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수장首章의 본의本意
1. 서분
주자는 주자어류朱子語類 제14권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학문學問은 반드시 대학을 우선하고, 다음 논어이며, 다음 맹자이고, 다음 중용이다.”(學問須以大學為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라고 사서의 공부 차서를 밝혔다. 학문學文은 사서나 삼경을 학습하는 것이고, 학문學問은 학습하고 질문하는 것이니, 학문學文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사서에 우열은 없다. 중용의 이치가 대학이나 논어 맹자보다 더 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학의 초구初句는 “대학의 도는 명명明明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라고 한다면, 중용의 제일구第一句는 “천명은 성性이라 일컫는다.”(天命之謂性)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문장에 심천을 논할 수 없다. 명명과 성은 전혀 차별이 없다. 만일 “대학의 도는 명명덕明明德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라고 한다면, 명명덕은 명명이나 성과는 차등이 있다. 어째서 그러할까? 전자는 도체道體가 되지만, 후자는 수행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2. 중용 제1구 천명은 성性이라 일컫는다
“천명天命은 성性이라 일컫고, 솔성率性은 도라 일컬으며, 수도修道는 교教라 일컫는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 통상 제일구를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 한다.” 또는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이라 말한다.”라고 해석한다. 이는 주자의 주석을 따른 것이지만, 번역이나 해석이 아니고 해설에 가깝다. 일차 번역이나 해석에 단어를 해설할 필요는 없다. 단어가 어렵다면 추후에 해설하면 그뿐이다. 하인을 막론하고 지천명知天命이나 외천명畏天命을 ‘천명을 안다’ 또는 ‘천명을 두려워한다’라고 명사 그대로 해석하면서, 굳이 중용의 천명만 천명이라 해석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그리고 천명을 하늘의 명령이라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천제天帝의 의지意志나 하늘의 뜻이라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천명은 성이라 일컫는다. 천명과 성은 어떤 관계일까? 동일할까? 아니면 차서가 있을까? 일단 문장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천명은 주어이고, 목적어가 아니다. 지之자는 주격조사이다. 위謂자는 동사이고, 성性은 목적어이다. 천명이란 무엇이냐? 성을 말한다. 이른바 성이다. 성이라 일컫는다.
뜻을 정확히 알려줄 수 없다면 비유를 쓴다.
“남자는 무엇이냐?” “사람을 말한다.”
“사람은 무엇이냐?” “남자를 일컫는다.”
앞 문답은 틀리지 않지만, 뒤 문답은 맞지 않는다. 다시 사람은 무엇이냐? 동물이라 일컫는다. 동물이나 식물은 무엇이냐? 물이라 말한다. 만물을 일컫는다. 전자와 후자는 예속 관계이다. 전자가 후자에 예속된다.
천명은 성이라 일컫는다. 성은 유학의 구경사이지만, 천명은 구경사가 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공부자는 사십에 불혹不惑하고, 오십에 지천명知天命하며, 육십에 이순耳順하고,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했다고 한다. 군자의 삼외三畏 가운데 천명이 으뜸이지만, 천명도 또한 성에 예속된다. 이 성性은 이성理性 천성天性이나 인성人性 물성物性의 성이라 일체 근본 중에 근본이다.
3. 중용 제2구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
“천명은 성이라 일컫고,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다시 대학의 수장을 인용한다.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고, 그 덕은 친근親近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 德在親) 대학의 도를 확장하면, “대학의 도는 격물에 있고, 그 덕은 치지에 있다.”(大學之道在格物 德在致知)라고 말할 수 있다. “천명은 성이라 일컫는다.”는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다.”와 상응하고,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는 “그 덕은 친근에 있다.”와 부합한다. 대학의 논법을 빌리면 “천명은 성에 있다.”가 되고, 중용을 차용하면 “대학의 도는 명명을 일컫는다.”가 된다. 명명은 대학의 삼주인과 팔강목 전체의 근본이고, 성은 만사만물이나 일체 유정 무정의 근본이다. 그 경계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는 “그 덕은 친근에 있다.”와 부합하는가? 대학의 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도道는 도라 말할 수 있다면 상도常道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할 때의 도체를 말하고, 또 하나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대학의 도는 명명덕에 있다.”라고 장구하면 수행방법으로서의 도가 되고,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다.”라고 분단하면 도체에 상당한다. 연이어 “그 덕은 친근에 있다.”라고 하면, 친근이 바로 수행방법의 도가 되고, 치지도 또한 그러하다. 솔성率性의 솔率자는 따라가다 좇아가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고, 문자를 쓰면 준순遵循이라 한다. 이에 중용의 제이구를 “천성을 좇아가는 것은 도라 일컫는다.”(率性之謂道)라고 부연할 수 있다.
명명덕明明德은 명덕明德을 밝히고, 친근親近은 명명을 친근하며, 치지致知는 성지聖知를 이루고, 솔성率性은 천성을 좇아가니, 이 때문에 수행방법이라 말한 것이다.
4. 중용 제3구 수도는 교라 일컫는다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라는 중용의 제2구는 이기행이라면, “수도는 교라 일컫는다.”(修道之謂教) 라는 제3구는 이타행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천성을 좇아가는 공부를 마치고 천명을 알았다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솔성 공부인 도를 닦아나갈 수 있도록 힘써야 옳을 것이다. 교는 교화를 말한다. 이 수도를 대학의 팔강목에 대비하면, 격물 치지 이후의 성의나 정심 수신 또는 지어지선이나 유정有定 등과 상응할 것이다.
5. 결어
도道라는 말을 유가儒家도 쓰고, 도가道家도 쓰며, 또한 불가佛家도 쓴다. 그렇지만 그 쓰임새는 동일하지 않다. 이에 도는 도체로 쓰이기도 하고, 수행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도를 도가는 도체로 쓰고, 유가는 도용道用으로 쓰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솔성은 도라 일컫는다.”(率性之謂道) 중용 제2구의 도는 수행방법으로 쓰였다. “대학의 도는 명명明明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 또는 “대학의 도는 명명덕明明德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 대학 초구의 도는 양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가의 관행으로 보면 후자의 해석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이 해석은 대학 수장의 전문 이해에 난맥상을 유발한다. 대학 이주인과의 초구를 명명덕으로 장구하는 바람에 요순우탕과 같은 고인古人의 덕천하德天下를 놓치고 말았다. 송유宋儒는 대학의 도를 명명덕과 같이 수행의 방법으로 보고, 이 때문에 격물도 또한 도체로 보지 못하고 수행방법으로 보며, 줄기차게 격물에 천착한 것이다.
“천명天命은 성性이라 일컫고, 솔성率性은 도라 일컬으며, 수도修道는 교教라 일컫는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 유가는 천명을 중시한다. 천자天子란 말 자체가 천제天帝의 대행자代行者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명도 성보다 높지는 못하다. 태극은 무극에 있다. 무극은 태극에 있지 않는다. 천명도 성에 있다. 성이 천명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태극은 무극이고, 무극은 태극이라 말한다. 이에 나도 거들고자 한다. 천명이 성이고, 성이 천명이다.
2023년 3월 29일 길상일吉祥日 75세 효산심일曉山心日 정덕성鄭德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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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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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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