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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에 이어 2구간(운봉 ~ 인월)을 연이어 진행합니다.
구 간 개 요
1. 산행일시 : 2017. 12. 21. 목요일
2. 동행한 이 : 홀로
3. 산행 구간 :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운봉읍 ~ 서림공원 ~ 비전마을 ~ 흥부골자연휴양림 ~ 인월)
4. 산행거리 : 9.9km
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운봉 시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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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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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마을 |
4.1 |
12:34 |
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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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골 휴양림 |
3.7 |
13:31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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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월 |
2.1 |
13:55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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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9.9 km |
02:14 |
02:14 |
실 소요시간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의 지리산길. 운봉-인월 구간은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9.9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12:41
이정표를 보고 직진을 하자마자 만나는 곳이 서림공원입니다.
서림공원
서천리 선두숲으로 불리었다. 서림공원에 들어서면 석장승이 눈에 먼저 띈다. 운봉전체를 지키는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 운봉사람들이 각별히 아끼는 석장승들이다.
서림공원 입구에는 이곳이 당산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당산堂山이라는 것은 마을 수호신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죠.
여기가 운봉 입구라는 얘기군요.
그렇다면 이 부근이 예전부터 인마人馬가 다니던 옛길이라는 얘기.
어쨌든 이곳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뜨는 게 두 기의 돌장승입니다.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던 기물입니다.
남쪽의 것은 여자로서 방어대장군이라 각자가 되어 있고,
북쪽의 것은 남자로서 진서대장군이라 각자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基의 돌장승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마을 입구나 사찰 입구에 서 있으면서 잡귀를 막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벽사신앙辟邪信仰의 하나입니다.
다음에 답사할 벽송사에 가면 이런 돌장승 세 기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죠.
물론 벽송사의 그것은 벽사문화 즉 토착신앙과 불교 신앙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고....
이곳에는 여러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많이 마모가 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 중 제일 좌측에 있는 '박봉양 장군비'라고 씌어진 '갑오토비사적비'라는 게 눈에 띕니다.
토비討匪라니!
그렇겠죠.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반란군이니 토비라고 한 거로군요.
더군다나 조선 정부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백성을 진압하던 팀이었으니....
참고도 #1
어쨌든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라고 하면 갑오농민혁명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는 1894. 11. 3. 운봉 → 영남으로 진출하려던 유복만, 남응삼의 혁명군이 요천이 뒤로 흐르는 남원 산동의 부동촌에 배수의 진을 친 다음 관암재에 진을 친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1. 14. 농민군이 방아치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되었던 바, 아마 이 사적비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송기숙 같은 이는 소설 '녹두장군'을 통하여 혁명군 전봉준, 김개남 등이 주둔하고 있던 지리산 권역인 남원의 교룡산성이나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들여져 있는 백두대간 상의 여원재 등을 설화적 공간으로 상정하여 역성혁명을 이루려는 민중들의 정치적 지향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매천 황현같은 유학자들은 대부분 '강상綱常의 윤리倫理'를 부정하고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하는 전봉준이나 김개남의 동학군을 붓으로 심판하는 입장을 취했지 않습니까.
특히 매천은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바탕한 역사서를 통하여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 기록이 바로 '오하기문梧下紀文'입니다.
매천 같은 이가.....
다른 이도 아닌 매천 같은 사람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시 유교 혹은 유학이라는 게 양반 층 혹은 일부 계층의 의식을 얼마나 뿌리깊게 지배하고 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할 것입니다.
하긴 요즘도 '국모니 국부니' 하는 봉건주의적 사고 방식에 얽매어 있는 부류들도 있는 판이니.....
하지만 매천은 자신이 견문見聞한 질서정연한 농민군의 모습을 보고는 노략질 부분, 살인 부분, 민폐 부분, 질서를 지키는 부분, 여성 해방을 부르짖은 신분 문제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을 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박맹수 논문, 지리산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과 동아시아적 의미
결국 이는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보는 이들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절도사 분충어난비.
우틀하여 서림공원 안내판을 보고 본격적으로 2구간 길에 들어섭니다.
지난 1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운봉 시내는 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레길에서 여원재를 빠트렸다는 게 저로서는 못내 아쉽기만 하군요.
아마 시내를 통과하는 길을 만들어 둘레꾼들로 하여금 부근 상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대치가 작용한 거 아닌가 혹은 '사단법인 숲길' 분들이 백두대간의 가치에 대해서 좀 평가절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울러 갖게 합니다.
구간의 시작은 좌측에 람천이 흐르는 뚝방 길입니다.
멀리 조금 전 보았던 고남산이 우뚝 서 있고...
1380. 9. 진포대첩으로 퇴로를 잃은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우왕의 명을 받은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황산으로 진출을 할 때 저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재계를 하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1:55
신기교를 건너 도로를 따르다,
잠시 뒤를 돌아 운봉의 진산인 성산533.5m을 봅니다.
1부에서 얘기했었죠?
저 성산은 운봉의 주산主山이고 반야봉은 운봉의 안산案山이라고.....
- 김선신(1775 ~ ? ) 두류전지
11:57
그러고는 신기4거리입니다.
좌측 표석을 보니 눈에 익은 마을 이름이 나옵니다.
우측 표지석 매요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라 여러 차례 들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약 3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신기 마을 방향으로도 좌측의 백두대간이 보이기는 마찬가지군요.
비록 낮게 깔려가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500고지를 넘나드는 높이 입니다.
여기는 아직도 운봉고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지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측으로 드디어 황산698.7m이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부근을 행군하던 630년 전 이성계 군사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저 황산과 우측의 지리산 자락 그 사이에 좁은 곳으로 람천이 흘러갑니다.
그러니 함양 땅에 들어온 왜구들이 남원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저 병목같은 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운봉지雲峰志를 볼까요?
신우辛禑-고려 32대 우왕을 폄하한 표현-때 왜구가 함양을 도륙하고 다시 남원산성을 공격했다. 왜구는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후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라의 안팎이 크게 진동하자 태조가 변안렬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다. 아침에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 동쪽으로 운봉을 넘어가니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 밖에 되지 않았다. 황산의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에 올랐는데 길 오른편 험한 지름길이 있었다. 험한 길로 들어서자 왜구의 기예부대가 갑자기 뛰어나왔다. 태조가 50여발의 화살을 쏘아 그들의 얼굴을 맞히자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꾸로지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구가 산에 근거해 방어를 굳건하게 했는데 태조가 군사들을 지휘해서 요해처를 분담하고 다시 소라를 불어 병사를 정돈한 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태조가 즉시 여덟 명을 죽이자 왜구가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기발도(살펴보건대 '아기'는 어리다-弱幼-는 말이다. '발도'는 왜구 말로 장사壯士라는 말이니 예라하曳落河-돌궐의 언어인 elaha의 음역으로 '건장한 사나이'라는 뜻-와 같다)라는 적장을 태조가 그의 용기와 기예를 아깝게 여겨 생포하려 하였으나 이두란이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아기발도가 구리 가면과 철갑을 입고 있어 화살을 쏘아도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두란이 뒤이어 화살을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왜구의 기가 꺾였다. 마침내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온통 붉은 빛이었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았지만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가 성모상과 가섭석상을 벤 뒤에 떠났다.
