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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행복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의
최소한의 행복마저 빼앗아 버린
반인륜적 풍습 '순장(殉葬)'
위무자(魏武子)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의 진문공(晉文公)이,
20년의 망명 생활 끝에
24대 군주에 오르도록 보좌한
5현신(五賢臣) 중 한 사람인
대부(大夫) 위무자(魏武子, 魏犨)가 있습니다.
젊어서 부인과 사별(死別)을 한 위무자에게는
나이 들어 얻은 조희(祖姬)라는
어린 첩실이 있었는데,
젊고 예쁜 외모에 총명하면서
다정다감한 그녀를
위무자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병석에 누워
조희의 정성 어린 간병을 받던 위무자는,
친자식 하나 없는 어린 조희가,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 살아갈지
크게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두 아들 위과(魏顆)와
위기(魏錡)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조희를 재가(再嫁)
시키도록 부탁을 합니다.
위과(魏顆)와 위기(魏錡)
병석의 아버지를 잘 보살펴주는
어린 계모(繼母)를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두 아들은
흔쾌히 동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이 왔다 갔다 하던 위무자는,
죽어서 혼자 저승으로 가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두 아들을 불러
"내가 죽거든 혼자 외롭지 않도록
조희도 함께 묻어 다오"라고
다시 부탁을 합니다.
위무자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들은 조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위무자가 정신이 맑았을 때 한 말을
따르기로 하고,
좋은 혼처를 찾아 시집을 보내줍니다.
BC 594년 두 아들은
진(秦)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하였는데,
첫 전투에서 진(秦)나라 명장
두회(杜回)에게 대패를 당합니다.
20년의 망명 생활 끝에
62살에 제위에 오른
진(晉)나라 24대 군주 진문공(晉文公)
"청초파(靑草坡, 청초고개)"
군영으로 후퇴하여
자정이 넘도록 계책을 고민하던 위과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청초파(靑草坡, 청초고개)"라는
소리를 계속 듣습니다.
다음날 아침 위과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동생 위기는,
근처에 풀이 우거진 청초파"라는
언덕이 있다고 했으며,
이를 계시(啓示)로 생각한 두 사람은
"청초파"에서 일전(一戰)을 벌이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군사들을 청초파에 매복시켜 놓고
두회(杜回)의 군사를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는데,
두회가 백근이나 되는 큰 도끼를
휘두르며 밀고 나오자,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히고
위과는 또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주변 일대에는 풀을 엮어
덫이 만들어져 있었고,
말을 타고 쫓아오던 두회가
덫에 걸려 쓰러집니다.
꿈에 나타나 상황을 설명해 주는 노인
위과(魏顆)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두회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으며,
전투에서도 대승(大勝)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날 밤 위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대가 시집보내 준
조희의 친정아버지요.
그대가 내 딸을
순장(殉葬)시키지 않고 살려 주어
딸이 잘 살게 되었기에,
풀을 엮어(結草, 결초) 덫을 만들어
그 은혜에 보답(報恩, 보은) 한 것이오."
이것이 바로 '죽어서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라는
사자성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유래로,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역사서
'춘추(春秋)'에 대한 주석서(註釋書)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에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결초보은(結草報恩)
현대의 순장(殉葬) 발굴 작업
'순장(殉葬)'은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게 종속되어 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고대의 장례 습속을 말합니다.
순장은 신분 사회가 형성되면서,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삶과 권력이 계속된다는
믿음을 가진 권력자들이,
후세(後世)에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으로,
고대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에서 나타난
장례 풍습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오리엔트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부터
순장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상왕조
(商王朝, BC 1600년경∼BC 1046년)부터
순장(殉葬) 풍습이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35구 인골이 발견된
고대 이집트 아하(Hor-Aha)왕의 무덤
어찌 보면 이 같은 순장은,
죽은 권력자가
사후에도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은 무시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극단적 이기주의(利己主義)의
결과물이라 하겠는데,
우리의 고대 문화에서도
없지는 않았지만,
고대 중국의 왕실에서는
오랫동안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순장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나 싫어할 일이었는데,
고대 발칸반도 동남부의
트라키아(Thracia) 부족의 경우,
남편이 죽으면 여러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받은 아내를 뽑아
함께 매장했으며,
선택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치욕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순장(殉葬)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또 피하고자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
한나라 때의 '용(俑)'
따라서 세월이 흐르면서
순장이 가혹하고 잔인한 풍습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중국의 경우 주왕조
(周王朝, BC 1046년 ∼ BC 256년) 때부터
사람의 대체 수단으로,
'용(俑)'이라는 제례용 인형을
묻는 방법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이 날아가는
부장품(副葬品) 대신에,
실물보다 작은 상징적 의미를 담은
명기(明器,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기물)를 만들어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힘과 권력을 지닌
황제들의 경우
크게 달라지지가 않았는데,
진(秦)나라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진목공(秦穆公)은,
유능한 신하들을 포함하여
무려 177명을 순장하였으며,
때문에 진(秦)나라가
크게 힘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병마용갱(兵馬俑坑)
또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만들어내고,
오늘날 병마용갱(兵馬俑坑)이라는
거대한 유적까지 남겨준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은
그 규모만으로도 엄청납니다.
