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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목차
1. 머리말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노선 3. 시기별 활동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조직과 임시헌정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특징 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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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분출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주권의지로 성립되었다. 나아가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지관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주의 원칙과 절차를 존중하며 약 27년간의 대장정 끝에 결국 조국 광복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해 국내 동포와 연결하였고, 또한 중국 만주와 노령 동포는 물론 미주 동포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은 물론 만주의 독립군단을 통솔하며 독립전쟁을 펼쳤다.
독립운동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를 비롯한 의열투쟁으로 국제사회에 우리 민족의 불같은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고, 조국광복에 대비하며 광복군을 창설해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일제 패망 후 독립을 구체적으로 보장받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그 자체다. 실로 임시정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암흑 속에 빛나는 등불과 같았다. 그래서 암울하고 전망이 불투명하였던 일제강점기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그 정부조직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고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니라 약 27년이나 유지하면서 활동한 점은 세계사적으로 큰 사건이다.
1)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우리 민족은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고 말았다. 반만 년의 역사를 유지해 온 한민족의 역사적 역량과 문화적 자긍심이 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최고 대표기관인 정부를 수립하여 민족 정권의 맥을 잇고자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의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수립으로 나타났다.
3·1운동은 온 민족이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민족의 절대독립을 요구한 독립운동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으니, 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해야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통해 표출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한 곳으로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과 함께, 이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킬 필요성도 있었다. 3·1운동이 전개되던 3월과 4월에 국내외 각지에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3·1운동 이전에도 민족해방운동 총본부로서의 정부 수립의 필요성이 이미 제기된 바 있었으나 그것이 구체화한 것은 이 운동을 전후한 시기였다.1) 정부수립운동은 세 지역에서 추진되었다.
먼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이미 성립되어 있던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가 1919년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어 정부형태를 갖추었다.2)
두 번째로 정부가 조직된 곳은 중국 상해(上海)에 있는 프랑스 조계지였다. 이곳에서는 3·1운동 이전에 이미 독립운동가들은 국가를 건설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미 1917년에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한 바 있었다. 나라 안팎으로 연락책을 보내 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러내도록 독려했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프랑스로 보낼 대표로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뽑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느라 분주하였다. 나라 안팎 곳곳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상해로 모여 들어,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2·8독립운동과 3·1운동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보낸 대표와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줄이어 상해로 모이게 되자 1919년 4월 10일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1천여 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고, 여기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4월 13일에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후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선포하고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 정부 역시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의원들은 국내와 연해주·중국령·미국령 등 11개 지방의 대표가 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선출됐다.3)
세 번째 정부는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조직되어 세칭 한성정부(漢城政府)가 조직되었다.4)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계획되어 '13도 대표자'의 이름으로 「국민대회 취지서」와 6개조의 양법이 명시된 「선포문」을 발표한 이 정부 역시 민주제를 채택했다.
임시정부가 세 곳에 세워지자 자연히 그 통일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세 정부의 통일교섭이 추진되었다. 교섭과정에서 상해와 연해주에 설립한 정부를 일체 해소하고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둘 것, 상해에 설립한 정부가 실시한 행정은 유효임을 인정할 것, 정부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할 것, 현재의 각원(閣員)들은 총사퇴하고 한성정부가 선임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 등이 통합정부 수립원칙으로 제시되었고, 그것이 합의되어 결국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 한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상해의 통일 정부는 한성정부 수반 이승만(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하고, 노령정부의 대표 격인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하여 성립하였다. 세 정부 사이의 이해관계를 넘어 결국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통합정부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민족해방운동 총본부로서의 임시정부 성립을 열망하는 민족적 여망이 뒷받침된 때문이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성립은 또 이 시기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이미 성립된 좌익전선과 우익전선, 무장항쟁 노선과 외교독립 노선이 합작한 민족해방운동의 총지휘부로서 통일전선정부가 출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상해에 위치함으로써 결국 외교독립론 중심의 정부가 되었고, 좌익전선이 곧 이탈하여 우익전선 중심의 정부가 되었다. 상해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정부였다는 점에 일정한 의의가 있었으나 민족해방운동 총본부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
2)노선
3·1운동 이후 독립노선은 절대독립론(선독립론)과 실력양성론(후독립론)으로 구분되었다. 절대독립론은 선독립(先獨立) 후실력(後實力) 양성론으로서 민족주의 좌파가 이를 따르고 있고 반자치론, 무력투쟁으로 연결된다. 절대독립론은 독립전쟁론을 주장했으며 노령정부, 신민회 등의 독립노선으로서 3·1운동 이후의 많은 독립단체가 이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실력양성론은 민족주의 우파의 독립노선으로서 애국계몽과 민족산업, 교육진흥에 노력하여 먼저 실력을 양성하고 후에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자치론, 외교론, 등으로 이어진다. 실력양성론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으며 이것은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노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선은 처음부터 차이를 보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쳐지기 전에는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전쟁론을 추구했고,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독립론을 추구했으며,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분될 때에는 창조파는 무력항쟁을 강조하면서 조선공화국의 수립을 내세웠는데 원세훈·김규식·김창숙·박은식·신채호 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노령공산주의 등 80여 명의 지지를 얻었고, 개조파는 실력양성을 우선으로 하면서 자치운동과 외교활동을 강조하였고 이를 지지하는 인사는 안창호(安昌浩)와 상해파 공산주의자 등 57명 정도였다. 현상유지파에는 이동녕·김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지도층의 독립노선 간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이승만은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달성을 시도해야 한다고 했고, 안창호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동휘는 소련의 레닌과 연대투쟁하자고 제창했다. 그리고 박용만은 일제와 직접적인 무력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성취하자고 하였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대립과 운동방법의 차이 등으로 분열 대립은 거듭되었고 결국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미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위임통치해 줄 것을 제의한 것이 불씨가 되어 이동휘·안창호가 임정을 떠났고, 이승만도 탄핵되는 등 시련을 겪게 만들었다.