하여간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와도 같은 나라입니다.
이들이 도망간 루트를 살펴볼까요?
당시 상황을 보자. 군산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이른바 ‘왜구(倭寇) 루트’를 통하여 도망갔다. 김천을 지나 그들의 2차 집결지는 지금의 바로 이 남원 운봉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토벌군의 구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하여 백두대간 상의 이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게 된다. 그때 홀연히 백발의 여인이 꿈에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 칠 계략을 일러준다.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택리지에도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토는 택리지의 일어 번역본인 조선팔역지를 통하여 익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이 여인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하였다. 그러니 여원이 있는 부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여원재(女院岾)라 불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여원치(女院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또 패한 나머지 왜구 잔당들은 반선으로 도망간다. 그들은 거기서 뱀사골을 이용하여 화개재로 오르게 된다. 그러고는 거기서 동진을 하여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고 천왕봉까지 간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잔당들은 백두대간의 지리 주릉을 타는 최초의 일본인이 된다. 천왕봉 정상에 선 그들은 거기서 사당 안에 있는 성모 석상을 본다. 그러고는 쓸데없는 분풀이를 그 성모석상에 가한다. 그 석상의 목을 자른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91쪽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왜구들은 화개재에 올라 백두대간길을 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사로 들어갑니다.
왜구들은 그 영신사에서 사람 형태를 하고 있는 가섭존자의 형상을 봅니다.
이 대목을 점필재는,
영신사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 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迦葉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 그 목에 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이 아닐까?
-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유두류록
라고 기록했습니다.
영신사는 영신봉 아래 그러니까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으로 진행하는 입구의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너른 공간-영신대-에 자리잡고 있던 암자였습니다.
그 암자 바로 뒤에 가섭존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걸 해하였다는 겁니다.
김일손(1464 ~ 1498)은 '두류기행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황산과 관련된 것은 이따 조금 더 보기로 하죠.
12:09
지도 #5의 '사'의 곳에 있는 사반교입니다.
다리를 건너,
좌틀하여,
이제는 람천을 좌측에 두고 걷습니다.
너른 반석들이 자주 나옵니다.
황산을 지나 왜구들과의 전투로 인해 생겼다는 피바위도 사실 저런 반석에 불과합니다.
다만 철분이 더 섞여 있어 붉은색을 띈다는 점이 다르겠죠.
오리 가족들.....
곧게 뻗은 뚝방길을 홀로 걷습니다.
우측을 보니 지리 서부능선이 고리봉부터 선명하고....
그 능선은 성삼재를 출발하여,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좌측 뒤로 바래봉.
바래봉 좌측으로 덕두산은 살짝 숨었군요.
황산은 정면으로 다가오고....
언제부터인가 저 황산은 제게 큰 신산神山이 되었습니다.
저 황산에서 왜구들을 쳐부술 때 왜구들과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떠돌아 다니다 못해 지리산 한 자락에 숨어살던 우리 민초들은 얼마나 통쾌해 했을까!
그 조선이 역성혁명을 통해 개국을 할 당시의 초심만 잃지 않았더라도 저렇게 왜적의 손에 나라가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 것을.....
람천 너머 백두대간길.
고남산은 멀어졌고....
이제 비전마을도 거의 다 왔습니다.
좌측으로 어휘각이 보이는군요.
오늘 필히 들러야 할 곳이죠.
그리고 황산대첩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
대첩교를 건너 어휘각으로 갑니다.
어휘각입니다.
御諱란 임금의 이름을 말하는데.....
바위 위에 단을 쌓아놓았습니다.
이런 큰 뜻으로,
바로 이 석벽에 각자刻字를 하여 쓴 것인데 1945. 1. 17. 조선총독부에서는 정으로 쪼아 이 각자를 훼손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인들은 고토 분지로도 육안으로 똑똑히 보았던 오른쪽의 황산대첩비는 기어코 다이너마이트로 파괴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쪽 閣의 이름이 파비각破碑閣입니다.
고토 분지로 아시죠?
고토 분지로가 도대체 누구야?
태어날 때부터 고토는 지질과 연관이 있었다. 아버지가 도공(陶工)의 보조인인 번사(燔師)여서 그는 자연스럽게 토양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1880년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국비로 독일 유학을 떠난다. 서양지질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1886년 동경제국대학의 지질학과 교수가 된다. 그는 그때부터 황무지였던 일본 지질학을 이끌게 된다.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오키나와(琉球) 제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만 같은 곳으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물론 일본 정부가 겉으로 내세우는 것은 학술조사이지만 실제는 자원 침탈을 위한 지질조사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하자원, 토지자원, 산림자원, 수력자원 등을 약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질, 지형 등의 조사가 필요했다. 이미 일제는 고체 등 몇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한 일본인의 조사보고서가 필요했다. 고토는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 교수였다. 외국 탐사경력도 충분했다. 동방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사상은 황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이도 한창 때인 40대 중반이다. 이런 고토보다 조선의 지질조사 작업에 안성맞춤인 사람은 절대 없었다.
음흉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민간기구 차원의 학술조사로 모양새를 갖췄다. 동방협회였다. 고토는 그렇게 동방협회의 지원도 받게 된다. 그는 1900년부터 2차에 걸쳐 조선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답사한다. 광산, 지질조사가 주목적이었다. 조선의 전반적인 정세도 정탐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 북부지방을 조사할 때에는 간도지역의 개발 가능성까지도 조사하였다.
“그럼 지질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당시 조선 땅은 인프라infra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게 불편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온 사람인데 웬만한 불편은 감수했겠지. 조랑말타고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으니 오죽했겠어. 탐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조선산맥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야. 거기에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름이 올라간 거고.”
“조선산맥론?”
“그래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
고토의 두 차례 지질조사
군산항으로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은 (주)조선목포영사관 군산분관 영사 주임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였다. 그는 조선인 길 안내원 2명을 소개하고 교통수단이 될 조랑말 4필도 건네준다. 그러고는 그들을 조선인 복장으로 위장시킨다.