197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착수했지만
아직까지 진행 중인 진시황릉은,
분묘(墳墓)만 높이 47m,
둘레 1,410m로 엄청난 규모인데,
신하들은 물론 후궁들과 자식들,
진시황릉을 축조한 장인(匠人)과 노예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병마용갱에서는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함께 묻힌, 진흙으로 만든
병사 도용(陶俑)과
진흙으로 만든 말 도마(陶馬)도
7,000여 개 발견되었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진시황릉
시안에 갔을 때
집사람과 같이
진시황릉에 올라갔다.
진시황릉의 병마용(兵馬俑)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은
누가 자신과 함께 묻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으니,
특별히 생전에 지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순장 대상자는
후대(後代)가 결정하였는데,
따라서 순장은 선대(先代)의
뒤를 이은 권력자가,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장애가 될 인물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진시황의 열여덟 번째 아들이자
서자(庶子)였던 호해(胡亥)는
자신의 황권 강화를 위하여,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군, 재상 등 관료들은 물론
형제와 누이 20여 명도
진시황과 함께 묻었으며,
이후로도 배다른 형제들과
그들의 후견인이 될 수 있는
후궁(後宮), 후처(後妻)들을
순장 대상으로 하는 일은
많이 일어났습니다.
순장제를 폐지한 진헌공(秦獻公)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 대신에 제례용 인형인
'용(俑)'을 묻는 습속(習俗)도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순장은 반인륜적 풍습"이라는
유교(儒敎) 학자들의 비판과
"이런 일을 하는 놈들은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는
엄청난 저주를 담은 공자(孔子)의 발언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BC 384년
진나라의 19대 군주 진헌공(秦獻公)은
순장을 법률로 폐지하기도 했지만,
앞서 말씀드린 진시황 사례는 물론,
삼국시대 조조(曹操)의 무덤에서도
순장된 여자 유골이 발견되고,
손권(孫權)은 자신이 아끼던
장수 진무(陳武)가 전사하자,
진무의 애첩을 자결토록 하여
순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이후로도 가진 자들의
순장 풍습은 계속되었습니다.
인(仁)을 최초로 제시한 공자의 가르침
요(遼)나라 개국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그리고 위진남북조시대
(魏晉南北朝時代)를 거치면서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佛敎)가
민간에 널리 퍼지고,
유교(儒敎) 또한 체제를 갖추어
다시 정비되면서,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되고,
6세기 경인 수(隋)나라 때는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들의
순장(殉葬) 문화는 변함이 없었고,
이후 북방 민족의 정복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순장 문화가 다시 부활합니다.
916년 거란족(契丹族)의 추장이었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내몽고(內蒙古)를 중심으로
북방을 통일하여
요(遼)나라를 세우고,
926년에는 발해(渤海)까지 멸망시켜
만주 전역(全域)을 장악하는
제국을 건설합니다.
요(遼)나라 2대 황제
야율덕광(耶律德光)
그러나 태조(太祖)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중에
부여부(扶餘府)에서 병사합니다.
그리고 순흠황후(淳欽皇后)
술률평(述律平)의 신임을 받았던
둘째 아들 야율덕광(耶律德光)이
황위에 오르는데,
장례식 도중 순흠황후가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신하들을 순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순장의 풍습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들만 당할 수도
없었던 신하들은,
태조(太祖)와 가장 가까웠던
순흠황후부터
먼저 순장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순흠황후는
야율덕광이 너무 어려(당시 24살)
자신이 수렴청정을 해야 하기에
죽을 수는 없고,
대신 자신의 팔 하나를
순장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잘라
무덤에 넣었습니다.
