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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45번째 주 내용: 만약에 당신(當身)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이라면 설명
■ 일자: 경자년(庚子年) 단기 4353년 서기 2020.12.24.목요일.(음력 11.10.)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45번째 무료강의 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오직 배움의 길로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자가 실패를 딛고 승리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0마당 설명 중 45번째 무료강의 시작
◐ 만약에 당신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이라면?
만약에 임금에게 유학(儒學)도 중요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나오는 주요한 역사(歷史)에 대해 강의를 해주었다면 우리나라의 정책은 아마 방향이 많이 바뀌어서 많은 사람이 덜 다치면서 더 발전할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과거(科擧) 시험제도가 있었다면 역사를 연구하여 대안, 대책, 방책 등을 세울 수가 있어서 힘찬 대응으로 국제무대에서 앞장섰을 것이었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 만약에 당신(當身)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이라면.
만일에 12살의 어린 단종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과연 그 당시 36살의 세조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보는 바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같이 타고난 자질이 왕재감이고 결단력이 있고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또한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고 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에 세종대왕이 둘째인 수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에 3대 태종의 아들 중 셋째 세종대왕이 오래 사셨다면 즉 세종의 형인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보다 더 오래 사셨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에 문종이 몸이 건강하고 씩씩하여 오래 사셨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에 단종이 즉위할 때 수렴청정(垂簾聽政: 왕이 나이가 어려서 성년 때까지 정사를 대신 보조하는 정치)을 할 수만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때는 단종의 어머니인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와 할머니인 소헌왕후 심씨(세종대왕의 비)는 다 별세하였던 시기이다.
그 당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즉위할 때는 12살 이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36살 이었다.
나이와 모든 면에서 볼 때 과연 당신이 수양대군 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역사란 길사(吉史)와 흉사(凶史)를 적는 것이며 즉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적는 것이며 힘의 원리가 눈에는 않보이지만 내면에는 역사의 힘이 그 시대를 그냥 나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즉 어느 시대나 또 현시대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배경으로는 세종은 장자에게 대를 이어줄려고 했으며 또한 당시의 고뇌요 마음의 기대였다고 봅니다. ≪ 세종대왕의 고뇌는 아래에 올려놓았음 ≫
그 시대의 배경이 지금으로 볼 때 유학은 좋은 말씀을 적어 놓았지만 그 활용을 잘못하여 또 그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나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에 즉 각자의 처신과 충의대로 영위하다보니 그 당시의 역사 속에서 흉사(凶史)들을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즉 나라를 이어갈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세자로 책봉을 한다든지 하였다면 아마 많은 인재와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려가면서 나라를 더욱 더 튼튼히 하였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가정(假定)하여 만일에 조선 말기에 즉 고종시대나 순종시대에 수양대군인 세조와 같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아마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유교의 학문인 사서삼경을 다 읽고 배운다고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 옛 임금이나 성현들이 사서삼경을 다 읽고 다 배워도 모함과 모략과 유혹에 빠지고 넘어가고 또 시기하고 아첨하고 이간질하고 음모를 꾸미고 밀고하여 참형을 당하는 일들과 또한 유배, 반정, 반란, 혁명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유학에는 깊이 알고 있지만 다른 세상일에는 어두웠기 때문에 남의 꾀임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게 되어 흉변(凶變)들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유학과 즉 모든 학문과 기술을 배워 잘 응용할 때 즉 역사를 알 때 그리고 제도를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때 그 나라는 발전을 할 것이며 나아가 힘 있는 나라를 만들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하면 힘없이 나라를 잃게는 않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곧 그 당시 역사의 소중함과 중요함을 알았다면 우리나라의 조정(朝廷) 즉 정치는 힘있는 역사를 만들어 나왔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성현(聖賢)께서 역사(歷史)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은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일까?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곧 선비의 기세가 펼쳐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곧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의 법도가 갈라지게 된다. 즉 법도에 맞지 않게 된다.
무릇 올바른 역사학이라고 말하는 법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인물됨의 크고 적음을 논하고 그 당시의 시국상황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만세의 표준이 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곧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곧 역사(歷史) 속에 모든 학문(學問)이 그리고 훌륭한 스승이 다 들어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고 연구하고 가르칠 때 나라의 발전을 가줘다 주는 것이다. 라고 봅니다.