1)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구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뒤 1945년까지 약 27년 동안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자리 잡고 활동을 벌인 터전을 기준으로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상해(上海)시기(1919~1932),이동(혹은 장정(長征))시기(1032~1940),중경(重慶)시기(1940~1945)가 그것이다.5) 상해시기는 임시정부 수립부터 윤봉길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던 1932년 4월까지이고, 이동시기는 이후 항주(抗州)6)·진강(鎭江)7)·장사(長沙)8)·광주(廣州)9)·유주(柳州)10)·기강(綦江)11)을 거쳐 중경에 이르는 1940년 초까지이며, 끝으로 중경시기는 이후부터 광복을 맞는 1945년까지이다.
2)상해시기(1919~1932)
(1)초기 활동
① 국내통치시도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행정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창호가 주도한 이 계획은 행정과 정보의 연결망으로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 행정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하자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연통제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행정조직망이자 지방 행정조직의 성격을 가졌다. 임정의 국무원령 1호로 실시된 연통제는 국내의 경우 서울에 총판(總辦)을 두고 각 도에는 독판(督辦), 군과 부(府)에는 군감(軍監)과 부장(府長),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도록 조직되었고, 간도지방에는 독판부(督辦府)가 설치되었다.
연통제는 내무총장 관할 아래 두어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제도의 형식을 지니나, 실제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운영비를 조달하려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의정원 결의에 의해 국내외 20세 이상 남녀동포에게서 1인당 1원씩 인구세(人口稅)를 징수하고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키로 결정하여 연통제를 통해 이를 실시했다. 군자금은 만주의 이륭양행(G. L. 쇼)이나 부산의 백산상회(안희제)를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쪽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 때문에 연통제는 평안·함경·황해도 전 지역과 경기·충청도 일부, 서간도·북간도 지역에 실시되었고, 그것도 면 단위까지 조직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1921년에는 이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전면적으로 무너졌다.
교통국12)은 교통부 산하 조직으로 각 지방의 연락조직망이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국내와 만주 등 각지에 지도권을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결시키는 기능, 즉 통신과 정보수집 및 전달 기능을 갖고 있었다.
② 외교활동
외교독립 노선 중심으로 출발한 상해임시정부는 당연히 외교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는 국제연맹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고 그것에 가입하는 데 일차적 목표를 두었다. 따라서 1919년 5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1919년 8월 조소앙을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파견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중국·미국·영국·소련 등 각국으로부터 개별적 승인을 받는데 이차적 목적을 두었다. 이 목적을 위해 워싱턴에 구미(歐美)위원부(이승만)13),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서재필), 파리에 파리위원부14), 런던에 런던위원부 등을 두고 북경과 우수리 등에도 임시외교위원을 두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효과는 없었고 미국을 비롯한 구미열강의 승인을 얻는데도 역시 실패했다. 다만 파리강화회의에서 실망한 임시정부가 약소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내세운 소련의 도움15)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려한 의도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공산주의를 동양에 선전하려 한 소련의 의도가 합치된 결과, 1921년 소련정부와의 비밀조약에 의해 독립군 양성자금을 받기도 했으나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와 소련정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한편 임시정부는 중국과도 교섭을 했다. 중국정부와의 외교적 교섭은 일찍이 쑨 원(孫文, 1866~1975)의 광동정부와 이루어 졌다. 두 정부가 서로 승인하고 한국의 학생을 중국 군관학교에서 교육받게 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요구한 차관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조차지(租借地)문제는 승인되지 않았다. 다만 쑨 원으로부터 "북벌계획이 완성된 뒤에 시기가 오면 전력으로 한국 광복운동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후 장 개석(蔣介石)의 국민당(國民黨)정부와 관계가 계속되어 만주지방의 교포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거를 계기로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광복군을 양성할 수 있었다.
