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변辯
이병진
내 옷장엔 흰 와이셔츠가 가득하다
다림질된 종족들과 희멀겋게 대면하는 것으로 무늬 없는 나의 일상은 시작된다
흰색에 길들어진 단조로운 습관은 상습투약의 부작용 같은 것
하루 업무도 숙고 없이 적당히 건조된 흰색 정도로만 처리한다
누구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책상머리 샐러리맨의 숙명이라고 메모했다
옷장엔 옷걸이라는 눈치 없는 놈이 오래 각을 잡고 있다
가끔은 힘없는 척하고 셔츠를 툭 놔버리면, 구겨진 옷을 핑계로 회사 땡땡이 칠 텐데
철사같이 질긴 시간을 외팔로 본업에 열중이다
내 옷장은 불가사의하다 믿거나 말거나
누가 착란을 사주하는지 새벽 옷장은 안개로 가득 찬다
안개는 옷장을 뛰쳐나와 목을 조르고 눈꺼풀을 겁박하고 급기야 내 작은 눈을 가려버린다
누구는 약봉지에, 번아웃 증후군 혹은 헛것이 보이는 섬망* 증상이라고 메모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환장할 폭력인가
그럼에도, 매일 불확신의 단추를 끼우고 더듬더듬 안개 본진으로 출근한다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항인가 비겁인가
내 삶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한때, 셔츠를 찢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적 있다
미래를 눈 가리고 걷는다는 건 너무도 가혹한 맹목盲目
안개 뱃속이라도 갈라 길을 내겠다고 미친 무사처럼 칼을 휘두른 적 있다
가당치도 않은 객기, 숟가락 네 개를 볼모로 잡혔으니
안개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승부였다
소매를 바짝 걷어붙여도 세상의 속내는 볼 수 없었고 대신,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가는 낯익은 이웃들을 보았다
그건 거대한 절망, 완벽한 공포
누구의 말처럼, 엄청 센 놈과 맞닥뜨리니까 본능적으로 온순해지더라
내가 꼬랑지 내린 수캐처럼 넥타이 줄에 끌려다닌 이유다
셔츠의 반란, 점점 더 배를 죄어오고
내가 슬림핏을 거부하고 일반핏을 고집하고 있을 때, 누군가 흰 셔츠의 남루와 고 지식함에 대해 숙덕거렸다
아, 표백제로도 지우지 못할 허무
나는 지금 작심하고 셔츠를 솎아낸다
옷걸이 어깨에서 깁고 꿰맨 세월의 통증이 드러난다
나프탈렌이 안개처럼 퇴각하고, 스멀스멀 빠져나간 자리에 허물 몇 개가 이력처럼 흔들거린다
물먹는 하마가 잠방잠방 무거운 몸을 뒤척거린다
만감萬感이 옷장에 고꾸라지면서 뱉은 말,
천지 분간을 못 하던 때가 그리울지도 몰라
*착각과 망상 등을 하는 의식장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이병진 시인
포항에서 출생. 경북대 철학과, 고려대 문학석사. 2022년「월간문학」등단, 시집으로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가 있음.
[출처] 샐러리맨의 변辯 - 이병진ㅣ■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신작시 □ 20 24년 1월호 ㅣ 2024, January ㅡ 통호 177호 ㅣ Vol 177|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