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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말씀 8,1-7.9-13>
그 무렵
1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으로 모였다.
3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가 도착하자 사제들이 궤를 메었다.
4 그들은 주님의 궤뿐 아니라 만남의 천막과 그 천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도 모두 가지고 올라갔는데, 사제와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5 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6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7 커룹들은 궤가 있는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 궤와 채를 덮었다.
9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12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3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을 받았다>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듯이(마르 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 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는 흉내를 내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을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을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 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 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더불어 우리의 간절함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 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이번 주간 첫 번째 독서인 열왕기 상권을 통해 우리는 솔로몬 왕(BC 971~931)의 삶과 신앙, 특히 그의 흥미진진한 흥망성쇠 스토리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스렸던 시절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순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을 향한 신앙뿐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 건축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잠언을 3천 개나 지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임금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칭송했고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을 한번 만난 뒤로 열혈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온 최초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정말 항간의 소문대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준비해온 그녀는 마침내 퀴즈 보따리를 솔로몬 앞에 잔뜩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문제를 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정답을 알아 맞췄습니다.
솔로몬의 탁월하고 비상한 지혜 앞에 스바의 여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의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 왕좌에 올려 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놀랍게도 스바의 여왕은 자신이 가져온 금 120 탈렌트,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약 4톤의 금과 엄청난 양의 향료, 보석들과 당시 최고급 목재로 손꼽히던 자단나무도 내려놓았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적(政敵)들을 하나씩 가차없이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측근들을 군대·정부·종교기관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또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 없다더니,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 부귀영화도 세월 앞에 부질없었습니다.
그 지혜롭고 영특하던 솔로몬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적당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그 끝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대적인 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과욕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장정들은 3개월마다 한번, 1개월씩 강제노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제성을 띤 행정구역 개편, 이해할 수 없는 세금 징수 방법 등이 백성들의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반대에 불을 지폈습니다.
말년에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솔로몬은 우상 숭배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거듭된 주님의 만류와 경고에도 전혀 ‘말빨’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잡신들 앞에 향을 피웠고 재물을 바쳤습니다.
결국 왕국이 둘로 분열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급격히 추락하게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그가 거느렸던 이방인 아내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리분별력이 흐려진 그는 이미 간교하고 요사스런 이방인 아내들을 감당할 내공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으로부터의 큰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초심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솔로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깊은 신심에다 겸손까지 겸비했던 솔로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솔로몬이었지만, 잠시 방심하는 틈에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 초라하고 부끄러운 말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주님의 안전한 날개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우리 자신의 발밑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부족함을 헤아리고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앞의 3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마르 3,9-10)
3장과 6장의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는데, 태도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3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려들고 서로 밀쳐대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6장에서는 그런 상황은 아니고,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막무가내로 밀려들고 밀쳐대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예수님께서 뒤로 물러나시면서 ‘거리두기’를 실행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은 안 듣고 몸의 병을 고치기만을 원하는 것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을 고쳐 준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렇게 오해하면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병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루카 4,18) 라는 복음 선포를 실제로 실현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 기적은 ‘병고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킨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고’는 사람들을 가장 크게 괴롭히는 고통이고 억압입니다.
‘구원’은 모든 고통과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서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구원을 인류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딱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고, 그리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으니까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는 왜 복음서의 치유의 기적 이야기와 같은 기적이 잘 안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두 가지입니다.
1) 옛날 사람들보다 현대인들의 믿음이 약해서.
2) 인간의 의술이 발달해서.
확실히 현대인들의 믿음이 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옛날보다 많은데, 특히 현대인들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합니다.
신앙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생각들....
그리고 인간의 의술이 발달해서 믿음의 힘과 기도의 힘보다는 의술의 힘에 더 의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옛날보다 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의학과 의술이 발달할수록 종교와 신앙은 점점 더 밀려나게 될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과 의술의 발달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종교와 신앙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서서히 바뀌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의학과 의술이 발달해도,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온갖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아들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회 17,30)
“인간의 수명은 기껏 백 년이지만, 영면의 시간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의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일 뿐이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비를 쏟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고 아시며, 그런 까닭에 당신의 용서를 넘치도록 베푸신다.”
(집회 18,9-12)
인간의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또 그 덕분에 인간의 수명이 많이 연장된다고 해도, 과학과 의학으로는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의 허무함’(시편 90,3)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결국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과학과 의학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권능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고,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고 몸의 건강을 되찾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의술의 힘으로만 병을 고쳤다고 해서 의술을 주님처럼 떠받든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반대로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믿음의 힘으로 병을 고치겠다고 고집부리면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하지 않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하인 부리듯이 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의학과 의술의 발달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했는데, 정상적인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만으로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총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는 태도이고, 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참 고향집 - 주님의 집>
누구나 옛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적 고향집과 마을의 개천이나 들과 산들을 뛰어다니며 놀 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따뜻해집니다.
