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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늑대가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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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한 밤 중에 미친듯이 이토록 열불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지금 내 방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라 이 말씀이야. 내가 12시가 넘은 이 시간에, 보통 아이들이라면 공부에 지쳐 앓고 있을 그 귀중한 시간에
컴퓨터를 끄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안에 다 들어있으니까. 사실은 12시 땡 하면 컴퓨터를 끄고 오늘은 기필코 일찍
자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굳은 다짐을 가득 안은 채 치밀하게도 불을 끄고 죽은 듯 컴퓨터를 키는 스릴감이란 정말 짜릿했지.
행여나 엄마가 들어올까봐 문까지 잠궈두고 새해가 밝은 첫날부터 한유빈의 수난은 시작된다.
사건의 발단은 2009년 1월 1일 새벽 12시경부터다.
점점 졸려와 감기는 눈꺼풀을 뜨며 시계를 바라보니 11시 59분이다. 2009년이 되기 딱 1분이 남은 시간이다. 나는 여유롭게
채팅방을 탐색하다가 나와 함께 2009년을 맞이하고 헤어질 기분 좋은 동지가 있을 것 같은 제목을 발견했다. 그 이름은
[들어오지마라 책임못진다]
............푸하하하.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채팅방을 개설해 놓고 들어오지 말라니. 웃기지 않을 수 없다. 이 깜찍한 제목을
가진 채팅방이 마음에 들어 거침없이 그것을 클릭했다.
채팅방 안의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4명. 그것도 특이하게 남자들만. 뭐야 이거. 남자들끼리......설마........설마!
팬픽에 중독됐다......하하하.
[재간둥이:우와아아아아악!!!!! 여자다!!!!! 안녕!!!!!!!]
[여우:아.....안녕하세요^^]
[이하:.........일났군] - 이새하
[여우:네? 이하님도 안녕하세요^^]
[이하:어]
솔직히말하자면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잠수라도 타는 듯한 나머지 한 명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아무런 글자도 치지 않았다.
그리고 짧은 몇마디가 지난 후 이하라는 사람도 잠잠한 듯 하다. 그러니까 사실상 따져보면 꽤나 활발한 듯한 재간둥이와
나만 신나게 놀고 있을 뿐이다.
[여우:저 조금 있다가 나가요^^]
[재간둥이:에이~가지마>< 나랑 놀아줘야지]
[여우:사실은 오늘 2009년 맞이만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재간둥이님이 너무 재밌으셔서 좀 더 있었던 거예요]
[재간둥이:지금 튕기는 거야? ㅠㅠ나 슬픈데.....그래도 꼭 가야 되면 안녕! 난 쿨하니까]
[여우:재간둥이님은 쿨한 남자!]
[재간둥이:여우랑 놀아서 즐거웠어~^^]
그렇게 더 이상 내가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 두 남자를 둔 채 재간둥이와 떠들석한 인사를 마치고 나가기를 클릭하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채팅창에 뜨는 글자.
[늑대:못나가^^]
[여우:예?]
처음부터 한 글자도 내비치지 않던 남자가 드디어 키보드에 손을 올린 듯 하다. 늑대라.......나랑 비슷한 부류군.
저 어울리지 않은 이모티콘은 대체 뭐란 말인가.
[늑대:눈 없어?^^]
[여우:네? 무슨 소리예요. 은근히 말투가 기분 나쁘시네요]
[늑대:들어오지 말랬지^^]
[여우:근데 들어와서 잘 놀았잖아요. 뭐가 문젠데요? 어차피 늑대님은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늑대:책임 못진다고 들어오지 말랬는데 니가 들어온거야. 들어왔으면 못나가. 보내줄 때 까지^^]
[여우:뭐라고요?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네. 무슨 그런 억지가 다 있어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늑대:좋은말 할 때 붙어 있어라 한유빈^^]
...........이거 지금 뭐라는 거야. 잠깐만.......진짜 잠깐만..........당신 방금 뭐라 그랬어?
좋은말 할 때 붙어 있어라 한유빈. 한유빈. 한유빈. 한유빈. 한유빈.........................!!!! 이 새끼 날 어떻게 아는거야!
