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1200년사이 지구는 빙하기의 반대개념인 중세온난기를 맞고 있었다.
인류가 지구상에 번성하는 것도 중세온난기의 영향이 크다.
500년 무렵에는 유럽중서부 온대지역의 4/5가 숲과 늪이었지만 1200년에는 절반이하로 줄었다.
1346년경 유럽의 인구는 8천만명이었다.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에 간 역사도 중세온난화 덕분이다.
비아르니 헤리욜프손이 캐나다 대브라도섬을 985년에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붉은머리 에릭손이 그린란드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그의 아들인 레이프 에릭손은
세인트 로렌스강에 도착하기도 한다.
캐나다 엘즈미어섬에서 나온 북유럽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9세기부터 바이킹 상인들은 핀족에게서 공물로 거둬들인 비버,검은담비,다람쥐가죽을
영국으로 가져가 밀,꿀,포도주, 천과 바꾸었다. 마르세유의 모피 시장에서는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구해온 가죽이 팔렸다.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에서 가져온 가죽은 브루게에서 팔렸고, 에스파냐의 비버는
런던에서 팔렸다.
고급 모피에 대한 수요가 아주 컸기 때문에 모피상은 상당한 정치 권력과 사회적 명망을 누렸다.
14세기 말에 이르자 모피 산업은 큰 호황을 누렸고, 모피 수요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의 모피 동물들은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렀다.
모피 사냥꾼들은 처음에는 그저 러시아의 오지로 더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러시아 북부와 서부지역에서 수집해 영국으로 실어 보낸 모피는 모두 38만
2982벌로, 영국 전체 모피 수입량의 97%에 해당했다.
1390년 3~11월에는 32만 3624벌이 수입되었는데, 그중 96%가 러시아에서 온 것이었다.
그 다음 200년 동안 유럽의 모피상들이 수입한 러시아의 다람쥐,비버,담비,흰담비족제비,
검은담비의 가죽은 수백만 벌이나 되었다.
비버는 한때 유럽 대륙 전역과 영국 제도의 야생 자연에서 서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모피상들이 비버가죽을 비싼 값으로 사들이자.
스코틀랜드의 비버 거래는 1350년경에 거의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무렵에
비버 가죽은 양가죽보다 무려 120배나 비싸게 거래되었다.
비버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 유럽 대륙의 비버 거래도 크게 줄어들었는데, 1384년에 발트 해에서 영국으로 수입된
모피 37만 7200벌중 비버는 3926벌뿐이었다.
프랑스 왕들의 의상 구입비 명세서에도 유럽에서 비버의 수가 크게 줄어든 사정이 반영돼 있다.
해가 갈수록 프랑스 왕이 구입할 수 있는 비버 모자의 개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제정러시아는 모피를 얻기 위하여 17세기 초부터 동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르쿠츠
(시베리아동부)를 건설하고 흑룡강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1643년 뽀아르코프의 지휘하에 송화강에 도착한 그들은 흑룡강지역을 약탈했고
1653년까지는 알바진과 흑룡강 하류일대의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에 청조는 1654년에 영고탑(간도)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파견했고 1백명의 조선병사(나선정벌)
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코사크족이 여전히 약탈을 계속하자 1658년에는 262명의 조선병사들과 함께
흑룡강으로 진군하여 1659년에 알바진 성을 수복함으로써 흑룡강 중.하류 지역을 회복하였다.
모피교역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황제는 정치와 경제력의 확충은 물론 상품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흑룡강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청조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660년에 북경에 파견된 사신들은 의례문제로 인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못했으나,
1670년에 파견된 밀로바노프는 강희제에게 예를 행하고 공물도 상납했기 때문에 청조도
그를 조공사신으로 맞이하여 하사품도 주고 연회에도 3번이나 초대하였다.
강희제(청나라4대황제)는 1685년 마침내 기병 1천여명을 동원하여 알바진을
공격함으로써 수비군 450명이 방어하던 이 지역을 초토화했다. 그러나 1686년 다시
코사크족의 약탈이 재개되어 전쟁이 계속되었다.
1687년 이번원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쌍방이 평화롭게 거주하며 사신을 교환하고 국경선을
결정하기 위한 협상을 희망한다는 서신을 받았다.
