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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중에서.. (131 편) 20220815
충국사 [ 어떤 책에는 염관으로 되었다] 에게 어떤 중이 묻되 " 어느 것이 근본 노사나불입니까?" 하니, 선사가 말호대 "나에게 정병을 다오" 하였다. 중이 정병을 가지고 가까이 오니 선사가 말호대 "본래의 자리에 두라" 하였다. 중이 다시 묻되 "어떤 것이 근본노사나불입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호대 "옛 부처님이 지나가신 지가 오래니라" 하였다.
[운문이 말호대 "아무런 흔적이 없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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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원문)
忠國師一本云鹽官因僧問 如何是本身*盧舍那 師云 與我*過*淨缾來 僧將淨甁到 師云 却安舊處着 僧復問 如何是本身盧舍那 師云 *古佛過去久矣雲門云無朕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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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뭣고]의 곁가지 김태현입니다.(방긋)
한 주일 잘 보내셨지요.. (방긋)
※ 이 글은 주로 수행을 처음 하시는 분들을 위주로 쓰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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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용은 참으로 혜충 국사가 재치 있게 본성 자리를 표현한 내용인데요.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이런저런 해석들로 복잡하게 설명되어 있었는데요.
오늘 내용은 그렇게 복잡한 뜻이 아니랍니다.
먼저 본문 내용에서 보면 노사나불이 나오는데요.
이분은 삼신불(三身佛) 중에 한 분이시지요.
우리는 그냥 많은 부처님(본성/성령/마음)들 중에 한 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정병(淨甁)이라는 물건도 나오는데요.
이 물건은 흔히 말하는 꽃병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스님들이 손을 씻을 때 물병으로 쓰이는 도구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 당나라 때의 정병은 그냥 물병 아니면 술병으로 쓰이던 물건이랍니다.
아무튼 오늘 내용은 혜충 국사가 은유법(隱喩法)으로 정병을 비유해 노사나불(불성 자리)을 표현한 내용이랍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병을 가져오라는 말은 노사나불(불성 자리)을 정병으로 비유해 가져오라 한 것이랍니다.
또 그 정병을 본래 있던 자리로 두라고 하는 뜻은 마찬가지로 정병을 노사나불(불성 자리)에 비유해 제자리에 가져다 두라는 뜻이고요.
본래 마음.. 바로 그 자리..로 말이지요.
이해가 가시나요?
그런데 이 중은 지금 혜충 국사의 이 이야기를 못 알아듣고 있답니다.
노사나불은 이미 오래전에 왔다가 본래 자리로 돌아갔는데도 말이지요.
이미 노사나불(불성 자리)은 왔다가 갔는데 또 노사나불은 어떤 것이냐고 물으니 당연히 "이미 지나가신지가 오래니라"라고 할 수 박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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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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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마음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합니다.
수시로 마음이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마음은 다 같은 마음인데 말이지요.
안 그런가요?
더 웃기는 것은 자기가 마음을 내놓고 지금처럼 자기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문 내용에서의 어떤 중처럼 말이지요.
더 웃기는 것은 자기가 마음을 내놓고 자기가 성질을 부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왜 성질을 부리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그냥 성질이 나는 데로 저팔계처럼 무조건 꿀꿀거리면서 그 성질 속에 파묻혀서 스스로 마음이 그물에 묶이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제 경우는 이법을 알기 전에는 많이 그랬답니다.
어렸을 때에는 더 심했고요.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들으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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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렇게 자기가 마음을 내고도 자기 마음을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수행이란 이 무의식을 의식으로 깨어서 생활하는 것이 수행이랍니다. (※)
오늘 본문 내용의 어떤 중처럼 형상이나 말에 끌려다니지 않고 현재 이 순간 의식이 깨어서 보는 것이 수행이랍니다.
지금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참나!"
혜가처럼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참나!"
경허선사처럼 지금 화두를 보고 있는 "참나!"
서산대사처럼 "꼬끼요~" 하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바로 "참나!"
를 의식이 깨어서 보십시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바보 주리반다가처럼 현재 내 마음을 빗자루로 쓸어내 보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조견(照見)이랍니다.
바보 주리반다가도 하는 일인데 왜 우리들이 못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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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에 대한 내용, 질문이 있는 경우 질문 내용
이 란은 우리들의 란인데요.
질문이나 세상살이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나누는 란이랍니다.
