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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누란(到整累卵)
달걀을 거꾸로 쌓는다는 뜻으로, 스승의 위대함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 낼 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到 : 거꾸로 도(刂/6)
整 : 가지런할 정(攵/12)
累 : 쌓을 누(糸/5)
卵 : 알 란(卩/5)
출전 : 선조실록(宣祖實錄) 한국인의 인간상(人間像)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언제나 스승은 우리의 삶에서 존경(尊敬)의 대상이었고, 잊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자고(自古)로 나라가 창업(創業)되면 그 나라에 중심이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임금(君; 국가지도자), 스승(師; 사회지도자), 부모(父母; 가정책임자)가 국가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곧 이를 이른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 사명당(四溟堂 /惟政)이 오랫동안 금강산(金剛山) 등지에서 도(道)를 닦은 끝에 축지법(縮地法)까지 익히자 혼자 생각했다. "묘향산(妙香山)에 도술 높은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 라는 큰 스님이 계시다는데 그와 도력(道力)을 한번 겨뤄 봐야겠다. 그래서 만약 나의 도력이 모자라면 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더 닦아야지."
사명당은 이제 막 익힌 축지법을 이용하여 몇 걸음 만에 묘향산 입구에 도착했다. 한편 서산대사는 사명당이 올 줄을 미리 알고 묘향산 골짜기의 물을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르게 해 놓았다. 도착하여 이 광경을 본 사명당은 큰 감동을 받았다. "역시 도술이 뛰어난 스님이시군!"
이윽고 암자에 도착한 사명당은 새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손에 쥐고서 서산대사 앞에 가서 물었다. "대사님, 제가 이 새를 죽이겠습니까? 살리겠습니까?"
그러자 서산대사는 사명당을 맞으려 대문을 나오려다 대문 문지방에 다리를 앞뒤로 걸치고 서서 되물었다. "대사, 그럼 내가 지금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맞혀 보시오. 그러면 나도 맞히리다."
사명당은 "그거야 나오시든지 들어가시든지 대사님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허나 대사님은 저를 맞으러 나오시는 길이니까 아마 나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서산대사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손 안의 새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이 아니겠소. 그러나 대사가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아오."
사명당은 "맞습니다. 불자(佛子)가 귀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지요. 허허허." 사명당은 시원스럽게 웃고 나서 손안의 새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두 분 대사는 마루방에 마주 앉았다. 사명당은 냉수 한 그릇을 청한 뒤 그 물에 가지고 온 바늘 백 쌈을 쏟았다. 그러자 바늘이 곧 먹음직스런 국수로 변했다. 그리고 사명당은 그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국수 맛이 참 좋을 것 같구려, 나도 출출하니…" 하면서 종자에게 냉수 한 사발과 바늘 백 쌈을 가져오도록 하고, 사명당과 똑 같이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국수를 뱉으니 국수가 다시 바늘 백 쌈으로 변했다.
이를 보고 속으로 놀란 사명당은 2차전으로 준비해 온 달걀꾸러미에 달걀을 꺼내어 차례차례 괴어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산대사가 "대사의 도력이 참으로 놀랍구려" 하면서 서산대사도 달걀을 가져오도록 하더니 처음 한 개를 허공에 머물게 한 다음 그 아래쪽으로 연이어 받쳐 내려가면서 거꾸로 쌓는 것이었다.
분명히 서산대사의 재주가 더 뛰어났다. 더욱 놀란 사명당은 3차전으로 이번에야말로 하면서 오른손을 들자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금새 소나기가 쏟아졌다. 서산대사는 "대사의 도력도 참으로 놀랍군요. 허허허…" 말을 마친 서산대사는 손을 들어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땅에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게 만든 것이다.
3차전마저도 사명당이 진 셈이다. "대사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부터 대사님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사명당은 큰절을 하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중을 나타내는 '사승(師僧)'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불교의 중을 '스승(師)'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중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한편 동언교략(東言巧略)에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僧)이 스승의 어원이라 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한, 동일한 뜻으로 쓰이는 선생(先生)이란 말은 고려(高麗)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선조 중엽 때 문헌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당시 선비들이 술 마시며 글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거나 낮건 간에 서로 '선생'이라 호칭을 하였다.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부르는 것이 고려 때부터의 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선생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스승의 날'이 현재는 5월 15일이다. 우리나라의 '스승의 날' 유래는 1958년 충남 강경여자 중·고등학교의 청소년적십자에서 시작되었다.
윤석란을 비롯한 단원들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 위문과 퇴직하신 스승님께 위로활동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3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처음으로 5월 26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신 세종대왕(世宗大王)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다시 정하고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스승들의 처지가 매우 낮아졌다. 스승이야 말로 사회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존경받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하루 빨리 교권(敎權)이 확립되고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새로워져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스승을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풍속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 스승과 제자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 했듯이 지도하는 곳에는 배움의 기회가 공존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지도 현장과 특히 어울린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스승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백지 상태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지식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다면 인간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평생에 한 분의 스승을 모실 수 있기를 원했고, 심지어 스승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평생 섬길 스승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이라 여겼다. 고개를 숙이고 발등에 입 맞출 스승이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랴.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마음은 황폐해지고, 지식이 넘쳐날수록 인격은 메말라 간다. 재주는 비상해도 덕망이 미치지 못하며, 교사는 많아도 스승은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 조선 후기의 이서는 '자신의 도(道)를 이루어 남에게 미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 도가 대단히 커서 덕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덕성을 지니지 않고서 스승이라는 명예와 그에 따른 이익만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스승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당나라 때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한유(韓愈)의 사설(師說)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돼 있는 글이다. "스승은 도를 전하고 학업을 전수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존재가 아닐진대 누군들 의혹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의혹이 있으면서도 스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의혹된 것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그 도(道)를 들은 것이 진실로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고 나보다 뒤에 태어났더라도 그 도를 들은 것이 또한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무릇 어찌 그 나이가 나보다 앞서거나 뒤짐을 따지겠는가? 그런 까닭에 귀하거나 천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관계없이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는 곳이다.(중략)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같지 못한 것은 아니며,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하지는 않다."