이렇게 6명이 약 70일 일정으로 제1차 조선반도 지질탐사대를 구성한다. 탐사책임자는 물론 동경대학 지질학과 제1회 졸업생이며 일본 지질학계의 태두(泰斗)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였다. 그의 손에는 1894년 발행된 미쯔하시(三橋僊史)의 ‘조선지명안내’ 책자와 일본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1:50,000지도가 들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토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이중환의 택리지를 독파했다는 데 있다. ‘조선팔역지(朝鮮八域地)라고 일역(日譯)된 이 택리지를 읽고 고토는 조선의 인문지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뒤에 자세히 본다.
고토는 지질학자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독일인 고체(Gottsche)는 그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왔다. 물론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고서였다. 고토는 이 고체의 자료를 참고한다. 그는 주로 노두(露頭)를 근거로 지형, 지질일반, 암석학적 분석을 한다. 즉 절벽이나 경사면 등에 노출된 암반이나 돌을 보고 그 일대의 지질을 추정하는 방식이다.
고토의 작업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땅속으로 들어가 보거나 다른 어떤 기계를 가지고 정밀하게 측정을 해본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 1900년 8월에 시작한 조사 작업은 1901년 3월 1차 조사를 마치게 된다. 이 결과물을 가지고 고토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 간 그는 그것들을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라는 논문을 쓰고 이를 동방협회 회보에 올린다. 그러고는 같은 해 8월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조선북부를 탐사를 한다. 그렇게 해서 1902년 발표한 논문이 ‘조선북부의 지세’이다.
즉 그는 1900년 8월 ~ 1901년 3월 그리고 1901년 8월 ~ 1902년 3월 두 차례 266일 동안 총6,300km를 다니면서 광물조사 를 하였다. 하루에 평균 23km 정도 걸었다는 얘기다. 당시의 도로 사정과 계절적 요인을 따져보면 상당히 어려운 환경조건이다. 아무리 40대 중반의 고토라도 고개나 강의 절개지 그리고 바닷가를 관찰하면서 걷기가 쉬웠을까?
이 논문은 고토가 지질학자이면서 철저하게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침략의 앞잡이 임을 보여준다. 즉 그는 역사학자 못지않은 조선의 고대사와 근대사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물론 그 지식은 황국사관의 입장에서 철저히 조작된 사실(史實)이다. 이런 것들이 그가 조선에 온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졸저 전게서 103쪽 이하
고토 분지로.
지금 우리 교과서에서 쓰고 있는 태백산맥 등 지질구조선에 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인 장본인인 고토 분지로.
산맥이라는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에 지질학적 개념의 지질구조선을 갖다 붙임으로써 용어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 인물.
그는 1901년 겨울 2차 횡단여행을 하면서 이 지점을 지나게 됩니다.
그의 글을 봅니다.
운봉읍내에서 4km 떨어진, 앞에서 언급한 풍극의 입구에 '비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일본으로 보아서는 운이 없었던 전장이었다. 왜냐하면 군기가 빠져 동요마저 일으키던 조선군이 압도적인 적을 두 번이나 물리쳤기 때문이다.
사당이 셋 있는데 팽나무숲에 의해 그늘이 져있다. 한 곳에는 1594년 일본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비명이 들어 있고, 이는 화강암에 새겨졌다. 두 번째는 일본 남부의 극악무도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 장군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는 훌륭한 사당이다. 그 후 이 장군은 힘을 길러 고려의 마지막 왕을 폐하고 현재 왕조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세 번째 사당이 가장 크지만 나는 그 안의 있는 내용물의 특성을 알 수 없었다.
코토 분지로 저 '조선기행록' 손일 옮김 푸른길 간 115쪽
다시 과거로 돌아가 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펼치던 청계도인 양대박(1543~1592)의 글을 볼까요?
1586. 9. 3.
느지막이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황산의 비전에서 잠시 쉬었다. 이 비석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칭송한 비다. 전殿은 비碑를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비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양대박 두류산 기행록
이보다 뒤의 글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의 유두류산록을 보면,
1611. 3. 29.
요천을 거슬러 올라 반암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1578년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이 전액篆額을 썼다.
지난 고려 말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 땅에 '황산黃山'이라는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켜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대적하여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일 뿐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에서 이야기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지난 정유1597년 왜란 때, 양원-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로써 부총병- 등이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것이 아니랴.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다.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가 피를 흘렸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주신 것인가보다.
이 유몽인의 글을 보면 우리가 알던 피바위에 대한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까 피바위 안내글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황산전투 시 아군이 수많은 왜구들을 죽이게 되어 그 피가 람천을 차고 넘쳤으며 이때 이 피가 바위에 물들을 정도였는데 이 바위를 혈암血巖 또는 피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라는 게 그 요지입니다.
그런데 이 유몽인의 글을 보면 피바위는 황산전투가 있은 지 약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거 아닙니까?
괜히 이성계와 황산대첩에 피바위를 연결시킨 모양새입니다.
하긴 어느 글을 보면 이곳이 '황산벌 싸움'이었다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나올 정도니....
잘못하면 이성계 = 계백장군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또 사실은 이 바위에 철분이 많아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인데....
유몽인에게 한 표를 던집니다.
비전마을의 첫 번째 집은 가왕 송흥록의 집입니다.
판소리는 조선 영조․정조 때 가장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동편제의 특징은 묵직하고 장엄한 소리에 막힌 가슴이 뚫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장수의 호령소리를 실감케 한 것이다. 판소리의 제(制)에는 동편제와 서편제 또 중고제와 보성제 등으로 크게 나눈다.
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지리산을 끼고 운봉을 비롯하여 남원․순창․구례와 같이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함양․하동․진주까지를 포함시킨다. 동편제는 장단도 길게 빼지 않고 짧게 그리고 분명히 끊어지며 리듬 또한 단조롭고 담백한 맛이 있다. 동편제의 시조가 가왕(歌王)이란 칭호를 받은 송흥록(宋興祿) 명창이 바로 운봉출신이란 점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동편제와 구별되어 일컫는 서편제는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와는 달리 애절하며 섬세하여 여성적인 맛을 가진 소리다. 동편제의 무뚝뚝한 맛과는 달리 서편제는 수식과 기교가 많고 자상하며,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감상적인 면이 강조되는 소리이다. 주로 섬진강을 넘어 광주․담양․나주․목포․보성․고창 쪽으로 보고 있다.
운봉은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이다. 바로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그의 아우이며 자신의 고수였던 송광록(宋光祿),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雨龍),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萬甲)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宋門一家)는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큰 계보인 것이다.
