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잎을 키웠다 (외 1편)
유지인
“모나리자의 눈썹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이다”
청맹靑盲과니를 위해 안개가 출사표를 던졌다 주파수가 없는 안개 속에선 감각의 촉수를 긴 안테나처럼 뽑고 경계선이 모호한 천을 박음질하는 재봉틀 바늘마냥 무작정 달려 나가야 한다 말의 애드리브나 즉흥 연주의 베리에이션처럼 시를 쓰다 불쑥 튀어나오는 의미도 기억도 생소한 단어를 만날 때 있다 노파심에 사전을 뒤적이면 쓰던 시에 영락없는 퍼즐의 한 조각이다 신명이 오른 문장이 문장을 불러오는 순간이다 안개 속에서 무수히 타종되었던 바람의 문장은 궂은날 눈만 홀리다 금세 사라지는 여우별이거나 의식의 창을 가린 검은 조각의 매지구름이거나 깨어나 메모장 찾다 다시 든 그루잠 속에서 번개처럼 잡아챈 시의 나비 날개다 안개 장마당에서도 시의 눈속임을 하는 야바위꾼을 만날 수 있다 절벽은 어디에나 있다 그럴 땐 감각의 집어등을 밝히고 허밍, 몰입으로 숨죽인 뱃고동 소리가 더 멀리 간다 아사시한 안개 스토리가 이어지는 곳에서 안개를 먹고 자라난 사물 아이의 눈은 웅숭그레 깊어져 있다
맛별 돋는 밤
소문난 입맛 찾아 몰려드는 발길들이 어둠 속에서 코가 낚였다 훅, 끼쳐오는 비릿함이라니! 밥솥에 묵은쌀 곰곰 뜸들이다 곰소라는 말 곰삭았다는 말의 언저리 같아서 그윽해지는데 안개 속을 휘저어가다 잘 발효된 바다 한 장 건져내는 늦가을이었음 좋을 성싶은데 앞서던 생각이 큼큼한 비린내에 미끄러진다 파도가 물방울 숭숭 띄워 황석어 등허리에 새긴 민달무늬가 입맛 낚는 어르신들 혀 위에서 별이 된다는 걸 아직 모르는 소금 뿌려진 항아리 속 망둥어 같은데 바다를 떠나온 숨을 거두어 저리 항아리마다 그득히 가두어 두면 가는 뼈마디까지 고인 고집스러움 다 내려놓는 거라지 그때 켜켜이 쌓인 침묵의 빛깔 살살 들어내고 나면 환하게 들어앉는 맛별들 한 상 가득 올려 배불리 먹이고 등 떠민다는 곰소항, 커다란 항아리 속 소금 누대 위에 부식되지 않는 별이 무진장 뜬다
―시집 『안개가 잎을 키웠다』 2023.12 ------------------------ 유지인 / 1964년 전북 정읍 출생. 2011년 계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안개가 잎을 키웠다』. 현재 문학치유 강사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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