③ 군사계획 수립과 활동
임시정부는 1919년 말부터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군대조직을 위한 법규를 마련하고, 간부양성과 모병활동을 전개하며, 만주지역의 독립군 조직을 통할·지휘하는 세 가지 내용으로 추진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등 세 가지 군사관련 법령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군사정책에 대한 기본원칙과 방향을 정립한 것이고, 병력을 모집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실행 방안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1919년 말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간부 양성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에 1개생 19명과 2기생 24명을 졸업시킨 뒤 폐교되었는데, 이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임시정부 군무총장이던 노백린은 미국 동포 김종림의 지원으로 1920년 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다. 비행사를 양성하여 공군을 창설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들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 조직을 정부 산하로 편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서간도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 대한독립군비단 및 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했고, 또 주만참의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군무부를 만주지역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인력과 자금을 이어주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붕괴된 뒤에는 이 계획을 지속시킬 수 없었다. 더구나 만주지역의 독립군 세력이 1920년 봉오동·청산리 승첩 이후 소련의 자유시로 이동하거나 흩어지는 바람에 임시정부로서는 군사적 활동을 주도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4)교육·문화 활동
임시정부는 교육을 통하여 동포 자제에게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상해에서 초등과정이 인성학교(仁成學校)와 중등과정의 삼일중학을 운영한 것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민족혼을 앙양시켜서 장차 독립운동자로 배출하기 위해 국어와 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중국어교육을 통해 중국 고등교육에 대비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외에 전하고, 민족사사의 고취와 민심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신문은 동포사회가 있는 세계 각지로 배포되어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했고, 국내에도 밀송되어 국내 민중들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지원하거나 궐기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했다. 이것은 1919년 9월 국제연맹에서 한민족 자주독립의 당연성을 밝히고자 발간했던 것이다. 이 사료집을 발간한 임시사료편찬회의 주선으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발간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그 외곽에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솔했다. 철혈단처럼 무력투쟁을 목적으로 삼은 단체에서부터 교육회·적십자회 등 교육·문화활동을 펴는 단체까지 많은 수의 단체를 거느렸다. 그런데 이들 단체의 주요 구성원은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이들을 지도하고 통솔하는 구심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2)침체와 극복 노력
(1)침체현상
초기의 활동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 요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반대 세력이 나타났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될 때, 신채호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유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사실 때문이었다.
신채호는 위임통치론을 들어 "이완용은 있는 정부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정부조차 팔아먹은 자"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했고, 북경으로 이동하여 박용만·신숙 등과 함께 반임시정부 활동을 펼쳤다.
북경 중심의 반임시정부 활동은 1919년이나 1920년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안창호에 의해 주도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 후반에 들어 교통국과 연통부가 붕괴되면서 임시정부의 세력이 크게 위축하자, 북경세력은 반임시정부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이 움직임이 곧 국민대표회의를 열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둘째, 이승만의 직책 명칭이 한 요인이 되었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되었던 이승만이 미국에서 대통령이란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각료들과 마찰이 지속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기에 그 명칭이 더욱 편리하고 유리하다고 하여 의정원의 반대를 뿌리치고 그것을 고집해 나갔다. 때문에 임시정부 구성원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셋째,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서 상해에 머물지 않고 미국에서 활약한 것도 임시정부 침체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승만은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 부임하긴 했지만, 임시정부의 갈등현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심화시켜 둔 채로 하와이로 돌아가 버렸다.
넷째,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큰 진척을 보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라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는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의 독립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국내 3·1운동으로 나타난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를 독립달성의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승전국의 일원이었고, 이후 세계질서가 베르사유(Versailles)체제16)를 바탕으로 유지되었으므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임시정부 또한 위축된 것이다.
(2)국민대표회의 추이와 임시정부의 대응
임시정부는 1920년 말을 고비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교통국과 연통부를 통한 국내와의 연결망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으로 나타났다. 이 회의는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상황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노력이 1921년 5월 이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22년 말에 300명 명도의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상해에 운집했고, 어렵던 자금 문제도 해결되어 1923년 1월에 회의가 열리게 되어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와 안창호가 각각 선출되었다. 각 지방의 70여 단체대표 140여 명이 모여 개최되었는데 지역대표와 단체 대표 130명 정도가 정식 대표로 인정되었고, 이들에 의해 회의가 진행되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 최대 규모의 회의가 4개월 반 동안 열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를 반성하고 임시정부를 운동의 실천에 맞도록 개조하자는 개조(改造)파와 현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창조(創造)파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다.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주요 인사들이 대표로 이제 참가했다. 이어서 창조파가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의정원에 제출하고,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가 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하자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의정원은 의회 고유의 입법권마저 국민대표회의에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결렬된 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조선공화국 혹은 한(韓)'이라고 하는 새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17) 이에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던 김구는 창조파만의 회의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려 추방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3)임시정부의 활로 모색
(1)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과 개헌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하고자 나섰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체제개편 작업에 몰두하면서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후임에 박은식을 선출했다. 탄핵의 요인은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북경을 중심으로 만연했던 점, 대통령이 미국에서 원격 조정하는 기존 체제로는 난국을 극복할 수 없던 상황, 재미동포들의 인구세를 이승만이 한 손에 쥐고 임시정부에 송금하지 않은 점 등이었다.
1925년 4월 제 2차 개헌을 단행하여 이승만의 독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를 채택했다.18) 초대 국무령에는 만주 독립운동계의 중심 인물인 이상룡이 추대되어 6개월 동안 임시정부의 혼란 수습을 위해 노력했으나 조각19)에 실패했다. 이후 1926년 7월 후임으로 홍진이 취임했고, 이어서 김구가 국무령이 되면서 임시정부는 본격적으로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2)유일당운동
1925년부터 유일당운동이 임시정부 주변에서 등장했다.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침체된 국면을 돌파할 방안 모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유일당운동으로 나타났다. 유일당운동은 좌우세력을 가릴 것 없이 독립운동계의 모든 세력과 집단을 하나로 통일하여 유일한 정당체제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운동이었다.
