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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間島부터 노령으로 옮긴 不逞鮮人團의 末路에 관한 건』,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대한혁명군(大韓革命軍)측의 성토문(번역문)
우리들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고 동포 각위(各位)에 참혹하고도 비분한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안됨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것은 즉 금년 6월 로령 흑룡주 자유시(『아레기세프스카야(알렉셰프스크)』이며 정거장(停車場) 소재지)에서 발생한 한인군대의 대참극에 관한 일이다.
이 사실은 한국신문지에 보도된 바 있는데 이는 대단히 비상식적이며 오히려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바이나 이같이 침소봉대하게 과장 선전되었고 참으로 그럴 듯한 사실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 전말(顚末)을 조사하여 이를 천명(闡明)하기 위하여 실지(實地)에 사람을 보내었는데 이는 우리들의 의혹이 그 사실과 부합하느냐 안느냐를 명백히 하기 위한 취지에서 연유(緣由)되는 것이며
실지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금년 6월 27일 (※실제로는 6월 28일 상오 밤중에 발생) 황망(荒茫)한 이경(異境)자유시의 원두(原頭)에서 참담한 최후를 마친 자는 가련한 우리 동포 6백여명인데 그중
적탄에 쓰러진 자가 72명,
익사자(溺死者)가 37명,
기병(騎兵)의 추격을 받아 산중에서 힘이 다하여 사망한 자 200여명,
행방불명이 된 자 250여명,
기타 포로가 된 자 917명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전말(顚末)을 밝히면 금년 3월 자유시 대한의용군총사령부(自由市大韓義勇軍總司令部)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 병합(倂合)된 이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선비(士)가 일신(一身)을 바쳐 조국복흥(祖國復興)을 위하여 희생이 되려고 조직한 것이며
그들은 동서간도와 로령 연해주 등지를 근거(根據)로 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대를 양성하는데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간난(艱難) 고초(苦楚)를 맛보며 백방 초지관철(初志 貫徹)에 진췌(盡瘁)한 바 있으나 시기가 미숙한 데다 일본군의 출동으로 다년(多年) 수축(修築)한 근거(根據)를 빼앗기게 되었고 결사적 저항을 취(取)하여 적에 다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한을 삼키고 다시 재거(再擧)를 도모하기 위하여 피로한 몸을 일으켜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원래 낭중(囊中)에 여유(餘裕)가 없고 사고(四顧)에 인연(人煙)이 끊기었는데 험준(險峻)한 산로(山路)는 인적(人跡) 미도(未到)의 지(地)로 연일(連日) 행군에 의갈(醫渴)할 연적(涓滴)의 청수(淸水)를 얻지 못하였고 또한 주림을 견디어 내어도 한조각의 식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초근목실(草根木實)을 먹으면서 주림을 참았고 탁류(濁流)를 떠서 의갈(醫渴)하면서 겨우 로명(露命)을 이어 부활의 지(地)로 나오려 한 것이므로 그들은 태식(太息)하지 않으려 하여도 불가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대지(大志)를 픔은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시적 고간(苦艱)을 맞나도 위축할 배 아니며 도리어 용기를 고무한 것은 물론 육체의 피로는 더욱 정신을 지려항분(砥礪亢奮)시켜 미래의 대성(大成)으로 향하여 용왕매진(勇徃邁進)하여 반다시 현하(現下)의 대동단결을 하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것을 통절히 감득(感得)한 그들이었으므로 의사(意思)를 소통(疏通)하고 성의를 피력하여 다같이 단결의 실(實)을 거둔 것이 즉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이다.
이에 참가한 자는 로령에 있어서는 「사하린」군대 청룡군대 이만리대(伊萬里隊), 중국령에 있어서는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및 혈성대 등의 단체이며 이 대동 단결의 결과 선정된 참모부원은 홍범도, 안무, 서일(徐一), 조욱(曹昱), 이청천, 이용(李鏞), 채영, 최진동, 오하묵 등 15명이고 실재 병원(兵員)은 3천여명이다.
그들이 계획한 바는 점차 순조(順調)로히 행진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당국 제씨(諸氏)의 덕택이나 또한 일반 한국민족이 촉망(囑望)한 바임은 감히 췌언(贅言)을 요(要)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선악은 양립할 수 없다.
종래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를 전대한국민의회(全大韓國民議會)라 개칭하고 외면(外面)으로는 전한국민족(全韓國民族)의 통치적 명령을 몽상(夢想)하고
그 실(實)은 일부 주민에 대해 가혹(苛酷)한 주구(誅求)를 일삼던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의 혐오(慊惡)할 소위(所爲)는 사리로 보아 정(正)히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들의 백반(百般) 간계와 악모중(惡謀中)에서도 문등(文等. 문창범 등)이 이름을 군자금에 빌려 얻은 수만원을 착복한 사실과 활자구입(活字購入)이라 칭하고 부호 김원서(金元瑞)로부터 사취한 금전으로 그의 일파인 원세훈 등을 북경 또는 상해로 파견한 추사(醜事)가 폭로(暴露)되었으므로 의용군과 일반공중(一般公衆)의 격렬한 분노를 산 것이다.