그리고 내용 끝에 (진실)이라는 표시는 제가 체험한 내용들과 마음에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동의] 표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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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알기 쉽게 잘 풀어서 설명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그건 '무상•고•무아'에 대해 고견을 청합니다.
(답장)
고맙기는 뭘요..
제가 오히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지요.🙏
네 알겠습니다.
기왕 답변을 드리는 김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보셨으면 해서 다음 선문염송 편에 자세히 답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관리 잘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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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오늘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고(苦)에 대한 질문 내용인데요.
이 내용은 보시는 분들이 어려워하는 내용들이라 그동안 잘 안 했던 내용인데요.
왜냐하면 특히 초보자분들은 너무 어려워해서 '수행은 어려운 것인가 보다' 하고 멀리 도망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질문을 주셨으니 성의껏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 가지 내용을 다 하자면 너무 광범위한 내용들이라 핵심만 설명해 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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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질문을 주신 분은 얼마 전에 종범 스님이 법문을 하는 고양시에 있는 여래사라는 절을 연결해 주신 분이기도 하답니다.
그래서 이분 덕분에 감사히 잘 만나고 왔답니다. ^^
갈 때 중국 친구들에게 월병(月餠)이라는 약과를 부탁해서 손에 들고 선물로 가지고 갔는데요.
월병은 영가 스님이 처음 육조 혜능 스님을 찾아뵐 때 가지고 간 선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제 마음 또한 영가 스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선물로 가지고 간 먹거리인데요.
한국 스님들은 자꾸 월병을 흰떡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월병은 떡 종류가 아니라 우리의 약과에 비슷한 것인데요, 약과보다 내용물이 충실한 잡곡들로 꽉 찬 다과 종류랍니다.
하나만 먹어도 요기(療飢)가 되지요.
중국 자료를 찾아보면 당나라 때부터 어른들을 찾아뵐 땐 꼭 선물로 들고 간 간식거리라고 적혀있는데요.
지금도 중국에서는 명절 때가 되면 어른들에게 선물하는 풍습으로 비교적 비싼 그런 먹거리랍니다.
옛날에는 단 음식들이 귀했잖아요.
특히 노인들은 단 음식을 좋아하고요.
거기다가 요기까지 되니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하게 취급받던 먹거리랍니다.
종범 스님에게 월병에 대한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드렸더니 활짝 웃으시면서 그런 뜻이 있었느냐? 하시며 매우 좋아하셨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종범 스님을 한국 불교에서 성문승(聲聞乘)으로는 최고로 보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분이 법문하시는 경전 내용들은 아주 정확하게 잘 풀어서 해설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앞으로 한국 불교의 앞날인데요.
스님의 법문 시간이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더라고요.
'수행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이거지요.
불교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종범 스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배워서 따라 해 보는 것일 건데요.
이런 점이 많이 아쉬웠답니다.
불교(佛敎)란 뜻은 불성(佛)을 깨닫고 증득하는 교육(敎)이란 뜻인데요.
절을 아무리 현대식으로 크게 지으면 뭐 하겠습니까?
안에 든 내용물들이 부실하면 속빈 강정인 것을요.
아무튼 가르치는 선생은 훈륭한 선생님을 모셔 놨는데 배우는 학생들이 의욕이 없어 보여서 많이 안타까웠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만이라도 열심히 따라 하셔서 꼭 성불을 이루시길 기원드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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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질문 내용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그리고 고(苦)에 대한 질문 내용인데요.
이번 질문은 선문(禪問)에 해당하는 질문이기도 하답니다.
왜냐하면 오늘 질문 내용들은 깨닫고 증득을 하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야기를 잘 안 하는 내용이기도 한데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동영상을 통해 오늘 내용에 대한 설명들을 들어보면 "내 몸이 어떻다?" "이렇다" "저렇다" "있네" "없네" "이것이 무아네" "저것이 무아네" 하면서 어떤 대상을 내세워 머리로 분별(分別) 하는 설명들이 많았는데요.
미안하지만 다들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세 가지 내용들은 어떤 대상이 없거든요.
오산에 계시는 딱 한 스님만 빼고는 거의가 제대로 알고 설명을 하시는 분들은 드물었는데요.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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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는 모두 최소한 본성을 깨닫고 증득을 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그런 내용이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성 자체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본성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 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본성을 못 보고 모르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는 거랍니다.
그리고 (고)는 직접 증득을 하고 증득하기 이전과 비교를 해보지 않으면 왜 (고)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그런 내용이랍니다.
