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속 묵은 김치를 죽죽 찢어 빨아 본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여름이 섰는 포도원의 알을 깨물어 본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
그 안에 갇혀 있는 달 한 조각을
새벽 다섯 시 아직 깨지 않은 하늘을
야윈 그림자 비친 우물 물 한모금을
들이켜 본다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겠어,
그걸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 시인들이
우주 밥상에 그득하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2.03.14. -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사랑의 근력>을 내면서 김은경에서 김안녕으로 이름을 갈아입었다. “안녕”이라는 인사말은 만남과 이별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김은경으로 쓴 시가 ‘겉절이’라면 김안녕으로 쓰는 시는 ‘묵은 김치’라는 뜻일까.
잘 익은 김치는 입에 넣는 순간 톡 쏘는 신맛이 강하다. 사실 김장김치는 장독대보다 땅속이 어울린다. 땅속에 묻은 장독에서 겨울을 난 김치를 “죽죽 찢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올려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시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시인의 생각에 시인들이란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는 것을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다. 고행을 자초하는 시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건 진정성이다. 물론 낭만도 빠질 수 없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포도알을 깨물거나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들인 손톱”이 빠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거나 새벽 우물물을 마시며 기도하듯 시를 쓰는 것 같은. 누가, 새벽달과 별들로 차린 ‘시의 밥상’을 받아들까.
〈김정수 시인〉
Florian Christl - Vivaldi Variation (Arr. for Piano from Concerto for Strings in G Minor, RV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