안창호는 북경의 좌파세력 대표인 원세운과 협상을 벌여 1926년 10월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결성시켰다. 1927년에 들어 상해·광동·무한·남경 등에도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었다. 5개 지역 촉성회 대표가 그해 11월에 상해에 집결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함으로써 중국 관내 좌우합작정당체의 출범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단계인 당조직주비회 조직을 추진하다가 제동이 걸렸다. 1924년에 체결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제1차 국공합작이 무너진 것과 1928년에 코민테른이 '12월테제'20)를 통해 좌파세력에게 민족부르주아와의 결별을 요구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ML파의 아래 1929년 10월에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기에 이르렀고, 이 운동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유일당운동이 전개되던 1920년대 후반에 임시정부는 이 운동을 수용하기 위한 체제 전환에 몰입했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개헌 작업을 통하여 정부체제를 이와 연결시키려 했다. 1927년 3차 개헌을 통해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당(黨)이 완성될 때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라는 '이당치국(以黨治國)21)의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가 유일당운동을 정부 차원에서 흡수하고 능동적으로 추진한다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유일당운동을 만주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국무령을 역임한 홍진을 만주로 파견하여 이 지역의 민족전선통일운동을 활성화 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유일당운동은 국내 신간회 성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3)한국독립당 창당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우파세력은 1930년 1월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는 좌파세력이 결성한 유호(留滬 : 在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 대응한 것이면서, 유일당운동의 한 산물이기도 했다. 한국독립당의 구성원은 이동녕·안창호·김구 등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관계는 소련공산당이나 중국국민당처럼 유일한 정당체였다. 이후로 임시정부를 에워싸고 여러 정당이 조직되고, 그것을 근간으로 정부와 독립운동계가 운영되었는데, 한국독립당이 그 출발점이었다.
한국독립당이 우파만의 정당이었으므로 그동안 추진해 온 또 하나의 목표인 좌우합작은 달성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일단 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접근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강령에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화하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담고 있었던 것이 그러한 증거였다.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통하여 남경 중국국민당 정부에 외교활동을 벌였다. 북벌 완성 이후 비교적 안정기를 누리던 국민당 정부에 대하여 '한국 영토에 민주독립국가의 건설, 균등제도의 실현, 일본의 만몽정책(滿蒙政策)22)에 대응하는 한중관계의 중요성'등을 역설하여, 임시정부의 노선과 방침을 전달하고 협조를 당부하면서 긴밀한 연락관계를 요구했다.
(4)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임시정부는 만주사변 발발(1931년 9월) 이후 여러 차례 국무회의를 열고 의열투쟁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1932년 1월과 4월의 이봉창·윤봉길에 의한 양대 의거로 나타났다.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5대 해군 강국으로 부상하자 한국노병회23)를 통해 장기적인 전쟁준비방략을 추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1931년에 만주를 침공하고 만주국을 급조하면서 중국민의 반일감정이 팽배해지자, 이 기회에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의열투쟁방략을 수립하여 일제를 응징하고자 나섰다.
김구는 미주동포들이 지원한 자금으로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을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일왕의 행차에 폭탄을 던지게 했다. 중국 신문들이 일제히 이 거사를 '불행부중(不幸不中)'으로 보도하자, 상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은 이를 핑계삼아 상해를 침공했다.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지 못한 일본군이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함에 따라 중국은 일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일본군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맞춰 승전기념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던진 폭탄이 식장단상을 풍비박산시켰다.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등 주요 군사지휘관들이 즉사했고, 일본공사 시게미쓰(重光葵)를 비롯한 요인들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상에서 패전국의 상징처럼 불구의 몸으로 목발을 짚고 나타나 항복 서명했던 외무대신이 바로 시게미즈였다. 윤 의사에 의한 시게미즈의 중상이 일본 패망의 계시였던 셈이다. 임시정부는 이 외에도 만주와 국내로 행동대를 파견하여 요인 암살을 여러 차례 추진했다.
의거를 일으킨 시기는 만보산 사건24)과 이에 대한 일제의 농간으로 한중 양 국민 사이에 충돌이 심각하던 때였다. 이 의거는 한 순간에 이 문제를 해결시켰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을 불러일으켰으며, 침체된 독립운동계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 당시까지 임시정부를 원조하지 않던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김구가 장개석을 만나 중국군사학교에서 우리 청년을 교육시킬 수 있게 만듦으로써 군사력양성의 길을 열게 된 것도 이 의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윤봉길의거을 계기로 상해를 떠나야 했다. 일제 경찰이 프랑스 조계당국을 협박하여 입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안창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대부분의 요인들은 항주·가흥 등지로 피신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주요 근거지인 상해를 떠나,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오랫동안 중국대륙 각지로 이동하며 활동하여야 했다.
3) 이동시기(1932~1940)
(1)정당연합 모색
한국독립당이 창당된 이후 임시정부 주변에 여러 정당조직들이 나타났다. 만주의 한국독립당(1930)과 남경의 한국혁명당(1932)이 신한독립당(1934, 남경)으로 통합되고, 남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혁명당(1929)도 관내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의열단이 1930년대에 들어 정당체로 활동했다.