먼저 아셔야 할 점은 부처님 법은 모두가 마음 법이라는 점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어떤 현상이나 물체를 가지고 "있다" "없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모두가 머리로 하는 분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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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고(苦)부터 설명을 하고 나머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고)는 중생들의 처해진(處) 삶을 표현한 내용이랍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 현재 너의 처해진(處) (고)를 크게 돌이켜 보라는 경전이 대념처경(大念處經)이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성을 증득하고 불성의 마음을 누려보지 못한 분들은 알 수가 없는 그런 내용이랍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비교 대상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 등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가 없고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저도 적잖이 많은 돈을 벌어보기도 하고 쾌락을 누려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힘들었답니다.
왜냐하면 돈이 있으면 있는 것만큼 마(魔)가 끼어들거든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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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말이나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라 저 또한 부처님처럼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 직접 생활 체험을 해봐야 북한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자유가 없었고, 불편했는지 알 수가 있듯이..
이것도 마찬가지랍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성의 맛을 못 본 분들은 불성의 안락함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있는 자리가 왜 고통스러운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음이 늘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번잡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답니다.
여러분들의 본래 마음(불성)은 한없이 평온하고, 안락하고, 고요하고 풍요로운 자리랍니다.
그래서 깨닫고 증득한 사람 입장에서는 중생들의 삶을 (고)로 보고 있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본인도 깨닫고 증득하기 전에는 (고)를 경험해 봤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직접 증득을 하고 직접 불성 자리를 느껴봐야 지난 중생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괴로웠고 자유가 없었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도달했다'라고 표현한 것이 도피안(到彼岸)이고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언덕' 이란 불성 자리를 뜻하는 거랍니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골고다의 언덕" 또는 "요단강을 건너서.."라고 표현하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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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고(苦)의 반대말을 락(㦡)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락)은 일반적인 그런 (락)이 아니라 안락(安樂)에 가까운 그런 (락)을 말한답니다.
안락(安樂)의 사전적 의미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바로 이런 (락)을 말하는 거랍니다.
그 자리는 정말로 한없이 편안하고, 평안하고, 고요하고, 여유롭고 은은한 그런 자리랍니다.
마치 마음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즐거운 마음들이 괜히 피어오르는가 하면, 아주 맑은 하늘처럼 마음이 밝고, 풍요롭고, 고요하고 평화롭답니다. (진실)
이런 상태로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평생을 지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지난 중생의 삶은 고(苦)라고 박에 느낄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고통 속으로는 돌아가기 싫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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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무아(無我)에 대한 설명입니다.
(무아)는 깨달음에 관한 내용이랍니다.
왜냐하면 본성 입장에서 보면 실제로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육체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지요.
왜냐하면 육체 자체가 나일 테니까요.
그러나 뒤에 무상(無常)에서 설명드리겠지만 이 육체 또한 영원하지 않고 인연 따라 계속 변화한답니다.
이름도 물론 그냥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고 나가 아니랍니다.
그럼 본성이 나일까요?
본성도 나라고 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나가 있으려면 너도 있어야 하는데 본성은 오로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깨닫고 보면 오직 그 한자리 박에 없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본성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육체 입장으로 봤을 때 억지로 이름 붙여 참나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주 전체가 본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요.
깨닫고 보면 본성은 육체뿐 아니라 전 우주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 붙여서 부처다. 불성이다. 참나다. 하는 것뿐이랍니다.
본성(불성/성령/마음)은 그저 유유히 존재하는 것일 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답니다.
그래서 공(空)이라 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육체 입장에서 보면 그 주체가 본성이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 붙여서 참나라고 표현하는 거랍니다.
(나)라는 명제는 오로지 육체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지요.
왜냐하면 육체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것은 각각의 객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뿐이랍니다.
그러나 본성은 여러 개의 객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통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라 나라고 할 수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나가 있으려면 남도 있어야 하는데 본성은 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고,
고조선에서는 하늘님이라고 했던 거랍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 눈으로는 하늘은 오직 하나 박에 없어 보였거든요.
그러나 후대 사람들의 종교들 모두는 전혀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종교로서만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이랍니다.
불교 쪽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 입장에서 웃기는 현상은 중생들이 섬기는 행위는 고조선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대상들을 만들어 놓고 빌기만 하거든요..
제가 왜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느냐 하면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러한 행위들을 주관했던 사람이 저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그러한 과보로 저 혼자만 여기서 이렇게 고생(苦) 하고 있는 것이고요. (진실)
그래서 특히 깨닫고 증득을 한 사람들은 무당과 같은 행위들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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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이렇게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하늘에 여러 개의 풍선들이 떠 있습니다.
