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덜커덩… 덜커덩…'
˝아 shit. 놓쳤다.˝
전철이 도착하는 줄 알고 계단을 다섯 개 씩이나 뛰어넘어 재빨리 내려왔건만 매정하게 자신을 지나쳐 버리는 전철을 보고
작게 욕을 읖조린다. 그리고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다시 일어나 전철 시간표를 바라본다. 혹시라도 저게 막차였다면 이대로
집에 가긴 글렀다. 평일 막차 시간 00시 57분. 지금 시각 00시 53분. 작게나마 한숨을 내뱉고 안심하며 다시 의자에 앉는다.
올해 나이 스물 다섯. 그는 중소 연예 기획사의 연습생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한 때 무대 뒤에서 대신 노래를 해주는
립싱크 가수였고 2년 전 까지만해도 동료 연습생 두명과 함께 그룹으로 앨범을 냈던 가수였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대중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린 전설이라 할 수도 없는 세월에 잊혀진 가수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인터넷 검색창에 공민서란 이름
석자를 쓰면 프로필이 뜨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며 살고있다. 그나마 그 짧은 두달 동안 행복했던 가수 생활을 할 때는 매니저
나 벤이라도 있었지만 신분이 추락한 관계로 모든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가끔 연습이 끝나고 나면 친한 동생인
전매니저가 집에 데려다주곤 하지만 그 놈의 선천적인 게으름때문에 가끔 사무실을 안나오기도 한다. 오늘이 그 날이다.
얼마 안 있으면 데뷔할거라는 생각을 품에 안고 민서는 잠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빼빼 마른 다리에 스키니,180을 훨씬
넘는 훤칠한 기럭지에 귀를 덮는 덮수룩한 머리에 모자 그리고 작은 얼굴에 다 들어가 있는게 신기할 정도인 뚜렷한 이목구비
까지 언뜻 보면 고작 열아홉살의 모델지망생 같아 보이지만 연예계란 이런 사람들 천국이니 민서가 당연 튀어보일리가 없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지만 여전히 건조한 입술을 물어 뜯고 있는 민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본다. 12.56.PM. 1분 남았
다.
'또각 또각'
그 때 계단 쪽에서 여자 구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 한 걸 보니 아마 술에 취한 여자
인 듯 싶다. 비틀 비틀. 그녀는 속이 훤히 다 비치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입었다. 가슴까지 오는 갈색의 웨이브진
머리를 가진 그녀는 위태롭게 지하철 선로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혹시라도 무슨일이 생길까 민서는 그녀를 주시했다.
머리가 아픈듯 왼 손으로 이마를 짚던 그녀가 한걸음 두걸음 내딛더니 그만,
'털썩-'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녀가 선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구두가 허공을 향해 내딛은지 0.1초만에 의자에 앉아있던 민서는
그녀가 떨어짐과 동시에 선로 밑으로 뛰어 내렸다. 한참을 고민했다. 한참이라 해봤자 10초 정도였다. 수능에서 수리영역을
풀 때도 두뇌회전이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그 짧고도 긴 10초 동안 민서는 이 여자를 들어서 선로 위에 올려 놓아야 할지
아니면 저 앞으로 달려가 마치 영화처럼 두손을 양 옆으로 뻗어 휘저으면서 달려오는 전철을 막아내야 할지 고민했지만 후자를
선택한다면 이름도 알리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저세상으로 갈 확률이 반이기 때문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녀를 선로위로
올리기로 결심했다.
˝이봐요!정신 차려봐요!˝
초인적인 힘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빼빼 마른 여자를 들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들 께서는…'
여자를 선로위에 올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 덜커덩거리며 달려오는 열차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이 때 초인적인 힘이 발생되지 않
았나 싶다. 안내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민서는 단숨에 선로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숨을 한번 고르고 시체마냥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었다. 열차가 도착하고 민서는 그녀
를 일으켜서 힘겹게 열차에 올라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옆칸엔 술취한 아저씨가 졸고 계셨다.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고민
했다. 병원에 데려갈것인가 집으로 데려갈것인가. 일반 사람 같았으면 당연히 병원에 데려다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민서는 자신
을 이미 알려진 가수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흑심은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 이뻤지만 자기 취향은 아니라고 계속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민서는 그녀를 자기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추운 날씨에 블라우스 한장 걸친 여자는 꽁꽁 얼어있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곤히 자고있는 그녀는 마치 인형같았다. 아니,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나오는 공주같았다. 나이를
대충 짐작하자면 이십대 초반이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였지만 고등학생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점
점 그녀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휘젓고 얼떨결에 같이 구한 그녀의 핸드백을 열어보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화장품과 지갑 등 특별한 건 없었다. 그녀의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혹시라도 연락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 1번을 길게
눌렀지만 지정되지 않은 번호라고 뜬다. 전화번호부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등록되어있지 않다. 핸드폰 배경화면도 검은 바탕
에 시계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귀신에 홀린 듯 등 뒤가 싸늘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 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귀신은
아닌 듯 했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민서는 방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 쇼파에 앉아 티비를 틀고 소리를 아주
작게 줄였다. 눈은 티비를 보고 있었지만 몸은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냉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를 집었다. 몇 모금
마시다 보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티비를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 쇼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막 잠에 빠져드려 하는 순간 방 문
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깜짝이야.˝
스탠드 불빛에 희미하게 여자가 보였다. 민서는 재빨리 불을 켰다.
˝누구…야?˝
그녀가 말했다.
˝아 저…그게-˝
˝설마 오늘 나랑 같이 술마신…˝
˝아 아니 그런건 아니고˝
˝누구야?˝
그녀가 큰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와 세개나 풀러놓은 블라우스 단추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속살을 보자 민서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여자와 단둘이 집에 있어 본 적이 언제던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흑심은 없
다.
˝아 그게… 술에 취해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길래…˝
그녀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놀란건지 불쾌한건지 눈은 동그랗게 뜨고는 인상을 잔뜩 쓰고있다.
˝그래서?˝
˝그래서… 정신을 못차리길래 우리 집으로…˝
˝실례했네. 고마워.˝
안절부절 못하는 민서와는 반대로 그녀는 당당하게 현관쪽으로 걸어가서는 구두를 신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민서가 잡았다.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민서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름 물어봐도 될까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아니- 라고 대답한다. 민서는 당황했지만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근데 몇살인데 초면에 반말이야?˝
˝스물 둘.˝
그녀는 너무 당당하게 대답했다. 스물 둘이라니… 스물 둘에 걸맞지 않는 어린 외모였다. 세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민서는 자신
이 왠지 기선제압을 당한 느낌이었다. 스물 둘이면 대학생이 아니던가. 이 나이면 한창 광란의 밤을 즐길 세대지만 부모님이 여
전히 걱정할 나이가 아니던가. 그러고보니 아까 본 그녀의 핸드폰에는 부모님 혹은 가족의 번호도 저장되어있지 않았다. 갑자기
할말이 없어진 민서가 이번에는 번호를 물어보았다.
˝핸드폰 없어.˝
˝아까 보니까 있던데?˝
˝……핸드폰 안 써.˝
˝그래도 상관 없으니까 번호만 알려줘.˝
민서가 그녀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민다. 그녀는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선뜻 번호를 적어준다. 그녀의 번호가 맞는지는 확실
하지 않지만.
민서의 핸드폰을 민서에게 건네주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민서는 그녀의 번호를 저장하고 잘가- 라고 문자를
보내주었다. 예상했던대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