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6] 창세기(16장-18장) 묵상
1,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3에 하갈은
고통 중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간증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하갈은 교만한 여자였다.
감히 여주인의 특별한 배려 때문에
주인 아브라함과 동침하고 임신이 되었으면
여주인의 심정을 헤아리고
겸손하게 여주인에게 감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정반대였다.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했다고 성경은 말한다(창16:4).
배은망덕한 여자다.
그 인격의 천박함이 훤히 드러난다.
당연히 응징이 여주인에게서 떨어졌다.
거의 살해의 위협을 느꼈던 그녀는
주인집을 나와 광야로 도망갔다.
고통스런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하며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이스마엘
`(고통을 들으심)이라 지으라 하시고
하갈에게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 여주인에게
용서를 빌고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끝이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시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이런 못된 여자는
쌩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녀의 고통을 돌아보셨다.
우리는 가끔 나 같은 못된 죄인을
정말로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밀려올 때도 있다.
그 때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신앙을 고백한 하갈의 간증을 생각하며
우리도 용기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지만
하갈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우리는 항상 `내중심`의 사고에 갇혀 살지만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며
온 천하 만민의 주인이 되신다. 아멘.
2,소돔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9장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데
하나는 사라를 위한 것이었다.
세 사람이 찾아와서 아브라함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 후에
그들이 한 말은 네 아내 사라가
곧 아들을 갖게 될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줄곧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다시 말씀하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라가 아직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조작하고 경험하고 의지로 만든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사라는 아직 그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사라에게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설득하셨다.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다.
당사자가 믿어야 기적이 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의 이유는
이제 곧 소돔과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창세기 18:16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라고 적혀 있다.
아브라함의 거처에서 환대를 받은
세 명의 하늘의 방문자는 장소를 옮겼는데
또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목적하던 또 다른 곳은 바로 소돔이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로 떠났고 아브라함은 전송을 마쳤다.
그런데 돌발적인 사건이 생겼다.
소돔으로 향하던 그들이 뒤돌아서서 어떤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창18:17을 보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가시려고 했던 것 같다.
한참 가시다가 마음이 바뀌셨다.
아니지 아브라함한테는 이야기해야지 하며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 놓았던 것이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 놓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 놓았다.
왜 그랬는가? 친하기 때문이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여기셨다.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유명한 반복적인 중보기도를 이때에 드렸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이 기도의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용조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너무 비참한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50명에서 45명으로 다시 40명으로, 30명 20명 10명으로
숫자를 바꿀 때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이것이 중보기도자의 모습이다.
하잘것 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움받으면 갈 데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붙잡고 수치를 각오하는 모험을 시작하였다.
사랑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수치를 겪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가 수치를 당한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 자녀를 사랑하기에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내를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보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다.
내가 한 것은 배신과 죄뿐인데도
주님께서는 나를 잊지 못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님도 이것을 감당하기 힘드셨다.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고난의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것이 중보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옆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가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데는
너무나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가치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도 내고 헌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
버려진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참된 중보기도자는
이러한 수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이다.
아브라함의 수치스런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참된 중보기도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고민은 대부분 다 나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내 인생을 바친 적은 거의 없다.
중보기도의 능력은 살아 있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받았지만
롯은 심판 중에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수치를 감수한 중보기도의 승리였다.
- 1년 1독 성경통독 학교, 꿀송이 보약 큐티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 <25년1월 6일,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