풍선들은 모양도 색깔도 모두 다릅니다.
이 풍선들을 인간을 포함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라고 가정해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풍선이 터지면 생명체도 죽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풍선 안에 들어있는 공기를 본성(불성/성령/마음)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풍선들은 사람처럼 의식도 있고, 생각도 할 수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할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풍선 안에 있는 공기와 풍선 밖의 공기는 같을까요? 다를까요?
그리고 A라는 풍선 속의 공기와 B라는 풍선 속의 공기는 같은 걸까요? 다른 걸까요?
다르다고요?
좋습니다.
그럼 풍선 하나가 터졌습니다.
터진 풍선 속 공기와 밖에 공기는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 않답니다. (不二)
우리들 몸과 본성도 마찬가지랍니다.
터져서 죽고 나면 본성은 본래 있던 자리로 그냥 돌아가는 거랍니다. (진실)
여기에 나가 어디 있고 네가 어디 있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하나인데요.
풍선과 같이 우리들 몸도 살아 있을 때나 나와 네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죽으면 누구나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본래 나와 너는 없는 거랍니다.
그래서 무아(無我)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제가 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제 경우는 전혀 불교 쪽으로 인연이 없었던 경우라 혼자 공부를 하면서 모르는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사전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해석을 하다 보니까 틀리게 해석한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요.
(무아)라는 단어도 사전에는 잘못 해석되어 있었답니다.
무아(無我)란 [자기의 존재를 잊음]이 아니랍니다. 본래 존재 자체가 없는 거랍니다.
그러니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다]라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랍니다.
이것은 무아지경에 도달하는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거랍니다.
왜냐하면 무아는 그냥 깨닫고 나라는 존재는 본래 없는 거였구나 하고 보고 알면 되는 거랍니다.
출처 : 네이버 사전 무아(無我)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b2f1aa9136740879d904f69d1d22f69
이 외에도 잘못 해석된 단어들이 많았는데요.
혹시 불교 쪽에 깊은 인연이 있으신 분들은 네이버에 연락해서 수정을 해주면 좋을 것도 같은데요.
왜냐하면 요새는 네이버가 국민적 대표 사전이 되어있어서 그렇답니다.
제가 큰 스님들을 통해 건의드릴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큰스님들은 얼굴은 뭐가 될까? 싶어서 그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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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터진 풍선 속의 공기는 새로운 다른 풍선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냥 그대로 허공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요.
모든 만물이 이렇게 윤회가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나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느 것이 나이지요?
풍선이 나일까요? 풍선 안에 있는 공기가 나일까요?
아니면 터진 풍선이 나일까요? 아님 풍선이 터져서 본래 있던 공기 속으로 흩어진 공기가 나일까요?
아님 풍선 하나에 김태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면 그 이름이 나일까요?
도대체 어느 것이 나이지요?
공기 입장에서 보면 온통 허공뿐인데요.
풍선 입장에서 보면 나와 네가 있지만 풍선 속의 공기 입장에서 보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그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거랍니다.
그리고 공기로 비유한 공(空)의 자리인 불성 자리를 확실히 보고 아는 것을 깨달음(見性)이라고 한다면 이 불성 자리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성불(成佛)이라 한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우리들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구걸을 하듯이 밖으로만 떠돌면서 구걸하고 있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의 핵심이랍니다.
이렇게 내 안에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유는 생각으로 만드어낸 수많은 상(想)들 때문인 것이고요.
이러한 상(想)들이 내 마음과 머릿속에 가득하다 보니 그 상들에게 속아서 저팔계처럼 속아서 따라다니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고 윤회랍니다.
이렇게 실제 주인인 본성(불성/성령/마음)을 못 보고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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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상(無常)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무상(無常)은 고(苦)와 함께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緣起法)과 바로 연결이 되는 가르침인데요.
(고)도 그렇고 (무상)도 그렇고 무명(無明)으로 인해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법(因果法)에 속한답니다.
왜냐하면 계속 변화하면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입니다.
무상(無常)이란 결론부터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삼천대천(三千大千)의 모든 일체만물(一切萬物)들이 무상(無常) 하다"라는 뜻인데요.
이 말의 뜻은 '본성(불성 성령 마음) 외에는 모든 것들이 변한다'라는 뜻이랍니다.