아무쪼록 좋은 역사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훌륭한 일들을 많이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여러분께서 더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하여서도 과연 아래의 사연을 읽어보시고 여러분께서 각자 판단을 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사마천의 사기에서 선위(禪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7대 한무제(漢武帝) 때 13년이나 걸려서 130권을 BC 91년에 완성하였다.
이중에서 본기(本紀)가 12권이며 제1권인 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은 중국의 오제(五帝)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편에서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어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모자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정권을 순에게 넘겨주고자 했다. 순에게 넘겨주면 천하가 이로움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볼 뿐이지만 단주에게 넘겨주면 천하가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롭게 될 것이었다.
요임금은 말한다. 결국 천하가 손해를 보게 하면서 한 사람만 이롭게 할 수는 없다.
마침내 천하를 순(舜)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순임금은 요임금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마치고 단주에게 양보하였으나 모든 제후들이 순에게 모이자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 라고 말한 뒤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순임금의 아들 상균(商均)이 또한 아버지를 닮지 못하여 못나고 어리석어 순임금은 미리 하늘에 우(禹)를 추천하여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세종대왕께서 서기 1450년 2월에 별세하고 난 후 세종대왕의 맏아들인 문종이 1450년에 2월에 시작하여 고작 2년 후인 1452년 3월에 몸이 약해서 운명하자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어린나이 12살에 조선 6대 임금으로 이어갔으나 고작 3년 후인 1455년에 수양대군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아래에 그 당시의 역사에 일어났던 것 중 중요한 것을 올리옵니다.
◉ 문종(文宗): 1414년(태종 14년)~1452년(문종 2년)이며 세종대왕의 맏아들이며 조선 5대 임금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에게는 자식이 10명이며 아들이 8명 딸이 2명이다.
문종의 재위는 1450년~1452년이다.
이름은 향(珦)이며 자는 휘지(輝之)이다.
◉ 세종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1419년(세종 1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사람이 이종무(李從茂)가 있으며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金宗瑞)가 있다.
세종의 전반기는 이종무(李從茂)가 후반기의 국방은 김종서(金宗瑞)가 도맡았다.
이때 즉 1419년(세종 1년)에는 세종의 맏아들인 향(珦)은 6살이며 세자(문종) 책봉 2년 전이다.
세종대왕의 치세기간은 31년 6개월이다.<1418년 8월~1450년 2월>
◉ 세종시대의 문종에 대하여
세자 문종의 이름은 향(珦)이며 자는 휘지(輝之)이며 세종 즉위 3년인 1421년에 8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었다.
1443년(세종 25년) 5월에 세자(문종)에게 대리 집정을 명하였다.
문종은 병약하여 장가를 간 후 후사를 내지 못했다.
세자빈 김씨와 세자빈 봉씨는 전부 폐빈(廢嬪)이 되어 자결 또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문종과 당시 궁녀였던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자식이 2명이 있다.
즉 단종과 딸 1명이다.
1433년(세종 15년)에 첫딸은 즉 옹주는 놓자마자 그날 저녁때에 죽었다. 그 후 1436년(세종 18년)에 딸을 놓았다. 이가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에 세자(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도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弘暐) 즉 단종을 놓고 그 다음날에 즉 2일 만에 별세했다.
◉ 한글 즉 훈민정음 완성이 세종 25년이며 서기 1443년이다. 즉 이해 12월에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즉 한글을 1443년에 완성했다.
그 후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된 해설서인 해례본과 정인지 서문이 1446년 9월 상한에 이루어졌으며 훈민정음 즉 한글 반포는 1446년 9월 29일(양력 10.9.)에 이루어졌다.
1445년(세종 27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病死)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원로대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세조의 찬위(簒位) 사육신(死六臣)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 문종 때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東國兵鑑)과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대학연의주석(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
특히 고려사(高麗史)는 정도전 등의 고려국사 이래 여러 차례 개수 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세종 31년)에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1451년(문종 1년)에 완성을 본 것이며 이 기전체(紀傳體: 개인의 전기를 기준으로 함)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문종 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인 고려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 제도, 문화의 정리를 위하여도 필요한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 고려사(高麗史)
고려왕의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는 익재(益齋) 이제현이 고려 태조로부터 고려 15대 숙종까지의 본기(本紀)만을 편찬하였다.