운봉에서 살다가 구례로 이사한 송광록과 송우룡은 물론 송만갑 역시 비록 구례에서 살았다고는 하나 결국 운봉에 뿌리를 둔 운봉인이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를 받았으며 운봉의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함께 마을 입구에 그의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의 고향이며, 그녀가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이밖에도 운봉은 남원이나 구례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로 오가면서 공부도하고 친히 지냈던 명창들이 대단히 많다. 유성준․김정문․배설향․이화중선․박봉술․강도근 등 많은 명창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안숙선․정춘실․이난초․전인삼 등의 젊은 명창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정춘실은 운봉면 권포리 출신이다. 운봉은 국악인들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속의 고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송흥록 생가의 모습입니다.
비전마을을 나와 발길을 재촉하면 좌측으로 국악의 성지가 보이고 그 뒤가 황산입니다.
군화동을 지나 구도로를 따라 걸으면,
화수교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두 기의 탑이 보입니다.
좌측 비에는 원명당 종범대선사부도탑이라고 적혀 있고,
우측에는 '나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이라고 적혀 있고 자잘한 글씨로 복잡하게 뭔가가 적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거칠불'부터 계승되어온 법통을 써 놓은 것 같습니다.
과거 장엄겁(莊嚴劫)에 나타난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의 3불과, 현재 현겁(賢劫)에 나타난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의 4불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불타는 석가모니불 혼자이지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과거칠불과 함께 현재불 ·미래불의 사상이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은 본생담(本生譚)의 구도자상(求道者像)과 어울려 보살(菩薩) ·여래장(如來藏) 등 대승불교의 사상적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거칠불 [過去七佛] (두산백과)
쭉 읽어보니 불교의 법통을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조통보佛祖統譜인 셈이군요.
쉽게 얘기하면 불가의 족보입니다.
기독교로 얘기하면 구약성서의 창세기편?
제1불인 비바시불부터 7조인 석가모니불까지 가재되어 있고 그다음이 전법원류傳法源流 제1조 마하가섭을 시작으로 아난존자, 제28조가 보살달마인데 그 달마대사인가요?
제33조 혜능, 도일, 지엄... 그러고는 제78대가 바로 이 원명 종범 스님이군요.
그렇군요.
비석이 있는 곳을 나와 인월교를 건너 거슬러 올라갔다가 리조트 안내판 좌측으로 들어갑니다.
옥계호라는 이름의 저수지로 오르면서,
고남산을 돌아 봅니다.
도로를 따라 올라,
우측의 옥계호를 봅니다.
이 옥계호 ~ 흥부골 자연휴양림 구간은 임도를 따라 걷는 구간입니다.
지난 번 지리서부능선을 할 때 지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정목은 여전하고.....
간벌과 벌목 작업 현장을 보고...
드디어 인월면이 보이는군요.
인월引月라는 지명은 1380년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와의 싸움 때 달月을 끌어引 승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8년까지만 해도 남원군 동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는데 개칭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인월의 뒷산은 오봉산878.5m, 옥녀봉801.5m, 천령봉558.5m으로 이어지는데 그 능선의 원천은 연비산843.1m ~ 팔량재 ~ 투구봉1032.5m으로 이어지는 임천지맥입니다.
AD940년 그러니까 고려 태조때 역驛을 설치하면서 인월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달을 끌어 전쟁에 이용했다는 설"은 좀 과장된 거 같습니다.
한편 임천지맥이라....
임천지맥은 백두대간의 봉화산 부근에서 분지하여 연비산 ~ 삼봉산 ~ 오도봉을 거쳐 임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지맥입니다.
지맥枝脈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얼마 전 백두대간 하늘재 ~ 조령3관문 구간을 진행하면서 달천지맥과 신선지맥에 관하여 글을 썼던 좋은 예제가 하나 있군요.
그걸 갖다 붙이겠습니다.
오늘 구간은 하늘재 ~ 마패봉을 지나 조령3관문까지 진행을 합니다.
포함산, 주흘산, 부봉, 신선봉 등이 멋진 조망을 보여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구간이 중요한 것은 여기서 두 개의 지맥이 분기한다는 것이죠.
신선지맥과 달천지맥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특히 달천지맥의 분기점은 애매하기도 하고 별다른 안내판도 없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찾아봐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행방식이야 개개인의 취향에 달린만큼 지맥 산행을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맥 산행을 한다고 '잘난 척'하고 다니는 사람들 얘기나 들어주려면 용어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래도 백두대간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산줄기에 입문한 '산줄기 꾼'이잖습니까?
말을 달리하여 일반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 "저 대간 하고 있어요!"하는 건 산꾼들 세계에 있어서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보다 더 먹히는 문장 아닙니까?
각설하고.....
저는 그리고 대한산경표는 산줄기를 4개로 구분합니다.
대간, 정맥, 지맥 그리고 단맥입니다.
대간은 백두대간을 이야기하고 정맥은 9정맥 그리고 지맥은 175개로 정리합니다.
그 나머지는 다 단맥으로 보면 되니까 단맥의 경우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물론 남한만 상정합니다.
북한 쪽은 김정일과 우리나라 국가보안법이 협조해 주지를 않아 부득불 통일 후로 작업을 미룹니다.
1대간 9정맥은 누구나 아실 것이니 지맥만 보기로 하죠.
우선 개념으로 본다면 지맥이라는 용어는 간단합니다.
즉 우리나라 산줄기 중 도상거리 30km를 넘는 산줄기 중 대간과 정맥을 제외한 모든 산줄기를 말합니다.
모든 산줄기?
그래도 명색이 지맥인데 어떤 요건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 요건을 제시해 준 아니 암시해 준 우리나라 지지地誌가 바로 산경표입니다.
“지난번 얘기하다만 산경표 얘기를 해줘. 특히 해제가 중요하다면서? 거기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하네.”
조선광문회 발간 산경표 해제(서문)
“우리나라의 지지(地誌)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祖宗)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고 적고 있다.
산경표는 ‘산의 조종(祖宗)’ 즉 산의 족보를 보여주는 표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幹)로 하여 갈래(派)를 친다는 말이다.
가령 ‘조령(鳥嶺)’을 보면 ‘鷄立嶺 - 鳥嶺 延豐 東二十五里 聞慶 西二十七里 - 伊火峴’으로 표기하여 놓았다.
이는 ‘ 조령은 연풍 동쪽 25리에 있고 문경 서쪽 27리에 있다’고 하여 위치와 구간 간의 거리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 조령은 계립령 ~ 조령 ~ 이화현으로 순(順)으로 진행한다고 하여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으로 향하는 산이나 고개의 순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조령 옆에는 ‘主屹山 聞慶治在南一里’라고 하여 ‘주흘산 - 문경치소가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하여 군현의 관청이 있는 고을 이름까지 나타낸다.