여기서 주의 아셔야 할 점은 무상(無常)은 상(常)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법(比喩法)이라는 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를 강조하기 위해 비유로 [일체 만물은 변한다]로 대비(對比) 해서 비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본성 외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뜻입니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가 중요한 포인트이지 [일체 만물이 변한다]가 포인트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법은 모두가 본성(불성/성령/마음)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라 그렇습니다.
그 외에 내용들은 모두가 [본성]을 수식(修飾) 해 주는 내용들이라 그렇습니다.
좀 더 깊이 설명해 보면..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무상(無常)을 통해 상(常)을 알아차려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대상으로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네 안에 있는 변하지 않은 것을 비교해서 크고 넓게 생각해 보고 찾아보라는 것이 대념처경(大念處經) 할 때에 대념(處經)이랍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기서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상을 생각해 보라 하셨던 것이고요.
자장율사가 수행했던 고골관(枯骨觀) 역시 시체 대신 사람 뼈를 앞에 놓고 무상을 관(觀) 했던 것이랍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랍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중국에서 한참 석탄 장사가 잘 풀리고 있을 때 동업자로 같이한 핵심 일행이 한국으로 마약 중개를 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그 시체를 직접 제 손으로 거두면서 느꼈던 (무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도 없었고요.
정말로 피눈물 그 자체였답니다.
그러고는 그렇게도 강했던 제 마음도 꺾기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고요.
이렇게 내 마음이 꺾여야 버리기가 쉬워진답니다.
인위적으로 내 마음을 꺾는 것이 수행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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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인생은 무상하답니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하는 거랍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죽을 때쯤에나 깨닫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생이니까요.
그래서 그동안 지은 것들이 마음에 걸려서 천도재다 뭐다 해서 부산을 떠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효험이 있을까요?
부처님이 다시 살아돌와도 못하는 일인데요.
여러분들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대념처경] 내용이나 [법화경] 내용이나 이 외에 모든 부처님 가르침들은 무상(無常)을 통해 상(常)을 깨닫고자 함이랍니다.
예를 들면
[대념처경]에서 "죽은 시체를 보라" "썩어가는 시체를 보라" "뼈만 남은 시체를 보라"라는 내용들은 모두가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우리들의 몸도 곧 저렇게 변할 것이다" 하는 내용을 통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성)을 알아차려 보라는 대비(對比)의 뜻이 담겨있답니다.
시체와 비교(比較) 하고 비유(比喩) 하고 대조(對照)를 해 보라는 뜻입니다.
마치 흑(黑)과 백(白)을 동시에 놓고 보면 금방 눈에 띄듯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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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체를 앞에 놓고 살아있는 나를 보면서 '나도 곧 저렇게 변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 몸도 곧 저 시체와 같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이 몸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현재 이 순간 알아차리고 있는지?] 크게 생각해 보라는 것이 바로 대념(大念)의 뜻이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성제]와 [집성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요.
"너도 곧 저 시체와 같이 저렇게 처(處) 하게 될 것이다."
또는 혜가처럼 네가 지금 처(處) 해진 마음을 확인해 보아라 하는..
그래서 대념처경(大念處經)이랍니다.
더 쉽게 말하면 "네가 지금 처(處) 해진 자신을 크게(大) 념(念)을 해 보라는 것이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참뜻이라는 겁니다.
즉 (무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있다 없다"라는 말에 얽매이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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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온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요.
우리 몸도 지금 변해가고 있고,
사람 마음도 자주 변합니다.
지구도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요,
태양계도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은하계도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요.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은 태산(泰山)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고,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랑도 곧 변질되고 말지요.
맞습니다. 우주 안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을 대비(對比) 하던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있다. 없다." 같은 그깟 생명이나 우주의 원리를 알려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냥 우주 만물은 "산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이랍니다."
그것이 뭐 어떻게요?
왜 그런 "있다 없다" 같은 곳에 대념(大念)을 합니까?
부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의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없이 변하니 네 안으로 조견(照見)을 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한번 찾아보고 느껴보라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참고)
좀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아직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메일이나 문자로 질문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
무상(無常)에 대해 수행적 관점으로 보충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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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평시에도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 집착하고 있고 홀려있답니다.
부처님의 수제자 사리불처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고 있는 거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자신과 같이 할 것이라는 대상들이 너무 많거든요.
곰곰이 자신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그런지? 안 그런지? 요.
주의를 살펴보면 영원할 것 같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너무 많지요?
너무 많아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일 겁니다.