갈수록 덕망을 가진 스승이 사라지고, 스승을 모시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다. 참다운 가르침을 줄 지혜로운 스승이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스승의 날(5월 15일)은 1964년 만들어졌으며 이듬해 기념일로 지정됐다. 이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로 이 세상의 모든 스승이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시대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스승은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巫覡)에서 여자 무당을 말한다거나 중(僧)을 나타내는 사승(師僧)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스승이란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로서 인생이라는 험난한 여정에서 우리를 안전하고, 이로운 곳으로 안내해 줄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샛별 같은 든든한 존재가 아닐까?
이상국 曰: "스승이라는 말 속엔 허허벌판이 있다.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크고 굳센 어른 하나 서 있다. 스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 삶이 거울이 되어 내내 한 존재를 비춘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거기엔 허허벌판에서 허허벌판으로 이어지는 진수(眞髓)의 이동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가슴에 평생 지지 않는 해를 달아 거는 일이다. 그리고 나를 스승으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나를 해 삼아 세상을 비춰보는 것이다. 눈 내리는 막막한 삶에 문득 홀로 서서 나를 지켜보는 스승, 그 스승의 안광(眼光)을 빌려 세상을 읽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일생의 간명한 요약이다.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다. 비록 거룩한 차림에 학위(學位)는 갖추지 않았더라도, 지혜를 건네주는 선각(先覺)은 어디에나 있다. 삼인행(三人行)에 필시 내 스승이 하나 있으니, 그저 그 스승을 향해 간절한 마음만 열어두면 되는 일이다. 스승은 굳이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살아간 자취만으로도 훌륭한 스승이며 한 구절 언어로도 평생 스승이 되기도 한다. 모든 스승이 뒷사람을 모두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뒷사람의 삶을 이루는 긴요한 결정들 앞에 스승의 말씀과 스승의 가르침은 문득 값지게 돋아나는 법이다. 내 살이의 스승을 살피는 일,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때로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고, 오직 내 존재가 기특하여 말없이 지혜를 퍼 주는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내 모든 고난과 역경들도 비문(非文)의 스승이었다. 숨어 있는 스승들은 옛 책들에 가득하다. 오직 내가 무릎을 꿇고 거기 앉기만 하면 그들은 기꺼이 사제(師弟)의 연을 맺는다. 나를 보는 일은, 내 스승의 흔적과 영향을 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스승은 높은 곳에만 있지 않다. 올곧게 살라고 마음 환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끌어 주는 스승은 더 가까운 곳에, 겨울이기에 꽃피운 나무나 밑줄 그어둔 책의 한 문장도 나를 키우는 스승이다. 어쩌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미운 사람과 고통스러운 세상조차 좋은 스승이리라.
선현들의 글이나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사숙(私淑)이라 했다. 남몰래 선한 것을 본받는다고도 한다. 이와 달리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는 것을 친자(親炙) 즉 고기 굽는 것을 보며 배운다고 한다. 누가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일까? 그런 스승을 공들이지 않고 저절로 만나는 것은 지복(至福)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택사삼년(擇師三年), 스승을 고르는 데 삼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듯하다.
최광수 曰: "요즘은 세상에 참스승이 없다고들 한다. 아니 찾기 어렵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지혜로움, 솔선수범, 전문적이거나 해박한 식견, 자애하는 마음 등을 두루 갖춘 이를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따지면 스승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일 뿐이다. 스승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제자다. 당연한 소리지만, 제자가 없으면 스승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살아가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스승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제자의 존재다. 그러니 제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스승이지만, 스승을 만드는 것은 제자라고 하면 과한 말일까.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듯이 제자가 있을 때 스승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제자가 없으면 훌륭한 사람은 될지언정, 스승은 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저 홀로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스승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게 제자 될 사람의 첫 역할이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내 눈이 어두우면 스승을 만날 수 없고, 스승을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를 만나는 게 천운이고, 제자는 스승을 만나는 게 만복이라 할 수 있다."
불가에서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되려면 만겁(萬劫)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 말을 곰곰이 반추해 볼지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처럼 예전엔 선생님은 임금, 아버지와 지위가 같았다. 율곡 이이는 '학교모범(學校模範)'에서 스승을 쳐다볼 때 목 위를 봐서는 안 되고, 스승 앞에선 개를 꾸짖어도 안 되며, 웃는 일이 있더라도 치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할 정도이겠지만, 봉건시대 스승의 권위는 이처럼 절대적이었다. 이제는 교권 몰락을 운운하는 장탄식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쩌면 스승과 제자의 상하관계가 요즘은 눈높이 인권의 수평관계로 진화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지상에는 신과 항상 친교를 맺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접촉하러 오는 사람들을 신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귀한 영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을 요가에서는 구루(guru)라 칭한다.
구(gu)는 어둠을, 루(ru)는 밝음의 뜻으로 즉 구루라는 말은 '어둠을 추방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구루는 은총을 내리는 신의 힘이다. 이 은총으로 제자의 영적의식을 일깨워준다. 구루의 영적 에너지는 자연적인 통찰, 자연적인 영적 성장과 의식의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구루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일반적인 지도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는 단순히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영혼의 스승이다. 그는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그 영혼의 지식을 전수받는 자를 쉬스야(sisya), 제자라 한다.