자연의 산을 배경한 다 그만의 모습을 지닌 고유한 장소에 고유의 집이라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에 따른 놀이도 스토리도 참 풍부했습니다.
돈 없어도 가난한 줄 몰랐고, 좀 춥고 배고파도 따뜻한 인정이 있었고, 대부분 무공해의 사람들이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중간고사나 학기말 고사 때면 시험 1주전 계획을 세워 하교 후 뒷동산에 올라가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중고교 6년 20여리 길 걸을 때도 동무들과 함께 했기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핀 산을 끼고 봄길을 걸을 때에 마음 시리도록 그리움에 젖었던 추억도 선명합니다.
집에 귀가하면 맨 먼저 찾는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대부분 집안일이나 주변 밭일을 하며 집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스토리들 가득했던 50-60년대 시골의 산들 배경한 농촌이었습니다.
이 때의 고향집과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의 품’ 같았고,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건강했습니다.
자살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불행합니다.
너무나 단조로운 환경에 자연을 배경한 특색있는 고향집이기보다는 천편일률적인 성냥갑같은 아파트 집들과 아파트 단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피정을 마치고 떠난 한 자매의 메시지가 반가워 소개합니다.
“정말 마땅히 갈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설 정초에 정말 갈곳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스물네 시간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인 이 수도원으로 나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피정의 집에 또 올 것을 생각해 두었습니다.
남은 내 생애가 그리 외롭지 않을 것 같아요.
기쁘게 내 삶의 자리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들 모두 무탈을 기도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가 한 생애 끝나고 귀가할 영원한 참 고향집이 상징하는 바, 바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이요 교회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 수도원에는 많은 이들이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찾습니다.
잃어버린 고향집을 대신하는 영원한 참 고향집 주님의 집인 여기 요셉수도원입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몸담을 영원한 참 고향집인 본향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이요, 이를 어느 정도 앞당겨 충족시켜 주는 수도원이요 교회의 성전입니다.
성가정 축일 미사시 즐겨 부르는 화답송 시편 성구와 ‘좋기도 좋을시고’라는 성가 416장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자 얼마나 행복되리.”
- 화답송 후렴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 성가 416장
믿는 이들 누구나 꿈꾸는 이런 주님의 집입니다.
생래적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 마음 안에는 이런 주님의 집을 찾는 갈망이, 주님의 집에 대한 사랑이 늘 깊이 잠재해 있습니다.
보이는 고향집들은 사라졌어도 주님의 집 수도원이, 교회 본당 성전이 참 고향집이 되어 고향을 상실한 영혼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어느 정도 달래주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34년 동안 여기 불암산 기슭에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늘 참 고향집에 머물 듯 참 편안함을 느꼈기에 찾아가고 싶은 곳도 없어 휴가 반납한 지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참 고향집인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것입니다.
읽을 때마다 반갑고 새롭지만 오늘 말씀에 대한 영문 주석을 읽으면서 새삼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반갑고 새로웠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의미는 여기 ‘치유되었다’ 라는 그리스어 동사 안에서 참으로 완전히 밝혀진다.
그리스어 ‘에소존토(esozonto)’는 단지 ‘육체적 치유(physival healing)’ 이상을 함축한다.
초기 교회에서 이 어휘 안에서 이 말은 구원의 온전한 체험을 뜻한다.
그것은 단지 ‘복지(wellness)’가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니 다른 말로 하면 ‘귀향(coming home)’이다.”
이미 우리말처럼 회자되고 있는 영어 ‘힐링’과 ‘커밍홈’이라는 말마디가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영육의 힐링에 주님의 집만큼 좋은 곳도 없고,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보다 더 좋은 힐링의 수행도 없습니다.
그러니 커잉홈, 주님의 집을 찾는 이들의 궁극의 바램도 이런 힐링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집이야말로 힐링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선왕 다윗에 이어 솔로몬의 주님의 집 성전에 대한 사랑도 놀랍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은 주님의 집 성전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성전을,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영원한 참 고향집을 상징하는 성전을 완공한 후 주님의 궤를 모시고 기뻐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감지됩니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대로 영원한 참 고향집을 상징합니다.
참 고향집을 찾듯이 영육이 지치고 병든 이들이 주님을 찾아 온전히 회복됩니다.
참으로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주 예수님보다 주님의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다음 복음 묘사가 그대로 예수님이 치유의 참 고향집임을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고향 상실의 업보입니다.
어머니들이 가정을 보금자리 주님의 품같은 집으로 가꾸고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참 고향집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의 중요성이 너무나 큽니다.
바로 섬김의 배움터이자 치유의 쉼터와 샘터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참 고향집을 앞당겨 만들어 살게 하시며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미사보다 더 좋은 주님의 선물도 없고, 미사보다 영육의 힐링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인간은 '생로병사'하게 운명 지워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 것까지는 다 받아들이고 수긍하겠는데, 왜 꼭 병이 들어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갈수록 의술이 좋아져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 병원마다 웬 환자들이 그리 많은지요.