고로 산경표는 백두산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기본 산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요 산이나 고개 사이의 거리, 관청이 있는 주요 지명 그리고 거기서 갈라진 주요 산줄기 등을 산 이름과 고개 이름을 중심으로 표로 일목요연하게 만들어 놓은 우리나라 산의 족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13쪽
이 산경표라는 책 안에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우리나라의 주요 산줄기가 순서대로 차근차근 기재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산줄기 체계입니다.
서양에서 ridgerange, mountains라는 개념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저로서는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조선시대 중기부터 '산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서양에서 얘기하는 산맥 개념과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가 무슨 용어로 번역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산맥이 고토의 작품이라고?
“형. 근데 지질구조선이 산맥이라며? 우리가 배운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거야? 원래 산맥이라는 말이 우리가 쓰던 말이었다면서!”
장감독은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다.
“장감독, 아베 노부유키라고 알지?”
“응 . 요새 인터넷을 달구고 있잖아. 지금 수상인 아베신조의 할아버지.”
하긴 그 똑똑한 장감독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그가 한 소위 ‘마지막 총독 아베의 소름끼치는 예언’이라는 것도 알지?”
“알지.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는...”
“바로 그거야.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서는 역사와 지리교육에 각별하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잖아.”
고토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 예습을 한 것은 조선의 역사뿐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책은 ‘조선팔역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를 일본어로 번역한 인쇄물이었다. ‘택리지’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지리소지(朝鮮地理小志)’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도 간행된 인문지리서이다. 188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조선지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는 동양 고유의 철학이자 자연관을 신봉했다. 그것은 길흉화복을 담은 어쩌면 과학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도 있었다. 즉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공생으로 보는 이 풍수사상은 서양의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지리학 역시 자연과 조화된 균형 있는 개발을 모토로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 지리학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렇다! 택리지에 서양지리학을 가미하자.” 그는 1884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접한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 중 산수(山水)편을 본 첫 감상은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작고 미개한 나라에서 이렇듯 과학적인 산줄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학이 그렇게 발달한 서양에서도 접하지 못한 산줄기 체계. 그것을 이미 100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다니! 고조선 시대에는 만주벌판을 호령했고 고구려 시대에 와서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이 다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어떠한가! 금속활자나 측우기 같은 것은 세계 최초로 만들었고 그들의 도자기 굽는 기술이나 화약을 최초로 실용화하고 나침반도 신라시대부터....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글자까지 가지고 있으니...
좋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단군과 백두산이렸다! 조선산맥? 백두산부터 흘러내린 조선의 기둥이 조선산맥이라고?
‘곤륜산의 한 가지가 큰 사막의 남쪽으로 오다가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지어 요동 평야가 된다. 평야를 건너 다시 일어나서 백두산이 되는데, 곧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치고 두 강을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이 되었다. 등 뒤로 뻗어 나간 한 가지는 조선산맥의 머리가 된다.’
그래!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의 팔도총론 도입부에 나온 이 조선산맥! 산맥으로 가자!”
택리지를 본 고토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짐을 느꼈다. 대일본제국을 위한 일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위한 일이었다.
- 졸저 전게서 157쪽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산맥이라는 산줄기에 대간 그러니까 백두대간을 우리나라 최고의 산줄기로 상정하였고 그 하위 개념으로 정간과 정맥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 산줄기 체계가 조선시대 - 대한제국 - 대한민국이라는 국체國體로 변경이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지리교과서에도 자연스럽게 이런 산줄기 체계로 올라 있어 당연히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사이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역사적인 사실'이 개입이 되면서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미 얘기했듯이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하자원, 토지자원, 산림자원, 수력자원 등을 약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질, 지형 등의 조사가 필요했다. 이미 일제는 고체 등 몇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한 일본인의 조사보고서가 필요했다. 고토는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 교수였다. 외국 탐사경력도 충분했다. 동방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사상은 황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이도 한창 때인 40대 중반이다. 이런 고토보다 조선의 지질조사 작업에 안성맞춤인 사람은 절대 없었다.
음흉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민간기구 차원의 학술조사로 모양새를 갖췄다. 동방협회였다. 고토는 그렇게 동방협회의 지원도 받게 된다. 그는 1900년부터 2차에 걸쳐 조선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답사한다. 광산, 지질조사가 주목적이었다. 조선의 전반적인 정세도 정탐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 북부지방을 조사할 때에는 간도지역의 개발 가능성까지도 조사하였다.
“그럼 지질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당시 조선 땅은 인프라infra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게 불편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온 사람인데 웬만한 불편은 감수했겠지. 조랑말타고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으니 오죽했겠어. 탐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조선산맥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야. 거기에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름이 올라간 거고.”
“조선산맥론?”
“그래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
고토의 두 차례 지질조사
군산항으로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은 (주)조선목포영사관 군산분관 영사 주임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였다. 그는 조선인 길 안내원 2명을 소개하고 교통수단이 될 조랑말 4필도 건네준다. 그러고는 그들을 조선인 복장으로 위장시킨다.
이렇게 6명이 약 70일 일정으로 제1차 조선반도 지질탐사대를 구성한다. 탐사책임자는 물론 동경대학 지질학과 제1회 졸업생이며 일본 지질학계의 태두(泰斗)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였다. 그의 손에는 1894년 발행된 미쯔하시(三橋僊史)의 ‘조선지명안내’ 책자와 일본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1:50,000지도가 들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토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이중환의 택리지를 독파했다는 데 있다. ‘조선팔역지(朝鮮八域地)라고 일역(日譯)된 이 택리지를 읽고 고토는 조선의 인문지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뒤에 자세히 본다.
고토는 지질학자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독일인 고체(Gottsche)는 그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왔다. 물론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고서였다. 고토는 이 고체의 자료를 참고한다. 그는 주로 노두(露頭)를 근거로 지형, 지질일반, 암석학적 분석을 한다. 즉 절벽이나 경사면 등에 노출된 암반이나 돌을 보고 그 일대의 지질을 추정하는 방식이다.
고토의 작업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땅속으로 들어가 보거나 다른 어떤 기계를 가지고 정밀하게 측정을 해본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 1900년 8월에 시작한 조사 작업은 1901년 3월 1차 조사를 마치게 된다. 이 결과물을 가지고 고토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 간 그는 그것들을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라는 논문을 쓰고 이를 동방협회 회보에 올린다. 그러고는 같은 해 8월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조선북부를 탐사를 한다. 그렇게 해서 1902년 발표한 논문이 ‘조선북부의 지세’이다.
즉 그는 1900년 8월 ~ 1901년 3월 그리고 1901년 8월 ~ 1902년 3월 두 차례 266일 동안 총6,300km를 다니면서 광물조사 를 하였다. 하루에 평균 23km 정도 걸었다는 얘기다. 당시의 도로 사정과 계절적 요인을 따져보면 상당히 어려운 환경조건이다. 아무리 40대 중반의 고토라도 고개나 강의 절개지 그리고 바닷가를 관찰하면서 걷기가 쉬웠을까?
