丞相嘗使籍福請魏其城南田.
승상이 한번은 적복(籍福)을 시켜 위기후에게 성 남쪽 밭을 요구하였다.
魏其大望曰: 老僕雖棄, 將軍雖貴, 寧可以勢奪乎. 不許.
위기후는 크게 원망하며 말하였다. "늙은 종이 비록 버림받았고 장군이 비록 귀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설마 권세로써 탈취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灌夫聞, 怒, 罵籍福.
관부가 이 말을 듣자 노하여 적복을 욕하였다.
籍福惡兩人有郤.
적복은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乃謾自好謝丞相曰: 魏其老且死, 易忍, 且待之.
이에 사실을 속이고 스스로 승상에게 좋은 말로 거절하여 말하였다. "위기후는 늙어서 곧 죽을 것입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잠시 기다립시다."
已而武安聞魏其灌夫實怒不予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안후는 위기후와 관부가 사실은 분노하여 밭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亦怒曰: 魏其子嘗殺人, 蚡活之. 蚡事魏其無所不可, 何愛數頃田. 且灌夫何與也. 吾不敢複求田.
그 역시 노하며 말하였다. "위기(魏其)의 아들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을 때 분(蚡)이 그를 살려주었다. 분이 위기를 섬겨 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어찌 밭뙈기 몇 고랑을 아낀다는 말인가? 또 관부는 무슨 참견인가? 내 다시는 밭을 요구하나봐라."
武安由此大怨灌夫魏其.
무안후는 이로써 관부와 위기후를 크게 원망하였다.
(19)
元光四年春, 丞相言灌夫家在潁川, 橫甚, 民苦之. 請案.
원광(元光) 4년 봄, 승상이 황제에게 관부의 집이 영천에 있으면서 세도가 심하여 백성들이 그에게 고통을 받는다고 아뢰고 수사를 청하였다.
上曰: 此丞相事, 何請.
황제가 말하였다. "이것은 승상의 일인데 무슨 청원을 하는가?"
灌夫亦持丞相陰事, 為奸利, 受淮南王金與語言.
그러나 관부 역시 승상의 비밀스러운 일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승상이 불법으로 이익을 구한 것이나 회남왕(淮南王)의 황금을 받고 더불어 어떤 말을 나눈 것 등이다.
賓客居間, 遂止, 俱解.
그래서 양쪽의 빈객들이 중간에서 조정하여 마침내 공방을 멈추고 모두 화해하였다.
(20)
夏, 丞相取燕王女為夫人.
여름에 승상이 연(燕)나라 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有太后詔, 召列侯宗室皆往賀.
태후가 조서를 내려 열후와 종실을 불렀으므로 모두 가서 축하하였다.
魏其侯過灌夫, 欲與俱.
위기후는 관부를 방문하여 함께 가려고 하였다.
夫謝曰: 夫數以酒失得過丞相, 丞相今者又與夫有郤.
관부가 사절하면서 말하였다. "부는 여러 차례 술로 실수하여 승상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또 승상은 지금 부와 틈이 있습니다."
魏其曰: 事已解. 彊與俱.
위기후는 "그 일은 이미 해결되었네" 라고 말하며 억지로 동행하게 하였다.
飲酒酣, 武安起為壽. 坐皆避席伏.
술자리가 무르익자 무안후가 일어나서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좌중이 모두 자리에서 벗어나 엎드렸다.
已魏其侯為壽, 獨故人避席耳, 餘半膝席.
그 뒤에 위기후가 축배를 들자 단지 친분이 있는 사람만 자리를 피할 뿐 나머지 반 정도는 좌석에 무릎을 붙이고 허리만 세우는 정도였다.
灌夫不悅.
(이런 꼴을 보니) 관부는 기분이 나빴다.
起行酒, 至武安.
관부가 일어나 순서대로 술잔을 올렸는데, 순서가 무안후에 이르렀다.
武安膝席曰: 不能滿觴.
무안후는 무릎을 좌석에 붙인 채 윗몸을 세우며 말하였다. "잔을 가득 채우면 마실 수 없는데."
夫怒, 因嘻笑曰: 將軍貴人也, 屬之.
관부는 화가 났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하였다. "장군은 귀인이시니 넘치게 드셔야지요."
時武安不肯.
이때 무안후는 마시지 않았다.
行酒次至臨汝侯, 臨汝侯方與程不識耳語, 又不避席.
