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은 어떻게 깨달으셨습니까? 해능 스님이 회상에 잠기셨습니다. 나는 오조 스님 밑에서 8개월 동안 방아만 찌었다. 글자도 몰라서 남한테 부탁해. 벽에 시를 썼지. 오조 스님이 그걸 보고 내가 본성을 본 줄 아셨지만 남들이 시기할까 봐 한밤중에 몰래 불러 금강경을 들려주셨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머리에서 번개같이 든 모든 게 환해졌다. 안에 본성이 원래 이렇게 왔네. 완벽하구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낼 수 있구나. 한숨이 나오더라.
내가 밖에서 찾으려고 했던 게 바로 내 안에 있었구나.
스님은 제자들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밖에서 찾지 마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다. 보물은 네 주머니에 있다.
제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침묵했습니다. 한참 뒤 법회가 물었습니다. 스님 왜 세 번째까지 가야만 진짜? 견성 본성을 봄이라고 하시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앞에 2개는 망상을 없애는 거고 세 번째는 진짜 주인을 만나는 거군요. 바로 그거다. 스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망상을 없애는 건 쉽다. 진짜 주인을 만나는 게 어렵지 청소 다 해놓고 주인 안 들어오면 빈집 아니냐. 무주생심을 알아야 주인이 들어와 사는 거다.
신회가 물었습니다. 진짜 주인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말로는 설명 못 한다.
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주인의 작용이고 너희가 듣는 것도 주인의 작용이고 저 등불이 타오르는 것도 주인의 작용이다. 네 마음 네 불성 그게 주인이다.
법회가 물었습니다. 그럼 무주생심을 체험하면 주인을 만난 겁니까?
그렇다. 스님이 강조하셨습니다.
주인은 본래 머무름이 없고 무주 본래 작용을 일으킨다. 생심 네가 일상에서 집착 없이 마음을 쓸 때 그게 바로 주인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멀리서 찾지 마라.
지성 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 깨는 것 파와 드러내는 것 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연결할 필요 없이 하나다.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사라지면 진심 진짜 마음이 저절로 드러난다. 구름 거치면 해 나오는 것과 같다. 억지로 해를 끌어낼 필요 없다. 구름만 치워라.
지상 스님이 물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망상을 없앴는데도 진심을 못 봅니까?
망상을 없애는 방식이 틀려서 그렇다.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누르려고 하니까 그렇다. 돌로 풀 무릎이 그러면 진심이 못 나온다. 그냥 지켜봐라. 싸우지 말고 그냥 봐라. 그러면 망상은 힘을 잃고 사라진다. 그때 진심이 쑥 나온다.
신화가 물었습니다. 그게 바로 무념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셋이 하나라고 한 거다. 스님이 웃으셨습니다.
무념으로 망상 걷어내고 무상으로 집착 끊고 무주 생심으로 진심을 쓰는 거다. 다 한 통속이다. 법회가 물었습니다. 그럼 저희가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말한 순서대로 해라. 스님이 정리해 주셨습니다.
먼저 무념을 익혀라 생각에 끌려가지 마라. 그다음 무相을 익혀라. 겉모습과 수행 형식에 집착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무주생심을 체득해라. 집착 없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라. 단 순서는 있지만 실제로는 동시에 일어나는 거다. 스님은 간곡하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제발 이 기준에도 얽매이지 마라. 이정표는 길을 알려주는 거지 이정표 끌어안고 살라는 게 아니다. 길을 알았으면 가라. 내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라.
밤이 꽤 깊어 등불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해능스님은 제자들에게 기름을 더 부으라고 하고 말을 이으셨습니다.
오늘 내가 한 말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거다. 깨달음은 만드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너희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얼마나 참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찰나의 순간에 툭 하고 터지는 거다. 하지만 그 찰나를 위해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겨울을 견뎌야 봄꽃이 피듯이
신회가 물었습니다. 준비가 다 된 건 어떻게 압니까?
니가 진짜로 포기했을 때다.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깨닫게 됐다. 욕심 인정받겠다는 욕심 공덕 쌓겠다는 욕심 다 내려놓고 텅 비었을 때 그때 물이 차오르듯 저절로 알게 된다. 물이 차오르듯 저절로 알게 된다.
