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히스패닉사제협회 회원들에게 연설하는 교황 (Vatican Media)
교황
교황, 사제들에 “모든 이에게 마음과 문을 여십시오. 사제는 ‘사무직’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16일 연례 국제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한 미국의 히스패닉사제협회 회원들의 예방을 받았다. 협회는 오는 2024년 미국에서 열리는 전국성체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대회 주보성인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와 성 마누엘 곤잘레스다. 교황은 사제들에게 교회 내 고위직에 오르려 애를 쓰기보다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불의에 맞서 행동하고, 문화 간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고 권고했다.
Antonella Palermo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16일 오전 사도궁 클레멘스 홀에서 연례 국제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한 미국의 히스패닉사제협회 회원들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교회는 문이 열려 있는 집”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준비된 연설문에 없는 연상적인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면서, 특별히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끊임없이 봉사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폐쇄적이고 “고상한” 교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고상한 교회”의 유혹을 경고하면서 “이는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른 어떤 참고도서보다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초대했다. 교황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말을 인용해 예수님께서 “살아 있는 책”이시라며, 따라서 “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영감을 끊임없이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성경을 묵상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며, 특별히 경배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침묵 중에 경배하며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민망하지 않도록 여러분께 직접 묻지는 않겠습니다만, 경배하기 위해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할애하는지 지금 제가 묻는다면 아마도 좋은 시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지만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경배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어요. 여기저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 기도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삶은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여인들
교황은 감실 앞에서 묵묵히 “이 살아 있는 책을 읽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고귀한” 성인들 가운데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와 성 마누엘 곤잘레스를 예로 들었다. 이들은 오는 2024년 미국에서 열리는 전국성체대회 주보성인으로 선정됐다. 교황은 사제들이 던진 현대 사도직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누엘 성인의 교리 교육에서 영감을 얻었다. 교황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여인들을 모범으로 삼아 그 여인들의 마음 상태 안으로 빠져들라고 초대했다.
“이주민 문제, 특정 국가 및 종교 당국의 폐쇄성, 다문화의 도전, 복음 선포의 복합성 등 숱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십자가 아래의 여인들이 당시 겪었던 것과 똑같은 무력함, 불의에 맞서 행동하려는 열망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히스패닉사제협회 회원들을 만나는 교황
고통받는 이들을 홀로 두지 말고 그들의 고난을 덜어주십시오
복음은 오늘, 지금 여기에서 육화돼야 한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들 안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으시기 때문이다. 교황의 권고는 분명하다.
“모든 감실에서, 모든 축성된 성작의 성혈에서, 우리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음을 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해야 한다.’ ‘수난’이 고통받는 모든 형제자매 안에 있는 ‘여러분의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동반자’라는 인식으로 그렇게 행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홀로 두지 마십시오.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홀로 두지 마십시오. 무릎으로 하지 않으면(역주: 기도하지 않으면) 손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성체 앞에서 침묵하고 경배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다음 봉사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탁구 경기와 같아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 이어지고, 또 하나가 다른 것으로 이어집니다.”
사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을 다루는 ‘사무직’이 아닙니다
교황은 또 사제들에게 “사무적인” 업무에 “안주”하며 정해진 일정만 고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일정표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을 다루는 ‘사무직’이 되지 마세요. 그러한 것은 오늘날의 문화에서 비롯된 위험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 마음이 열려 있는지 잘 살펴보길 바랍니다.”
교황은 감실에 계신 주님께서 사제들의 걱정에 답변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가 ‘천국으로 가는 고속도로’라는 표현으로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울인 노력처럼 기발한 답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 사업과 사도적 활동에 혼신을 기울인 마누엘 성인과 같은 분이 여러분보다 더 대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충실하고 변함없이, 그리고 자녀의 일을 완성하시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라고 격려했다.
교황의 강복을 받고 인사를 건네는 한 사제
겸손한 사목, 기도, 형제적 환대
교황은 사제들에게 사전에 미리 준비된 계획 없이, 아낌없이, 남김없이 사목활동을 수행하라고 권고하며 마누엘 성인을 다시 인용했다. “성인은 사제가 오늘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기도, 친근한 말, 형제적 환대, 끈기 있는 사목 활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교황은 정해진 일과시간 외에는 방해받지 않기 위해 사제관 창문을 굳게 닫아 놓은 가난한 동네의 한 사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안 됩니다. 문을 활짝 여세요!” 교황은 “하루 동안 많은 씨를 뿌리고, 고단한 몸으로 저녁에 돌아와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형제 여러분, 대단한 아이디어나 잘 짜인 사목 제안만 믿지 마세요. 남들이 실행에 옮겨야 하는 여러 사목 계획서를 저에게 들고 올 때마다 참 우려스럽습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를 찾지 마세요. ‘이 담당자가 이러저러하게 잘못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먼저 ‘나는 제대로 할 일을 했는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행여나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사목자의 겸손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서로에게 선물이 되라고 부르시고, 오직 여러분에게 충실함과 항구함을 원하시는 하느님께 여러분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복음 선포는 조건이나 대가가 없습니다
교황은 사제들에게 교회 내 고위직에 오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라고 당부하기 위해 “손톱 밑의 때”라는 이미지를 끌어왔다.
“손톱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유지하십시오. 사제가 고위직에 오르려 하면 손톱 밑에 때가 끼기 때문입니다. 이 직책, 저 본당, 이 참사회에 들어가려는 사제에게는 인간적 승진이 조건 없는 복음 선포를 대체하게 됩니다. 복음 선포가 조건 없이 이뤄진다는 점을 잊어버리면 여러분은 삶의 희망을 잃은 불쌍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항상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돌아가십시오. 손톱을 더럽히면서까지 올라가려 하지 마십시오. 고위직에 오르면, 굳이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추잡한 것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