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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마카 6,1-13
복 음 :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과 일치의 여정
-삶과 죽음, 부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중 참 많이 사용한 말마디가 여정입니다.
무한한 삶이 아니라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는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하여 실감나는 비유가 우리 삶을 일일일생 하루로, 또 일 년 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는가 묻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아고 순례 중에 깊이 생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느님'과 '죽음'입니다.
하느님을, 또 죽음을 날마다 환히 눈앞에 두고 살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 없이 하루하루 본질적 투명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또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항상 기쁘게, 늘 기도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 때 죽음도 은총의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어제 경향신문 1,2,3면을 가득 채운 기사도 이색적이었습니다.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몰랐다 오늘 내가 죽는다는 걸, 알았다 오늘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걸”,
“하루에 한명 떨어져 죽고, 사흘에 한 명 끼어서 죽는다.”는 제하에,
작년 1,1일부터 올해 9월말까지 노동 중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가 무려 1200명이란 기사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고로 병으로 자살로 불행한 죽음을 맞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죽음 앞에 누구나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참으로 진지하게 살아가시는 연노한 수녀님의 진솔한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닐까, 과연 하느님이 계실까,
하느님을 뵈올 수 있을까 하는 유혹도 든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쩌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의미하게 생각 없이 살다가 죽은 무수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등
죽음에 대한 물음은 끝이 없습니다.
문득 며칠 전 읽은 좋은 글의 네 조건이 생각납니다.
쉽고, 간결하고, 명료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것인데,
정말 하느님을, 죽음을 늘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살아갈 때
삶 역시 쉽고, 간결하고, 명료하고,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삶은 필시 깊고 아름답고 감동적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회한에 가득 찬 죽음도 인상적입니다.
그대로 죽음은 그이 삶의 반영이자 요약임을 깨닫게 됩니다.
산대로 죽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연속되는 실패에 큰 충격과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죽음이 닥친 것을 느낀 임금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 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과연 후회 없이 시종여일 한 결 같이 착한 삶을 살다가, 실망이나 절망함이 없이
희망과 기쁨 중에 아름다운 최후의 선종을 맞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참으로 부활신앙, 부활희망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희망이 있을 때 함부로, 되는 대로 막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 중에 역동적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된 우리들임을 깨달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죽어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의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사랑이, 희망이 삶과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의 궁극의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파스카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일거에 몰아내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과 일치하여
참 영원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참으로 삶도 죽음도,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주님과 일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정이 전염된다는 것은 많은 학자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198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사업가가 지하철 앞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목숨을 끊으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스스로 목숨 끊기를 바랐을까요?
그저 혼자 외롭고 힘들어서 목숨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후 1년 동안 매주 평균 5명의 비율로 동조 자살이 이어졌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가 많은 곳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살자가 많은 곳은 계속해서 자살자가 나옵니다.
그렇게 주변 환경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바로 스스로 생명을 버리려는 감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감정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다가서야 합니다.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장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직원들의 표정은 어떨까요? 똑같이 좋지 않습니다.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 심판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였습니다.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면
죽어서 누구의 아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서 던지면서,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으므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제관 계급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즉,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 대사제 차독의 후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입김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었지요.
그들의 말에 동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 사두가이들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설명하셨고, 후에 주님께서는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지 보여주셨습니다.
내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산 이들을 하느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불가항력(不可抗力),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한다고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뉴욕으로 온 친구가 캐나다로 단풍 구경 간다고 했습니다.
숙소도 예약했고, 렌터카도 예약했고, 비행기도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미국면허증을 가져오지 않고, 한국 면허증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에 연락해서 미국면허증을 택배로 보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미국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다시금 비행기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캐나다 전자 여행 허가(eTA)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법이 개정되었는데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단풍 구경은 포기하였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속이 상하고, 자신을 탓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덕분에 친구와 며칠 더 뉴욕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 겨울이 가까이 온다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을 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 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Marc Chagall ‘The White Crucifixion
제노 수녀
당신을 부활을 믿습니까?
'교리에서 그렇다니까 부활하겠지'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있나요?
아니면 공자처럼 '삶에 대해서도 다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어찌 알겠는가?' 라고 생각하나요?
그것도 아니면 죽은 후의 일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까?
신의 존재 유무를 입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할까?'라는 질문에
수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사후에 정말 신이 있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갈 것이다.
신이 없다고 해도 지상에서의 그의 삶이 가치로웠기에 잃을 것은 없다.
그런데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내 욕구대로 살았는데
죽은 후에 신이 없다 해도 그가 삶을 충실히 살지 못했기에 슬픈 일이고,
신이 있다면 엄청나게 당황하며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이 있다고 믿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느 경우에도 크게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부활에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현세의 권력과 명예에 집중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부활해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어처구니없는 비유를 들어
부활이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지니 부활이 없는 것이 낫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부활론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루카 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Mk 12,24)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은 세상의 질서이고, 하늘나라는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연장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이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은 이들"(35절)만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참된 행복을 누릴 것이고,
죽어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뵈오며 지극한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의 소금과 빛을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