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열 세 번째로 구리 동구릉의 목릉(穆陵)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구리 동구릉
목릉(穆陵,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600년(선조 33), 1630년(인조 8), 1632년(인조 10)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 목릉(穆陵) 이야기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처음 목릉 자리에는 의인왕후의 능(유릉裕陵)이 조성되었다. 8년 뒤 1608년 선조의 능(목릉)을 건원릉 서쪽 언덕(현 헌종 경릉)에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로 의인왕후의 능 서쪽 언덕으로 옮기고 능의 이름을 목릉으로 고쳤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목릉 동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었고 능의 이름을 혜릉(惠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목릉과 능역이 가까워 따로 능의 이름을 정하지 말고, 목릉 능역으로 합치자는 논의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선조의 능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선조의 능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이 생략되었다. 특히 의인왕후 능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에 조성된 조선왕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자식이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 명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재위 초반에는 양어머니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으며,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이황, 이이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 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까지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쟁 전후 복구작업을 하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현 덕수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여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선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 후궁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 황화방 별궁(경운궁, 현 덕수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장례는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장례였다. 원래 왕과 왕비의 능자리로 결정된 곳은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때는 전쟁 이후의 수습 상황 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능 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였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 음력 12월에 겨우 장례를 마쳤다.
▷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선조 39)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618년(광해군 10)에는 왕대비의 자리에 폐위되어 경운궁에 유폐되고 그 호칭을 서궁이라 하였다. 1623년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 때 ‘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있던(현 헌종 경릉) 선조의 목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진 것이다. 이때 새로 옮겨온 정자각에서 의인왕후 능침까지 신로(神路)를 연결하였다. 이후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에도 능침에서 정자각까지 신로만 연결하여 3기의 능이 하나의 정자각을 사용하였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져 있고, 17세기의 건축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밤에가면 지릴듯...
문닫는 시간이 있어서...
@베라루빈 극 T시군요
밤에가면 못들어갈듯...
어제는 푹 쉬셨습니까?
@베라루빈 집에서 방청소 하고, 은행가고, 애들하고 놀아주고 하니 그냥 하루 끝 ㅎㅎㅎ 일 하는게 더 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