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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품위 있으며 아름다운 루민국의 성, 에르메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양지에 지은 에르메스성은 햇빛에 따라 하얗게 반짝인다.
루민국의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에르메스성의
뒤에 있는 루민국 최고의 정원사의 손길로 가꾸어지는 장미 정원에 루민국에선 볼 수 없는
검은 머리를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있다.
파란색의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붉은 보석이 달려있는
은 장신구로 틀어 올린 여자는 단아하면서도 분위기 있어보였다.
미인이라고 할 순 없지만 묘한 매력을 가진 여인의 검은 눈동자는 그늘져 있다.
"련.여기서 뭐하고 있니?"
그녀의 이름은 련.
아스틴 황자가 데리고 온 사라한 국의 여인.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루민국의 고귀한 여왕, 엘라 루민 에르가르트.
엘라여왕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련 옆에 앉는다.
엘라여왕을 보는 련의 눈동자에 생기가 돈다.
"오늘은 뭘 했니?"
"그냥..정원에 있었어요."
다정하게 서로 마주보며 말하는 엘라여왕과 련은 마치 모녀사이 같다.
"먼 나라에서 홍차가 들어왔거든.
너랑 마시려고 준비했어. 자 이리오렴."
엘라 여왕은 련의 손을 잡아 정원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티 한 점 없이 하얀 테이블엔 화려한 장미무늬가 새겨진 유백색 찻잔 두 개와,
똑같은 무늬의 하얀 도기 티포트가 올려져 있다.
스트레이너를 찻잔 위에 올리고 티포트에 담긴 홍차를 붓자 잎이 걸러지면서
붉은빛을 조금 띠는 노란색 액채가 차오른다.
련은 자주 해봤는지 익숙한 솜씨로 엘라여왕과 자신의 찻잔에 홍차를 부었다.
적당량을 부은 후 티포트를 제자리에 놓은 뒤 련은 의자를 빼내어 엘라여왕 옆에 앉았다.
"향기가 참 좋지. 이건 저 멀리 타국에서 나는 홍차란다.
처음 보는 홍차인데…….붉은 빛만 띄는 우리 나라의 홍차와는 많이 다르구나."
홍차를 마시는 련의 모습은 평온해 보인다.
그런 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엘라여왕은 련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아스틴 왕자는 여자를 데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아스틴 왕자가 사라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후
그것도 비밀리에 여자를 에르메스성 뒤편에 있는 별장에 데리고 왔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엘라여왕은 별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보았던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채 침대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었다
.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건지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엘라여왕은 사라한국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검은 눈은 사라한 국민 특유의 눈이기 때문이다.
텅 빈 밤하늘처럼 맑고 청량한 눈이 말없이 자신을 주시하자 엘라여왕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여인을 바라봤다.
"누구...?"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적당한 미성.
그 순간 엘라여왕은 정신을 차리고 여인을 탐색했다.
아름답다고 할 순 없다. 왠지 모르게 빨려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신비로운 검은 눈 때문일까?
전체적으로 보아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분위기 있다.
하지만 아스틴 왕자가 데려온 걸 보니...
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엘라여왕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몽롱한 눈은 초점 없이 엘라여왕을 주시했다.
"너는 누구니?"
부드럽게 묻자 여인을 꿈꾸듯이 말했다.
"련..."
여인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넌 어디서 왔니?"
엘라여왕이 묻자 련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넌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거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넌 누구니?"
엘라여왕이 다시 똑같이 질문하자 련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련..."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엘라여왕은 왕실 의원을 불렀다.
엘라여왕의 다급한 부름에 한 걸음에 달려온 의원은 련을 꼼꼼히 진찰했다.
련은 그런 의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몇가지 질문을 하고 난 뒤 진단을 마치자 의원은 엘라여왕에게 말했다.
"기억 상실증입니다. 굉장히 큰 쇼크로 거의 모든걸 잊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억이 돌아오지?"
엘라여왕이 물었다. 난감하다는 듯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올리며
의원은 말했다.
"방법은 없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어떤 계기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엘라여왕은 난감했다.
