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무렵의 ‘고구려-후연’ 전쟁으로 인해서 후연이 멸망의 계기를 걸었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왕 무렵에 발발한 ‘고구려-후연’ 전쟁 때의 후연은 이미 북위에게 사실상 박살이 난 상태였습니다.
397년 북위의 대공세로 모용수의 태자인 모용보는 중산에서 옛 수도인 용성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후연은 멸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시점이었습니다.
후연이 그나마 강성했던 무렵인 모용수 시절에 후연은 북위의 탁발규와 2번 싸워서 한번은 대패합니다(태자인 모용보 지휘). 이에 놀란 모용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가 북위를 상대로 대 승리를 거두지만 이것은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광개토태왕 무렵의 ‘고구려-후연’ 전쟁으로 인해서 후연이 멸망의 계기를 걸었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왕 무렵에 발발한 ‘고구려-후연’ 전쟁 때의 후연은 이미 북위에게 사실상 박살이 난 상태였습니다.
397년 북위의 대공세로 모용수의 태자인 모용보는 중산에서 옛 수도인 용성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후연은 멸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시점이었습니다.
후연이 그나마 강성했던 무렵인 모용수 시절에 후연은 북위의 탁발규와 2번 싸워서 한번은 대패합니다(태자인 모용보 지휘). 이에 놀란 모용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가 북위를 상대로 대 승리를 거두지만 이것은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모용수는 늙은데다가 후연은 사방으로 지킬 곳이 너무 많아 북위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북위는 당시 생번(生蕃)으로써 막강한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후방으로는 외몽고라는 드넓은 지역을 배후에 두고 있어 언제든지 막강한 유목민 전사들을 자신들의 전력으로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모용수가 있었을 때는 후연은 어느 정도 위엄은 유지하지만 이것도 북위와의 싸움에서 승리 후에 모용수가 죽음으로써(396) 그것도 끝이 납니다. 모용수 죽음과 맞춰 종실간의 혼란과 탁발규 지휘 아래 북위의 대 공세(397)로 사실상 나라 막장 모드에 들어간 것입니다.
태왕이 상대했던 후연은 이미 막장모드에 가까워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멸망의 계기를 마련한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고구려-후연' 간의 전쟁보다는 397년경에 있던 북위의 대공세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영락 10년에 후연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여리 땅과 민호 5000가구를 빼앗지만 그건 당시 고구려가 남쪽 전선에 전력을 집중해라 후방 전선에 어느 정도 허술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남쪽 전선을 정비하고 후연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영락 12년~영락 17년부터는 후연은 일방적으로 고구려에게 떡실신 당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나마 걸출한 지도자였던 모용수를 잃고 북위에게 떡실신 당해서 이미 만싱창이 상태에서 잘 나가던 고구려와 일대일 맞짱을 깠으니깐요.
ps .. 북위의 걸출한 지도자 도무제 탁발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걸출한 지도자 광개토태왕까지 만난후연은 안습 크리인 것 같습니다.
첫댓글 다른 것은 몰라도 '모용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가 북위를 상대로 대 승리를 거두지만 이것은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라는 부분은 선뜻 수긍하기 어렵군요. 당장 제3자인 동진의 사마씨 입장에서 본 '진서'만해도 모용수의 반격에 탁발규가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용수가 덜컥 죽어버림으로서 탁발규는 졸지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지요. 모용보의 무능함을 틈타서 북위가 세력을 확장하기는 했어도 북위라고 무턱대고 손쉽게 후연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은 분명히 해야 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