아무리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의 인연은 참으로 악연이 아닌가싶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
내 이름을 읊조리는 늑대 놈이다. 허 하고 터져나오는 어이없음에 인상을 쓴채 내 이름이 띄워져있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저 인간 대체 누구야.
[여우:저기요. 나 알아요?]
[늑대:모르는데^^]
[여우: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데요]
[늑대:글쎄^^]
[여우:아씨. 이게 끝까지 반말질이네. 야. 너 잠수타더니 내 신상이라도 캤냐? 엉?]
[늑대:생각보다 똑똑하네^^]
허....허허허..진짜 어이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라는게 이런거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컴퓨터 키보드를 부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 기분에 휘감겨 모니터에 띄워진 '늑대' 라는 두 글자만 노려보았다. 하긴. 이름 하나 알아낸다고 뭐 달라질 게 있다고.
나는 쉼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두둑한 배짱을 내밀며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타닥 타닥─
[여우:야. 너 몇살인진 모르겠는데 나도 이제 못참아. 웬만하면 매너 지키는데 말 놓는다]
[늑대:그러시든지^^]
[여우:그깟 이름이 무슨 대수라고 엄폰데? 내가 그런거에 쫄기라도 할 줄 알았나보지? 난 더 이상 너랑 할 말 없으니까 나간다]
[늑대:한유빈^^]
[여우:뭐!]
[늑대:캠 사진 보내봐^^]
[여우:저게 미쳤나]
[늑대:면상 좀 보자^^]
오호라. 걸려들었다 이 말씀이야. 달랑 이름 하나 알고 얼굴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설치고 난리야. 딱 보니 내 나이 또래 같구만.
나는 실실 웃으면서 타자를 쳤다.
[여우:니 면상이나 보내]
[늑대:그럼 니꺼 보낼래?^^]
[여우:엉]
어떤 미친 놈이 진짜 사진을 줄까나. 나는 속으로 큭큭큭 웃으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보나마나 나가거나 욕이나 읊조리겠지.
2009년부터 진짜로 이상하고 재밌는 놈을 만났다며 재수좋은 2009년을 기약하고 있을 그 때였다.
※※※늑대 님으로부터 파일이 전송되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
일순간 웃음이 가신 채 키보드에 올려 놓았던 손을 굳혀버리는 나였다. 저거 진짜 미친 놈 아니야? 심난한 기분으로 솔직히
떨리는 손가락을 힘겹게 이끌어 YES로 가져갔다. 쿵쾅쿵쾅........에이. 설마. 그래도 진짜 자기 사진이면 마음껏 비웃어준 뒤
튀면 되니까.......하하......하하하하하! 그렇지! 그런 방법이 있었네. 부들부들..........그리고 클릭!!!!!!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바탕의 채팅창 대신 어두운 듯한 검은 배경에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웬 샤방이 사진이다.
허..........허허허허허..............이거 진짜 살다 살다 뭐 이런 놈을 다보네.
[여우:돌았니?]
[늑대:니 사진 보내라?^^]
[여우:진짜 웃겨서. 이 양심에 털난 자식아]
[늑대:사진만 보고 튀면 죽여버린다^^]
[여우:너 진짜 한심한 새끼구나. 이게 어디서 사진 도용을 하고 앉았어!]
[늑대:하─도용?^^]
[재간둥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수 타던 녀석들의 자음 남발에 이어 소위 말하는 '얼짱' 사진을 도용해 낸 놈을 나 역시 속으로 맘껏 비웃어주었다.
저 사진은 말이다. 우리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고등학교의 여자들이 동경한다는 '서 휘 한' 님의 사진이거든? 감히 너같은 빌어먹을
늑대자식이 도용할 만한 사진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신성한 사진을 더럽히다니, 진짜 미친 놈, 돈 놈, 맞아 죽을 놈이다.
그리고 진짜 이상한 것이 대체 '^^' 이 표시는 계속 왜 붙이는 건데. 말투만 들으면 진짜 툭툭 정 떨어지는 놈이라서 그런가.