차례로 술잔을 올려 순서가 임여후(臨汝侯)에게 이르렀다. 임여후는 한창 정불식(程不識)과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夫無所發怒, 乃罵臨汝侯曰: 生平毀程不識不直一錢, 今日長者為壽, 乃效女兒呫囁耳語.
관부는 노기를 풀 수가 없어서 이에 임여후를 욕하였다. "평소에는 정불식이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 비방하더니 오늘은 어른이 축배를 권하는데도 계집애나 본받아 소곤소곤 귓속말을 한다는 말인가."
武安謂灌夫曰: 程李俱東西宮衛尉, 今眾辱程將軍, 仲孺獨不為李將軍地乎.
무안후가 관부에게 일러 말하였다. "정불식과 이광(李廣)은 모두 동서 두 궁전의 위위(衛尉)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장군을 욕보이고 있는데 중유는 어찌 이장군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가?"
灌夫曰: 今日斬頭陷匈, 何知程李乎.
관부가 말하였다. "오늘 머리를 자르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고 해도 정(程)이니 이(李)이니 하는 사람을 어찌 알겠는가."
坐乃起更衣, 稍稍去.
이에 좌중은 일어나 측간에 가는 체하면서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魏其侯去, 麾灌夫出.
위기후가 나가면서 관부에게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武安遂怒曰: 此吾驕灌夫罪.
무안후는 드디어 분노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관부를 교만하게 만든 죄이다."
乃令騎留灌夫.
곧 기병을 시켜 관부를 억류하게 하였다.
灌夫欲出不得.
관부는 나가려고 하였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籍福起為謝, 案灌夫項令謝.
적복이 일어나 그를 위해 사과하면서 관부의 목덜미를 누르며 사과하도록 시켰다.
夫愈怒, 不肯謝.
관부는 더욱 화를 내며 사죄하지 않았다.
武安乃麾騎縛夫置傳舍.
무안후는 곧 기병을 지휘하여 관부를 포박하여 전사(傳舍)에 두게 하였다.
召長史曰: 今日召宗室, 有詔.
그리고 장사(長史)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종실을 부른 것은 조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劾灌夫罵坐不敬, 系居室.
그러면서 관부가 (조칙에 의해서 모인) 좌중을 모욕하여 '불경죄(不敬罪)'가 된다고 탄핵하여 거실(居室)에 붙잡아 두었다.
遂按其前事, 遣吏分曹逐捕諸灌氏支屬, 皆得棄市罪.
마침내 그의 이전 일까지 조사하고, 관리보내 패를 나누어 관씨 일족을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모두 기시(棄市)의 죄에 해당되었다.
魏其侯大媿, 為資使賓客請, 莫能解.
위기후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자금을 풀어 빈객들에게 청원하게 하였으나 능히 관부를 풀려나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武安吏皆為耳目, 諸灌氏皆亡匿, 夫系, 遂不得告言武安陰事.
무안후의 관리들이 모두 다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살피니 관씨들은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관부는 잡혀 있으므로 결국 무안후의 비밀스러운 일을 고발할 수 없었다.
(21)
魏其銳身為救灌夫.
위기후는 곤란한 상황 속에서 애써 관부를 구하고자 하였다.
夫人諫魏其曰: 灌將軍得罪丞相, 與太后家忤, 寧可救邪.
그의 부인이 위기후에게 간하였다. "관장군은 승상에게 죄를 짓고 태후의 가족을 건드렸습니다.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魏其侯曰: 侯自我得之, 自我捐之, 無所恨. 且終不令灌仲孺獨死, 嬰獨生.
위기후가 말하였다. "후(侯)의 신분은 나로 인해서 획득한 것이니 나로부터 그것을 잃어도 한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황차 종국에 관중유를 홀로 죽게 하고 두영이 홀로 살아 남을 수는 없다."
乃匿其家, 竊出上書.
이에 그 집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가 상서장을 올렸다.
立召入, 具言灌夫醉飽事, 不足誅.
곧 불려 들어가게 되어 관부가 취중에 한 일로서 주벌할 만한 일이 못 됨을 상세히 아뢰었다.
上然之, 賜魏其食, 曰: 東朝廷辯之.
황제는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여 위기후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동궁(東宮)에 가서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해명하라."
