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4Zp1zfydJY?si=dKS_hKlfMWSB6Ynb
(Franck: Violin Sonata A major - Oistrakh, Richter)
프랑크가 쓴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 이 곡을 가리켜 뱅상 댕디는 ‘최초이자 가장 순수한 순환 주제의 소나타’라 했지만 순환형식이 그리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는다. 어쨌든 작곡가 자신은 서로 연관되는 선율을 가리켜 ‘사촌들’이라 했고, 이것이 작품 전체에 통일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4악장 구조. 신비적인 첫번째 주제가 그렇듯이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환상곡풍의 무드가 지배적이며 이따금 강렬한 정열이 표출될 때도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오이겐 이자이에게 헌정된 곡이다. 베토벤, 브람스의 작품과 더불어 바이올린 소나타의 걸작으로 꼽힌다.
프랑크 자신이 작곡해놓고 자화자찬하지 마지않았던 바로 그 소나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나 한 번 멋들어지게 연주하리라 덤벼보는 바로 그 곡이지만, 애석하게도 실력이 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성공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여지껏 쌓아올린 점수를 깎아먹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 아마도 프랑크의 소나타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악기가 가진 그 美麗함의 한계가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특유의 몽환적이고 귀족적인 이미지가 자칫 지나치게 표현되었다가는 단박에 '퇴폐'로, 부족하게 표현되었다가는 곧 '싸구려'로 느껴진다. 여지없이 이 곡은 위대한 곡이지만, 연주자가 누구든 작품이 가진 그 자체의 위대함 때문에 언제나 감동을 주는 여타의 곡들과 달리, 좋은 연주자를 만나야만 빛을 발하는 특별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 곡을 잘 연주해 내려면 이 결점을 채워 줄 지능과 함계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성이 있어야 한다. 위대한 연주자들이 가진 그 '무엇'이라고 표현되는 재능을 말이다.
명반 중에 가히 태양과 같은 독보적인 존재가 있으니 바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환갑 기념 실황 음반이다. 그의 환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 스뱌토슬라프 리히터가 피아노를 연주했고, 이 둘 간의 대화는 정말 기가막히게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또 감동적이다. 4악장의 불꽃튀는 에너지와 인생을 달관한 맘씨좋은 아저씨가 베푸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용서'는 더 없는 감동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자아낸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연주요, 그래서 이 음반은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David Oistrakh, 1908~1974
1908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오데사 태생이며 197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 1908~1974)는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 1901~1987)와 함께 바이올린 연주로 세계 음악계를 뒤흔든 대단한 연주자입니다.
당시 음악계에서 하이페츠의 등장으로 당대의 많은 바이올린 주자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까지 합니다. 독설가로 이름높았던 버나드 쇼조차 하이페츠가 19세 되던 1920년, 런던 데뷔무대를 보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잠들기 전, 기도 대신 아무곡이나 서툴게 연주해라.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신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다간 자칫 하느님의 시기로 요절할지도 모른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얼마전 라디오 FM의 클래식 시간에도 해설자가 들려주더군요. 어떤 면에서는 하이페츠와 동시대에 살아 그의 연주를 실황으로 들어야 했던 연주자들에게는 하이페츠와 한 시대를 함게 한 자체가 정말 불운했던 시기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런 시기에 역시 그 빛을 잃지 않고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연주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였습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살아 생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하이페츠에 버금가는 '2인자'이기만 했을까? 지난 96년 3월호 '객석'의 집중 탐구기사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계'를 보면, 음반부분에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을 평론가와 칼럼니스트의 투표로 선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으로는 샤를르 뮌슈 지휘, 하이페츠 연주의것 (보스턴 심포니, RCA)이 선정되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오이스트라흐(클뢰탕스-프랑스 국립방송 교향악단, EMI)이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도 역시 하이페츠의 연주(라이너- 시카고 심포니,RCA)가 오이스트라흐(오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CBS)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하이페츠가 아닌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콘드라신-필하모니아,EMI)가 명반으로 선정되었고, 오이스트라흐(클렘페러-프랑스 국립방송 교향악단)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 모두는 다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음반이지만 오이스트라흐는 불행하게도 어느 하나에서건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협주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아직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오이스트라흐는 하이페츠같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 연주의 완숙도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이페츠는 '너무 완벽해 차갑다'는 평을 자주 들었으나 오이스트라흐는 그 반대로 '따뜻한 인간미가 넘친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위에서 말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도 하이페츠의 것을 '불타는 빙산'에 비유한다면 오이스트라흐의 것은 '얼음기둥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는 금빛 물고기'에 비할수 있을 것이다.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는 내향적, 사념적이고 절제미가 돋보이며, 폭 넓은 레가토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이페츠의 연주특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지만 모든 면에서 하이페츠에 뒤지는 오이스트라흐의 변호를 위해 누군가가 지어내 준 것은 절대 아니다. 음악은 언제나 치열하고 숨가쁘게 몰아붙여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스트라흐의 미덕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자리잡을수 있었다.