쉬스야는 구루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될지어다. 자기 깜냥대로 자기 눈높이대로만 스승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는 자만이 자질 있는 쉬스야라 할 것이다.
단순히 현장에서 실전적인 지식의 습득만을 수단으로 하는 자, 그들은 곧 요가의 지식과 기능을 사고파는 장사꾼일 뿐이다.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관계일 때가 진정한 구루와 쉬스야의 관계라는 말이다.
옛 구루 중에서는 제자를 택할 때 인성(人性)이 함량 미달이면 천금을 지고 와도 허하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온다. 눈 밝은 스승이 그립고 제자다운 제자를 그리워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닐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나라에 인재가 없음을 한탄 말고, 네 스스로가 인재가 되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바, 그럼 먼저 스승다운 스승이 되도록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의 의미인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실천할지어다. 수행과 교육과 경영이 함께 하는 길,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 요가의 길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쌓이니 조금은 철이 드나 보다만 그간의 숱한 시행착오는 무엇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설익고 어설픈 요가지도자로 인해 상처받고 실망했을 사람들도 많았을 듯하여 얼굴이 화끈거려 옴을, 이 카르마를 이 업보를 어이할꼬.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세 가지 눈물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하나는 잘못을 뉘우치는 학생의 눈물, 상처를 어루만지며 부족함을 탓하는 부모의 눈물, 그리고 또 하나는 덕으로 가르치지 못했음을 탓하는 스승의 눈물이다. 이를 일러 교편삼루(敎鞭三淚)라 한다. 이제야 그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스승과 제자, 멘토와 멘티, 영혼의 동반자, 소울 메이트, 선물과도 같은 운명과도 같은 사람, 이 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난다(ananda) 즉 지복(至福)이다.
혼돈 속에서 혼자하는 수행이나 공부나 학습보다 눈 밝은 스승 모시고 도반과 함께하는 수행이, 공부가, 학습이 더욱 나를 무르익게 한다고 했다. 김삿갓의 "도움을 받으면 빨리 알게 되고, 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어진다(補知는 早知고 自知는 晩知라)"는 시를 되새겨 본다.
퇴계 이황은 "스승은 산 속 샘터와 같아서 제자들은 각기 필요한 만큼 마시고 간다"고 하였다.
중국 당나라 때 문인 한유는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며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면 누군들 의혹이 없겠는가? 의혹이 있으면서 스승에게 배우지 않는다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공자는 곤학론(困學論)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아는 사람이 으뜸이다.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 그다음이다. 깨닫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힘써 배우는 사람은 또한 그다음이다. 깨닫지 못했는데 힘써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장 하류이다. 알려주는 사람은 누군들 다 나의 스승이다"는 말을 남긴다.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채널이 3개 있으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선생이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된 듯한 시대가 되었지만, 공자가 언급한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은 여전히 새겨들을 말이다.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을 위해 몸소 제주도까지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추사는 한 폭의 그림으로 보답하였다. 이들은 사제 간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는 인간적인 만남을 이루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들의 만남은 사제지간을 떠나 결코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인간의 표상이다. 이런 참다운 사제 간의 모습은 인간의 삶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추사는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세한도(歲寒圖)라는 길이 남을 작품을 그렸다. 스승과 제자의 아릿한 정이 우리나라 국보 중에 국보인 세한도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발문에 "날이 차가운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써서 제자 이상적의 의리와 절개를 칭송했다.
오래전에 방영된 TV사극 '허준'에서 스승 유의태가 허준에게 죽기 직전 자신의 몸을 실험 수술 대상으로 내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 유의태의 모습은 비록 픽션이라 하더라도 강한 감동을 주었다. 허준은 그런 유의태라는 스승이 있었기에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될 수 있었다.
횡진이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哲理),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를 자연스레 읊조려 보게 된다.
'소설 속을 걷는 여행'의 작가 이순원 소설가는 초등학교 시절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상(賞)과는 인연이 없었다. 풀 죽은 제자에게 담임교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같은 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 피는 꽃이 있더라. 일찍 피고 지는 꽃이 눈길은 더 끌지만, 선생님 보기엔 큰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이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는 말로 제자를 격려한 기억을 떠올린다.
주로 성화(聖畫)와 신화를 그렸던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 안토니오 반 다이크의 명성이 그 스승 페테르 파울 루벤스 없이 가능했을까? 루벤스를 스승으로 모신 다이크였기에 영국 국정 수석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스승의 그림을 실수로 망친 제자들, 만회하려고 덧칠한 안토니오 반 다이크, 이것을 본 루벤스는 뭐라고 했을까. "내 그림을 자네가 더 좋게 고쳐 놓았군." 언어의 힘을 알고 말의 영향력을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스승을 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에게 처음에는 판단을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지혜를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은 여전히 볼 때마다 감동을 준다. 한 여학생이 흑인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른다.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해 'To Sir with love'를 부른 여학생이 바로 루루(Lu Lu)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움켜진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가난하고 거친 이스트엔드 지역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학교생활 이야기다. 주인공은 임시로 교직생활을 시작했지만 주어진 교육환경에서 진심으로 아이들과 소통한다. 이런 과정이 점차 사제 간의 감동적 교감으로 바뀌어 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영화 '뮤직 오브 하트'는 뉴욕 할렘가 초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취직한 로버타 과스파리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클래식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빈민가 아이들에게 13년 동안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불어넣는다. 다리로만 일어설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강하면 살 수 있다고, 진정한 스승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만드는 의사들이다. 헬렌 켈러를 절망에서 끌어올린 앤 셀리번처럼.