태조(太祖) 야율아보기와
순흠황후(淳欽皇后) 술률평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그러자 어쩔 수 없었던 신하들은
순흠황후의 팔 하나와 함께
순장을 당하는데,
이후 순흠황후는 "단완태후"(斷腕太后,
팔을 끊어버린 태후)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순장 문화를 안고 있던
요(遼)나라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동안 중국 대륙에서 사라졌던
순장 문화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다행히 한족(漢族) 유학자(儒學者)와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로
순장 문화의 부활 조짐은
가라앉게 됩니다.
이후 몽골족의 나라인 원(元)나라 때
순장 문화가 다시 부활하였으며,
이는 다음 왕조인 한족의
명(明)나라까지 이어지는데,
이로 인하여 조선(朝鮮)의 여인들이
순장을 당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조선 여인
여비(麗妃) 한씨(韓氏)
영락성세(永樂盛世)의 주인공인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1407년 황후 서씨(徐氏)를 잃었는데,
새로운 황후 간택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조선에서 8명의 공녀(貢女)를
데리고 가서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공녀(貢女)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며
처참하게 타국 생활을 해야 했는데,
1421년
2,800여 명의 후궁과
궁녀, 환관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한 '
어여지란(魚呂之亂)'이 끝날 때에는
겨우 두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1424년
영락제가 죽으면서,
살아남았던 공녀 출신의
미인(美人) 최씨(崔氏)와
여비(麗妃) 한씨(韓氏)도
30여 명의 다른 후궁(後宮)들과
함께 순장을 당합니다.
강제로 자살을 하고 순장이 되었던
황제의 여인들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
아바하이(阿巴亥)
이후 1464년,
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가
죽음을 앞두고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유조(遺詔)를 내리면서
명나라에서 순장 제도는 사라지는데,
1616년 만주족(滿洲族)의
청(淸)나라가 등장하면서,
순장(殉葬) 문화가 다시 시작됩니다.
1626년
청(淸)나라 건국 황제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여행 중 사망을 합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죽기 전에
대복진(大福晉, 일부다처제의 正後)
아바하이(阿巴亥)를
순장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바하이(阿巴亥)는
이를 따르려 하지 않았는데,
연맹 지도자들이
죽은 황제의 명을 따르라고
강요하고 질책하자,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르게 됩니다.
청나라 2대 황제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
그리고 예복으로 갈아입고
장식으로 치장을 한 후,
연맹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세 아들을
잘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고는,
지하로 내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바하이(阿巴亥)의 순장은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유언 때문이라기보다는,
여덟째 아들로 2대 황제가 되는
홍타이지(皇太極)가 꾸민
계책이었다는 해석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홍타이지는 평소에도
계모인 아바하이(阿巴亥)를
무척 싫어했는데,
무엇보다 자신의 황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그녀의 아들로 자신의 이복동생인
아지거(阿濟格, 12남)와
도르곤(多爾袞, 14남),
도도(多鐸, 15남) 형제를
제압하기 위하여,
순장 제도를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타이지의 견제를 받은
아바하이(阿巴亥)의 친자 3형제
강희제 때 황후로 추존되는
황귀비(皇貴妃)
그리고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가
1661년 23살의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했을 때에는,
후궁인 정비(貞妃) 동악씨(董鄂氏)가
순장을 당합니다.
순치제(順治帝)는 어린 나이였지만,
4명의 정실(正室)과 30여 명이 넘는
후궁(後宮)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 사람만 순장된 것에 대하여
후대에 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여러 중드의 소재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순치제가
지극히 총애한 황귀비(皇貴妃)
동악씨(董鄂氏) 때문에,
순치제가 일찍 죽었다고 생각하는
황태후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황태후의 원한이
동악씨(董鄂氏) 집안에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황귀비(皇貴妃)의 사촌 동생인
정비(貞妃) 동악씨(董鄂氏)가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62년간 제위를 지킨
강희제의 젊은 시절
이렇게 만주족(滿洲族)의 나라
청(淸)나라 때
순장 제도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1674년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가
칙령(勅令)으로
순장제 폐지를 선포하면서
순장 제도는 사라집니다.
따라서 정비(貞妃) 동악씨(董鄂氏)는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순장을 당한
황궁의 여성이 됩니다.
이전에도 황제의 순장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순장제는 계속 살아났는데,
강희제(康熙帝) 때
끝이 날 수 있었던 것은,
강희제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62년 동안 장기간
황위를 지키면서,
거의 3세대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황궁의 장례(葬禮)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정착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후 다시 일어나는 일도
없어집니다.
옮겨온 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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