이제 다들 가서 쉬어라. 그리고 내 말에 너무 매달리지 마라. 나중에 너희가 진짜 깨달으면 알게 될 거다. 아 스님이 하신 말씀이 다 당연한 소리였구나 하고 웃게 될 거다. 제자들은 다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물러갔습니다. 해 능스님은 그들을 배웅하고 밤하늘에 별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무념 무상 무주생심 말은 쉽지만 참 어렵지 하지만 진심이면 누구나 다 다다를 수 있어.
그날 이후 제자들은 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정진했습니다. 특히 신회가 아주 열심히 였죠. 며칠 밤낮을 무주생신만 생각하다가 다시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 며칠을 고민했는데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만 가르쳐주십시오. 해능 스님이 웃으시며 물으셨습니다.
뭘 알겠더냐? 신회가 대답했습니다. 무주는 거울이 깨끗한 거고 생심은 사물을 비추는 것 같습니다. 비유는 좋다만 아직 얕다. 스님이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내 말에는 아직 내가 비춘다는 의식이 남아 있다. 진짜 무주생심은 내가 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거다.
신회는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럼 그게 뭡니까 해능스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신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시더니
벼락같이 소리치셨습니다.
누가 묻는가? 신회는 너무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습니다. 제자 신회입니다. 신회가 어디 있느냐? 스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신회는 자기를 가리키며 여기 있습니다
했지요? 그러자 스님이 호탕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내가 물었을 때 너는 바로 대답했다.
대답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했느냐 아니지 그냥 나왔지 그게 생심이다. 하지만 이 마음속에 내가 대답했다는 집착이 있었느냐. 없었지? 그게 무주다. 무주생심은 이렇게 찰나에 저절로 되는 거다.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다.
신회는 그제야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원래 제 모습이군요. 꾸밀 필요가 없군요. 그렇다. 스님이 신회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제야 졸업했구나. 무주생심은 닦아서 만드는 게 아니다. 본래 있는 걸 확인하는 거다.
그 후로 신외의 수행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더 이상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본성을 관찰했지요. 얼마 후 해능 스님이 진짜로 떠나실 날이 왔습니다. 스님은 법당에 앉아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난 이제 간다. 너희들 수행의 핵심은 딱 하나다. 견성 본성을 봄 본성을 못 보면 아무리 닦아도 맹물이다. 본성을 보면 똥을 싸도 수행이다. 스님은 숨을 고르시고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이 3 가지 기준 잊지 마라. 특히 세 번째 왜냐 앞에 2개는 깨는 거고 세 번째가 드러내는 거니까 껍질만 깨고 알맹이 안 먹으면 바보다. 꼭 무주생심의 경지까지 가라
법회가 울먹이며 물었습니다. 스님 우주생심을 어떻게 체득합니까?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몸으로 느껴라.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아까 내가 신회한테 소리쳤을처럼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며 느껴라.
생각과 생각 사이 행동 행동과 행동 사이 그 틈을 바라 스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밖에서만 찾으니 안타깝다. 짐 놔두고 여관방 전전하며 거기가 집인 줄 안다.
깨달음은 화려한 게 아니다. 그냥 집에 돌아와서 두 다리 뻗고 먹고 쉬는 거다. 그게 다다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집으로 가는 지도를 줬다. 무념 무상 무주생심 이 세 표지판만 따라오면 된다. 하지만 표지판 끌어안고 있지 말고 계속 걸어라.
제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지 마라.
가는 길에 있으면 오는 게 자연의 이치다. 몸은 가지만 법은 남는다. 너희가 바로 나의 법이다. 부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쉬운 길을 알려줘라.
어렵게 꼬지 말고 쉽게 누구나 자기 본성을 볼 수 있게 도와줘라.
말을 마친 스님은 단정히 앉아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 해 스님이 남기신 이 돈오가 갑자기 깨달음의 가르침은 온 천하를 뒤흔들었습니다.
무념 무상 무주생심 이 3 가지는 후대 선사들이 깨달음을 점검하는 잣대가 되었죠. 특히 그 세 번째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무주생심은 선종의 최고 경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산속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느냐의 있지도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그 마음 집착 없이 맑게 작용하는 그 마음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여러분은 육조 스님이 왜 그토록 세 번째 기준을 강조하셨는지 왜 그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자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머무름 없이 자유롭게 쓰고 계십니까?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