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떠나온 천관사를 다시 그리위 하며,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남파랑 길을 걷던 그제와 어제는 다행히 비가 조금 내려 걸을만 했었는데,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한 번 비에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걸어갔을 테지,
문득 다시 떠오르는 천관산과 천관사,
곳곳에 기암괴석이 많고 정상부근에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바위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이 보여서 천관산이라 부르는 이산을 대덕이나 관산에 사는 사람들은 그저 ‘큰 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큰 산에 비 몰려온다.‘ ’큰 산으로 소풍 간다.‘ ’큰 산이 울었다.‘ 라고 말하며 산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덕 사람들과 산의 동부 쪽에 위치한 관산 사람들은 이 산의 정기를 독점해서 누리고자 ’네 산이다.’, ‘내 산이다.’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산 만 해도 1936년 까지만 해도 고읍면 이었던 것을 천관산에서 천자만 빼어 버린 채 관산으로 개명하였다.
특히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올릴 때면 심한 편싸움이 벌어지는데 각 고을 마다 서로 번 갈아 기우제를 지내고는 산중의 분묘를 파헤쳤다. 큰 산에 누군가가 묘를 잘 못써서 화기를 돋워 올려 수액을 말려버린 탓이라 하였다. 내장산, 월출산, 변산, 두륜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이 천관산은 봄의 진달래와 가을의 억새 숲이 절경을 이루기 때문에 지지난 주에는 이산의 억새 숲에서 억새제가 열렸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산에서 올리는 그 억새 축제마저 여느 다른 지역의 축제나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미친다는 말에는 뭐라고 할 말을 잊고 만다.
이 큰 산에는 엄청난 규모의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절이 대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탑산사 일 것이라는 말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천관사가 큰절이라는 말도 전해온다. 그 절의 여러 내력들을 이 곳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큰 산엘 들어가면 사방에 옛 절터가 남아있는데 그 도량이 얼마나 컸던지 절이 불타 없어질 때 죽어 쌓인 빈대 껍질이 지금도 발 등을 덮어올 정도라지.” 라거나 “큰절 앞에는 산 중복 껜데도 용둠범이라고 부르는 검은 소가 뚫려 있어 그 소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을 해갔단다. 그래서 절터 뒤엔 지금도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의 바위 모양이 남아있게 되었고 그 산의 정봉을 구룡봉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서 이름이 유래한 것이란다. ” 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절이 불타 없어져 거기서 살수 없게 된 때문으로 그로 인하여 용들이 떠나버린 큰 산은 이후부터 정기를 잃어 죽은 산이 되었디야. 그래 산만 컸지. 이산 아래에서 큰 사람이 나가기 어렵게 되었고…”
이렇듯 전설 속의 큰절(탑산사)이 실재했음을 알려주는 보물 한 점이 대흥사 표충사의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탑산사 동종(보물88호)이라 이름 붙여진 이 종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없어진 뒤에 해남의 대흥사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 것이다. 종신에 새겨진 문양이나 명문 그리고 기법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산사의 동종이 천관산 자락에 그 맑은 종소리를 울렸던 날들도 이산은 이렇게 의연하게 서 있었을까?(...)
천관보살이 주거했다는 데에서 절이름이 유래된 천관사를 「동국여지승람」의 「장흥 도호부 불우조」에서는 “영통화상이라는 사람이 일찍 꿈을 꾸니 북쪽곶이 땅으로부터 솟아 오르는데 화상이 가지고 있던 석장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그 북쪽곶에 이르러 내려 꽂혔다. 그곳이 지금의 천관사다.“ 라는 창건 설화가 소개되고 있지만 장흥지역의 향토지에는 또다른 창건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기록에는 천관사의 본래 이름은 화암사 로써 신라 성덕왕 4년(705) 보현사의 정천암을 크게 개창한 뒤에 그 절 이름을 화암사로 개칭하고 교종의 스님이었던 영변과 그의 동료였던 다섯 명이 운영케 하면서 화엄경을 설법하였다 한다.
그 후 애장왕 때에 영통화상이 다시 천관사로 개명하여 재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당시 절의 시세를 짐작해 볼수 있는 것은 신라 성덕왕 때에 쌀 삼백 석과 등유 2석을 내렸고, 애장왕 때에 이르면 다시 밭 800결과 노비 400명을 이절에 시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천관사의 유적으로는 절터 입구에 3층 석탑(보물795호)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 및 5층 석탑이 있을 뿐이다. 천관사 3층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의 구성은 상륜을 장식한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하층기단을 받고 있는데 이 석탑은 별다른 손상이 없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안정감 있는 탑으로 신라 식 일반형 석탑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관사에는 천관보살이
89개의 암자를 거느렸다는 그 옛날의 영화는 찾을 길 없는 천관사에는 천관보살을 모셨던 극락보전과 새로 지은 칠성각 만 남아 있는데 정면 3칸에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건축양식이 간결하고 지붕의 선이 직선형이다. 벽면의 장식이나 기교 보다는 현실적으로 꾸며져 소박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간결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편 산신당 고랑에는 장흥군에서 천관산 신령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천관산신사天冠山 神祠‘가 있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사람과 산>이라는 잡지에 <유적답사 산행>을 연재하던 1996년의 기록이다. 30여 년의 세월ㅇ 지나는 그 사이 천관사는 몰라보게 중창을 했으니,
일년 뒤, 아니 십년 뒤에는 또 얼마만큼 변할는지,
2023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