사욕을 위하여 공(公)을 판 그들은 한인군대를 로군(露軍)의 일부로 하여 편입시킨다는 조건으로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장(東洋秘書部長) 「스마츠」 휘하로 들어가 비밀히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그 의원으로 오하묵 김하석(臨時) 최고려 류동열 및 로인(露人) 1명을 임명한 뒤에 그들은 이러한 비행에 대한 일대협위(一大脅威)인 대한의용군을 그 수중에서 농락(籠絡)하려고 가진 수단을 썼으나 조국복흥(祖國復興)의 대지(大志)를 각성한 그들이 어찌 이러한 공(公)을 팔아 사(私)를 영위하는 비리몰의배(非理沒義輩)에 귀복(歸服)할 리가 있었겠는가.
도리어 그 불법을 널리 알리고 또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 그 자체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함원(含怨)하는 바 있어 로국군(露國軍)에 무고(誣告)하여 대한의용군은 민족적 관념에 집착(執着)한 반혁명의 군(群)이라 칭하고 거기다 일본의 밀정(密偵)이라고 말하며 일즉이 의용군이 간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을 때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의 견장시계 등을 휴대하고 있는 것을 그 증좌(證左)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즉 인정(人情) 풍속을 달리하고 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등의 불편이 있는 로군(露軍)에 동족이면서도 이러한 참무(讒誣)를 감히 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어찌 이러한 사실의 진상을 지실(知悉)할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로군(露軍)은 반혁명이라고 말하면 풍성학루(風聲鶴淚)도 빼놓지 않고 신경과민이 되는 것이므로 로군(露軍)은 곧 장갑차 대포 기관총 등을 가지고 1만여(萬餘)의 대부대로 포위한 후 의용군에 대해 3시간 이내에 전부의 무장해제를 명(命)하였다.
이리하여 의용군은 그들의 진의를 해득(解得)하는 데 고심하고 진퇴에 궁(窮)하여 그 처치방법을 주저하고 있을 즈음 강대한 로군(露軍)의 포격을 받아 일대참극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당초 단지 위혁적(威嚇的)으로 고의로 상공을 향하여 발포하였으나 오하묵의 군(軍)은 조준을 정하고 사격한 결과 로군(露軍)측에 있어서는 로국 중대장 1명이 살상한데 불과하였다.
이 교전 경과에 대하여는 대략 추측하기 어렵지 않는 바로서 이 같은 비인도적 참극을 연출한 그들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포로가 된 817명에 대하여 1등에서 4등에 이르는 죄로 처단하였는데
1등에 해당되는 자는 총살,
2등은 전세계가 적화(공산화)하기까지 구금,
3등은 15년 이상의 징역,
4등은 구로(歐露)에서 로동(勞動)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유배하는 등의 혹형(酷刑)에 처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쿠츠크」에 있던 김철훈, 이정(李檉), 서초(徐超), 남만총(南萬聰, 남만춘), 조훈(曹勳), 오진형(吳鎭珩), 장건상(張建相), 안병찬(安秉瓚) 등은 그들의 비행을 덮기 위하여 반혁명의 죄명으로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애, 장기영, 김동한(나중에 일제밀정으로 변절), 김성우, 김규면, 주영섭, 박원섭, 한운용(한운룡), 안태국, 박상춘, 이노겐지 등 30여명을 무고(誣告) 구금(拘禁)하였다.
이들은 산천이 격절(隔絶)하고 풍속을 달리하는 이역 옥중에서 비통의 눈물을 삼키며 신음하고 있는 바이다.
억(噫) 이 참극에 대해 우리 동포는 무엇이라 말하여 좋겠는가.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부모처자를 버리고 최후 목적을 세우려고 그 목적에 쓰러진 그들 신성한 6백여명의 영령은 단지 사리 사욕을 영위하려는 이민족인 로군(露軍)의 총구에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참극은 공전절후(空前絶後)하며 실로 우리 민족의 일대치욕으로 우리 민족의 절대
(絶大)한 역사적 오점이다. 황망한 자유시 원두(原頭)에서 혹은 적탄에 쓰러지고 혹은 강물에 몸을 던저 익사한 감개(感慨) 많은 최후를 마친 6백여명 의사의 심술(心術)은 과연 여하(如何)하였겠는가.
총구를 견양한 로군장교(露國將校)가 도리어 낙루(落淚)하며 사자(死者)에 대해 후장(厚葬)의 예(禮)를 취(取)하였다 하는데 그 현장의 활지옥적(活地獄的) 참극을 추상하면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6백 의사의 영령(英靈)이 우리에게 고할 바는 대체(大體) 무엇이며 이역(異域) 옥리(獄裏)에서 신음(呻吟)하는 수백의 우리 동포가 우리에게 가르키는 바는 대체(大體) 무엇일가.
참극 사실은 대개 이와 같다.
