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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상일동 삼성엔지니어링 사옥. 같은 사무실 공간 안에서도 사원 자리에 따라 조명등 밝기가 다르다. 자연광 정도에 따라 조명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엔 자연 채광이 비칠 경우 최대 밝기의 30%까지만 조도(照度)를 올리고 그보다 먼 자리엔 50%, 창에서 제일 떨어진 어두운 자리는 70%까지 조명이 들어 오도록 밝기 설정이 돼 있다.
이런 제어 시스템은 프랑스의 세계 최대 에너지 관리 기업 슈나이더 일렉트릭(이하 슈나이더)이 공급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슈나이더 본사 건물 역시 독특한 에너지 관리 소프트웨어가 적용된다. 건물 천장과 벽에 설치된 위치 감지 센서가 직원들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조명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한 시간 동안 건물 내부에 사원들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으면 사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 조도를 50% 낮추고, 다시 한 시간 뒤에도 인기척이 없으면 조도를 다시 절반으로 줄이는 방식이다. 경비원이 모니터로 빌딩 내의 여러 사무실 상황을 점검하고, 사람이 없을 경우 직접 올라가서 소등하는 기존 방식과는 큰 차이다.
이렇듯 자동으로 전력을 관리하는 슈나이더의 기술은 연면적 43만㎡에 달하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와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도 적용됐다. 슈나이더는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소프트웨어 기반 솔루션 업체'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235억유로(약 33조원) 매출을 올려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372위에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26위 기업이다.
그런데 슈나이더는 원래 소프트웨어 업체가 아니었다. 1836년 탄생한 이 회사는 원래는 철강을 만들던 전형적인 굴뚝 기업이었다. 그런 회사가 지금 모습으로 변신한 과정은 극적이면서 제조업이 나아갈 미래에 대해 시사점을 제공한다. 위클리비즈는 슈나이더 장 파스칼 트리쿠아 회장(CEO)을 홍콩에서 만났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JPT(슈나이더에서는 회장 이름을 이렇게 약자로 부른다)는 365일 중 300일은 해외 출장이라 아시아에 머무를 때 날짜를 잡아보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게 홍콩이었다.
트리쿠아 회장에게 컬럼비아대 리타 맥그래스 교수가 언급한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각 산업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시대에선 기업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얘기하면서 슈나이더처럼 사업 전환을 꿈꾸는 기업이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우리 회사 규모는 3배 성장했다. 전기 하드웨어 업체에서 에너지 관리 솔루션 제공 업체로 이동했다. 이는 우리의 신속함(agility)이 증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꿈꾸는 기업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게 전부다. 기업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은 기업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외부, 즉 고객에게서 나온다"고 답했다.
아돌프와 유진 슈나이더 형제가 광산과 용광로, 주조 공장을 사들여 설립한 슈나이더는 19세기 후반부터 변압기·발전기 같은 전기 설비 제조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차 대전 후 국가 인프라 재건 사업이 진행되면서 슈나이더는 호황을 누렸다.
첫 번째 변화는 1980년대 찾아왔다. 1960년 슈나이더 가문 마지막 경영자인 찰스 슈나이더가 갑자기 사망한 뒤 경영권 승계 문제에 부딪혔다. 당시 슈나이더 가문은 최대 주주 지위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2차 대전 후 핵심인 철강·제철 산업이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자 벨기에 등 해외 자본에 수익성 약한 사업 부문을 팔았고, 이 과정에서 보유 지분을 대량 처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슈나이더 가문 지분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슈나이더는 1986년 전문 경영인으로 디디에 피노 발렌시엔(Valencienne)을 영입하면서 오너 경영 시대를 완전히 마감했다.
발렌시엔은 취임 후 미래의 먹을거리인 전기 설비로 눈을 돌렸고, 그룹의 심장이던 철강과 선박 사업을 매각하고 프랑스와 미국 전력 설비 제조 회사를 인수해 대대적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제철·선박·중공업·군수 등 문어발식 거대 복합 기업(conglomerate)에서 핵심 사업 하나에 주력하는 기업으로 체질을 변화시킨 것이다.