그 당시 임진전쟁(임진왜란)으로 불타 전하지 않지만 다만 각 왕의 본기 말미에 써 붙였던 사찬(史贊) 즉 사평(史評)이 익재난고(益齋亂藁)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전하고 있다. ≪ 다행으로 전주사고지는 병화를 면하게 되어 역사가 살아서 움직이게 됨. ≫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사(高麗史: 고려왕의 실록)를 완성하였다.
즉 고려 말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고려국사(高麗國史)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57년 만에 조선 5대 문종 1년인 1451년에 고려사(高麗史: 고려왕의 실록)가 마무리되었다.
이제현이 고려 15대 숙종실록까지는 편찬하였으나 그 후 공민왕실록은 1391년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에 의하여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끝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건국 후인 1398년(조선 태조 7년)에 공양왕실록과 함께 편찬 작업을 종결하였다.
결국 고려사(高麗史)의 역사서는 고려 말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고려국사(高麗國史)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57년 만에 조선 5대 문종 1년인 1451년에 고려사(高麗史)가 마무리되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년(문종 2년) 2월에 김종서(金宗瑞) 등에 의하여 편찬된 고려시대의 역사를 즉 고려사가 완성된 후 다시 편년체(編年體):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함)로 정리한 사서(史書)를 말한다. 고려사(高麗史)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역사서(歷史書)이다.
◉ 정도전은 이성계 즉 태조의 명을 받아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려사(高麗史)를 나쁘게만 기록하였다.
그 후 세종임금은 잘못된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즉 집현전의 젊은 학사 정인지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겼다. 되도록 고려의 역사를 올바르게 펴내려고 하였다.
이때 정인지 밑에서 신숙주가 재편찬작업을 도왔다.
신숙주는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왔으며 뛰어났다.
그는 고려에 대한 중요한 것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즉 고려사는 제4차 개찬작업으로 세종 20년에서 24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에 의해 고려사전문이 완성되어 세종대왕에게 받쳐 올렸다.
때는 1442년(세종 23년)에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세종대왕은 1450년(세종 32년) 2월 17일 붕어하였다. 이에 문종은 이해 2월 22일에 조선 5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고려사를 더 정리하여 1452년(문종 2년) 2월에 김종서(金宗瑞) 등에 의하여 편찬된 고려시대의 역사를 즉 고려사가 완성된 후 다시 편년체(編年體):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함)로 정리하여 만들었다. 곧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중요한 역사서이다.
그러나 문종은 1450년 2월~1452년 5월로 재위기간이 2년 3개월에 몸이 허약하여 병사하였다.
◉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년(태종 18년)~1441년(세종 23년) 조선 5대 문종의 비이다.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영의정부사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집안이 어려워 궁궐에 들어오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년)에 세자궁에 선임되어 승휘(承徽)에 오르고 1433년에 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김오문의 딸 세자빈 김씨가 폐빈이 되고 또 봉려(奉礪)의 딸 순빈(純嬪) 봉씨가 부덕하여 폐빈(廢嬪)이 된 뒤 단종의 어머니가 세자빈이 되었다.
1441년 7월 23일에 원손 즉 단종을 놓고 2일 만에 운명했다.
이에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450년(문종 1년)에 현덕왕후(顯德王后)에 추숭(追崇) 되었다. 이해 7월에 홍위(단종)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몸이 허약해 운명하자 6대 단종 1년에 문종과 합장되었다.
1456년(세조 2년)에 현덕왕후의 아버지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복주(伏誅: 죄를 인정하여 죽음)되면서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은 추폐 되어 서민이 되었으며 평민의 예로 또한 개장되었다.
현덕왕후는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다.
현덕왕후의 소생으로는 단종(端宗)과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있다.
