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지석강에서 기축옥사의 최대 희생자인 이발을 추억하다.
나주시 남평읍을 흐르는 강이 드들강이라고 부르는 지석강이고, 지석강을 건넌 곳에 광주 카톨릭대학교가 있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남평 출신으로 정여립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이발이 떠올랐다.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이 되어 명성이 자자하였던 이발은 곧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발은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하고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확립하였으며 또한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그는 경연에 출입하면서 사정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합하려는 뜻이 없었다. 이발은 1584년 동인과 서인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이이가 죽자 동인의 거두로서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그후 동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과 알력이 생겨 기축년 9월 부제학이었던 이발은 시사불가위(時事不可爲)라는 말을 남긴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후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그후 동인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일 처음 동인 공격의 포문을 연 사람이 호남 출신 생원 양천회였다. 양천회는 11월 3일 올린 상소에서 “이발, 이길, 김우홍, 백유양, 정언신 등이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했다. 이어 11월 12일 예조정랑 백유함이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그 뒤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 과정에서도 이발과 정언신 등 여러 사람들이 정여립의 역모에 관여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발은 정여립 역모 사건이 벌어지자 자신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조용히 서울길을 떠나 교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잡혀와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았다.
선조가 “너는 어찌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갔던가”고 물으니 이발은 “신의 노모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 이급이 ‘전하의’ 은혜로 모친 봉양에 허함을 받아 정읍현감이 되었으므로, 동생 이길도 이미 올라왔고 신도 역시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어 “네가 벼슬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묻고, 다시 “네가 네 죄를 아느냐” 하고 묻자 이발은 “신은 저의 낮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미소 지으면서 “이미 때가 늦었다”고 말하였다.
옥사는 크게 확대되어갔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으로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사람은 모두가 금고형을 받았다.
이발은 정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정란과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사람 알기가 어렵다고 하나 정여립 같은 역적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인데도 나는 홀로 알지 못하였으니, 내 눈을 빼어 마땅할 것이며 죽어도 오히려 죄가 남겠지만, 자네는 이미 정여립과 원수가 되었으니 죽을 리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처럼 이정란은 옥에서 풀려나오고 이발은 북도로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발은 선홍복의 초사로 다시 잡혀 서울로 돌아왔다. 이발이 옥에 있으면서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는데 이것은 조헌이 그 이전에 이발에게 경계하기를 “정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한 때문이었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이발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 옷 앞섶에 혈서를 썼다.
“망녕되이 역적과 사귀었다가 화가 늙은 어머니에게 미쳤다.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땅이 검고 하늘이 푸르도다” 그후 이발은 온몸에 살이 온전한 곳이 없을 만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이 죽자 선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이발 등은 처음에 정집의 공초에 나왔고 다음에는 선흥복의 공초에 나왔으니, 역적모의에 참여한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물며 평일에 역적과 체결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일을 해온 것은 조그만한 아이들도 아는 바요, 정여립과 왕래한 서찰은 ‘친밀하기가’ 마치 부자․형제보다 더하니, 이런 자를 처단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을 처단할 것인가. 춘추대의로 역적을 치는 데는 ‘역적의’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가릴 것 없고, 옛날 것이나 지금 것이나를 가릴 것 없는 것인데, 이미 이발의 죄상이 드러나서 증거가 모두 나타났으니, 마땅히 법에 의하여 처단해야 할 것이니 의논하여 아뢰라. 그리고 역적 정언신에게 무기를 나누어 보내주었다는 것은 가령 그 말이 십분 적실하다 해도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 일이다. 언신이 들으면 자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양형(梁泂)’의 소에는 거짓말이 백 가지인데, 이것은 물을 것도 없으니, 이것으로 고문하지 말라. 다만 조강(趙綱)은 역적이 김효원(金孝元)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하나, 무릇 역적이 제 자제를 위하여 입학시키려고 하였다면, 그 당시에는 친한 친구로서 정부 요로에 있는 자가 많았는데 하필 영흥에 가 있는 김효원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다. 이와 같이 인심이 험악한 시기를 당해서 의외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되니, 다음에는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 대저 당당한 국가에서 외방 유생의 황잡한 소를 보고 국문을 하고 형벌을 주는 것은 사체에도 크게 손상이 될 뿐 아니라 후폐가 많을 것이니, 그냥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따라서 조강은 고문하지 말고 놓아 보낼 것이며 방대진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일 이발의 어머니 윤씨와 그의 아들이 국문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洁)의 가족들은 2년째 옥에 갇혀 있었다. 