두 번째 변화는 1990년대 후반. 전기 시스템 제조업체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슈나이더는 당시만 해도 생소한 에너지 제어 관리 분야에 눈을 돌렸다. 고객사에 퓨전, 소켓, 스위치 같은 전기 생산 설비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관리·제어 소프트웨어까지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쓴 슈나이더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기업들이 생산비 절감을 위해 에너지 효율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최근 일본 원전 사태나 한국 블랙아웃 위기에서 볼 수 있듯 에너지 관리 필요성이 점점 커지는 추세다. 스마트 홈, 스마트 빌딩이나 스마트 도시처럼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 건물과 인프라가 각광받고 있다.
일찌감치 미래로 눈을 돌렸던 슈나이더는 50년 전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한국에선 삼성엔지니어링·현대중공업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고, LS산전과 경쟁 관계다.
'제품'이 아닌 '해결책'을 팔다
장 파스칼 트리쿠아 회장에게 슈나이더의 두 번째 변화, 즉 전기 설비 생산에서 에너지 관리로 사업 방향을 전환한 이유를 물어봤다. 당시 슈나이더는 전기설비 생산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였다. 섣불리 신사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례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신사업을 CEO 직속 전담으로 정하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왜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신사업을 추진했을까.
트리쿠아 회장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고객사인 공장들은 이런 주문을 했어요. '당신들은 공장에 전기 시스템을 설치해줬지요. 이번엔 그 시스템을 자동화해줬으면 좋겠어요. 전기는 주요 에너지 공급원인데 그 과정을 더 효율적으로 하면서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싶어요.' 또 '전기 시스템뿐 아니라 그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제어장치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도 만들어 주세요'라고 주문했죠. 그래서 에너지 사업에 뛰어든 겁니다." 슈나이더가 적절한 시점에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계기는 고객으로부터 나왔다. 특별한 혜안(慧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당신들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대신 고객이 요구하는 사항을 수렴해서 필요한 해답을 건네줄 수는 있죠. 바로 그 시점이 기업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트리쿠아 회장은 1986년 슈나이더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006년 CEO, 2013년 CEO 겸 회장에 올랐다. 그는 슈나이더의 역사를 이렇게 요약했다. "1836년부터 1980년대까지 슈나이더는 가족이 경영하는 거대 복합 기업이었습니다. 가족 경영진이 회사를 일궜고 몇 대에 걸쳐 경영했지만 1970년대 말 결국 그런 방식이 실패했죠. 회사는 매각됐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새로운 회사가 만들어진 겁니다. 지금은 우리가 철강 회사였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지난 30년간 슈나이더는 전기 하드웨어에서 전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사업이 이동했습니다. 현재의 슈나이더는 30년 전 다시 탄생했습니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환골탈태
신우석 올리버와이만 코리아 상무는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은 소수 제품 특화 → 카테고리 내 커버리지 확대 → 복수 카테고리로 확장 → 토털 솔루션 제공이라는 4단계 성장 경로를 밟는다고 분석한다. 간단히 말하면 제조업체에서 서비스업체로 점진적으로 이행해 가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이에 딱 들어맞는 사례다.
트리쿠아 회장은 말한다. "우리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소프트웨어 회사도 아니고, 순수한 하드웨어 제조사도 아녜요. 우리는 우리가 제조한 제품 역량을 소프트웨어 기술을 활용해 확대시키고 소프트웨어를 통해 좀 더 우수한 역량을 키웁니다."
슈나이더는 이 4단계 성장 경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M&A(인수·합병)를 130여건 벌여 기술과 인재를 확보했다. 프랑스 내 잠재력 있는 작은 회사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탄탄한 기업을 찾았다. 한국에서도 12년 전 모터보호제조기업체 삼화이오씨알을 인수했다. 트리쿠아 회장은 제조업 시절부터 갖고 있던 '영구적인 개선'이라는 슈나이더의 DNA가 오늘날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또 슈나이더 제조 공장은 스스로 만든 소프트웨어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이걸 '우리가 차려 놓은 음식을 우리가 먹기(eating our own food)'라고 부릅니다. 우리 제조업 공장에서 우리 소프트웨어 기술을 최대한 시험해 보는 거죠."