(22)
魏其之東朝, 盛推灌夫之善, 言其醉飽得過, 乃丞相以他事誣罪之.
위기후는 동궁에 가서 관부의 좋은 점을 크게 드러내고 그가 취해서 죄를 지은 것인데 승상이 무고하게 다른 일로써 그에게 죄를 씌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武安又盛毀灌夫所為橫恣, 罪逆不道.
무안후 역시 관부가 저지른 횡포와 방자하였던 소행을 크게 비방한 다음 죄가 대역무도하다고 말하였다.
魏其度不可柰何, 因言丞相短.
위기후가 생각해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아 승상의 허물을 이야기하였다.
武安曰: 天下幸而安樂無事, 蚡得為肺腑, 所好音樂狗馬田宅. 蚡所愛倡優巧匠之屬, 不如魏其灌夫日夜招聚天下豪桀壯士與論議, 腹誹而心謗, 不仰視天而俯畫地, 辟倪兩宮間, 幸天下有變, 而欲有大功. 臣乃不知魏其等所為.
무안후가 말하였다. "천하가 다행히 안락하여 무사합니다. 분(蚡)은 황제의 심복되는 자리를 얻었는데,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개와 말, 밭과 집입니다. 분이 아끼는 것은 광대와 솜씨 좋은 공장(工匠)과 같은 무리입니다. 이것은 위기나 관부 등이 밤낮으로 천하의 호걸과 장사를 초청하여 더불어 의론하며 내심으로 조정을 비방하고 우러러 하늘을 살피지 않으면 땅을 굽어보거나 두 궁궐을 흘겨보며 요행이 천하에 변고가 나서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은 위기후 등이 하는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於是上問朝臣: 兩人孰是.
이때 황제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옳은가?"
御史大夫韓安國曰: 魏其言灌夫父死事, 身荷戟馳入不測之吳軍, 身被數十創, 名冠三軍, 此天下壯士, 非有大惡, 爭杯酒, 不足引他過以誅也. 魏其言是也. 丞相亦言灌夫通奸猾, 侵細民, 家累巨萬, 橫恣潁川, 淩轢宗室, 侵犯骨肉, 此所謂, 枝大於本, 脛大於股, 不折必披, 丞相言亦是. 唯明主裁之.
어사대부 한안국이 아뢰었다. "위기후가 말하기를 '관부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서 죽게 되자 몸에 창을 지니고 예측할 수 없는 오나라 군영 속으로 달려 들어가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어 이름이 삼군(三軍)에서 드높았으니 이는 천하의 장사이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술잔을 돌리다 다툰 것으로서 다른 허물을 끌어 처형할 만한 것은 못 된다'라고 하였는데 위기후의 말은 옳습니다. 승상은 또한 '관부는 도적들과 왕래하며 백성들을 침탈하고 집에는 거만(巨萬)의 재산을 쌓아두고 영천에서 세도를 부리며, 종실을 능욕하고 황실의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침범하였다. 이는 소위 가지가 근본보다 크며 종아리가 넓적다리보다 커 부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갈라진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승상의 말 또한 옳습니다. 오로지 영명하신 주상께서 그것을 판결하실 일입니다."
主爵都尉汲黯是魏其.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汲黯)은 위기후가 옳다고 하였다.
內史鄭當時是魏其, 後不敢堅對. 餘皆莫敢對.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는 위기후가 옳다고 하였다가 뒤에는 자신의 대답을 감히 견지하지 못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上怒內史曰: 公平生數言魏其武安長短, 今日廷論, 局趣效轅下駒, 吾並斬若屬矣.
황제가 내사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평소에 여러 차례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단점을 말하더니 어찌하여 오늘 조정의 변론에서는 마치 수레 끌채 아래의 망아지처럼 움츠러들어 있는가? 나는 그대들과 같은 무리까지 목을 칠 것이다."
即罷起入, 上食太后.
곧 조회를 마치고 일어나 들어가서 태후에게 음식을 올렸다.
太后亦已使人候伺, 具以告太后.
태후 역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상세하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太后怒, 不食, 曰: 今我在也, 而人皆藉吾弟, 令我百歲後, 皆魚肉之矣. 且帝甯能為石人邪. 此特帝在, 即錄錄, 設百歲後, 是屬寧有可信者乎.