□ 단종(端宗)
1441년(세종 23년)~1457년(세조 3년)이며 문종의 아들이며 조선 6대 임금이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재위는 1452년~1455년이다.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8살인 1448년(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450년에 세종대왕이 붕어(崩御)하자 문종이 즉위하고 홍위 즉 단종은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나이는 10살이다.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1452년 5월에 병사하자 홍위 즉 단종의 나이 12살에 조선 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 1453년 4월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 1452년 9월에 명나라에서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誥命)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사신)로 명나라에서 돌아와서 병권을 쥐고 있는 김종서(金宗瑞)를 그해 10월 10일 간계를 써서 죽였다. 그리고 영의정 등을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이를 역사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단종 즉위 후 황보인, 김종서 등 황표정사(黃標政事: 단종이 결정을 하도록 누런 표시를 한 것) 등으로 고명대신의 의정부가 하는 일은 알았으나 군주(단종)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계유정난 때도 집현전 관료들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자도 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세종대왕의 3째 아들이며 문학, 예술을 좋아하며 세종대왕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과는 가장 쌘 세력경쟁자)을 붕당모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단종 2년 뒤 1455년 윤6월에는 강제로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7대 임금으로 등극하고 사육신으로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움.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혀서 처형당함. 1457년에는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세종의 6째 아들인 금성대군도 영주시 순흥에 유배 후 관노의 고발로 처형당함. 역사는 수양대군을 왕권 계승 후 당시 조선인들에겐 왕위 찬탈로 인식되었다. ≫
1454년(단종 2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1455년(단종 3년)에 선위로 세조가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457년 6월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해 10월에 노산군(단종)을 죽였다.
1681년(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 복위되어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이라 하고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였다.
▣ 조선 7대 세조(世祖)의 업적
세조(世祖): 1417년(태종 17년)~1468년(세조 14년)이며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7대 임금이다.
문종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재위는 1455년~1468년이다. 재위는 13년 3개월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문종보다는 3살이 적으며 단종보다는 24살 많다.
이름은 유(瑈) 자(字)는 수지(粹之)이다.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에게 너처럼 기가 강한 사람은 부드러움을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는 구슬옥(玉)변에 부드러울 유(柔)자가 합하여 유(瑈)로 지어주었다.
세조의 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왕재감이며 결단력이 있고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양대군(晉陽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여 불서의 번역을 감장하고 향악의 악보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병약하여 병사하자 7월부터 그의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을 장악하려고 계략을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년) 10월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단행하여 국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윤6월에 단종에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1455년 8월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하게 하였다. 11월에는 춘추관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사육신 등이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려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발각되어 여러 충신들의 신하들이 죽었다.
1456년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으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였다.
1457년 6월에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으며 이때 경상도 순흥에 있던 세종대왕의 6째 아들이며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노비의 밀고로 인하여 발각되자 이해 10월에 사사(賜死)되었다.
단종인 노산군도 죽였다.
1458년에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1458년에 국조보감(國朝寶鑑) 즉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4대의 치법 정모(政謀)를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위하여 편수하였다.
그 후 동국통감(東國通鑑: 고대사와 즉 고조선의 역사와 신라, 고려의 역사서)을 편찬하게 하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
1458년(세조 4년)에 편찬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즉 고조선 부분을 손질하여 1476년(성종 7년)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성종 15년)에 성종의 왕명을 받고 서거정 등이 신라,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즉 1485년(성종 16년)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감 사서(史書) 56권을 신편하였다.
원래 세조가 목표하였던 의도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한 고대사)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즉 고조선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 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세조 때 골격이 거의 짜여진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즉 고조선 부분을 다시 손질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사서(史書)는 영의정 신숙주가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다.
세조는 왕조정치에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시대의 통치법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6년(세조 12년)에는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大司諫)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는 관찰사(觀察使)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다.
과전제(科田制)를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 즉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란이 일어났다. 즉 지방민을 등용하지 않고 중앙의 문신을 임명한데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반란이다.
이를 평정하여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 란(亂)은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관찰사 강효문(한명회의 외척)의 애첩 기향을 강간하여 강효문은 이에 보복을 하기 위해 이시애를 쳐들어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고 이에 애첩인 기향은 자결하였으며 또 신숙주와 한명회를 같이 공모하였다고 거짓 계략을 짜고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에 세조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신문을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잠서(蠶書: 농잠으로 된 한문 책)를 즉 누애치기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五倫錄)을 찬수케 하였다.