이들 정당에 의해 1932년 다시금 민족전선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이해 10월에 상해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대일전선통일동맹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유일대당을 조직하기 위한 논의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김원봉과 이청천(1888~1957)25)의 주도로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족혁명당, 1935년 7월)이 결성되었다. 임시정부를 지탱하던 한국독립당마저 여기에 참가하고,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존폐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구는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재정비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존폐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임시정부는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기초세력으로 운영·유지되어 갔다. 김구가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게 되면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은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의 양대 구도로 재편되었다.
양대 정당체제를 보이던 남경시대의 독립운동계는 중일전쟁 발발(1937. 7) 직후에 다시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한국독립당재건파, 이청천이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조직한 조선혁명당 등 3당이 연합하고, 미주지역의 6개 단체의 연명으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1937년 8월)를 조직했다. 이에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 등을 결합시켜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 1937년 12월)을 결성했다. 그리하여 중일전쟁과 일제의 남경 침공 무렵에 임시정부 주변에는 양대 연합체제가 형성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광복진선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양대 연합체제는 김구와 김원봉의 회합에 의해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7)결성에 합의를 보기도 했다.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기 위해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홍진), 조선혁명당(이청천·최동오)의 광복진선계 3당과 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청년전위동맹(신익희) 등 민족전선계 4당이 1939년 8월에 7당 통일회의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방법(단일당 혹은 연맹체)과 독립운동 최고기구(임시정부 혹은 단일 신당)에 이견이 생겨 이 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우파인 광복진선계 3당은 중경진입 직전에 통합을 도모하고, 당시까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임시정부에 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이 참가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2)군사력 양성노력과 군사계획 수립
상해를 떠난 요인들은 남경 근처인 진강에 정부청사를 마련했다. 남경에 청사를 두지 못한 이유는 일본이 중국 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진강에 청사를 두었지만, 사실상 김구와 이동녕 등의 핵심인물들은 남경성 내에 비밀 거처를 마련하고 청년 모집과 군사력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는 남경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교내에 자리잡은 장개석 관저에서 그와 회담을 가졌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양대 의거를 치하하는 그에게 김구는 우리 천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이 낙양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위한 특별반 편성을 허가함으로써 1934년에 초급간부 양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운영하기 위해 북만주에서 활동했던 이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군 출신 장교를 교관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1기생만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김구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방법으로 군사간부를 육성했다.
임시정부는 그 소재지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군사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전시체제를 준비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김구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재정비된 1936년 말경부터였다. 그리하여 중일전쟁 발발 1주일 만에 군무부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군사위원회는 초급장교 양성과 기본 1개 연대 편성을 목표로 잡았다. 한편 민족혁명당이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자, 임시정부는 이듬해 2월 유주에서 선전공작대의 성격을 지닌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자대를 조직했다.
1939년 기강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갖추기 위한 부서 개편과 방량 수립에 나섰다. 군무부 외에 군사계획의 수립을 전담할 기구로 참모부를 증설했고, 이어서 「독립운동방략」을 결정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군대를 조직한다는 원칙하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3개년 계획을 수립한 것이었다. 핵심은 국내외 각지의 한민족을 총동원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이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우선 1939년 11월 군사특파단을 편성하여 서안으로 파견했다. 당시 서안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곳이었고, 화북지역에는 20만 명에 달하는 한인이 거주해 있었다. 임시정부는 서안에 병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계 청년들은 1939년 11월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고, 곧바로 서안으로 이동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4)중경시기(1940~1945)의 임시정부체제 정비와 광복군 창설
(1)한국독립당(중경)창당과 민족전선통일 달성
임시정부가 중경 입성 직전에 우파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을 확대 강화하는 동시에 임시정부의 체제정비작업도 병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들기 위해, 첫째 정부와 의정원을 확대하고, 둘째 군사조직을 창설하며, 셋째 개헌을 통해 단일지도체제를 갖추어 나가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우선 국무의원을 11명, 의정원 의원을 35명으로 확대시키고, 중국 정부의 주선으로 정부청사를 중경에 마련하고 임시정부를 이전했다. 이어서 중경 도착 직후인 1940년 9월에 국군(國軍)이자 당군(黨軍)으로서 광복군을 창설했다. 또 다음 달에 집행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고, 김구가 주석을 맡는 단일지도체제를 이루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강력한 지도력 아래 운영될 수 있었다. 이제 임시정부는 정부(정)·한국독립당(당)·광복군(군)의 삼위일체체제를 확립했고, 이동 시기의 약화된 모습을 극복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다시 대두할 바탕을 확립했다.