태후는 화가 나서 식사는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도 사람들이 나의 동생을 깔아뭉개니 가령 내가 죽고 나면 모두 어육(魚肉) 신세가 될 것이오. 또 황제께서는 어찌 깎아 놓은 돌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오. 이들은 황제가 살아 계셔도 주견(主見) 없이 흔들리거늘 가령 황제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런 무리 중에 어찌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上謝曰: 俱宗室外家, 故廷辯之. 不然, 此一獄吏所決耳.
황제가 사과하여 말하였다. "모두 종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것을 논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옥리가 결정할 일일 따름입니다."
是時郎中令石建為上別言兩人事.
이때 낭중령 석건(石建)이 황제를 위해서 사리를 잘 따져 두 사람의 일을 아뢰었다.
(23)
武安已罷朝, 出止車門, 召韓御史大夫載, 怒曰: 與長孺共一老禿翁, 何為首鼠兩端.
무안후는 조회가 파한 뒤 지거문(止車門)을 나와서 어사대부 한안국을 불러 수레에 같이 타고 가면서 성내며 말하였다. "나는 장유(長孺)와 함께 늙은 퇴물 관료를 대적하려 하였는데 어찌하여 주저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는 말이오?"
韓禦史良久謂丞相曰: 君何不自喜. 夫魏其毀君, 君當免冠解印綬歸, 曰; 臣以肺腑幸得待罪, 固非其任, 魏其言皆是. 如此, 上必多君有讓, 不廢君. 魏其必內愧, 杜門齰舌自殺. 今人毀君, 君亦毀人, 譬如賈豎女子爭言, 何其無大體也.
한안국은 한참 뒤에 승상에게 말하였다. "승상은 어찌 자중하지 않습니까? 저들 위기후가 승상을 비방하면 승상께서는 관을 벗고 승상의 인끈을 풀어 황상께 돌려드리며 '신은 외척인 덕으로 요행히 승상직을 얻었습니다만 진실로 그 적임이 못 됩니다. 위기후의 말이 다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황제께서는 반드시 승상이 겸양하는 것을 칭찬하여 승상을 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후는 틀림없이 속으로 부끄러워 문을 닫아 걸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남이 승상을 비방한다고 승상 또한 남을 비방하니 예컨대 장사치나 계집애들 말다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리도 대세의 이치를 모르십니까?"
武安謝罪曰: 爭時急, 不知出此.
무안후는 사죄하여 말하였다. "다툴 때는 마음이 급하여 이러한 큰 대책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24)
於是上使禦史簿責魏其所言灌夫, 頗不讎, 欺謾, 劾系都司空.
이때 황제가 어사(御史)를 시켜 위기후가 관부에 대해서 한 말을 문서로 조사하게 하였는데 상당 부분 부합되지 않아 기만죄에 해당하였으므로 위기후를 탄핵하여 도사공(都司空)에 가두었다.
孝景時, 魏其常受遺詔, 曰: 事有不便, 以便宜論上.
효경제 때 위기후는 일찍이 유조(遺詔)를 받았는데 유조에는 "불편한 일이 있으면 편의대로 황제에게 보고하라"고 되어 있었다.
及系, 灌夫罪至族, 事日急, 諸公莫敢複明言於上.
위기후는 구금되고, 관부는 죄가 멸족에 이르는 등 사태가 날로 다급해지는데 여러 공(公)들 중에서 감히 황제에게 다시 밝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魏其乃使昆弟子上書言之, 幸得複召見.
위기후는 이에 조카를 시켜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유조에 관해 말하게 하여 다시 불려 들어가 알현할 기회를 가지기를 원하였다.
書奏上, 而案尚書大行無遺詔.
상서가 황제에게 올라왔는데 상서(尙書)의 문서를 조사해보니 선제(先帝)의 유조가 없었다.
詔書獨藏魏其家, 家丞封.
조서는 단지 위기후의 집에만 보관하여 가승(家丞)이 그것을 봉인해두고 있었다.
乃劾魏其矯先帝詔, 罪當棄市.
이에 위기후는 선제의 유조를 위조하였다고 탄핵되었는데 그 죄는 기시(棄市)에 해당하였다.
五年十月, 悉論灌夫及家屬.
원광 5년 10월에 관부 및 그 일족은 모두 처형당하였다.
魏其良久乃聞, 聞即恚, 病痱, 不食欲死.
위기후는 한참 뒤에야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소식을 듣자 분노하여 중풍을 앓게 되었고 음식을 끊으며 죽으려고 하였다.