필자 같은 산꾼도 매일 23km 걷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에 부친다. 고토는 그걸 다 감수하고 걸었다. 어찌 보면 그런 상황에서 얻은 자료는 얼마나 부실한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얻은 지질자료를 기초로 두 편의 논문을 정리한 것이 1903년 발표한 조선산맥론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다.
이 논문은 고토가 지질학자이면서 철저하게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침략의 앞잡이 임을 보여준다. 즉 그는 역사학자 못지않은 조선의 고대사와 근대사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물론 그 지식은 황국사관의 입장에서 철저히 조작된 사실(史實)이다. 이런 것들이 그가 조선에 온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졸저 전게서 104쪽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산맥을 우리는 그 10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의 산줄기 체계로 잘못 알고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산맥이라는 게 엉터리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태백산맥에 태백산은 없다?
“그러니까 태백산 부쇠봉에서 온전하게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얘기지?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잠시 백두대간을 몰랐었을 때 그때는 태백산맥이라고 불렀잖아. 그 태백산맥은 이 태백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니겠어? 그런데 태백산맥은 여기서 어떻게 낙동정맥 방향으로 이어지는 거야? 분명 낙동강을 건너야 할 텐데.”
“중요한 지적이야. 사실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개념은 전혀 다른 거야. 백두대간은 분수계의 개념인 반면 태백산맥은 지질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지. 땅속에 있던 지질구조선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게 지리학에 편입이 된 건 순전히 지형의 형성 과정 파악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즉 거의 평평했던 지구에 화산 활동을 동반한 단층이나 습곡작용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구조선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 그러니까 지각변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단층, 습곡, 산맥 등을 구조선이라고 하잖아. 산맥 얘기할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그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을 지나면서 침식 ∙ 풍화작용을 거쳐 현재의 형상을 갖춘 게 분수계인 산줄기잖아. 그러니까 백두대간을 이렇게 정의하면 될 거야. ‘지각변동에 의하여 형성된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침식, 풍화작용을 통하여 현재의 산줄기가 만들어졌다. 그 산줄기는 분수계 역할을 하는데, 그 중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가장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한다. 이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로 나라의 모든 산과 모든 물이 여기서 흘러나가니 백두산은 그들의 조종(祖宗)이라 불린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예전엔 학교에서 구조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줄기 개념도 아닌 엉성한 산맥 개념만 가르치고 배웠던 게 우리 기성세대에게는 큰 약점이었어. 당시 지리학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니까.”
“지리 교육이 잘못 됐다는 거 아니야?”
“고토 분지로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지리교육이 지금껏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지리학계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거지. 지금은 사실 학자들이 여기서 벗어나려는 흔적이 많이 보여.”
“그럼 예전에는 태백산맥 종주를 어떻게 한 거야?”
“말은 태백산맥 종주였는데 산맥을 종주한게 아니고 실제는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 일부를 이어서 걸은 것이지
. 백번 양보하여 그 당시 개념으로 얘기하더라도 태백산맥을 걸은 게 아니고 태백산맥의 분수계만 걸었다는 것이지. 산맥 = 분수계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산맥은 사람이 걷거나 종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그래도 명색이 태백산맥인데 태백산은 지나야 했을 거 아니야!”
“결론을 우선 보자면 그들이 걸었던 태백산맥에는 태백산이 없었어. 즉 태백산맥 안에는 태백산이 없었던 거야!”
- 졸저 전게서 328쪽
산맥이라는 개념과 우리 산줄기 개념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결국 산맥이라는 것은 우리 고유의 개념인데 일본의 고토 분지로 가 그것을 도용해서 사용하여 지금은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산맥이 교과서에 올려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산줄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대간과 정맥은 산경표에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고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후손의 입장으로 선조들의 빛나는 업적인 이 소중한 기록을 선용善用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선배님 가령 이우형 선생이나 조석필 선생, 박성태 선생 등은 이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냅니다.
산경표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골머리 아프네. 결국 산경표의 저자는 모른다는 얘기구만. 앞으로 할 얘기는 산경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 그런 거잖아?” 머리에 쥐가 오른다.
“그렇지 아까 얘기했지? 산경표는 그 당시 조선 지리정보의 총아라고! 뭐 다 아는 내용이니까 그냥 지나가도 되지만 중요한 건 이것과 뒤에 나올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와 비교해 보는 일이야. 이런 건 지금 당장 산행을 하면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 골머리 아플 필요도 없어.”
“형, 그건 그렇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자분수령하는데 그 산자분수령이란 말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 혹은 스스로 분수령이다.’ 그 말 맞아? 다른 얘기도 있던데.”
장감독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고 언젠가 해줘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래. 맞아.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문구는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말이야. 그리고 처음에는 나도 그걸 그렇게 이해했었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산경표는 당연히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경표의 대원칙은 ‘산자분수령’이라고 알고 있다. 그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짐작컨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보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온다.
한 번 읽어 보자.
東史曰 朝鮮音潮仙 因仙水爲名 又云鮮明也 地在東表日先明 故曰朝鮮
‘동사’에 이르기를 조선(潮仙)이라 소리나는 ‘朝鮮’은 선수(仙水)로 말미암아 이름을 삼음이요 또한 이르기를 선명(鮮明)한 것이라,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뜰 때 먼저 밝아오므로 조선이라 한다 하였다.
山經云 崑崙一枝 行大漠之南東 爲醫巫閭山 自此大斷 爲遼東之野
‘산해경’에 이르기를 곤륜의 한 갈래가 대막(넓은 사막)의 남동으로 가 의무려산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 요동 벌판이 되었다.
漉野起爲白頭山 爲朝鮮山脈之祖 山有三層 高二百里 橫亘千里 其巓有潭 名謂達門 周八百里 南流爲鴨綠 東分爲豆滿
마른 벌이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조선산맥의 시조다. 산은 셋으로 층졌는데 높이는 200리, 가로는 1000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어 이름은 달문이라 하고 둘레는 800리이며, 남으로 흘러 압록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이 된다.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재가 되고, 철령의 한 갈래가 동과 남으로 달려 일어나 도봉과 삼각이 되니 한수가 그 가운데를 지난다.
위에서 보다시피 山自分水嶺은 ‘산은 분수령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산자분수령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 졸저 전게서 455쪽
그럼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이 무너지는 걸로 끝나야 하나요?
어쨌든 학자들은 산자분수령에 대해서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분노하고 싶은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우선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자분수령.