우파 3당이 합작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있던 상황과는 달리, 좌파세력은 분열을 거듭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연합을 이루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4개 조직은 7당 통일회의 직후 분열되어 단합된 모습으로 우파세력과의 통합을 도모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세력은 임시정부로 통합하는 합작을 추진했다. 그것은 당시까지 일관되게 지켜왔던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 자세를 바꾸어 정부 참여라는 쪽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유가 있다. 첫째 7당 통일회의 이후 좌파연합체가 와해된 것, 둘째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대다수 병력이 화북으로 이동한 것, 셋째,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 창구의 단일화를 위해 합작을 종용하고 나선 것, 넷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이 임시정부 참여를 독자적으로 발표한 것, 다섯째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전시체제가 긴요했던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은 1941년 12월에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고, 다음해 8월 좌우익 출신 23명 의원으로 구성된 의정원이 구성됨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 대통합과 민족전선통일을 달성했다. 이제 임시정부는 (상해)한국독립당(1930), 한국국민당(1935), (중경)한국독립당(1940)으로 연결되던 일당운영체제에서 벗어나 다당운영체제로 발전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인적 바탕이 확대되고, 외연26)도 넓어졌으며 활동도 강화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광복을 염두에 두고 정치이념과 독립전쟁 준비태세를 천명하는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27)을 발표했다. 이것은 삼균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았는데, 민족 내부에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실현하여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모순을 제거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자는 논리였다. 건국강령의 내용은 국토를 탈환하는 과정을 담은 복국(復國)과 해방된 조국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건국단계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를 통해 국내에서 건국할 국가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요소를 포괄하는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민족전선통일을 위한 이념적 광장을 열어 두고 있었다. 이것도 좌우합작 정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2)광복군 창설과 활동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경으로 이동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규군의 필요성과 일제와의 일대 결전의 시기에 대비하여 1940년 9월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과 각지의 무장독립군을 모아 김구, 김규식, 지청천 등을 중심으로 중경(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여 1942년 조선의용대(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1938)를 흡수하였고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는 조직을 보강하여 강화하였다. 이 광복군에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과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청년,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로 징병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가담하였다. 후에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협조를 받아 임전태세를 정비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1941) 임시정부는 대일·대독선전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 외에도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의 작성·암호문해독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43년엔 일부는 미얀마·인도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같은 한민족의 일본군과의 전투참가사실은 연합국측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비행대까지 편성한 광복군은 1945년 총사령관 지청천, 제2대대장 이범석 등에 의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첩보전략기구인 OSS와 연합하여, 특수훈련까지 받고 비행대를 동원한 1945년 9월 국내진입계획을 세웠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는 환국을 준비했다. 우선 중국국민당 정부에 외교업무를 담당할 주화 대표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중국 내 동포사회의 파악과 귀국 주선 및 생활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했다. 그러면서 요인들도 공식적으로 환국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국토가 미국과 소련의 두 열강에 의해 점령되었고, 따라서 임시정부의 환국도 점령국가의 정책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이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자세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할 경우 남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할 것이라는 우려였고, 둘째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승인도 검토해야 하며, 그럴 경우 소련이 만대하고 나설 것이라는 점이었으며, 셋째 미국이 소련영토 안에 한인부대 3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음에 따라 소련의 주장에 지나치게 순응한 점, 넷째 인도의 전후처리문제를 들어 영국이 임시정부 승인을 반대하고 나선 것 등이었다. 이처럼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거부는 열강들의 야합28)에서 비롯되었다. 이 결정은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초래했고, 해방 정국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정식 정부로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요인들은 1945년 11월 말과 12월 초 두 차례에 걸쳐 귀국했다. 비록 그것이 개인 자격의 환국이었지만,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의와 기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광복군은 서울에서 '복원(復員 ; 해체)'을 선언했다.
1)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행정기관인 국무원, 사법기관인 법원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체의 정부로서29)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임시헌법을 갖추어 출범하였다.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내각은 대통령에 이승만, 그리고 국무총리에 이동휘, 그리고 내무부에 이동녕, 외무부에 박용만, 군사부에 노백린, 법무부에 신규식, 학무부에 김규식, 재무부에 문창범, 노동국에 안창호(安昌浩)로 내각이 정해서 있고 대본영, 참모부총장, 군사참모부, 회계감사원이 있었고 따로 비서국도 있었다.30)
2)임시헌법
임시헌장 10개조를 기본으로 하여 신헌법을 제정·공포하였는데(1919.9), 전문 및 본문 58조로 이루어진 신헌법에는 자유주의와 민주공화국의 내용이 집약되어 있고, 3권 분립의 원칙에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것이 특색이었다. 임시정부는 한국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요구하는 성명서를 전 세계 인류에 선포하고 임시정부의 헌법요지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1919)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서 의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에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
<임시정부의 헌법요지 발표내용(1919.9)> |
①한국은 공화국이다. ②정부는 의회제도의 형식 취한다. ③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한다. ④언론·출판·집회와 청원의 자유를 보장한다. ⑤귀족의 특권을 폐기한다. ⑥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한다. ⑦상비군은 국가의 안전·독립·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군으로 대체한다. ⑧소수자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 ⑨독립된 사법제도를 실시한다. ⑩교육의 특별한 조성을 실시한다. ⑪사회적 청렴의 기풍을 고무하기에 노력한다. |
3)개헌과 정치형태
1914년 4월 임시헌장을 제정했을 때는 임시의정원 중심으로 헌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대통령 지도제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총괄할 수 있게 1차 개헌을 하였다.