문화사업에는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어제시문 (御製詩文)의 편집발간 등을 하였다.
왜인에게는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 즉 여진족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시키고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이만주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상명하달(上命下達) 식의 방법을 택하여 단종 때의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직계제를 시행함으로써 왕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여 중신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다.
사육신의 사건으로 집현전을 폐지하고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인 조석문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 왕비의 친아버지)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 후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 즉 세조 자신이 직접 지명한 삼중신(三重臣)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1468년(세조 14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하고는 그 이튿날에 운명하였다.
세조는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조의 정치는 그 실행면에서 하의상달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하여 사회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세조는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만은 정치적발전면에서는 즉 나라 전체의 발전에서 보는 문화대화정치에는 뒤떨어진다고 보는 바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크다고 보는 바이다.
왜냐 문화사업으로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의 편집발간 등을 하였다. 이것 외에 많은 업적이 있다.
▣ 세종대왕의 고심과 각자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항상 마음에 꺼림직 한 것은 이방원 즉 태종에게는 4형제와 4남매가 있었다.
그중에서 충령대군이며 즉 세종대왕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다.
양녕대군은 아버지인 이방원 즉 태종이 임금 자리를 세종에게 전할 뜻이 있음을 알고 거짓 미치광이가 되었다.
다재다능한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 1404년에 처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1418년에 세자에서 폐위되었다.
둘째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한때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생각으로 공부에 열중했으나 형인 양녕대군이 동생인 효령대군에게 말하기를
아서라 우리 셋째 아우 충령대군(忠寧大君: 세종대왕)이 공부도 잘 하려니와 사람됨이 성실하여 그가 이다음에 임금이 되어야 나라가 잘 될 것이다. 알아듣겠니 하고 말하였다. 이에 효령대군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세종대왕의 맏형과 둘째형은 세종대왕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 중 효령대군은 91세까지 살았다.
이러한 사연을 안 세종대왕은 큰형인 양녕대군에게 항상 미안하고 민망스럽고 거북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세종은 세자의 자리가 바뀜에 따라 생겼던 그 불쾌하고도 거북스런 경험을 다시는 후손에게 되풀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종은 세자(문종)가 즉위를 하면 황희(黃喜)는 나이가 많아서 그때는 한 줌의 흙으로 화해버릴 것이나 김종서, 황보인,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등이 보좌를 하면 혹시 훌륭한 왕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세종은 허약한 세자 즉 문종을 걱정하기를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도 자리를 잘못 잡으면 무능한 사람이 될 것이며 설혹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뽑아 배치한다 해도 윗사람의 힘과 독려가 있어야 될 일들이 많다.
이러한 것들이 세종을 번뇌하게 만들었다.
세종은 임종 시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과 아들 수양대군, 금성대군 외 왕자들과 여러 대신 등에게 세자(문종)와 세손(단종)을 잘 보살펴 주라고 당부하였다.
◉ 문종
세종대왕과 같이 학문을 좋아했으며 학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문종은 유학뿐 아니라 천문과 역수 및 산술에도 정통 하였고 예, 초, 해서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몸도 약하고 마음마저 약하였으며 따라서 결단성도 매우 결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즉 몸이 약하기 때문에 의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인자한 반면에 좀 쌀쌀하고 냉정하고 부드러우나 강한 것은 전혀 가지지 못하였다.
겉으로 보면 한량없이 부드럽기만 할 것 같으나 속으로는 고집과 집념이 강하였다.
◉ 단종
홍위(弘暐) 즉 단종은 두뇌가 명석했다.
그러나 아버지 문종과 똑같이 몸이 나약했다.
마치 그늘에서 자란 밀대처럼 가냘프고 여린 모습이 여자같이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세조
수양대군(首陽大君) 즉 세종대왕의 둘째인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왕재감이며 결단력이 있고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또한 너무 과격하고 억세어서 재상감이 아니고 대범하고 호탕하여 오히려 당당한 왕재(王材)감이었다.
만인의 위에 서서 천하를 지휘할 사람이지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괄괄하고 인정이 있을 때는 뜨거울 줄 알았고 도량 또한 끝없이 넓었다.
워낙 활달하여 작은 일에는 개의치 않았으며 무술과 병법에도 남달리 뛰어났다.