영화 '굿 윌 헌팅' 속 숀 맥과이어 교수가 인생의 조력자로서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건네며 주인공인 제자 윌 헌팅의 곁을 지키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훈훈한 사제지간의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달과 허균의 두터운 이해, 연암 박지원과 그 제자들, 외로운 유배자 처지의 정약용과 황상, 부처의 법을 전한 사리불 등 10제자, 공자의 도를 받든 안연 등 10철(哲), 예수의 진리를 전파한 베드로 등 12사도, 인도 고전 바가바드 기타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리쥬나와 크리슈나, 앞서 얘기한 추사 김정희와 이상적,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의 애절하고 두터운 스승과 제자 관계 등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관계이다.
살아가면서 세월 지나도 기억이 나는 스승과 기억에서 지워지는 스승은 어떤 차이가 날까? 맹자는 "빛나는 스승이 아니라 따뜻한 스승이 되라"고 한다. 요즘엔 참된 제자도 드물지만 참된 스승 역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마음 깊이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와, 제자를 진심으로 아끼는 스승의 만남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사제관계가 시대를 뛰어넘는 울림을 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근래 수련 현장에서는 '스승' 대신, 생활 속에서 요가의 길을 실천하고 지도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지도자'나 '강사', '선생님', '트레이너'란 호칭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또 제자란 말 대신에 회원, 수련생, 수강생, 학원생, 멤버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대중성과 보편성 상업성을 띠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문의 세계이든, 도(道)의 세계이든, 수행의 세계이든 멘토와 멘티, 영혼의 동반자, 소울 메이트라 대변되는 이런 관계는 앞서 열거한 예를 보듯이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운명과도 같은 극적인 만남이 될 것이다. 그런 만남 자체만으로도 그는 진정 축복 받은 자이며,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행을 지도하는 것은 수행의 또 다른 연장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지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의 수행에 소홀해질 수도 있다. 자기 자신만의 수행이야말로 균형 잡히고 건강한 삶의 체계를 이루는 길인데 말이다.
체력이든 이론이든 많은 수업지도를 했다면, 반드시 자신만의 수행, 공부, 학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심신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지치지 않고 싫증나지 않고 오래도록 요가를 즐기고 사랑할 수 있고 지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도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물 흐르듯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 했듯이 지도하는 그곳에서 역시 배움의 기회가 공존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특히 어울리는 곳이 바로 지도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행자는 천년을 살듯이 오늘을 살고, 내일 죽을 듯이 오늘을 산다'고 했다. 배우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성장을 약속한다. 그래서 선현들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다. 그걸 일러 평생학습이라고 하지 않던가.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말이 여기에 딱 와닿는다.
인생이란 살아가면서 스승이 되었다가 제자가 되었다가, 제자가 되었다가 스승이 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부단히 영혼을 뒤흔드는 스승을 찾고 또 기다린다. 생애 내내 그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깨달음에 이르는 고독한 행로에 내가 미숙하고 모르는 다른 분야에 문득 길잡이처럼 나선 사람, 등을 돌린 채 묵묵히 앞에서 걷는 사람을 자연스레 뒤따르게 된다. 그러다가 제자는 다시 스승이 된다.
어쩌면 역사란 이렇듯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의 행렬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유구한 세월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제지간 서로 마주 잡은 두 손의 온기를 따라 그 숱한 지혜와 지식, 문화와 문명, 지성과 덕성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이어지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비제도권 속 평생 강단에 선 사람으로서, 영원한 공염불일 수도 있겠으나 '눈 밝은 스승' 소리 한 번 들어 보는 것, 그리고 진실로 '신애(信愛)로운 제자' 몇몇 손꼽을 수 있기를 간구하고 소망해 본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앞으로도 지도자 대열에 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그동안 쌓아 놓은 조그만 내공이지만 힘닿는 데까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의 발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능력과 열정을 성심껏 그리고 진솔하게 뿜어내 보리라는 의지를 다져본다.
[기능인 혹은 선생님, 스승님]
누군가를 지도할 때, 누군가를 가르칠 때, 우리는 기능인이 될 수도, 선생님 될 수도, 스승님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뭔가를 지도한다고, 앞에서 뭔가를 가르친다고, 모두가 선생님이 스승님이 되는건 아니다.
깔랑한 지식 몇 알, 깔랑한 기능 몇 줄, 깔랑한 재능 몇 잎 앞세우며, 안하무인 무례한 처사, 안과 뒤 겉과 속 말과 행동이 불일치 되는 얄팍한 속내, 진정성 없는 눈빛, 자신감이 경망함과 시건방짐으로 비쳐질 때, 기능인은 기능인일 뿐, 선생님, 스승님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도하고 가르치면서, 진정으로 회원이나 문하생 수강생, 그 제자의 발전을 묵묵히 후원해 주고, 사랑의 눈빛으로 지켜봐 주며, 간절히 이끌어 주는 그런 선생님을 스승님을 만난다는 것, 축복 중에 축복, 하늘의 복을 타고난 것이리라.
우리 역시 기능인이 아닌, 선생님이 되고 싶은, 스승님이 되고 싶은, 존재의 이유이다.
우리는 기능인이기 전에 먼저 한 인간이 되어야 하리. 우리가 만약 남 앞에 서서 뭔가를 지도하려고 한다면,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선생님이 되고자 한다면, 스승님이 되고자 한다면.
■ 스승이란?
自天子至於庶人, 未有不資其師而成其名者也.
천자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이름을 이룬 자는 있지 않다.
- 이곡(李穀) 사설(師說) 가정집(稼亭集)
우리가 다 아는 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나에게 같은 존재이니 섬기기를 동일하게 하라는 뜻인데, 자칫 소홀히 여기기 쉬운 스승을 잘 섬겨야 함을 주로 강조하는 말이다.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말로 '국어(國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사람은 세 분의 덕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부모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배우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데, 그 배움을 채워주는 사람이 바로 스승인 것이다.