대강만 살펴보아도
돈, 명예, 권력 은 물론이고 사랑, 정, 애정, 물건, 등등
수시로 그 대상이 변하는 경우도 많고, 내 마음도 수시로 변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가끔 이런 마음 상담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엊그제도 똑같은 상담이 있었는데요.
겉으로 보아도 마음이 아주 힘들어 보였답니다.
주요 내용은
자기는 배신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하던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도 당했고 친구에게 상당한 금액을 사기당해서 지금은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이고,
그래서 지금은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고 가족들과도 따로 나와서 살고 있다 하는 그런 내용이었는데요.
그래서 제가 이분에게 이렇게 대답했고 또 이렇게 물었답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본인은 마음이 자주 안 바뀌나요?"
자신도 잘 바뀐다는 거예요.
그래서 또 이렇게 물어보았지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혹시 있나요? 있으면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생각해 보더니 그런 것 같다는 거예요?
사람 마음이든 뭐든 그 어떤 것이든 늘 변하는 것이 진리랍니다.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착각이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되물었답니다.
"보살님은 참으로 욕심도 많고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이네요."라고 대답해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해주었답니다.
"그렇잖아요? 자신의 마음은 잘 바뀌면서 남들 마음은 바꿔서는 안된다?"
"사기도 그래요. 친구를 믿었겠지요? 믿었으니까 투자를 했을 거고요. 그런데 본인도 큰돈을 벌려고 했잖아요? 그래도 친구는 그 일을 성사시켜 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을 것이고 준비는 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본인은 돈만 달랑 투자하고 그 일을 위해 뭘 하셨지요? 이거 엄청난 욕심 아닌가요? 보살님은 그저 돈만 투자를 해놓고 앉아서 큰돈을 벌려고 했잖아요? 그 욕심이 보살님 눈을 멀게 한 거랍니다."
"사업은 전쟁과 같은 거랍니다. 돈 놓고 돈 먹기이지요. 저도 사채업을 20년 넘게 해보았지만 다들 욕심들 때문에 집 잡히고 사채 돈 쓰는 거랍니다. 사채업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도 드물 건데요. 그 속에는 보살님 같은 분들이 수두룩하답니다."
"사랑도 그래요. 그래 나이 사십이 넘도록 아직도 사랑 타령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사랑이 얼마나 지속된다고요? 오죽하면 노래 가사에 '사랑은 나비인가 봐.'라는 가사까지 있겠어요."
그리고 뒤이어 부처님 말씀으로 마무리를 해드렸는데요. 이런 내용이었답니다.
※
"깨닫기 전이라 해도 세상을 무상(無常)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지혜(知慧)가 있답니다." (진실)
"세상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살아가 보십시오."
"지금처럼 머리로만 살아가다가는 또 그런 경우를 당하기 일쑤랍니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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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여기서 수행의 관점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깨달았던 그렇지 않던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아주 요긴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데요.
첫 번째 방법은 깨닫기 전이라 해도 나를 알아차려보십시오.
나만 알아차려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답니다.
왜냐하면 현재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크게 실수하는 것이 대부분이거든요.
두 번째 방법은 현재 이 순간 의식이 깨어서 생활해 보십시오.
그러면 처음에는 잘 적응이 안 되지만 하다 보면 지혜(知慧)라는 참으로 유익하고 신기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은 오늘 말한 무상(無常)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집착하는 마음이 덜 일어나기 때문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서 실수를 덜하게 된답니다.
그렇지 않고 상담자처럼 욕심내고, 집착하고, 애착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팔계처럼 내 스스로 그물 속에 얽매이고 만답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든, 못 깨달은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유익한 방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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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정리를 하겠습니다.
실제로 깨닫고 증득해 보면 (나)라는 것은 아예 없답니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하지요. (진실)
쉽게 말해 실제로 깨닫고 보면 나라는 실체는 없거든요.
이 말의 뜻은 '내 몸이 있다. 없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에게는 (나)가 없으니 (상)도 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일반 사람들과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觀點)이 완전히 다른 거랍니다.
그리고 (고)는 증득을 하게 되면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랍니다.
그 이전에는 왜 고(苦)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고)라는 것을 알려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를 수 박에 없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증득을 하게 되면 이전 마음과 증득한 후의 마음을 비교해 볼 수 있지만 증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깨닫고 증득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기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
그러나 증득을 하고 나면 바로 '그동안 내가 고통 속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하는데요.
'피안(彼岸)에 도착(到) 했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문원이랍니다.
다른 말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갔다'라는 뜻입니다.