아스틴 왕자가 사라한 국의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근데 그 여자는 강한 쇼크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더불어 이 여자를 데려온 아스틴 왕자의 생각도 모르겠다.
"이 아이의 일은 비밀로 하게. 밖에 알려져서는 안돼."
"예."
여왕이 경고하자 의원이 깊게 머리를 숙이고 별장 밖으로 나갔다.
련은 또 멍하니 창 밖을 응시했다.
"올거에요."
"응?"
가만히 있다가 뜬금없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련 곁으로 엘라여왕은 다가갔다.
"누가 오니?"
"돌아올거에요."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강한 믿음.
엘라여왕은 련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 후 엘라여왕은 련을 만나러 별장에 들렀다.
옷을 가져다 주거나 아님 루민국의 예절이나
전설 같은 걸 알려주면서..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인 련의 기억을 엘라여왕은 채워주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련을..혼자 둘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어그러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련을..
친어머니처럼 돌봐주자 련은 엘라여왕을 따랐다.
그런 련을 보며 엘라여왕은 아스틴 왕자에게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꼈다.
6개월..련이 루민국에 온지 6개월이 흘렀다.
아스틴 왕자는 련을 별장에 데려오곤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엘라여왕은 아스틴에게 말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만나러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맛있어요."
"그렇지?"
때가 올 거다.
곧..
유난히 푸른 하늘과 련의 웃는 모습을 보며 엘라여왕은 속으로 되내었다.
#03
한쪽 벽의 절반을 차지한 아치형의 창문 안으로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겹겹이 올려 쌓여진 책들 사이에 앉아있는 남자를 비췄다.
진지하게 책을 읽는 남자의 얼굴은 환상적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균형 잡힌 단정한 얼굴.
햇살에 녹아내릴 것만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핏기가 진하게 돌아 유달리 붉은 입술.
유달리 새하얀 피부와 얼어붙은 피를 연상시키는 싸늘한 붉은 눈동자.
누구든지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얼굴의 남자가 바로 붉은 야수, 아스틴왕자다.
하얀 셔츠에 헐렁한 바지 차림의 아스틴 왕자는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지만
왠지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될 위압감이 느껴졌다.
책에 집중하고 있던 아스틴이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창 밖에 보이는 모습에 아스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에 깊이 박힌 검은 머리의 소유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다정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라한국과 전쟁을 치른 지 6개월이 지났다.
에이란 거리에서 저 여인을 별장으로 데려온 뒤 단 한 번도 별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유가 뭔질 모르겠다.
거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여인의 검은 눈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여자를 데려왔다.
사라한 국에선 흔하디 흔한 게 검은 눈이다.
수많은 사라한 여자들의 눈을 봤지만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쟁에선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베었지만 이 여자는 그럴 수 없었다.
위험하다. 21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험한 감정.
뭔가 정의 할 수도 딱히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그런..
본능적으로 저 여자는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죽일 수가 없다.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아스틴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보고 싶다. 자신을 사로잡던 그 눈을...
하얗고 창백하던 작은 얼굴을..
아스틴의 붉은 눈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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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엘라여왕은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엘라여왕이 떠난 후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위에 둘러진 얇은 레이스
휘장을 보다 련은 생각에 잠겼다.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지?
돌아올 거라고 굳게 약속한 사람.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
기억하려고 애써봐도 떠오르는 건 흐릿한 뒷모습뿐..
기억나는 건 없지만, 얼굴조차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고 있다.
돌아올 거다. 돌아올 거다.
그 믿음만큼은 변함없다.
머릿속에서 자꾸 그 뒷모습만 맴돌자 련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의 빛을 차단하기 위해 내린 천을 올리고 아직 밤은 쌀쌀하기에
커다란 숄을 어깨에 걸친후 련은 별장 밖으로 나왔다.
어둠속의 정원은 조용하다.
유달리 검은 밤하늘과 커다란 달은 보며 련은 조용히 걸었다.
습기를 머금은 풀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련은 정원을 산책했다.