스승에 대한 논설로 가장 유명한 글로는 중국 당나라의 최고 문장가로 꼽히는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이 있는데, 그 글에서는 도(道)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 스승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의혹이 없을 수 없고, 그러한 의혹은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위의 글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었던 이곡(李穀)이, 임금의 스승이었던 전정부(田正夫)에게 작별하며 지어준 글의 일부이다.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름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스승의 가르침에 그 사람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말이니, 스승의 역할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임금의 경우에는 어떻게 길러지느냐가 백성과 나라의 운명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의 스승이 되어 가르침을 잘 전할 수 있을까? 이곡은 다음과 같은 말로 당부하고 있다. "남의 스승이 되려거든 반드시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해야 하니, 자신이 바르지 못하고서 남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凡爲人師, 必先正己, 未有己不正而能正人者也)."
배우는 사람은 나를 이루어 주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스승이 되려는 사람은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 스승의 자격
스승은 설법이 능숙해야 합니다. 설법이 능숙하다는 것은 제자를 이끄는 수단이 훌륭하며, 가르침의 의미를 제자에게 바르게 전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피곤해 하지 않고, 지칠 줄 몰라야 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더라도 피곤하지 않아야 하고, 가르침을 설하는 고행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소남 갈첸 곤다의'티베트 밀교의 명상법' 中에서 -
스승도 사람인데 어찌 지칠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스승의 자리는 남 달라서 초인적인 자기 관리도 필요합니다. 몸 관리, 마음 관리, 정신 관리, 얼굴 관리...
'설법'은 기본이고, 몸이 힘들면 마음으로, 마음이 힘들면 정신으로 견디어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늘 평화롭고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인적'입니다. 자격 있는 스승 한 사람 잘 만나면, 그를 따르는 제자도 자격 있는 사람이 됩니다.
고문관지(古文觀止) 8권 당문(唐文)
01. 사설(師說) / 한유(韓愈)
스승의 도(道)에 대하여 논함
이 편은 고문관지(古文觀止) 제8권 '당문(唐文)'의 첫 번째 편으로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이다. 설(說)은 논설문(論說文)으로 자기의 의견을 밝히는 글인데, 한유의 이 '사설(師說)'은 정연한 논술의 전개가 아주 뛰어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사설(師說)'은 한유(韓愈)가 사문박사(四門博士)로 있던 35세 때에 지은 것으로 스승의 임무와 본질을 글의 첫머리에서 밝히고, 배우는 자들이 교육의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을 망각한 채 학문을 하는 것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스승을 찾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공자(孔子)가 실천한 사례를 들어 올바른 사도(師道)를 밝히는 내용이다.
한유(韓愈)는 이 작품이 옛 스승의 도리를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어린 나이의 이반(李蟠)을 격려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古文觀止/卷8 唐文
師說 / 韓愈
古之學者必有師.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 惑而不從師, 其為惑也終不解矣.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란 도(道)를 전수하고 학업을 교수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의혹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의혹이 있는데도 스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의혹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註)
○ 道(도) : 유가(儒家)의 도를 말한다.
○ 受(수) : 授와 통용되어 가르치다.
○ 惑(혹) : 의혹. 미혹.
生乎吾前, 其聞道也, 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 亦先乎吾, 吾從而師之. 吾師道也, 夫庸知其年之先後生於吾乎. 是故無貴無賤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그가 도를 아는 것이 본래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며, 나보다 뒤에 태어났더라도 그가 도를 아는 것이 또한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그를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내가 도리를 배우는 것이니 어찌 그의 출생이 나보다 먼저인지 나중인지를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나이가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註)
○ 乎(호) : 于(於)와 같다.
○ 從而師之(종이사지) : 찾아가서 스승으로 삼다. 從師(종사)는 사사받다. 배우다.
○ 吾師道也(오사도야) : 내가 그에게 도리를 학습하다.
○ 庸(용) : 어찌.
○ 是故(시고) : 그러므로.
嗟乎. 師道之不傳也久矣. 欲人之無惑也難矣. 古之聖人, 其出人也遠矣, 猶且從師而問焉; 今之眾人, 其下聖人也亦遠矣, 而恥學於師. 是故聖益聖, 愚益愚, 聖人之所以為聖, 愚人之所以為愚, 其皆出於此乎.
아! 스승을 모시는 도리가 전해지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도다! 사람들이 의혹이 없기를 바라기가 어렵게 되었도다! 옛날의 성인(聖人)들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심했지만 그래도 스승을 찾아가 물었는데, 지금의 보통 사람들은 성인(聖人)만 모자람 또한 심하지만 스승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더욱 현명해지고 어리석은 이는 더욱 어리석어지니, 성인(聖人)이 현명한 이유와 어리석은 이가 어리석은 이유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註)
○ 師道(사도) : 스승을 모시는 도리.
○ 出人(출인) : 남보다 뛰어나다.
○ 猶且(유차) :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 眾人(중인) : 보통 사람. 일반 사람.
○ 下(하) : ~만 못하다.
愛其子, 擇師而教之, 於其身也則恥師焉, 惑矣. 彼童子之師, 授之書而習其句讀者也, 非吾所謂傳其道解其惑者也. 句讀之不知, 惑之不解, 或師焉, 或不焉, 小學而大遺, 吾未見其明也.
