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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염불회 마지막 염불장 지봉당 석산 대종사 원적 | ||||||||||||||||||||||||||||||
영결식 19일 10시 서울 정법사…5일장 선학원 재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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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만일염불회 마지막 염불장(念佛場)인 지봉당(知峰堂) 석산(石山) 대종사가 15일 오후 9시 30분 재단법인 선학원 삼각산 정법사 조실채인 지봉당(堂)에서 입적했다. 세납 97세, 법랍 79세. 석산대종사의 법구는 정법사 극락전에 안치됐다. 선학원과 정법사는 대종사의 장례위원회 구성 등 장례 절차를 논의해 장례는 5일장으로 선학원 재단장(財團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영결식은 19일 오전 10시 서울시 성북구 정법사에서 엄수된다. 석산 스님은 1919년 기미년에 강원도 명주군(지금의 강릉)에서 출생해 1936년 보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37년 건봉사에서 사미계를, 1956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건봉사 시절 염불을 배운 스님은 1944년 서울 가회동 포교당(건봉사 서울포교당)에서 은사인 보광 스님을 모시고 원주를 살던 중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고, 정전이 된 후 해인사로 옮겼다가 다시 범어사로 가서 비구계를 받았다. 범어사에서 노전으로 지내며 후학들에게 염불을 가르쳤다. 1977~9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평생을 삼각산 정법사에 주석했다. 96세인 지난해 중양절 당시 직접 생전예수재를 집전했고, 올해 1월초까지 목탁과 요령을 놓지 않는 등 평생 염불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석산 스님은 염불 외에도 매일 <금강경>을 사경했다. 친견을 원하는 신도들에게는 염불과 사경 수행을 강조하며 직접 경전 구절 등을 써주며 신행을 독려했다.
석산 스님은 평소 선과 염불 사경 등 모든 수행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산 스님은 2006년 한 교계매체와 인터뷰에서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경을 볼때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황급히 절박하게 해야 한다”며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또 스님은 “중노릇은 참 어렵다. 출가하지 않았을 때는 부모에게 효도하면 되지만, 출가 후에는 부처님과 뭇 중생들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며 “‘백미 한 톨에 시주공덕이 7근이다’ 직업을 갖지 않고 신도가 가져다 주는 것을 먹는 처지에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시은을 갚기 어렵다”고 했다. 스님은 “출가자는 시주자의 은혜를 갚고 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계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며 “시은이 무서운 줄 안다면 계행이 하지 않을 수 없고, 계를 지키지 않는 출가자는 중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석산 스님은 시줏돈으로 여행 한 번 해본 일이 없다. 그나마 상좌와 1980년대 중반 인도 4대 성지순례를 다녀 온 것을 빼고는 정법사를 떠나지 않았다. 석산 스님은 건봉사에서 경학을 배우고 어산을 배워 일가를 이뤘다. 염불에서는 남영암(南映巖, 기종淇宗) 북석산(北石山)이라 꼽힐 정도로 이름이 났다. 석산 스님의 은사는 보광 스님이다. 보광 스님은 건봉사 만일염불회 회주이다. 만일염불회 회주는 관준-만화-응화-대련-보광-석산 스님으로 이어진다. 석산 스님의 은사인 보광 스님은 건봉사 경성포교사로 혜화전문학교 주임교수를 지냈다.
대련 스님(1887~1949)은 건봉사에서 출가해 교학을 배운 후 송광사에서 참선정진했다. 유점사 총림 율주와 만일염불회 회주를 지내며 조선불교 중흥을 위해 정진했다. 대련 스님은 개성포교사로 활동했고, 원산 석왕사 포교사 시절에는 신도회와 어린이법회를 개설하는 등 선구자적 발자취를 남겼다. 대련 스님은 1929년 1월 조선불교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승려대회에서는 종헌과 중앙교무원 원칙 제정을 비롯해 3부장 선거를 실시했다. 대련 스님은 교정(敎正)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으로 뽑혔다. 대련 스님의 인지도와 대중적 신망을 알 수 있는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석산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모시고 노전을 보면서 후학들에게 염불을 가르친 4년여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법사에서 수행과 염불로 평생을 살았다. 범어사 시절, 스님에게 염불을 배운 이가 무진장(열반)·고산(현 원로의원)·정관 스님 등이다.
석산 대종사는 입적 전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 “나와 남의 모든 행위는/ 모두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니/ 솔바람 달 아래 한적한 곳에서/ 다함이 없는 조사선을 길이 닦으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지봉당 석산 대종사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19년 기미년 강원도 명주군(강릉)에서 출생 1937년 건봉사에서 보광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1945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졸업 1946년 가회동 건봉사 포교당 원주 1949년 망월사 선원 안거 1951년 화봉사 원주 1957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1960년부터 정법사 중창(옛이름 복천암, 건봉사 포교당을 이전) 1980년대 중반 인도 4대 성지순례 1977~199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 1991~현재 정법사 조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고불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군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조용히 가셨군요. 선지식 인연이 부족하니 가까운 곳에 계셨는데도 친견하지 못하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왕생성불하소서.....()....나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는 비록 미세한 선이라해도/ 모두 생사윤회의 원인일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