밤공기가 차갑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자 련은 몸은 움츠렸다.
검푸른 천을 깔고 거기다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하늘엔 제일 커다란
달이란 보석이 빛을 내뿜고 있다.
창백한 달빛이 련의 얼굴을 비춘다.
무의식적으로 련은 달을 바라봤다.
그 순간 깊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내는 소리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나 커다란 소리다.
이런 밤에 별장을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생각을 마친 련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련,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마렴.'
엘라여왕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어둠속에서 나온 검은 인형을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
투명한 하얀 피부, 붉은 눈동자..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외모에 련은 넋이 나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스틴은 련을 찬찬히 바라봤다.
6개월 전과 달라진 건 없다.
창백해 보이는 흰 피부와 검은 머리..
부셔져 버릴 것 같은 가녀린 몸..
달빛 때문인지 몽환적인 검은색 눈동자는 여전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의도적으로 만나려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났다.
"누구세요..?"
먹잇감을 탐색하는 듯 한 날카로운 눈빛에 겁먹은 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아스틴 왕자는 련에게 다가갔다.
아스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련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런 련때문에 아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져 빠른 걸음으로 련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오는 아스틴이 무섭지만 붉은 눈에 사로잡혀 도망칠 수 없는
련은 거미줄에 붙잡혀 있는 나비와 같았다.
이윽고 련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스틴의 그림자가
련을 향해 길게 늘어졌다.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키와 분위기 때문인지 위화감을 느낀 련이 겁먹은 눈동자로
바라보자 그가 련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느린 화면을 보여주듯이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길다랗고 각진
하얀 손이 련의 뺨에 닿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 때문에 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누구지?"
똑같이 되묻는 말..
그러나 낮고 강하게 울려 퍼지는 매혹적인 목소리에
련은 넋을 잃었다.
"넌 누구지?"
또다시 물으며 아스틴 왕자가 련의 뺨에 자리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짜릿하다.. 련의 뺨에 닿았던 손에서부터 올라오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야릇한
통증에 아스틴 왕자는 손이 새하애질정도로주먹을 꽉 쥐었다.
"련.."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아스틴왕자의 귀엔 똑똑히 들렸다.
련..련…….
아스틴이 속으로 련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동안 련은 아스틴을
찬찬히 바라봤다.
차갑다. 붉은 색 눈동자도 황금빛 머리카락도 다 따뜻함을 나타내는
색인데.. 이 남자는 너무나 차갑다.
만지면 나마저 얼어붙을 것 같아.
밤공기가 아닌 남자의 차가움으로 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스틴의 눈이 다시 련을 주시했다.
겁먹었는지 잔뜩 물기를 머금은채 심하게 요동치는 눈동자가
가련하면서도 아름답다.
"나..나 갈래요."
이 말을 끝으로 련은 뒤돌아 뛰었다.
아스틴이 잡으려 뻗은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스쳤다.
잡지 못한 손은 그대로 허공위에 뻗어있었다.
작은 미련이 손끝에 남는다.
이 기분은 뭘까?
갖고 싶다..
본질적인 욕망..
원하지 않아도 손에 들어왔던 다른 것들과 달리
저 여자는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젠 보이지 않는 련의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아스틴은 손을
거두었다.
그래. 뭐가 뭔질 모르겠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 건 내것이 되야 한다는 것.
가지지 못할 것 따윈 없다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으며 아스틴은
자신의 앞에 없는 련에게 말했다.
"내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욕망이 달빛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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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아스틴의 행동을 기대하시라.
댓글은 작가의 힘의 원천으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남겨주신
저는 기숙사 생활로 인해 다음주 토요일쯤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아듀~
첫댓글 아..저..저 아스틴이란 인간 위험하다- ㄱㅡ 련이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빨리좀 왔으면 한다는..
련이 기다리는 사람은 앞편에서 언급했었는데.. 앞편을 읽으신다면 알 수 있으실거에요.
ㅎㅎ 재밋네요.. 다음편 빨랑 올려주세요.ㅋㅋㅋ
댓글은 저의 힘의 원천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