(고)에 대한 내용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도착한 사람들은 그 이전 언덕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었는지를 바로 알 수가 있답니다.
마치 흙과 백을 구분하듯이 말이지요. (진실)
그러나 그 이전 언덕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이 다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를 않는답니다.
그곳이 전부인 줄 알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 집착하고 있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거랍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임시로 만들어 놓은 가짜 성(城)인데도 말이지요. (법화경 내용)
그래서 중생들은 죽기 싫어합니다.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요, 그 이상의 마음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 같은 것에는 별 관심도 없고요.
불교에서는 이런 상태를 무명(無明)이라 표현하고 있답니다.
이러한 무명이 모든 (고)를 탄생 시키고 있고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면 좋은데 욕심과 집착 때문에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모습들을 깨닫고 "(고)다" "어리석다" 표현하신 거고요.
그래서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없이 중생들이 안되어 보이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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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흔히 나의 몸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시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답니다.
한번 여러분들도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내 몸 중에 어느 것이 나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사고로 내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가도 그 팔 다리가 나겠습니까?
우리 몸도 마찬가지랍니다.
죽으면 터진 풍선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런 거랍니다.
우리 몸은 물론이고 삼천대천 모든 만물들이 그냥 인연 따라 합해졌다 흩어지고, 또 합해졌다 흩어지는 연속인 것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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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용과 연관이 깊이 공(空)에 관한 부처님의 동영상 내용인데요.
잘 들어보시고 따라 해 보겠습니다.
제목: 불멸의 길_존재의 실체 없음 [쌍윳다 니까야]
(아래의 사이트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y_h_uQmVl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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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보자 내용
이 글은 수행을 처음 하시는 분들을 위한 내용이랍니다. ♡
오늘도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내용 중 고성제(苦聖諦)를 끝내고 집성제(集聖諦)의 수행 방법인데요.
사성제의 전체 내용을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고(苦)·집(集)·멸(滅)·도(道)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네 가지의 수행 방법은 해탈로 가는 수행 순서를 말하는 내용이랍니다.
고(苦)와 집(集)은 깨어서 알아차리는 방법을 기록해 둔 것이라 말씀드렸고,
멸(滅)은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방법을 기록해 둔 것이라 보시면 된답니다.
도(道)는 깨닫고 난 후의 후 공부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이것은 깨닫고 증득을 하기 전의 분들은 신경을 안 쓰셔도 답니다.
왜냐하면 도성제(道聖諦)는 마음의 힘(道力)이 없으면 행하기 어러운 것들이라 그렇습니다.
이 마음의 힘을 도력(道力)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혹자들은 도성제를 거쳐야 깨닫고 증득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많은데요.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모르고 하는 소리랍니다.
마음에 힘이 없는데 어떻게 [팔정도]나 [바라밀]등을 행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들을 걸림이 없이 행하기 위해서 깨닫고 증득을 하려는 것인데요.
사성제를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1)
고통과 괴로움(즐거움도 포함) 등을 깨어서 알아차려보아라, (苦)
(2)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모이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그 원인을 알아차려보아라, (集)
(3)
마음에 것들은 욕망의 완전한 소멸이며, 버림이고, 포기이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초연함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을 마음에서 들고 있지 말고 내려놓고, 버리라는 뜻입니다. (滅)
(4)
도(道)는 깨닫고 증득을 했으면 [팔정도]나 [바라밀] 등을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해 나가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道)
초보자분들은 지금은 이러한 것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마시고 열심히 나와 내 마음과 현재 이 순간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일에만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화선으로 하시는 분들은 화두를 열심히 깨어서 알아차려보시고요.. <고(苦) 와 집(集)>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수행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답니다.
그럼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보겠습니다.^^♡
(※)
들으실 때 각자가 본인들 마음과 연관시켜서 들어보시지요.
그러면 한결 이해하시기 좋고 어쩌면 중간에 깨달으시는 분들도 나올 수 있답니다. (진실)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I9V6YYR96JCtEaMZJYfcrU6eEYW3u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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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을 깨어서 알아차리란 뜻이랍니다..)
대념처경. 16 법념처 E 4성제 3 멸성제
2.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멸성제
멸성제는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랍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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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서 시각 대상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소리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향기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맛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몸의 접촉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마음의 대상에 대한 욕망이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이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될 것이다.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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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오늘 내용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접촉으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 등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없애라(버리라) 보라는 내용인데요.