그리고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 지도제로 전환(국무령-김구)함으로써 사법권 조항을 폐지하는 3차 개헌을 하였다. 그리고 1940년 주석중심제인 주석지도체제로 전환하는 4차 개헌을 해서 강력한 지도력을 주석인 김구가 발휘했다. 그리고 1944년 마지막으로 5차 개헌을 하였는데 내용은 주석과 부주석 중심체제로 전환하는 개헌을 했으며 이 내용은 민족의 광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이 여러 차례 개헌된 것은 정부 내의 지도급 인사들 사이에 여전히 노선의 갈등이 일어나 많은 인사들이 정부를 떠난 것과도 관련이 깊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독립방향에 적절한 노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개헌을 한 노력한 것을 알아야한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하여 9년간 단절되었던 한국인의 민족정권을 잇는 정통성을 가진 한국민족의 망명임시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정치체제에서 종래의 모든 종류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한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에 기초한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국 민족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셋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려 계보와 각파의 독립운동단체들(사회주의 계열의 한인사회당 포함)이 거의 모두 참가한 통일성을 가진 임시정부로 수립되었다. 최초의 통합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을 다수로 하고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연합정부'로 성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당시에는 이에 참가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까지도 이를 한국민족 전체의 임시정부로 봉대31)하였다.
넷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상징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그 자신이 매우 중요한 독자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초기에 독립군 무장독립운동까지도 지도하고 때로는 지휘하였다. 예컨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군민회군, 참의부, 독립군 등은 임시정부가 지도하였다.
다섯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외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여 국내통치의 일부를 실행한 정부였다.
여섯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침략 점령하자 '특공대(한인애국단)'를 조직하도록 결의하고 김구에게 위임하여 이봉창 의거,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 의거 등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독립운동을 고양시킨 큰 성과를 낸 정부였다.
일곱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부터 독자 무력으로서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내진입 해방작전을 추진한 정부였다.
여덟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반포하여 광복 후의 서울에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추진하고 준비하였다.
아홉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에도 전력하여 중국 수뇌 장개석과의 외교활동 결과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연합국 수뇌가 세계에 공약하게 되었다.
열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2~1945년에는 민족주의 세력 3분의 2, 사회주의 세력 3분의 1의 원칙으로 다시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광복 후의 통일정부수립에 대비한 정부였다.
열한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것이 임시이지만 '정부'였기 때문에 국권을 잃고 신음하던 모든 한국민족의 정신적 대표기관이었으며, 정신적 지주(支柱)였다. 한국민족은 국내에 있든지 국외에 있든지 간에 일제침략기에 국권을 빼앗기고서도 '우리의 임시정부'가 국외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는 정신적 고취와 의지를 얻었다.
열두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수립된 후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무려 약 27년간이라는 최장기간 존속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한 정부였다. 임시정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독립운동기관·단체도 이만큼 오래 존속하면서 철저하게 광복의 날까지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열셋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 약소민족 독립운동사(세계사)에서 가장 임시정부다운 임시정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프랑스와 폴란드가 영국에서 잠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한 일은 있었으나, 그것은 극히 짧은 기간의 일이었다. 그 밖의 어떤 약소민족도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결 때까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은 한국민족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6.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1)한계
독립운동가 들의 사상적 대립, 운동방법론의 차이 등으로 분열 대립이 거듭되었다. 인적·물적 기반이 없는 망명정부라 여러 차례 위기 속에서 활동하였다.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미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위임통치해 줄 것을 제의한 것이 불씨가 되어 이동휘·안창호가 임정을 떠났고, 이승만도 탄핵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정부였다는 점에 일정한 의의가 있었으나 민족해방운동 총본부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만주나 연해주 지방에 있는 많은 독립군 단체들을 직접 통어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이 지방 독립군의 전력이 통일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정했다. 의정원의 일부 의원들이 군무부(軍務部)의 만주 혹은 연해주 이전, 적극적인 군대양성, 독립전쟁의 즉시 개시를 건의했으나 재정문제를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독립전쟁, 즉 무쟁투쟁을 미룬 임시정부는 심한 정쟁과 파쟁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그리고 3·1운동을 계기로 노동자·농민·청년·학생층이 광범위하게 민족해방운동의 주력으로 성장해갔지만 상해임시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훈련하여 운동의 전력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정책을 수립하지 못했다. 계속 '광복 운동자' 중심의 정부로 유지하려 한 점에 그 한계성이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이탈한 신채호의 경우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새로 부상한 이들을 '민중'으로 이해하고 「조선혁명선언」에서 혁명으로서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중혁명'이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2)의의
첫째, 우리 민족 주권의 대표기구였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기구로 활동하였다.
둘째, 독립운동의 중심기구였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지휘하는 중심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셋째,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의 전위기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모든 동포에게 우리도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세계 각국에게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전위기구로서 기능하였다.
7. 맺음말
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나타난 독립국가·민주공화국가 수립의 민족적 의지를 수렴하여 수립되었다. 그리고 광복을 맞는 1945년까지 중국에서 약 27년 동안 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민족의 대표기구로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정부활동이 해외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내 민중을 직접 파악하지 못하고, 또 중국의 정세변화에 따라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라는 이름만큼의 활동을 수행하지 못한 시기도 많았다.