或聞上無意殺魏其, 魏其複食, 治病, 議定不死矣.
혹 황제가 위기후를 죽일 뜻은 없다는 말도 들리곤 하였으므로 위기후는 다시 음식을 들고 병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그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乃有蜚語為惡言聞上, 故以十二月晦論棄市渭城.
그러자 이번에는 그를 나쁘게 말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그것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이로 인해서 12월 그믐에 위성(渭城)에서 참수되었다.
(25)
其春, 武安侯病, 專呼服謝罪.
그해 봄에 무안후는 병이 났는데 줄곧 괴로와서 큰 소리로 울고 소리치며 잘못하였다고 사죄하였다.
使巫視鬼者視之, 見魏其灌夫共守, 欲殺之.
귀신을 볼 수 있는 무당을 시켜 그를 보게 하니 위기후와 관부가 함께 그를 지키고 서서 죽이려 하는 것이 보였다.
竟死, 子恬嗣.
결국 무안후는 죽고 그의 아들 염(恬)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元朔三年, 武安侯坐衣襜褕入宮, 不敬.
원삭(元朔) 3년, 무안후는 짧은 옷을 입고 입궁하였다 하여 불경죄에 걸렸다.
(26)
淮南王安謀反覺, 治.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죄가 다스려졌다.
王前朝, 武安侯為太尉, 時迎王至霸上, 謂王曰: 上未有太子, 大王最賢, 高祖孫, 即宮車晏駕, 非大王立當誰哉.
이전에 회남왕이 입조하였을 때, 무안후는 태위로서 회남왕을 영접하러 패상(霸上)까지 가서 왕에게 말하였다. "황제께는 아직 태자가 없으신데 대왕께서 가장 현명하시고 또한 고제(高帝)의 손자이십니다. 그런즉 황제게서 붕어하시면 대왕이 즉위하지 않으면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淮南王大喜, 厚遺金財物.
회남왕은 크게 기뻐하며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上自魏其時不直武安, 特為太后故耳.
황제는 위기후의 일 때부터 무안후가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다만 태후와의 연고 때문에 그냥 두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及聞淮南王金事, 上曰: 使武安侯在者, 族矣.
회남왕이 무안후에게 황금을 준 일을 듣자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안후가 살아 있었다면 멸족당하였을 것이다."
(27)
太史公曰: 魏其武安皆以外戚重, 灌夫用一時決筴而名顯.
태사공은 말하였다. "위기후(魏其侯)와 무안후(武安侯)는 모두 외척으로서 존귀하게 되었고, 관부(灌夫)는 한 번의 모험으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魏其之舉以吳楚, 武安之貴在日月之際.
위기후가 등용된 것은 오와 초의 반란 때문이며, 무안후가 영달하게 된 것은 한 무제(漢武帝)가 막 즉위하여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할 때였다.
然魏其誠不知時變, 灌夫無術而不遜, 兩人相翼, 乃成禍亂.
그러나 위기후는 참으로 시운이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관부는 학식이 없고 겸손하지 못하였으니, 두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화란(禍亂)을 빚었다.
武安負貴而好權, 杯酒責望, 陷彼兩賢.
무안후는 존귀한 신분을 등에 업고 권세를 좋아하였으니 술자리에서 꾸짖는 것으로 저 두 어진 사람을 모함하였다.
嗚呼哀哉. 遷怒及人, 命亦不延.
오호, 슬프도다! 분노를 옮기어 남에게 이르게 하며 자신의 수명 또한 연장하지 못하였다.
眾庶不載, 竟被惡言.
뭇 사람들이 옹호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쁜 말을 듣게 되었다.
嗚呼哀哉. 禍所從來矣.
오호, 슬프도다! 재앙은 반드시 그 근원이 있나니!"
▶️ 呫(소곤거릴 첩, 소곤거릴 첨)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占(점→첩)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呫(첩, 첨)은 (1) '소곤거릴 첩'의 경우는 ①소곤거리다 ②(말을 많이) 지껄이다 ③좀스럽다 ④맛보다 ⑤작은 모양, 하찮은 모양 등의 뜻이 있고, (2) '소곤거릴 첨'의 경우는 ⓐ소곤거리다 ⓑ(말을 많이) 지껄이다 ⓒ좀스럽다 ⓓ맛보다 ⓔ작은 모양, 하찮은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귀에 입을 대고 속삭임을 첩섭(呫囁), 다른 사람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거리며 하는 귓속말을 이르는 말을 첩섭이어(呫囁耳語) 등에 쓰인다.