우리 민족을 팔아 사리(私利)를 영위(營爲)한 배덕비도(背德非道)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총(南萬聰, 남만춘 추정), 최고려, 오진형(吳鎭珩), 김응섭(金應燮), 류동열, 서초(徐超), 안병찬(安秉瓚), 장건상, 최의수(崔義洙), 김기룡(金琪龍) 등의 죄악은 인류의 도의를 위해 민족의 대의를 위해 절대 가차(假借)할 수 없는 바이며 이를 절규(絶糾)하는 우리들은 어찌 일점(一點)의 사욕(私慾)이 있겠는가.
응당 우리는 그들의 죄를 규탄하고 징계하는데 고조(鼓噪)하여 철저적(徹底的)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기원 4254년 (서력1921년) 9월 일
국민회 대표 구춘선 이봉우
군비단 대표 이희삼 윤덕보
광복단 대표 김성원 황만실
신민단 대표 김성배 유봉득(劉鳳得)
로농회 대표 조응순 권중선
공의단 대표 심영택 엄준(嚴俊)
태극단 대표 임석우 박대성
농무회 대표 김기형 김직묵(金直黙)
의민단 대표 방우룡 김연원
청년독립단 대표 정태선 장민준
야단 대표 오석영 윤좌형
1915년경 스바보드니 시의 최대 번화가였던 발샤야 거리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마을, 타타르스코예 이슬람 교 묘지주변 지도. 지금은 항구 교통이 없어지면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이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들의 「이르쿠츠크파와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성토문에 사소한 오류는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 등과 거의 일치한다. (※오늘날에도 자유시 사건과 관련된 중국 정부의 기록들은 공개되는 것이 거의 없다.)
독립 운동사에 일제 침략군과의 뚜렷한 전과가 없었던 이르쿠츠크파로 불려졌던 ‘대한국민의회’측에서 독립군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할린 부대와 만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반혁명⦁무정부주의자⦁아편중독자⦁학살범⦁강도’ 등으로 무고하여 학살한 것은 오늘날 러시아까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닌(Ле́нин)은 무정부주의자 등을 냉혹하게 비판하였고, 일부 볼셰비키들은 무정부주의자를 ‘학살범, 강간범, 강도, 아편중독자’와 동일하게 간주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무정부주의자를 ‘정부와 같은 거대 지배조직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들은 자유시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유시 등의 현지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원세훈, 문창범 등의 지도를 받던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독립군 공격에 가담하여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였다.”고 규정하였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 군자금과 동포의 금전을 횡령하고, 이르쿠츠크 일대로 도주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와 결탁하여 독립군부대를 무고하고 공격에 적극 가담하여 600여명을 학살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또 수백여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 징역형과 강제노동형을 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성토문이 전파되자 오늘날까지 국내외의 인심은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에게 좋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가 러시아 공산당에 무고해 독립군을 학살했다, 독립군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라는 표현이 나돌았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 조직이 1921년경 비밀리에 (러시아 볼셰비키의 핵심기관인)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만든 극동(원동)공화국내의 독립군 최고군정기관이 바로 러시아계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정의회였다.
고려군정정의회의 반박 선포문이 말하듯이, 이르쿠츠크파가 극동공화국 일대의 독립군 군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 및 간부(박윤천)를 사살하기 위해 “로국 수비대장에게 밀명하였고 결국 기습공격” 하였던 것이다.
간도계 11개 단체의 성토문은 1921년 6월 28일경 수라제프카 학살 당시 현장 부근에 있었던 000선생이 주도하여 작성하였고, 사건이 발생했던 자유시 일대를 방문하여 사망자를 확인 후, 간도지방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만주 도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로부터 노획한 성토문을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의 일제식민지 지배 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일제의 만주•시베리아 침략군,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 러시아 백파 등에 쫓겨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집결하여, 동족이라고 믿고 절대 조준사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르쿠츠크파와 (중립을 지켜주고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던) 러시아측에게 학살당한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자유시에서의 참변이라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당시의 사면초가의 어려운 사정상 대놓고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레닌(Ле́нин)의) 볼셰비키 정부를 비판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많은 독립군 단체들에게 이르쿠츠크파 등의 규탄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볼셰비키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이러한 규탄문에조차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11개 독립운동단체의 성토문이 발표되어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춘, 최고려, 오진연, 김응섭, 류동열, 서초, 안병찬, 장건상, 최의수, 김기룡 등이 ‘매국노 반역도당’으로 규탄받게 되자
1921년 9월 30일경에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선포문’형식으로 이를 반박하였다.
첫댓글 사진으로 보니 과거의 항구와 지금의 항구위치가 다르네요?
아무르강이 워낙 큰 강이고, 몽고? 근처까지 큰 배가 다니는 강입니다.
발샤야 거리 (혹은 볼쇼이 거리) 가 한국어로는 "큰거리"라는 뜻인데... 1921년 당시에는 최대 거리였습니다. 지금은 가장 낙후된 마을입니다.... 그래도 이름이 "큰 마을, 큰 거리"라는 뜻입니다.
사행천이 평원을 뱀같이 흐르다보니, 항구의 위치가 바뀌고... 우각호가 아무르강 주변에 폭 20km 범위에 걸쳐 많이 있습니다.
항구 위치도 큰 홍수가 날 때마다 약간씩 바뀐 것 같습니다.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