절대적인 개념이라고.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산줄기에서 다른 하나의 산줄기를 가지 칠 때 분명 그 사이에서는 골이 형성되고 그 골에는 물이 생겨 그 물은 내려오면서 천이 되고 그 천들이 모여 강이 되어 바다로 가지 않는가?
그리고 그 천이 합칠 때 반드시 하나의 크던 작던 산줄기 하나가 그 합수점으로 잠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가? 즉 그 산줄기는 천이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을 만나면서 그 맥을 다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두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적어도 5,000만 년 정도는 진리였다. 움직이지 않는 진리.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문장도 진리다. 하지만 앞으로 1억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山自分水嶺은 “분수령으로부터 오는 산은....”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며?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문장 속에 들어 있는 걸 해석할 때 그렇고 우리가 얘기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관용구(慣用句)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자분수령을 두 가지로 읽었다고 보면 된다.
관용구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관용적으로 둘 이상의 단어가 결합하여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언어 형태. 흔히 비문법적이거나 문법적이더라도 구성 요소의 결합만으로 전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을 고유명사로 인식하지 않고 보통명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만 그런가? 다들 그렇게 이해했던 거 아닌가?
또 다른 견해를 보자. 대동여지도 숭실대 본을 보면 ‘東分爲豆滿江 自分水嶺’이 되어 강자분수령이 된다. 위의 다른 대동여지도를 보면 분수령에서 물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분수령이라는 지명이 물을 나누는 산줄기(고개)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므로 이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山自分水嶺은 이따 산맥을 이야기할 때 또 이야기해야 하니 여기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 졸저 전게서 463쪽
그 선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 이 산자분수령을 현대에 맞게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지형에 맞게 그 하위 개념을 설정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 작업의 결과물이 곧 활자화 될 '대한산경표'입니다.
'산으로' 박흥섭 님이 맡은 분야의 작업은 거의 끝났는데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일이 바쁘다 보니 제게 맡겨진 부분을 정리하지 못해 아직 출간을 하지 못했지만 내년 중반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대한산경표에 따라 지맥을 보죠.
아까 말씀드렸죠?
지맥은 대간과정맥이 아닌 산줄기 중 도상거리 30km 이상의 그것이라고!
도상 거리!
즉 실거리가 아니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등고선을 이용하여 선을 그었을 때 즉 마루금을 그었을 때의 거리를 얘기합니다.
그 거리가 30km 이상인 산줄기라는 겁니다.
그 나머지 요건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①첫째, 그 산줄기는 반드시 그 산줄기를 싸고 있는 물줄기들의 합수점으로 가는 산줄기여야 합니다.
그 합수점은 결국 본류本流와 지류支流가 만나는 지점을 말합니다.
이를 대한산경표에서는 '합수점형'이라 이름합니다.
대원칙입니다.
이하 참고도는 대한산경표의 산경도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고로 신산경표의 그것을 차용합니다.
참고도 #1
가령 참고도 #1의 가평지맥이나 조종지맥과 같은 경우입니다.
즉 한북정맥의 도마치봉 부근에서 한 줄기('A줄기'라 함)가 가지를 치게 됩니다.
그때 그 A줄기와 한북정맥 사이에서는 물줄기가 하나 발원하기 마련입니다.
-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
그리고 그 물줄기는 가평평야를 적시며 흐르다가 가평읍 읍내리에서 북한강과 만나면서 북한강에 합류하게 되죠.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위 A줄기는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
도마치봉 부근에서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이 'A줄기'의 국토지리정보원지도의 도상거리를 측정해보니 42.1km가 되는군요.
그래서 이 A줄기는 지맥의 조건을 충족하게 됩니다.
이름을 지어야죠?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은 이를 화악지맥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지맥에서 가장 고봉인 화악산의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런데 이 신산경표에서 규정한 산줄기는 이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흔들린다는 것이죠.
일관성의 결여입니다.
원인은 긴 산줄기 즉 산경山經만을 추구하게 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산줄기를 그은 게 바로 '대한산경표'입니다.
이 대한산경표의 특장特長은 바로 물줄기에 충실하다는 겁니다.
물줄기를 봐야 산줄기가 보인다는 것이죠.
대한산경표의 산줄기를 보는 시각은 위 예에서 보듯 가평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시작합니다.
그 합수점에서 가라앉는 산줄기를 봅니다.
그 산줄기를 따라 올라갑니다.
그 줄기의 끝은 어디일까요?
보지 않아도 압니다.
백두대간일 수도 있고 정맥일 수도 있으며 지맥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북정맥과 이어짐을 볼 수있죠.
이렇듯 산줄기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게 더 확실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아래에 있는 산경표의 명지지맥은 부르는 이에 따라 연인지맥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연인지맥 파'는 명지산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줄기의 최고봉은 연인산이 맞다는 것이죠.
반면 '명지지맥 파'는 이 지맥이 명지3봉 옆으로 지나는 것이니 본래의 명지지맥이 맞다고 합니다.
이들이 다툼이 있는 대목입니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이런 논쟁을 불식시킵니다.
방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맥 갈림봉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인 조종천에 착안합니다.
위와 같이 대한산경표에서는 그 지맥의 이름에 물줄기 이름을 차용하여 붙입니다.
그리하여 A줄기는 가평천의 이름을 따 가평지맥, B지맥은 조종천의 이름을 따서 조종지맥이 되게 됩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맥은 이렇게 합수점으로 진행하는 '합수점 형' 지맥입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정맥 줄기를 만든 그 원리를 본뜬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합수점으로 가는 줄기 외에 나와는 관련은 없으나 옆에 있는 물줄기로 진행하는 산줄기에 대한 처리 문제입니다.
가령 위 참고도 #1에서 조종지맥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 하나('b 지맥으로 부름)가 조종천이 아닌 인접 가평천으로 가서는 가평천과 북한강의 합수점으로 갈 경우의 처리 문제입니다.
분명 이 b줄기도 합수점으로 가는 줄기가 맞잖습니까?
지맥을 만든 이유는 이 산줄기를 우리 생활에 선용善用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만큼 이를 도외시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b줄기의 유형도 지맥에 편입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② '하천(지류 포함)의 수계 산줄기로 1유형이 아닌 산 줄기'를 한 유형으로 넣습니다.
참고도 #2
참고도 #2는 신산경표에서 영월지맥과 백운지맥 그리고 천등지맥을 보여주기 위한 개념도입니다.
하지만 이 신산경표의 지맥들은 온전하게 산자분수령에 충실하지 못함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 영월지맥과 섬강지맥에 관하여 더 자세한 것은 다음 블로그 '산, 산줄기 그리고...'의 산행기 #651 지리산 둘러보기(금대암 ~ 금대산 ~ 삼봉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신산경표의 천등지맥의 경우 자신과 관련된 물줄기와의 합수점으로 가지 못하여 이는 지맥에서 탈락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 예를 하나만 예시하자면 위 참고도 #2의 파란선 같은 경우입니다.