그러나 제조업이란 출신 성분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흔히 산업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나눌 만큼, 두 사업은 여러모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트리쿠아 회장은 "사실 가장 큰 도전은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면서 "우선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보유한 기술자들을 훈련시키고 개발해야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적합한 인재를 채용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모든 인재를 내부에서 충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외부에서 영입한 인재와 내부 직원들이 잘 융합하도록 하는 게 큰 과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더의 소명은 현실에 더 가까이 있는 것
트리쿠아 회장이 자주 여행 가방을 싸는 이유도 바로 융합을 위한 노력의 하나다. 그는 업무 시간의 50%를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데 쓴다. 그 절반은 슈나이더 사람들, 나머지는 고객들이다.
"리더로서 제 소명은 현실에 좀 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본사에만 머물러 있다면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없고 소통할 수도 없겠죠."
그는 슈나이더의 강점으로 인재가 전 세계에 분산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혁신의 가장 훌륭한 방법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을 섞어 놓는 겁니다. 다양한 국적과 성별, 다양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말이죠. 슈나이더는 이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슈나이더 계열사는 100개가 넘어 삼성그룹(현재 74개)보다 많다. 공장은 세계 곳곳에 200개가 넘고, 관계 회사는 300개 이상이다. 하지만 에너지 관리라는 한 분야에 집중한다는 특징은 혼란을 최소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우리는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춘 기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추구하고 지켜야 할 게 뭔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슈나이더의 기술력은 산업 전반에 걸쳐 확대되고 있다. 공장 폐기물 처리·관리 소프트웨어와 전 세계 200여개 도시와 협력해 진행하는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미국 보스턴에선 시설물 350개와 교차로 신호등 850개, 가로등 6만4000개의 에너지 사용량을 관리, 2020년까지 온실가스 25% 감축, 2050년까지 80% 감축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며, 중국 베이징에선 도로 혼잡을 줄이기 위해 도심 내 교통 제어 센터 10곳을 통합 관리하는 교통 제어·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전 세계 빌딩과 인프라 중 80%가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지고 산업 부문에선 60%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산업 전망은 아주 좋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앞으로 20년, 30년 뒤 슈나이더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라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고객에게 물어보세요! 우리의 미래는 그들에게 달렸으니까요."
5大 경영 시사점
체스 vs 바둑
과거의 기업 경영 방식은 적과 아군이 뚜렷하고, 왕을 잡으면 게임이 끝나는 체스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의 게임 법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전혀 생각지 못한 다른 산업에서 경쟁자가 출현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효한 전략은 더 많은 영역에 진출해 더 많은 집을 짓는 편이 이기는 바둑에 가깝다.
집중 & 파괴
보통 경영 전문가들은 '선택과 집중''경계 파괴'라는 상반된 전략적 대안을 지지하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고, 반대편을 기업 위기의 원인으로 비난하곤 한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한 우물 파기에 머물러 있지도 않지만, 문어발식으로 무조건 경계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핵심 역량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꾸준히 진화한 것이 성공 비결이다.
제품 대신 솔루션
B2B 업체는 보통 4단계에 걸쳐 진화하며 마지막 단계가 '솔루션 공급자'가 되는 것이다. 고객은 '드릴'이 아니라 '구멍 뚫는 도구'를 원한다. 슈나이더는 건물에서 사용되는 전력이나 용수 관련 설비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소비 패턴을 최적화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가 됐다.
최종 고객
냉장고 부품 업체는 고객인 냉장고 회사의 요구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실제로 냉장고를 사용하는 고객은 일반 소비자, 즉 최종 고객(end user)이다. 최종 고객의 요구를 깊이 있게 이해할 때 비로소 B2B 기업의 혁신 기회가 창출될 수 있다. 슈나이더가 전력 기기 제조업체에서 에너지 관리 솔루션 업체로 이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최종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마인드
한국의 많은 대기업이 제조업의 서비스산업화, 혹은 제품 업체에서 솔루션 업체로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제조업 마인드가 팽배한 조직 구조와 문화 속에서 시스템·솔루션 사업의 새싹이 자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움말 주신 분: 신동엽 연세대 교수, 신우석 올리버와이만 코리아 상무, 장세진 KAIST 교수, 정지택 베인앤컴퍼니 코리아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