▶️ 囁(소곤거릴 섭, 말 많을 녑/엽)은 형성문자로 嗫(섭)의 본자(本字), 聶, 讘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聶(섭)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囁(섭, 녑/엽)은 (1) '소곤거릴 섭'의 경우는 ①소곤거리다 ②속삭이다 ③말을 머뭇거리다 등의 뜻이 있고, (2) '말 많을 녑/엽)'의 경우는 ⓐ말이 많다는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귀에 입을 대고 속삭임을 첩섭(呫囁), 머뭇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오므렸다 함을 섭유(囁嚅), 다른 사람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거리며 하는 귓속말을 이르는 말을 첩섭이어(呫囁耳語) 등에 쓰인다.
▶️ 耳(귀 이, 팔대째 손자 잉)는 ❶상형문자로 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문에서는 귀라는 뜻 이외에도 ~할 뿐이다, 혹은 ~할 따름이다 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耳자는 '귀'나 '듣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耳자는 오른쪽 귀의 귓바퀴와 귓불을 그린 것이다. 耳자는 사람의 귀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귀의 기능인 '듣다'와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글자에서는 항아리나 솥과 같이 단순히 물체의 '손잡이'를 뜻할 때도 있다. 참고로 중국 고문(古文)에서는 耳자가 종종 '~일 뿐이다'나 '~일 따름'과 같은 어조사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곤 했다. 그래서 耳(이)는 ①귀, 오관(五官)의 하나 ②성(盛)한 모양 ③뿐 ④귀에 익다, 듣다 ⑤곡식이 싹나다 그리고 ⓐ팔대째 손자(孫子)(잉)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귀와 눈 또는 남들의 주의를 이목(耳目), 겉귀의 드러난 가장자리 부분을 이개(耳介), 귀와 코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이비(耳鼻), 귀에 생기는 병을 진찰 치료하는 의술의 한 분과를 이과(耳科), 귓바퀴를 이각(耳殼), 귀동냥으로 얻은 학문을 이표(耳剽), 몹시 떠들어서 귀가 먹먹함을 이괄(耳聒), 귀로 들음을 이령(耳聆), 귀가 먹음을 이색(耳塞), 귓바퀴가 뺨에 붙은 부분을 이근(耳根), 귀로 소리를 듣는 능력을 이력(耳力), 귀에 입을 대고 하는 말을 이어(耳語), 듣기만 하여서 알게된 학문을 이학(耳學), 귓속이 곪아 앓는 병을 이통(耳痛), 귀가 먹어 들리지 않음을 이롱(耳聾), 나이 60세를 이르는 이순(耳順), 참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단지 귀로 듣기만 하고 넘겨짚어 관찰을 할 줄 모름을 이식(耳食), 귀와 눈과 입과 코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이목구비(耳目口鼻), 귀로 듣고 눈으로 봄을 이르는 말을 이문목견(耳聞目見),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다는 뜻으로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이시목청(耳視目聽), 담에도 귀가 달렸다는 뜻으로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말을 삼가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을 이속우원(耳屬于垣), 귀로 듣고 눈으로 봄으로써 일어나는 욕심 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욕망을 일컫는 말을 이목지욕(耳目之欲), 귀로 듣고 눈으로 봄 즉 틀림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이이목지(耳而目之),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친다는 뜻으로 친절히 가르침을 이르는 말을 이제면명(耳提面命),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뜻으로 남의 비평이나 의견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 버림을 이르는 말을 마이동풍(馬耳東風),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바람이 귀를 통과하는 듯 여긴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여풍과이(如風過耳), 제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얕은 꾀로 남을 속이려 하나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엄이도령(掩耳盜鈴),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으로 바르게 타이르는 말일수록 듣기 싫어함을 이르는 말로 충언역이(忠言逆耳), 귀로 들어온 것을 마음속에 붙인다는 뜻으로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입이저심(入耳著心),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먼 곳에 있는 것을 괜찮게 여기고, 가까운 것을 나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귀이천목(貴耳賤目), 남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전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을 일컫는 말을 구이지학(口耳之學),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는 뜻으로 들은 말을 귓속에 담아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언유재이(言猶在耳), 머리를 수그리고 귀를 드리워 엎드린다는 뜻으로 온순하게 맹종하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면수첩이(俛首帖耳), 콩알 두 개로 귀를 막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것이 큰 지장을 초래함을 이르는 말을 양두색이(兩豆塞耳) 등에 쓰인다.