이런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상황에 맞게 방략을 추진하고, 또 독립운동세력을 결집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했다.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의열투쟁을 펼쳤고,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군사계획을 수립하고 항일투쟁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민족전선통일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 결과 1940년대 초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구현할 수 있었고, 국군으로서 광복군을 창설하여 중국군만이 아니라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과 공동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와 공동작전을 폈던 미국과 영국은 끝내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데 반대했다. 이 문제는 임시정부의 모든 활동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선언했던 「대일선전포고」조차 인정되지 않아 참전국으로서의 자리에 서지 못했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에 승전국으로서 참석하지 못했고, 일본과의 사이에 문젯거리를 많이 남겨 놓았는데, 독도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임시정부에 대한 많은 연구들을 보면 이에 대한 평가는 두 갈래로 선명하게 나뉘어 왔다. 하나는 임시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으로 보아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한 단체에 불과하게 평가한 것이었다. 이 양극단적인 평가는 모두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존재가치와 역할가치로 구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등장했다. 1910년에 나라를 잃은 순간 우리는 정부가 필요했다. 때문에 3·1운동 직후에 여러 개의 정부조직체가 등장했다. 이를 통합하여 민족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그 자체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부로서의 존재가치이다.
그런데 '이 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구실을 다 했는가'라는 문제는 시기에 따라 다르다. 때문에 역할가치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약 27년이란 존립기간 동안 독립운동계의 구심점으로서 구실을 계속 하지 못했다고 해서, 전개했던 활동마저 부정해서는 안 되다. 비록 제약조건과 한계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일률적으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사의 위대한 한 획이며, 민족독립의 장강을 이루는 토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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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굴레에 벗어나 혁명운동을 일으켜 독립을 세계에 선포하고 자결주의를 발표하였다. 혁명사업이 시작되었으나 결국에 이르지 못함에 이르러는 반드시 최고기관인 임시정부가 있어 국민의 기준이 되고 국교(國交)의 지위를 점하여야 되는 것이며, 또한 세계 혁명사의 관례인 것이다. 3월 1일 이후 각처 독립단은 모두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2) 대통령 손병희(孫秉熙),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3) 의정원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
4)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李東輝)
5)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대한 시기구분은 다양하다. 헌법체제의 변화나 활동상의 특색 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예컨대 1기(초기 임정 활동기;1919~1923), 2기(국민대표회의 이후 한국독립당 조직기;1923~1930), 3기(정당중심 활동기;1930~1940), 4기(확대·강화기;1940~1945)로 나눈 추헌수의 구분을 들 수 있다.(추헌수,『대한민국 임시정부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6) 1932. 5 ~ 1935. 11
7) 1935. 11 ~ 1937. 11
8) 1937. 12 ~ 1938. 7
9) 1938. 7 ~ 1938. 9
10) 1938. 11 ~ 1839. 4
11) 1940. 10 ~ 1945. 8
12) 국내의 무장 사상적 투쟁을 지휘하는 교통부를 설치, 전국 각 군(郡)에 1개소의 교통국을 두고 각 면(面)에 교통소를 설치하여 국내와의 연락을 취하였다.
13) 미국에 외교본부격인 구미위원부를 설치(1919.9)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특히 이승만)하였고, 영국과 미국에 각각 한국친우회가 조직되고 미국의회에 한국문제를 4회나 상정시켰으나 결국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되었다.
14) 국제사회당대회에서 국제기구에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았다. 간행물로 선전활동에도 힘씀.
15)소련과 공수동맹(1920):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군양성지원(무기, 탄약 공급)을 교섭하여 200만 루블을 지원받기도 하였다(1921)하지만 이 자금을 이동휘 계열이 독점하다가 문제가 되어 결국 이동휘는 임시정부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이후 임시정부와 소련은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16) 베르사유 조약 등 연합국이 패전국과 맺은 일련의 강화조약에 기초를 둔 국제질서. 이 조약들은 T.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평화원칙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실제로는 연합국측의 자의적(恣意的)인 적용으로 끝났다.
17)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연해주로 갔으나 소련의 지원을 얻지 못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8) 임시헌법의 적용범위도 종래의 '인민'에서 '광복운동자'로 좁히는 등 현실에 맞게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19) [정치] 내각을 조직함.
20) 코민테른 12월 테제란,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를 말한다. 조선공산당은 종전과 같은 인텔리 중심의 조직방법을 버리고, 공장, 농촌으로 파고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개량주의자들을 근로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21) 정부를 정당조직 중심으로 운영하는 체제
22) 만주와 몽골을 대하던 정책.
23) 1922년 김구, 여운형이 설립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군인 양성·한국 독립군 사기진작 및 독립군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결성된 일제강점기 한국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24)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은 1931년 7월 2일에 중국 만주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로 만주사변을 촉발했다.
25) 독립운동가로서 본명은 지청천이나 별칭으로 이청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26) 일정한 개념이 적용되는 사물의 전 범위. 이를테면 금속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금, 은, 구리, 쇠 따위이고 동물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원숭이, 호랑이, 개, 고양이 따위이다.
27) 대생산 기관은 국유로 하고 토지·어업·광업·은행·전신·교통기관 등을 국유로 하며, 토지의 상속·매매를 금지하고 "두레농장, 국영농장, 생산·소비와 무역의 합작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대중(農工大衆)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 정도와 문화수준을 제고"한다
28)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림.
29) 최초로 공화제를 주장한 것은 신민회였다.
30) 1919. 11. 27 독립신문
31) 공경하여 높이 받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