뭐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생기고 부속을 새로 갈아 끼워 넣어야 하듯이 오랜 세월 잘 사용했으니 고장날 만도 하지요.
이런 노화를 겪으면서 여기저기 고장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는 아이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린 사람들, 우울증과 조현증, 치매와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삶이 파괴되고 있는 사람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좋더라"(창세 1, 10.12.18)고 하신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시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보다 "사람들"(마르 6,54)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부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눕혀", "데려다 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복음의 다른 치유 기적 사화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좀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직접 팔을 뻗어 "옷자락 술"(마르 6,56)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독서는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의 창조 설화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세상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빛, 하늘, 땅과 바다와 푸른 싹, 빛물체들'이 나흘 동안 차례로 생겨나지요.
시편 저자는 세상 만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 모든 창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귀하십니까! ...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시편 2,4)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압니다.
이 '하느님의 손'이나 '손가락'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위엄과 권능의 업적임을 드러낼 때 성경 저자들이 즐겨 썼던 표현이지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손들이 등장합니다.
자기 일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챙겨 데리고 온 손들, 그리고 치유의 일념으로 가득 차 장터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향해 힘껏 내뻗은 병자들의 손들.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것은 아무 의미없이 그냥 해보는 행동이 아닐 겁니다.
의도와 방향성과 목표를 지닌 신념의 표출이지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첫번째 창조가 하느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자리에서는 병자들을 도와주는 이들의 손과, 믿음에 차 내뻗은 병자들 스스로의 손을 통해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잠언 8,22-31 참조) 새 창조의 현장에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저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을 통해 오늘도 세상의 혼돈과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 여러분은 병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까?
주위에 그런 분이 계시지요?
이 고통스런 병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사업에 기여하기 위한 봉헌이라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고통이겠지요.
오늘 생로병사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병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 아파하시며 그 고통을 축복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시길 청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기적수로 원죄의 업보로 얻게 된 이 병까지도 깨끗하게 치유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시어 모든 병자들을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70년이니까 52년 전입니다.
당시 성당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밖으로 행렬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성체거동’이었습니다.
지금은 교통상황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도 쉽지 않기에 그런 행사를 하는 성당이 거의 없습니다.
풍수원 성당이나, 장호원의 감곡 성당이 성체거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체현시, 성체강복, 성체거동과 같은 신심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봅니다.
초대교회는 오랜 박해를 견디고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곳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감실에 성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에 감격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성체조배를 하는 것도 감격이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은 성체강복과 성체거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중남미에는 이런 전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은 지금도 세계성체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1989년에 44차 세계성체대회를 주관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박해를 받으면서 성직자 없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미사 없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미사가 그리웠고 성체가 고팠습니다.
드디어 1886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한국에도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들은 성체조배, 성체현시, 성체강복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처음으로 용산 신학교에서 성체거동이 있었고, 이런 전통은 197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성체거동은 주교님들의 관심이 있었고 신학생들과 신자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관공서에서도 성체거동 행렬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성체거동은 신자들에게는 자부심을 주었고, 비신자들에게는 천주교를 알리는 선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체거동의 신심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1984년 103위 시성식과 같은 행사의 기틀이 될 수 있었습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미사를 자국어로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체거동의 신심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철학과 신학의 이성적인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상생활은 전례, 신심행사, 친교, 나눔의 감성적인 부분도 필요합니다.
이성이 없는 감성만의 신앙은 광신이 될 위험이 있지만, 감성이 없는 이성만의 신앙 또한 건조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발과 손입니다.
우리가 오랜 전통의 설날, 추석을 기다리는 것은 가족은 이성으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21세기의 밝은 세상에 초를 밝히는 것은 초가 가지는 전례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성탄과 부활의 전례와 축제는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삶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추어진 우리의 전례와 축제가 재현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앉은뱅이, 나병 환자,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나라가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루라는 시간을 주십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의 한자를 살펴보십시오.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의 조합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여 그사이에 공간이 형성되어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간이 너무 떨어지면 외롭고, 이 공간이 너무 밀착되면 숨이 막힙니다.
적절한 거리감이 중요합니다.
무관심은 사이 공간을 떨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간섭하면 숨 막혀 죽을 상황을 만들고 맙니다.
인정과 지지만이 적절한 거리감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거절, 부정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자녀에게 “절대 안 된다”라면서 그럴 바에는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부모의 외침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부모의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말한다면 숨 막히는 간격이 아닐까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황금률의 기초이며, 참 인간으로 사는 길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따르셨음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동네방네 소식을 알리고 병자들을 앓고 있는 상태 그대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지요.
너무 사람이 많아 일일이 손을 얹어 주시거나,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 주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의 치유가 예수님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네들 스스로가 믿음을 가지고 했던 행동(옷자락에 손을 대는 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갑곶성지에도 예수님의 발등을 잡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미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했기 때문에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기도 한다는 점에 기대어 보면 어떨까요?
진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게 꼭 필요한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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