대신들이 미봉책으로 죽음은 면하게 하였지만 석방시키자고는 못하였다. 이는 선조가 옥사를 완결시켰으면서도 이발의 가족에 대해서만은 다시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발의 어머니 윤씨는 82세였는데 죽을 때에 말하기를 “형법이 너무 과람하다” 하였고, 8세였던 이발의 아들 명철(命哲)은 “평일에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기를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라 하였을 뿐 역적의 일은 들은 바 없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이런 말이 어찌 놈의 자식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때려 죽였다. 우의정 이양원이 늙은이와 어린 아이에게는 형벌을 실시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홍가신의 아들 홍절과 김응남의 아들 김명룡에게도 압슬형을 가하였으며, 그 문생들과 노복에게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이전의 을사사화 때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키고 있던 옥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렇듯 그의 어머니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압슬형을 받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연유는 이발이 선조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신랄하게 비판하여 선조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 남녘길 아득한데 새 날아가고
이발의 형이었던 현감 이급은 앞서 형벌을 받고 죽었고 그의 아들 만생(晩生)․순생(順生)도 장형을 받고 죽었다. 이발의 아들 효동(孝童)과 이길의 아들 효손(孝孫)은 모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효동은 병으로 죽고 효손은 임진왜란 때 옥문을 크게 열자 석방되었으나 역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렇듯 그의 가문 중에 화를 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오직 이직만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화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직은 본래 길인이어서 그의 형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 탈 없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선홍복의 집에서 발견 되었다는 알려진 이발과 정여립이 나누었던 편지도 실상은 정철과 송익필이 꾸며낸 것이었으며,또한 선홍복이 이발․이길․백유양 등을 모반사건에 끌어넣은 것도 “그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교사했기 때문이라고 실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악연으로 끝난 정철과 이발의 첫 만남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철이 남평에 있던 이발의 집에 들렀을 때 이발과 이길이 장기를 두고 있어 정철이 무심결에 훈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발 형제가 달려들어 역적놈의 자식이 시키지도 않은 훈수를 한다면서 정철의 턱에 나 있는 수염을 모조리 뽑았다고 한다. 정철은 이때의 일이 뼈에 사무쳐 이발의 형제들과 팔순노모, 그리고 그의 아들들까지 때려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기축옥사 이후 서인측이 꾸며낸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8세와 10세의 어린 이발 형제가 훈수를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18세의 건장한 청년인 정철의 수염을 다 뽑아버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또 다른 이야기가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제 13권에 실려 있다.
“....헌의 상소 중에 ‘신은 그윽이 들으니 정철은 이발의 아버지 이중호와 옥당의 동료가 되는데 중호가 일찍이 <근사록近思錄>을 정철에게 질문한 후에 비로소 감히 나와서 강살講說하였다고 하오니, 이발. 이길은 철에게 제자의 예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발이 출세하여서는 감히 정철을 능멸하였으며, 정철이 긴 수염이 있는데, 이 발이 취한 김에 희롱하여 뽑으니 정철이 곧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두어 개 긴 수염 그대가 뽑아가니
늙은이의 풍채가 문득 소조해졌네. 하였습니다.
그 후 마주 앉아 술을 마실 때에도 이발이 패만悖慢한 말을 하니 정철이 곧 돌아보지 않고 이발의 낯에 침을 뱉고 일어섰는데, 정철의 강직함으로써 다만 한번 이발의 낯에 침을 뱉은 것으로 인하여 귀신의 수레를 보는데 이르렀습니다.“
그 뒤 서인이었던 윤선거(1610~1669)는 《노서집》에 “이발이 역옥에 중하게 걸려 있으나, 뚜렷한 죄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부의 의논이 그를 가엾게 여겼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여립은 역모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이발․최영경․정개청 등의 죽음은 사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에도 일리는 있다.
기축옥사의 후유증으로 세력을 잡은 홍여순․김우옹 등 동인은 정철을 귀양보내고 관직을 삭탈하면서도 이발의 신원은 청하지 못하였다. 정미년에 이르러 한호(韓浩) 등이 비로소 신원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엄하게 물리쳤고, 경술년에도 삼사에서 이발 등의 신원을 청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초 갑자년에 정철의 신원을 청하면서 영상 이원익이 이발과 백유양도 아울러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인조는 “백유양은 신원하지 말고, 이발만 신원하라” 하였다.
남녁길 아득한데 새 날아가고
서울은 저기 저 서쪽 구름가에 있네
아침에 간밤 꿈을 기억해보니
모두가 어머니와 임금의 생각이라
서울에서 근친하러 돌아가는 도중에 쓴 아름다운 시(詩)속의 그 어머니는 그렇게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가 그리워했던 선조 임금과는 도저히 더할 수 없는 악연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것도 필연적인 운명이었을까? 역사의 희롱이었을까? 이발이 죽던 날 그의 형 이급이 재직했던 정읍 현감에 난세의 영웅 이순신이 부임하였다.
이발의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한 이후 광산 이씨 중 이발의 장조카 이원종만 살아남았고 그는 자구책으로 성씨를 밀양 이씨로 변성하고 숨어 살다가 150년이 지나서야 성을 되찾았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남원 대접주 김개남의 아들이 박씨로 성을 바꾸고 살다가 1950년대에 와서야 김씨를 되찾은 경우처럼 이발의 광산 이씨도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이어졌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퇴보하는가?
2023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