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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9 사순 제5주일
그때에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11,1-45)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라자로는 부활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새 목숨을 얻은 라자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부활 은총의 핵심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못 믿을 것이 없습니다.
부활의 은총은 지식으로 접근하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론이 아닌 까닭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이 체험이듯 부활은 체험이어야 합니다. 내 몸과 마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부활해야 살아 있는 은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순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라자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아직도 수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순간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떤 느낌으로 오빠의 움직임을 지켜보았겠습니까? 두 사람의 변신 역시 궁금해집니다. 내 안에는 라자로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믿을 수 없다고 제쳐 두고 있는 라자로의 죽은 모습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을 걸어오시면 언제라도 인생은 바뀔 수 있습니다. 라자로처럼 소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3월 9일 사순 제5주일-요한 11장 1-45절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영원히!>
우리 국민들의 노령화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가끔씩 문상을 가보면 요즘 80은 장수한 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90 넘어 돌아가시는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아직 생존해계시는 10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한국에만 1,000여명 남짓 된답니다. 세계 최고령 남자는 올해로 만 112세를 넘기신 다나베 도모지라는 할아버지랍니다. 기네스 협회 관계자가 인증서를 수여하러 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몇 살까지 살고 싶습니까?” 112세 된 할아버지는 거침없이 대답하셨답니다. “영원히!”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지만, 얼른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락된다면 쭉 나가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위 할아버지께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분의 삶이 앞으로 며칠 남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이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또한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상 그 누구도 죽음의 땅으로 한번 건너간 사람 이상 다시 이쪽 세상으로 건너오지 못했습니다. 물론 가끔씩 예외적인 상황이 없지 않았겠지요. 외관상으로는 죽은 듯했지만, 아직 완전히 목숨이 덜 떨어진 상황에서 사망진단을 내렸다가, 다시금 생명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는 그런 상황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완벽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염을 했고, 무덤에 묻었고, 바위로 봉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이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라자로가 소생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부여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이끄시는 관문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자로는 한번 소생했지만, 영원히 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조건을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20년, 30년이 흘러 그는 또 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라자로의 소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부활로 온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하루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작은 부활’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한 조각’입니다. 오늘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하루,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찬미하면서 최대한 만끽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 우리가 드릴 참된 예배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 나이 먹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지켜본 것은 3년 전 아버지의 영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지인들의 부음을 듣거나 빈소를 찾아서는 그 순간 잠깐 가슴이 먹먹하고 삶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말로만 듣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게 아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죽음도 삶의 연장이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이란 단어가 그토록 절실하게 제 마음을 꽉 채운 적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른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죽음 앞에 어느 장사가 당해 내겠습니까? 죽음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작가가 그러더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 ‘셔올’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친히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십니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나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정작 라자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6절)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야(39절) 그 가족에게로 가십니다. 그것도 얼마 전 돌에 맞으실 뻔한 일로 유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8절), 말리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 가십니다. 늑장을 부리신 것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절)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을 병이 아니라니요?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북받치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이 애통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세력에 화가 치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당도하셨을 무렵 그의 육신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죽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잃은 몸은 썩기 마련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도 부패하여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직 라자로를 살리기도 전인데 미리부터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절) 예수님은 무조건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신다는 온전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죽음을 건너뛰지 못하셨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십자가상 죽음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님을 미리 내비치신 듯합니다. 점점 죽음으로 가까이 가심을 예감하시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비장한 각오도 단단히 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깨우러 가십니다. 편견·무관심·악습·상처·두려움의 무덤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믿음은 무덤에서 사람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들이 이들 자매를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1819절). 그들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45절) 제자들의 믿음 또한 풍요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고(27절) 부활이요 생명이심을(25절)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이 그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일로 신앙과 불신앙이 판가름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심을 합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은 곧 맞이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앞당겨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를 모신 성당 근처로 이사 와 아버지와 한 본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곧장 아버지께 달려갑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기만 하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조금씩 피부에 와 닿습니다. 육신을 뛰어넘는 생명, 죽더라도 살고 살았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그 무엇, 봉안당을 사이에 두고 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교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어느 날 문득 돌이켜 보니 아버지께 하소연했던 일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고비를 탈 없이 잘 넘긴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하느님 가까이에서 백을 쓰시나 봅니다. 아직은 풀어야 할 일들이 좀 남았습니다. 아버지께 또 도움을 청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42절)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어 새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서울] 절망의 끝자락에서..안병철 신부
2008년 3월 9일 사순 제5주일 가해
열심히 성당을 다니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 나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가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보게 되었어요.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주님께 이렇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주님,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신은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십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님의 겸허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하네요.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에 보내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죄 많이 지으라고? 하느님 나라에서 할 일이 없어서 대충 시간 때우고 오라고 보내셨을까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이 세상에서 고생이나 신나게 하고 오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지금 나를 바로 이 자리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뜻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십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근처의 동네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결국 베타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반대하여 제거하려는 유다 지도자들이 가득한 곳으로,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곧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다 라자로가 있는 베타니아로 떠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께서 통보받았을 때에는 이미 라자라고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랍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자기 육체 근처에서 계속 머물다가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로소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한 나흘이라는 숫자는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이미 늦었는데,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십니다. 그 결과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 수 있게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도록 한다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 제5주일. 이제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부합되게 살았는지를 반성하면서, 예수님의 사랑 실천에 함께 동참하는 우리들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친절 한 가지를 베풀어 보세요.
내가 이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좋은 글’ 중에서)
돋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영특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헤아려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잠깐 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부산] 요한 11, 1-45. 서공석 신부
요한복음서는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명상록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 9장은 예수님이 어느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해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에게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력을 얻어 하느님을 새롭게 보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이 요한복음서 10장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입니다. 그분의 죽음에서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를 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인 11장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양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고, 당신 스스로는 죽음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부분에 이어서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서 11장은 라자로를 살린 예수님은 그 일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죽은 사람을 살린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분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명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 계시며, 그분의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역사에 흔하디흔한,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셨고,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기 전에 ‘비통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분이 라자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이 명상의 자료로 제공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시듯이, 그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고, 스스로는 죽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라자로를 살린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도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린 이야기가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서들 안에 있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가 루가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료로 삼아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진다.”(1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남긴 말이고, 초기 교회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기 위해 인용하던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오늘의 이야기를 구성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을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도 요한복음서가 의도적으로 한 일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이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이야기에 라자로를 등장시켜 죽었던 라자로가 실제 살아서 돌아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이 복음서에서는 “다 이루어졌다.”(19,30)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당신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실천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요한복음서 공동체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여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이 반영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재물과 권력을 얻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보장해 주시는 생명을 찾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 생명의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비통해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비록 자기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실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목숨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 생명의 의미와 삶의 질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 현상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