사람을 내리누르고 사로잡아 버리는 위압적이고 지배적인 데가 있었다.
같은 행동이나 말이건만 어째서인지 수양대군에게는 위사람으로서의 기품이 당당하였다.
▣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가 승하한 후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세조의 첫아들이 덕종이며 즉 의경세자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뒤에 병으로 횡사하였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이 8대 예종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여서 모후인 즉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으로 이뤄졌다.
이는 조선왕조의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정희왕후는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에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떠받쳐주어 그다지 흔들림이 없이 왕권을 유지하였다.
또한 이때 세조는 원상제도를 만들어 왕의 업무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는 즉 정승이 나라를 총괄하게 하여 나라를 운영하였으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세조의 첫아들은 덕종이며 즉 의경세자의 세자비는 한확(韓確)의 딸이며 덕종의 아들에게는 첫아들이 월산군(月山君)이며 둘째 아들이 자을산군(者乙山君)이다.
이 둘째인 자을산군의 부인이 바로 한명회의 둘째 딸이다.
즉 한명회의 첫딸은 예종의 비이다.
그러나 예종(한명회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으나 일찍이 사망했다)은 일찍이 요절하여 결국 예종의 뒤를 이은 조선의 9대임금은 바로 세조의 첫아들인 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다.
자을산군이 임금에 즉위하게 된 것은 세조가 살아있을 때에 자을산군의 인물이 뛰어나고 대담함을 보고 다음 대를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자기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자을산군의 장인이 바로 한명회이기도 하였다. 자을산군이 조선 9대 성종 임금으로 즉위할 때는 나이가 13세였으므로 또한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7년 동안 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역사상 8대 예종 즉 임금이 죽은 날 곧바로 다음 왕으로 앉힌 예는 처음이었다.
조선 9대 성종은 도학 정치와 동국통감(고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역사서) 등 많은 업적과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성종의 첫째 왕비인 한명회의 둘째 딸이며 12살에 성종의 비가 되어 7년이 지나는 동안에 자식을 놓지 못하고 더구나 성숙한 한 여자로서 한 번도 쾌락이나 만족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또 그러한 인생 맛에 푹 빠져 보지도 못하고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후궁에서 맞이한 윤씨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 이다.
그리고 폐비가 되자 성종은 세 번째 왕비도 후궁에서 맞이하였다.
그 왕비가 바로 조선 11대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이다.
역사는 흘러흘러 중종의 후궁에서 태어난 창빈안씨의 둘째 아들이 바로 조선 14대 선조임금이다.
조선의 역사는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 세종의 뒤를 이어 세조의 후손이 즉 세조의 첫아들이 덕종이나 즉 덕종의 아들 성종은 한명회의 딸에서는 비록 왕비로 책봉 되었으나 그의 소생은 태어나지를 아니하여 한명회의 두 딸들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으며
결국 역사는 세조의 첫아들이 덕종이며 이 덕종의 둘째아들이 바로 9대 성종이며 이 성종에게서 한명회의 딸이 아닌 폐비윤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나와 10대 연산군과 그리고 성종은 폐비윤씨의 뒤를 이어서 또 다른 후궁인 성종과 정현왕후와의 사이에서 그 아들이 그 뒤를 이어가게 되어 11대 중종 등의 왕이 조선을 이어갔다.
곧 세자책봉 제도를 꼭 맏이한테 물려주는 것보다는 능력이 있는 세자를 책봉하였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곧 역사를 유학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즉 사마천의 사기를 참고문헌으로 하였다면 또 우리나라의 위대한 삼성기나 단기고사나 단군세기인 단군조선의 47대 역사나 북부여의 역사 등을 참고문헌으로 하였다면 아마 나라를 임진전쟁(임진왜란)도 병자전쟁(병자호란)도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또 독도도 강탈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나라를 매국하는 더러운 짓은 않일어났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45번째 무료강의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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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성스러운 임금의 통업(統業)을 일으키려한다면 오직 장군과 재상을 잘 선택하는 데에 달려 있으리라. ♬
경자년(庚子年) 단기(檀紀) 4353년 서기(西紀) 2020년 12월 24일 목요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辭)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