▶️ 語(말씀 어)는 ❶형성문자로 语(어)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吾(오, 어)로 이루어졌다. 吾(오, 어)는 서로 말을 주고 받고 하는 일이, 나중에 吾(오)를 我(아)와 같이 나 또는 자신이란 뜻으로 썼고, 서로 이야기한다는 뜻인 때는 말이란 뜻을 나타내는 言(언)을 붙여 따로 語(어)를 만들었다. ❷형성문자로 語자는 '말씀'이나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語자는 言(말씀 언)자와 吾(나 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吾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를 뜻하는 吾자에 言자가 결합한 語자는 '나의 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본래의 의도를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뜻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語(어)는 명사 아래에 붙어 그것이 어떤 말인가를 나타내는 말로 ①말씀, 말, 이야기 ②새, 벌레의 소리 ③논어(論語)의 약칭(略稱) ④기뻐하는 모양 ⑤말하다, 논란(論難)하다 ⑥알리다, 고(告)하다 ⑦발표(發表)하다 ⑧의논(議論)하다, 모의(謀議)하다 ⑨이야기하다, 담화(談話)하다 ⑩대답(對答)하다 ⑪깨우치다 ⑫가르치다 ⑬설명(說明)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언(言),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담(談), 말씀 사(辭), 말씀 변(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말이 궁하여 답변할 말이 없음을 어색(語塞), 낱말의 수효 또는 낱말의 전체를 어휘(語彙), 말의 한 토막이나 말의 마디를 어구(語句),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말의 조직에 관한 법칙을 어법(語法), 말의 가락이나 말하는 투를 어조(語調), 낱말이 생겨나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근원을 어원(語源), 한 낱말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더는 가를 수 없는 부분을 어근(語根), 훌륭한 학자나 지도자들이 한 말을 간추려 모은 기록을 어록(語錄), 말의 뜻을 어의(語義), 글이나 말에서 낱말의 놓인 차례를 어순(語順),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나 글자로 나타내는 수단을 언어(言語),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사용하는 말을 용어(用語), 같은 음이나 비슷한 음을 가진 단어를 반복적으로 결합한 말을 첩어(疊語), 보통 회화로 쓰는 말을 구어(口語), 문장의 주체가 되는 말을 주어(主語), 글로만 쓰고 말로는 쓰지 않는 말을 문어(文語), 정도에 지나치게 심한 말을 격어(激語), 동아리끼리 저희들만 알도록 특정한 뜻을 숨겨 붙인 말을 은어(隱語), 남이 못 알아듣게 넌지시 하는 말을 밀어(密語),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을 내놓음 또는 그런 말을 방어(放語), 새로 말을 만들어 냄 또는 그 만든 말을 조어(造語), 말이 하나의 일관된 논의로 되지 못함 즉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말을 어불성설(語不成說), 하는 말이 재미없다는 뜻으로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맛없음을 이르는 말을 어언무미(語言無味),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어불근리(語不近理), 말을 삼가지 않고 함부로 함을 이르는 말을 어불택발(語不擇發), 사람을 부리는 것이 말을 부리듯 노련함을 일컫는 말을 어언여마(語言如馬), 대단하지 아니한 말의 허물을 일컫는 말을 어언박과(語言薄過), 항간의 뜬 소문이라는 뜻으로 저자거리나 여염에 떠도는 소문을 일컫는 말을 가담항어(街談巷語), 아무 근거없이 널리 퍼진 소문이나 터무니없이 떠도는 말을 유언비어(流言蜚語), 먼저 들은 이야기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선입지어(先入之語), 제 주제에 당치 아니한 말을 희떱게 지껄임 또는 그러한 말을 대언장어(大言壯語),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 터무니없는 말 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이르는 말을 호언난어(胡言亂語), 남을 냉정하게 접대함을 이르는 말을 냉어빙인(冷語冰人), 반 권의 논어라는 뜻으로 학습의 중요함을 이르는 말 또는 자신의 지식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반부논어(半部論語),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이르는 말을 해어지화(解語之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