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 (7) ...동정공파 안동시내 법상동에 계거하는 안동 권씨 제4파 동정공파(파조 권체달)는 조선시대 慶尙 監營의 營吏는 물론 안동부의 吏屬을 맡아 행정에 참여하였음이 “慶北地方 鄕吏關係 古文書資料 集成”에 나타나 있다.
1824년 동정공파 權永翕이 간행한 “鄕孫事蹟通錄”에는 안동 향손 가운데 행적이 두드러진 인물에 대한 전기를 수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안동 권씨 동정공파에서 戊申亂 진압에 공을 세운 感顧堂 權喜學(1672-1742)의 공적과 權命達․權聖範(1745-1807)의 효행, 權兆均․權德寬․權德來의 학식과 학행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경상 감영 영리의 70%가 안동 이속 출신이었는데 영리는 대다수가 세습되었으며 안동 권씨 동정공파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동정공파 權世益은 병자호란때 공을 세우고 난후에 의성 김씨 瓢隱 金是榲을 師事하여 길안면 용계리에 이거하여 그 후손이 계거하고 있었는데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각지로 흩어졌다. 권세익의 아들 權後重은 軍器監造의 功으로 동지부호군에 오르고, 권후중의 아들 權是昌은 흉년에 구휼하여 첨지중추에 오르고, 권상하의 문인 權是亮은 진사가 되고, 밀암 이재의 문인 權舜紀는 참봉을 지냈고 그 후손과 문인들이 藥溪亭을 지었다. 權舜經의 아들 悟軒 權翕은 효자로 동몽교관이 되었다. 동정공파는 시내 법상동이 세거지였으나, 종파는 남선면 구미 음곡으로 이거하였고, 권세익의 후손 無窩 權舜經, 藥溪 權舜紀는 길안면 용계로, 感顧堂 權喜學의 후손은 봉화 명호면 등으로 산거 하고 법상동에는 權兆均의 후예만이 정착하고 있다. 감고당 권희학의 영정은 현재 남선면 유일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권조균의 아들 권덕관․ 권덕래 형제는 효행이 뛰어났으며 권덕관의 아들 權昌植은 예학에 밝았고 권덕래의 아들 權昌質은 동지중추부사에, 權龍稱은 성균진사가 되었다. 이 외에도 權心度, 權永翕이 성균 생원이며 權有夏는 문과에 급제, 注書가 되었다. 풍산 막곡에 세거하는 권영흡의 손자 權載鐸은 고종때 대원군과 서신을 왕래하는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안동 권씨 동정공파는 다른 파에 비하여 크게 현달한 인물이 없다.
권희학(權喜學) 1672(헌종 13, 임자) ~ 1742(영조 18, 임술)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문중(文仲). 호는 감고당(感顧堂). 명형(命逈)의 자. 부내(府內) 법상동(法尙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높고 자질이 뛰어났다. 자라서 본부(本府 : 安東)의 통인(通人)이 되었는데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온 최석정(崔錫鼎)이 그 능력의 비범함을 보고 내직(內職)으로 옮길 때 데리고 갔다.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가는 최석정을 따라 청(淸) 나라에 다녀와 1700년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이 되고, 이어 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 고군산첨사(古群山僉使)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에 금위영교련관(禁衛營敎鍊官)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었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花原君)으로 봉해졌다. 곤양군수(昆陽郡守)를 거쳐, 오위장(五衛將)․ 운산군수(雲山郡守) 등을 두루 거치며 선정을 베풀다가, 1737년 장연부사(長淵府使)를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그는 평생 자기를 이끌어 준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명곡의 유저(遺著)를 간행하고, 토지를 사서 명곡의 사당에 바치며, 해마다 기제(忌祭)에 제수를 보내는 등 정성을 다했다. 저서에『감고당집(感顧堂集)』『연행록(燕行錄)』『서행록(西行錄)』이 있고, 영정(影幀)이 전한다. ■참고문헌 : 肅宗․英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 著) 권성범(權聖範) 1745(영조 21, 을축) ~ 1807(순조 7, 정묘)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명칙(明則). 재장(再章)의 손자. 본부(本府)의 하리(下吏)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부모상을 당하여 삼년 시묘를 하루같이 정성을 다 하며, 손수 무덤 가에 하루종일 나무를 심었다. 성범이 매일 부모님 산소를 오가며 밟아 길이 되니 세상 사람들은 이를 ‘효자로(孝子路)’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효행으로 1808년(순조 8)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남선면(南先面) 신석리(申石里)에 비각(碑閣)이 있다. 또 그 아들 사도(思度)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901년(고종 38) 효자 정려를 받았다. ■참고문헌 : 嶠南誌․安東府邑誌 저작자 김석규 [출처] 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 (7) ...동정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