오데사 태생의 오이스트라흐는 렝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오데사 음악원의 또 다른 명교수 스톨리알스키에게 배운 그는 아우어파와는 다른 러시아 바이올린 인맥을 형성했다. 물론 테크닉은 하이페츠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수준이었다.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1937년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 등으로 구소련 밖에서 알려졌고, 길렐스의 경우와 비슷하게 구소련이 정책적으로 서구에 소개하는 연주가로 지목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레프 오보린과 리흐테르와의 트리오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활동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져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지휘대에도 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교육분야에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겠다. 기돈 크레머와 올레그 카간 등이 그가 길러낸 제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는 그의 아들이다.
세자르 프랑크 (Cesar A. Franck, 1822-1890)
프랑스 작곡가. 벨기에 출생. 1833년 리에제음악원을 졸업하고 35년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르보르느에게 대위법(對位法)을, P.L.L. 베누아에게 오르간을 배우고 각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한때 벨기에로 건너갔으나, 43년 이후 파리에서 생활하였다. 경건한 가톨릭신자로서, 58년에는 생 클로틸드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널리 알려졌다.
72년 파리에서는 롯시니·마이어베어·오베르의 오페라음악원의 오르간과 교수를 지냈다. 당시 파리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러한 풍조 속에서도 J.S. 바흐의 대위법에 의한 오르간 음악을 강조하여 절대적인 음악의 이상을 설파하였다. 초기의 가곡·실내악곡·피아노곡 및 중기의 종교음악 작품은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90년 《현악 4 중주곡》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음악을 조화시켰으며, 화성(和聲)에서는 대담한 전조와 반음계를 자유로이 구사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 실내악곡·교향곡의 각 악장을 하나의 테마로 통일하는 순환형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교육에도 역점을 두어 댕디·E. 쇼송·G. 피에르네·P. 피달르 등을 배출하였다.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속죄(1871∼72)》 지복(至福)》을 비롯해 《교향변주곡(1885)》 바이올린소나타(1886)》 《현악 4 중주곡 D장조(1889)》 《3개의 중창곡》 등이 있다.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프랑크는 12세의 나이로 리에주 음악원을 졸업하고 연주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15세 되던 해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푸가, 대위법, 작곡, 오르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오르간 연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던 그는 여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다가 1858년에 성 클로틸드 교회의 합창장이 된 그는 이어 그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 즈음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프랑크를 두고 "바흐 이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프랑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망과 존경을 받았다. 1872년엔 파리 음악원의오르간 교수가 되어 루이 비에른, 가브리엘 피에르네, 에르네스트 쇼송, 앙리 뒤파르, 뱅상 댕디 등을 가르쳤으며,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의 일원으로 프랑스 작곡가들을 지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베토벤과 바그너풍의 풍부한 화음들로 가득차 있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D단조>, 피아노곡 <전주곡, 코랄과 푸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등이 대표적이다.
https://youtu.be/UT-2uvay7Z0?si=hhrcKbwY9f4iSsAp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FWV8 | 기돈 크레머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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