사랑하는 자기 자식에게는 스승을 골라 가르치도록 하면서 그 자신에 대해서는 스승에게 배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니 미혹된 것이로다! 저 동자의 스승은 그들에게 독서를 가르치고 구두(句讀)를 익히게 하는 자이니, 내가 말한 바의 도(道)를 전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스승이 아니다. 구두(句讀)를 알지 못하는 것과 의혹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은 스승에게 배우고, 어떤 것은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 작은 것은 배우고 큰 것은 포기하니, 나는 그런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
(註)
○ 句讀(구두) : 단어와 구절을 점이나 부호 등으로 표하는 방법. 讀은 구절 ‘두’
○ 或師焉(혹사언),或不焉(혹불언) : 어떤 것은 배우고 어떤 것은 배우지 않다. 구두를 알지 못하는 것은 배우고, 의혹이 풀리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 小學而大遺(소학이대유) : 작은 것은 구두를 말하며, 큰 것은 의혹을 푸는 것을 말한다.
巫醫樂師百工之人, 不恥相師; 士大夫之族, 曰師曰弟子云者, 則群聚而笑之. 問之, 則曰: 彼與彼年相若也, 道相似也. 位卑則足羞, 官盛則近諛. 嗚呼. 師道之不復可知矣. 巫醫樂師百工之人, 君子不齒, 今其智乃反不能及, 其可怪也歟.
무당과 의사, 악사와 온갖 공인(工人)들은 서로 스승으로 삼아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사대부(士大夫)의 무리들은 '스승'이라 하고 '제자'라고 하는 자가 있으면, 무리지어 모여서 그들을 비웃는다. 비웃는 까닭을 물으면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도(道)가 서로 비슷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으면 수치스럽고, 관직이 높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으면 아첨에 가깝다"고 한다. 아! 스승을 모시는 도(道)가 회복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다. 무당과 의사, 악사와 온갖 공인들은 군자들이 상대하려 하지도 않지만 지금 군자들의 지혜가 도리어 저들에게 조차 미칠 수 없으니 참으로 괴이하도다!
(註)
○ 百工(백공) : 온갖 공인(工人).
○ 相師(상사) : 서로를 스승으로 삼다.
○ 復(복) : 회복하다.
○ 不齒(불치) : 상대하지 않다. 멸시하다. 齒(치)는 나란히 서다.
聖人無常師: 孔子師郯子萇弘師襄老聃. 郯子之徒, 其賢不及孔子. 孔子曰: 三人行, 則必有我師.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성인(聖人)은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공자(孔子)는 담자(郯子), 장홍(萇弘), 사양(師襄), 노담(老聃)을 스승으로 삼았다. 담자(郯子)의 무리는 그 현명함이 공자에 미치지 못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못한 것이 아니요,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도 아니니 도(道)를 아는 것에 선후가 있고, 학술에 전공(專攻)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을 뿐이다.
(註)
○ 郯子(담자) : 담(郯)은 춘추시대의 작은 나라로 담자(郯子)는 담국(郯國)의 군주이다. 공자(孔子)가 담자(郯子)를 찾아가 알현하고서 그에게 옛 관제(官制)를 배웠다 한다. (春秋左氏傳 魯 昭公 17년)
○ 萇弘(장홍) : 동주(東周)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 공자가 그에게 음악을 배웠다.
○ 師襄(사양) : 노(魯)나라의 악관(樂官)으로 공자가 그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 老聃(노담) : 노자(老子). 공자가 노자에게 주례(周禮)를 배웠다.
○ 三人行(삼인행), 則必有我師(즉필유아사)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가운데 나보다 나은 사람의 좋은 점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의 좋지 않은 점을 골라 그것을 바로잡는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고 하였다.
李氏子蟠, 年十七, 好古文, 六藝經傳, 皆通習之, 不拘於時, 請學於余. 余嘉其能行古道, 作師說以貽之.
이씨(李氏)의 아들 반(蟠)은 나이가 열일곱인데, 고문(古文)을 좋아하고 육경(六經)의 경전(經傳)을 모두 두루 익혀, 시속(時俗)에 구애되지 않고 나에게 배우기를 청했다. 나는 그가 능히 옛 도(道)를 행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사설(師說)'을 지어 그에게 준다.
(註)
○ 李氏子蟠(이씨자반) : 이반(李蟠). 한유의 제자로 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19년(803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 육예(六藝) : 육경(六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경(樂經), 주역(周易), 춘추(春秋)를 말한다. 이 중 악경(樂經)은 실전(失傳)되었다.
○ 通(통) : 두루. 보편적.
○ 不拘於時(불구어시) : 당시 풍속에 스승을 구하는 것은 치욕으로 생각하는 좋지 않은 풍속이 있었다. 時는 시속(時俗). 당시의 풍속.
○ 嘉(가) : 칭찬하다. 가상하다.
○ 貽(이) : 전하다. 선사하다.