이에 강희제는 코사크족이 서몽고와 연합하여 중국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었는데 중국어,러시아어,
만주어,몽고어,라틴어로 작성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남진을 포기하고 북으로 진출하게 되어 1741년에는 베링이 알래스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 캄차카반도를 근거지로 하여 일본과 대적하면서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179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과 교역하였다.
1790년 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이때부터 우익세력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본우익의 어제와 오늘)
흑초 (검은담비)의 가죽은 서구 귀부인들 사이에서 대인기였고 파리에서 고가로 매매되었다.
제정러시아의 군비와 기술도입 비용은 모두 모피로 충당되었다.
시베리아의 흑초가 멸종되어 갈 무렵이었다. 러시아군은 대륙의 동녘 끝 거대한
캅차크 반도 산림지대에 흑초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겨우 60명의 카자크 군사만으로 한반도의 넓이보다 훨씬 넓은 캅차크 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는데 6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무서운 정복 속도다.
모피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폭력으로 정복을 진행한 무리 가운데는 범죄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 징역 대신 강제 노동과 탐험의 의무가 부과된 것이다.
시베리아 전체가 완전히 러시아 영토에 편입된 것은 18세기 초였고, 그 후에는 계속
바다로 나갈 숙명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무렵 이미 러시아는 일본 훗카이도(북해도)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1741년 덴마크 출신의 베링은 러시아 정부의 후원으로 알래스카 탐험을 시작했으나
항해 도중 배가 난파해 죽는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그곳에 서식하는 해달의 가죽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알래스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784년 에스키모가 살던 알래스카에 최초의 러시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799년 러시아 황제가 노미회사 건립을 허가했고 모피 획득을 위한 독점적 기업이 만들어졌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도 북태평양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남하하는 러시아인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저지당했다.
16세기 중엽에는 시베리아와 스칸디나비아의 오지에 있는 연못들에서만 비버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아직도 수백만 마리의 비버가 살고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다.
그곳은 비버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와 플리머스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단은 코드
곶에 있던 인디언 마을들에서 유럽의 솥과 손도끼를 많이 보았는데, 필시 비버 가죽과
바꾸어 얻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존슨은 1653년에 "네덜란드,프랑스,에스파나,포르투갈의 비좁은 땅에서
교역을 하려고 건너온 상인들에게 이 황야가 훌륭한 시장으로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약 300년에 걸쳐 북아메리카의 모피 거래는 그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세계의 자연환경을 싹 바꿔놓았다.
모피 거래가 처음 시작될 당시엔 인디언은 상등품 비버 10마리를 총 한 자루와 바꾸었다.
상등품 비버 한 마리는 화약 0.5파운드나 탄약 4파운드, 손도끼,잭나이프8개,구슬 0,5파운드
좋은 외투 한 벌, 다배 1파운드와 ㄱ환되었다. 인디언 모피 사냥꾼은 1657년에
예수회 신부에게 "비버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비버는 솥,손도끼,검,칼,빵을 만든다. 비버는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영국인은 분별력이 없다. 비버 가죽을 하나 주면 칼을 2개나 준다."라고 말했다.
인디언이 사냥을 해 구해온 비버 가죽은 플리머스 정착민에게는 짭짤한 현금이 되었다.
그것으로 개척지를 건설할 때 진 빚을 갚고, 유럽에서 필요한 물건을 수입하고,
결국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비버 가죽은 초기의 플리머스 정착민에게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어느 국가든 정치,경제,사회질서가 혼란하게되면 제도권밖의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숲속밭에다 농약뿌리고 밀렵하는 TV에 나오는 자연인,고양이 한마리 죽인것엔 분노하면서
산에서 뱀잡는 것엔 관대한 동물보호협회.
모피모자에 열광하던 중세유럽귀부인과 서울대병원교수식당에서 상어요리의 전염성.
프랑스여배우의 말대로 개고기엔 열을 올리면서 TV홈쇼핑에 나오는 악어가죽백이나
밍크코트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
갯벌을 메우고 도시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정치인들.
고냉지숲을 없애고 밭을 만드는 사람들.
숲을 밀고 종교시설앞까지 큰 도로를 내야 만족하는 종교계 인사들.
지하철 3호선 지축역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어느 사람의 일기였습니다.2019.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