초보자분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알아차리기는 할 수 있겠는데 마음을 비우고 버리기는 잘 안된다는 내용들이 많았는데요.
괜찮습니다.
부처님도 처음부터 잘 됐던 건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계속 나 자신을 알아차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엷어져서 나중에는 버리기 싫어도 버리게 된답니다.
왜냐하면 들고 있으면 들고 있을수록 자신만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거든요.
그러나 자신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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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행자 내용
이 글은 연꽃이 활짝 피신 네 분을 위해 신설된 유마경(維摩經) 내용이랍니다. ♡
[유마경]은 [법화경]과 아울러 보살들을 가르치는 경전이랍니다.
이 말의 뜻은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은 유마경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비교를 해 보면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해 나가 보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아래의 사이트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vtL4VwXhp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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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8~
대덕이시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여래의 신통력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허깨비 같은 것이 이러한 말을 했다면 그대는 과연 지금처럼 곤혹스러워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대덕 수보리시여,
무엇이든 저 허깨비와 같은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말이라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꿰뚫어 보는 이는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않음은 물론 그에 대해 조금도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문자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해탈은 문자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체의 법은 문자를 초월한 해탈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설법이 끝나자 2백 명이나 되는 천자(天子)들이 그 자리에서 티끌을 여의고 청정무구한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5백 명의 천자들은 진리를 기꺼이 따른다고 하는 앎을 얻었습니다.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저는 인사조차 제대로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하기에 저는 저 고매하신 분의 문병을 엄두조차 낼 수가 없습니다.”
~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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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무엇이든 저 허깨비와 같은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말이라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꿰뚫어 보는 이는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않음은 물론 그에 대해 조금도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문자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해탈은 문자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체의 법은 문자를 초월한 해탈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무아)와 (무상)과 (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네요.
이렇게 부처님 말씀은 모두가 단어만 다르게 표현할 뿐이지 [무아] [무상] [고]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 안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꾸며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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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문답(禪問答)
중국 글은 뜻글자랍니다.
선문답에서는 마음을 뜻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키포인트랍니다.
모든 선문답은 그동안 공부한 내용들을 알아보는 것이랍니다.
깨닫고 증득한 것과는 크게 상관은 없답니다.
왜냐하면 우주보다 크고 넓은 이 불성(마음)의 세계를 몇 글자의 글과 말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깨닫고 증득한 기준점은 글이나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의 마음에서 오는 언행(言行)이 그 기준점이랍니다.
아무리 선문답을 잘 풀고 경전에 막힘이 없다 하더라도 불성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선문답 같은 곳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문답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비교를 해보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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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선문(禪問)입니다.
[건달바가 거문고를 타다가 줄이 끊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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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답)
여러분들도 선답을 찾아보셨나요?
저는 이렇게 선답을 하겠습니다.
[먼저 끊어진 거문고 줄을 다시 잘 매어서 다른 줄과 함께 다시 잘 조율을 하고 거문고를 다시 탈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거문고 줄처럼 너무 팽팽히 당겨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조여서도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다음 주 선문(禪問)입니다.
[자자(自恣) 하는 날에 문수가 세 곳에서 여름을 지냈기 때문에 가섭이 대중에게 공개하고 내쫓으려고 종 망치를 들렸는데 백천만억 문수가 보였다. 가섭이 그의 신통력을 다 하여도 끝내 들지 못하니 세존께서 그에게 물으시되 "네가 어느 문수를 내쫓으려 하느냐?" 하시니 가섭이 대답하지 못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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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내용에서도 마음을 뜻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잘 알아차려 보시고 여러분들은 뭐라고 [선답]을 주실지 답변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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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음 주 선문염송
[선문염송] 중에서.. (132 편) 20220905
충국사에게 숙종 황제가 묻되 "어떤 것이 십신조어입니까?" 하니, 조사가 대답호대 단월이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를 밟고 다니 십니다." 하였다. 황제가 다시 묻되 "과인은 잘 모르겠소." 하니, 국사가 말호대 "자기의 청정법신을 잘못 알지 마십시오. 하였다.
(주)
1. 십신조어 :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니 부처님에게 열 가지 별명이 있어 존친 함.
1. 단월 : 시주라 번역하니, 여기서는 황제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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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이 가능하신 분들은 답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혹시 개인별로 답을 주시거나 질문이 있으시면 메일로 주셔도 됩니다.
e-mail : 119e@daum.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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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법문 동영상
제목: 종범스님 법문-무아와 해탈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ObSt6ScYH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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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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