무수히 많은 단맥만 양산할 뿐 불행히도 제천천으로 진행하는 이 천등지맥은 지맥의 자격을 갖추지 못해 탈락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구제 방법으로 제천천의 본류만 보는 게 아니라 지류의 그것도 그 줄기가 30km가 넘을 경우 지맥에 포함시키기로 합니다.
하지만 본류인 제천천의 합수점으로 가는 제천지맥에 대하여 이는 제천천의 서쪽으로 합수되는 줄기인만큼 이름은 조금 양보하여 제천서지맥으로 명명하기로 합니다
이게 제2유형으로 이른바 '울타리형' 줄기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거리가 있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산줄기나 내륙에서도 호수 등으로 돌출된 산줄기의 처리 문제입니다.
이들을 위 조건에 엄격하게 적용시키면 이런 유형의 줄기들은 토막토막 동강이 나 결국 산줄기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이걸 구제하고자 대한산경표에서는 지맥의 조건에 이 제3유형의 산줄기를 하나 더 구분합니다.
이른바 '산줄기형'입니다.
참고도 #3
이런 유형의 지맥이 바로 신선지맥입니다.
그저 산경山經 즉 산줄기의 길이 때문에 지맥에 편입된 경우이므로 즉 물줄기와는 무관하므로 이는 신산경표의 산이름을 그대로 붙이기로 합니다.
그러니 그 예로 신선지맥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타당합니다.
복잡한 것 같지만 차근차근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황산의 옆 모습.
멀리 남덕유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고 있는 남강지맥이 그리고 그 앞 줄기들은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는 임천지맥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니 저 함양벌을 적시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풍천인데 이 풍천이 인월에 이르러 람천을 흡수하면서 임천이 되어 흐르게 되는 것이죠.
아까 람천을 보면서 두류전지에 나오는 얘기를 인용하여 얘기했었습니다.
13:30
우측 아래로 흥부자연휴양림 사무실이 보이고 좌측 상단으로 팔량재가 보입니다.
1부에서 얘기했던 내송마을 출신 조경남의 팔량재(치).
바로 그곳입니다.
지리산으로 인해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통로는 3개라고 합니다.
그 통로는 왜구들의 루트와도 일치합니다.
북쪽부터 보자면 함양의 황석산성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으며 중간은 저 팔량재가 그리고 지리산 남부로는 구례의 석주관 등입니다.
그러니 진포해전에서 패한 왜구의 잔당들이 저 팔량재를 넘어 남원을 공격하려 하다 결국 황산대첩의 원인이 됐고 그 전투가 곧 이성계로 하여금 역성혁명의 기틀을 잡게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흥부골 자연휴양림.
아스팔트 위를 지나는 차량 소리를 들으면 이내 751번 도로가 나오고 복성이재다. 이 도로로 시내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대간꾼들은 이 복성이재를 기점으로 소구간으로 나누어 들 · 날머리 혹은 탈출로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 도로 우측으로 내려가면 아영면 성리마을이 나온다. 인월 성산마을이 흥부와 놀부 형제의 고향이었다면 이 성리마을은 쫓겨난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곳이다. 이쯤 되면 정∙순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의 판소리 ‘흥부가’도 한 번쯤은 들어볼 만하다. ‘흥부전’은 판소리 ‘흥부가’에서 비롯된 판소리계 고전소설이다.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17개 마을을 떠돌다 마지막 찾은 곳이 산안(남원 산내면)인데 지금은 인월면과 이 아영면이 서로 ‘흥부의 고향’이라고 자처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흥부의 성이 예사롭지 않다. 연씨 혹은 박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최근 1833년 필사본 ‘흥보만보록’이 공개되어 흥부가 무과에 급제하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씨의 시조는 고려말 귀화한 위구르인 장순룡인데 그렇다면 흥부의 실제 모델이 위구르인 장순룡이라는 이야기인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겼다.
- 졸저 전게서 102쪽
이정표를 보고 도로를 따르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계곡 방향으로 이정표가 보입니다.
계곡에는 무인쉼터가 있는데 알아서 먹고 돈을 내고 가랍니다.
여름이었으면 시원한 맥주 하나 꺼내서 먹었을 겁니다.
사과밭을 지나면서 좌틀하여 산길을 따릅니다.
멀리 삼정산1156.2m이 있는 지리북부능선이 보이기 시작하고....
바로 우측으로는 바래봉 ~ 덕두산에서 내려오는 지리서부능선이자 지리태극 종주 루트가 보입니다.
지난 7월 말 지리태극종주 그것도 왕복 종주 약181km를 무지원으로 55시간 주파라는 놀라운 아니 거의 신기록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내려오고 있는 해밀의 '봉순이오빠' 회장님의 마지막 스퍼트를 하시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그 뒤를 인사랑 명예회장님, 이한검 대장님 그리고 백일홍 총무님 등 세 분이 성삼재부터 우정 산행으로 동참하셔서 함께 모습을 보여주시고....
아름답습니다.
대단하신 분들.....
남쪽으로는 지리 주릉이 멀리 보이고....
영신봉에서 벽소령으로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조금 당겨봤습니다.
인월을 다시 보고....
깨끗하게 기와로 얹은 월평마을의 모습입니다.
담장도 산뜻하게 그림으로 장식이 되어 있고,
월평 마을은 상당히 많은 집들이 민박과 식당 그리고 커피샵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곳이 둘레꾼들에게는 2구간이 끝나고 3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지만 산줄기꾼들에게는 지리서부능선이나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끝나는 지점이자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13:55
구인월교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소로가 보입니다.
이곳이 3구간을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제3구간인 인월 ~ 금계 구간은 좀 복잡한 곳입니다.
황매암을 경유할 경우 20.5km가 되는 반면, 삼신암을 경유할 때에는 19.8km가 됩니다.
문제는 실상사를 다녀와야 하는데 그 거리가 문제가 되겠군요.
다음 구간도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고 기대치가 높은 곳은 바로 용유담입니다.
그 용유담에서 우리는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사실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
그저 발품만 파는 게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 문화적인 측면 등을 살피고 가야죠.
인월에서 안양으로 가는 버스가 14:30에 있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달랑 저 혼자서 그 버스를 타고 귀가를 합니다.
그나저나 탈 때는 1명 사망이었던 제천 화재 희생자가 차에서 내릴 때는 29명으로 늘었군요.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후기 잘 읽어 봅니다 저도 한번 걸어 봐야 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