▶️ 到(이를 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이르다의 뜻인 至(지)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到자는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到자는 至(이를 지)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至자는 땅에 화살이 꽂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떠한 장소에 '다다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到자를 보면 至자와 人(사람 인)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이 어느 한 지점에 도착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人자가 刀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到자가 되었다. 착오라기보다는 발음을 위해 글자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到(도)는 '도착하다'의 말로 (1)관리(官吏)의 출근을 명부(名簿)에 표시하는 기호 (2)관리(官吏)의 끗수는 하나임 등의 뜻으로 ①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②닿다, 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③어떤 곳에 가다 ④주밀(周密)하다, 빈틈없이 찬찬하다(성질이나 솜씨, 행동 따위가 꼼꼼하고 자상하다) ⑤세밀(細密)하다 ⑥말하다, 설명하다 ⑦속이다, 기만하다 ⑧거꾸로 서다 ⑨거꾸로 ⑩근무(勤務) 일수의 계산(計算) 단위(單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계(屆), 붙을 착(着), 이를 지(至), 이를 치(致), 이를 진(臻), 이를 흘(訖)이다. 용례로는 목적한 곳에 다다름을 도착(到着), 학식이나 생각이 아주 깊음을 도저(到底), 정한 곳에 다다름을 도달(到達), 이르러서 옴이나 닥쳐 옴을 도래(到來), 가는 곳이나 이르는 곳을 도처(到處), 지방의 관리가 임소에 도착함을 도임(到任), 문에 다다름을 도문(到門), 배로 와 닿음이나 배가 와 닿음을 도박(到泊), 귀양가는 죄인이 배소에 도착함을 도배(到配), 공문 등이 와 닿음 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을 도부(到付), 세차게 몰려듦을 쇄도(殺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글을 읽을 때 다른 말을 아니하고 책에 집중하는 일을 구도(口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마음이 글 읽는 데만 열중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일을 심도(心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글을 읽을 때에 눈을 집중시키는 일을 안도(眼到), 와 닿음이나 닥쳐옴을 내도(來到), 늦게 다다름을 만도(晩到), 도달하지 못함을 부도(不到), 먼저 도착함을 선도(先到), 간절하고 빈틈없이 마음을 씀을 간도(懇到),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박도(迫到), 조심성이 두루 미쳐서 빈틈이 없음을 주도(周到), 어떤 한 곳이나 일에 닿아서 이름을 당도(當到), 아직 도착하지 아니함을 미도(未到), 생각이 미침을 상도(想到), 서로 미침을 상도(相到), 아주 정묘한 경지에까지 이름을 정도(精到), 감흥이 일어남을 흥도(興到), 근무 일수를 깍음을 삭도(削到),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도처낭패(到處狼狽), 가는 곳마다 살기 좋은 곳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도처청산(到處靑山), 빈한함이 뼈에까지 스민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일컫는 말을 빈한도골(貧寒到骨),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 한 결과를 일컫는 말을 성심소도(誠心所到), 물이 흐르면 고기가 다닌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나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수도어행(水到魚行), 주의가 두루 미쳐 자세하고 빈틈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주도면밀(周到綿密) 등에 쓰인다.
▶️ 整(가지런할 정)은 ❶형성문자로 束(속; 묶다, 긴장하다)과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가 합(合)한 글자 칙(敕; 몸을 긴장시켜 주의 깊게 함)이 되었다. 음(音)을 나타내는 正(정)은 바로잡다의 뜻으로 일을 가지런히 하다, 다스리다, 정돈하는 일을 뜻한다. 돈의 액수 아래에 붙이는 말이다. ❷회의문자로 整자는 '가지런하다'나 '정돈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整자는 束(묶을 속)자와 攵(칠 복)자,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攵자는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치다'라는 뜻이 있지만 '~하도록 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整자에 쓰인 束자는 나무를 끈으로 묶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묶다'나 '동여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 글자의 구성을 놓고 풀이해보면 整자는 '바르게(正) 묶도록(束) 하다(攵)'이다. 즉 整자는 흐트러진 것을 바르게 정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整(정)은 ①가지런하다 ②가지런히 하다 ③정돈하다(整頓--) ④정연하다(整然--: 가지런하고 질서가 있다) ⑤단정하다(端整--), 엄숙하다(嚴肅--) ⑥온전하다(穩全--), 완전무결하다(完全無缺--) ⑦정(끝수 없는 금액임을 나타내는 말)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齊(가지런할 제, 재계할 재, 옷자락 자, 자를 전)이다. 용례로는 흐트러진 것을 가지런히 바로잡음을 정리(整理), 정돈하여 갖춤을 정비(整備), 하나 또는 그것에 하나씩 순차로 가하여 이루어지는 자연수를 정수(整數), 건축을 하기 위하여 땅을 고르게 만듦을 정지(整地), 가지런히 바로잡음을 정돈(整頓), 정돈하여 가지런히 함을 정제(整齊),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음을 정연(整然), 가지런히 줄지어 섬을 정렬(整列), 옷깃을 여미어 모양을 단정히 함을 정금(整襟), 흠이 없이 미끈하게 다듬음을 정련(整鍊), 먼지를 떨어 내고 잘 정돈함을 정불(整拂), 격식에 맞게 잘 정돈 함을 정삭(整槊), 정돈이 잘 되어 몹시 아름다움을 정미(整美), 몸의 자세를 가지런히 함을 정용(整容), 지압이나 마사지에 의하여 등뼈를 바르게 하거나 몸의 컨디션을 좋게 함을 정제(整體) 아주 가지런함을 이르는 말을 정정제제(整整齊齊), 의논이나 언설이 사리에 잘 통하고 정연한 모양을 이르는 말을 이로정연(理路整然),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면 오얏 도둑으로 오해받기 쉬우므로 그런 곳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남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은 아예 하지 말라를 이르는 말을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등에 쓰인다.
▶️ 累(여러 루/누, 자주 루/누, 벌거벗을 라/나, 땅 이름 렵/엽)는 ❶형성문자로 纍(루)의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포갠다는 뜻을 가진 畾(뢰)의 생략형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累자는 '묶다'나 '여러', '자주'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累자는 田(밭 전)자와 糸(가는 실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累자의 소전을 보면 畾(밭 갈피 뢰)자와 糸자가 결합한 纍(여러 루)자가 그려져 있었다. 纍자는 베틀에 매달아 놓은 추를 그린 것이다. 베를 짜는 베틀에는 여러 개의 조작 도구가 있는데, 纍자는 그중에서도 실에 매달려 있던 추를 표현한 것이다. 천을 짜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纍자는 여러 번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여러'나 '자주', '묶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纍자는 후에 간략화되면서 지금은 累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累(루/누, 라/나, 렵/엽)는 실을 차례로 겹쳐 포개 나간다는 뜻으로 ①여러 ②자주 ③묶다 ④거듭하다 ⑤포개다 ⑥폐를 끼치다 ⑦더럽히다 ⑧연(連)하다(잇닿아 있다) ⑨폐, 누 ⑩연좌 ⑪연루(連累) 그리고 ⓐ벌거벗다(라) 그리고 ㉠땅의 이름(렵)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포개어 쌓음 또는 포개져 쌓임을 누적(累積), 여러 차례나 여러 차례에 걸쳐를 누차(累次), 부분 끼리의 합을 다시 몰아서 친 셈을 누계(累計),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그것에 대한 비율의 수를 상대적으로 더 줄임을 누감(累減), 선행에 방해가 되는 악행 또는 덕을 쌓음을 누덕(累德), 여러 달을 이르는 말을 누월(累月), 거듭하여 보태는 것을 누가(累加), 여러 백이라는 뜻으로 많은 수를 이르는 말을 누백(累百), 여러 사람 또는 여러 언어의 통역을 거침을 누역(累譯), 지위 등이 계제를 밟아서 차차 올라감을 누진(累進), 한 번 죄를 지어 처벌된 사람이 또다시 죄를 범하는 일을 누범(累犯), 인체의 기를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을 누기(累炁),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대하여 자기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누인(累人), 바둑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는 뜻으로 위태함을 이르는 말을 누기(累碁), 쌓아 놓거나 포개 놓은 알이라는 뜻으로 어떤 구성체 따위가 무너질 것처럼 몹시 위태로운 형편을 이르는 말을 누란(累卵), 남의 범죄에 관계됨을 연루(聯累), 남이 저지른 죄에 관련되는 것을 연루(連累), 재앙을 더함을 가루(加累), 다른 일이나 사물에 얽매임을 계루(繫累), 살아 나가는 데 얽매인 너저분한 세상일을 속루(俗累), 몸을 얽매는 세상의 온갖 괴로운 일을 물루(物累), 번거로운 걱정과 근심을 번루(煩累), 물건을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든 모양을 봉루(蓬累), 스스로 저질러서 만든 잘못을 흔루(釁累),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아주 많은 재산이나 재물을 이르는 말을 누거만재(累巨萬財), 헛된 이름을 구하여 스스로 재난을 초래한다를 이르는 말을 허명자루(虛名自累), 살아 나갈 걱정 곧 먹고 살 근심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구복지루(口腹之累), 아주 적은 것이라도 쌓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된다를 이르는 말을 수적촌루(銖積寸累) 등에 쓰인다.
▶️ 卵(알 란/난)은 ❶상형문자로 닭 따위 새의 알의 뜻으로 쓰이지만 본디는 물고기나 개구리의 알과 같이 얽혀 있는 모양의 것이라고도 한다. ❷상형문자로 卵자는 '알'이나 '고환', '굵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卵자는 '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알이라고 하기에는 모양이 다소 이상하다. 왜냐하면, 卵자는 새가 아닌 곤충의 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곤충은 나무나 풀줄기에 알을 낳는 습성이 있는데, 卵자는 그것을 본떠 그린 것이다. 그래서 卪(병부 절)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卵자는 곤충의 알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卵(란)은 ①알 ②고환(睾丸), 불알 ③기르다, 자라게 하다 ④크다, 굵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알에서 새끼를 까는 일을 난생(卵生), 달걀 노른자를 난황(卵黃), 알집 안에서 알세포를 둘러싼 주머니를 난포(卵胞), 달걀과 같은 모양을 난형(卵形), 동물 암컷의 생식 기관을 난소(卵巢), 알 속의 노른자위를 둘러싼 빛이 흰 부분을 난백(卵白), 알 모양으로 둥그스름하게 만든 등을 난등(卵燈), 밀가루에 계란의 흰자위를 섞어서 반죽하여 얇게 썰어서 끓인 음식을 난면(卵麵), 알 모양으로 된 작은 술잔을 난배(卵盃), 어미가 알을 낳거나 알을 품는 자리를 난좌(卵座), 닭의 둥지에 넣어 두는 달걀을 소란(巢卵), 닭의 알을 계란(鷄卵), 알을 낳음을 산란(産卵), 물고기의 알을 어란(魚卵), 알씨가 아기집으로 가기 위해 알집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을 배란(排卵), 명태의 알을 명란(明卵), 누에의 알을 잠란(蠶卵), 식용에 쓰는 달걀이나 그밖의 알을 식란(食卵), 알을 낳게 하여 거둠을 채란(採卵), 암새가 알을 품어 따스하게 하는 일을 포란(抱卵), 영양 불충분 등으로 껍데기가 무른 알을 연란(軟卵), 새의 알처럼 생긴 돌을 석란(石卵), 속이 비어 있는 알을 허란(虛卵), 달걀 위에 달걀을 포갠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이르는 말을 난상가란(卵上加卵),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포개어 놓은 알의 형세라는 뜻으로 몹시 위험한 형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누란지세(累卵之勢), 알을 쌓아 놓은 것같이 위태롭다는 뜻으로 몹시 위태로움을 이르는 말 위여누란(危如累卵),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속담으로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덕을 못 본다는 말을 계란유골(鷄卵有骨), 계란으로 돌벽을 치듯이란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일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이란격석(以卵擊石),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어리석은 짓을 이르는 말을 이란투석(以卵投石), 새집이 부서지면 알도 깨진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 또는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이르는 말을 소훼난파(巢毁卵破), 산을 떠밀어 달걀을 눌러 깨뜨린다는 뜻으로 일이 아주 쉬움을 이르는 말을 배산압란(排山壓卵), 큰 산이 알을 누른다는 뜻으로 큰 위엄으로 여지없이 누르는 것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태산압란(泰山壓卵), 달걀을 보고 닭이 되어 울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성급한 것을 이르는 말을 견란구계(見卵求鷄)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