하여튼 이상한 그 놈은 잠시 동안 말이 없더라.
[늑대:야. 오빠 화나기 전에 사진 보내 봐봐^^]
[여우:벌써 화 난것 같은데? 그리고 너. 무슨 얼어죽을 놈의 오빠야! 얼굴도 호러같이 생겨먹을 것 같은 놈아]
[늑대:.............^^]
[여우:그 웃음 표시. 진짜 안 어울리거든? 저게 너면 내가 니 소원 다 들어 준다. 그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것아]
[늑대:알았다^^]
[여우:뭘 알았어?]
[늑대:캠 켜라^^]
[여우:뭐?]
[늑대:캠 키라고 썅년아]
어느순간 사라진 웃음 이모티콘과 거친 말투가 드러난다. 허...............아무래도 내가 놈의 성질을 돋군듯 하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캠은 안 키면 그만이고 저 자식은 내가 누군지 모르고.......아니지. 내가 캠 켜서 저 시건방진 놈을 비웃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내 캠은 쳐박아두면 내 얼굴이 공개되지 않는 것은 당연사고, 난 그저 늑대자식의 얼굴이나 감상하다 컴퓨터를 끄면 된다 이거야.
[여우:오냐]
[재간둥이:워워워! 오예~~~~]
[이한:일 났네. 일 났어]
[재간둥이:이곳은 피씨룸~~~피씨룽~~~~예에에에~~~~~~]
[이한:........]
[재간둥이:아싸아싸! 2009년부터 캠질이구나! 근데 못생겼으면 어떡해?]
[이한:눈 버리는거지]
[재간둥이:아.....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결심이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나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오징어 땅콩 과자를 챙겨들고 돌아왔다. 12시 취침?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오냐 그래. 갈때 까지 가보자 이거야. 내가 너를 마음껏 비웃어 주마.........하하하하하!!!!!!!
드디어 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구나. 그리고 이어서 상대 캠으로 포착 된 장면. 그곳은 매우 어두운 장소였다.
물어보면 두말 할 필요 없이 피씨방이로구나. 이 한 밤중에 참 대단한 놈들이야. 아마도 셋 다 같이 있는 모양이지. 먼저
시끌벅적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재간둥이 이려나. 그리고 이어서 이한으로 추정되는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우왓 우왓! 진짜 하는거야? 오예~~~~신난다!!!"
"야. 너 진짜 할거냐?"
그리고 들려오는 것은 묵묵부답이다. 내 캠은 이미 나의 신성한 오징어 땅콩을 찍고 있다. 이제 귀찮게 타자를 칠 필요 없으니
아리따운 목소리로 대화를 대보자꾸나 늑대새키야.
"늑대님. 아니지~~~서휘한랬나? 그 잘난 면상 좀 봅시다?"
"못 믿냐"
역시나 웃음표시는 가식이였던거지. 그렇게 자상하게 웃어 줄 목소리가 아니였다. 내 예상대로 뚝뚝 끊어지는 듯한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목소리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저..............솔직히 괜찮았어. 큼.
"그럼 내가 순순히 속아줄라고?"
"야. 오징어땅콩 치워라?"
"싫은데. 그 쪽 면상 먼저 봐야지. 그 잘난 얼굴이 어딨나. 왜 배경만 찍으셔. 누가 피씨방인거 몰리?"
"한휘야! 얘 목소리 은근 맘에 들어!"
"아 씨. 좀 꺼져"
"이렇게 당찬 아가씨가 니 얼굴보고 어떻게 달라질라나? 푸하하하──완전 기대!!!"
"재간둥이?"
"오예. 역시 여우는 다르구나!"
그렇게 오두방정에 쾌활한 아이는 여기서 너 밖에 없을 것 같구나 간둥아. 재간둥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휘파람을 불어댄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말씀이야. 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놈의 목소리.
"야. 캠 돌려"
"예썰!"
재간둥이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캠이 돌아간다. 돌아간다. 즐길 시간이 왔구나. 돌아간다~~~~~~~~.....................풉.
푸하학!!!!!!!!! 나는 그 자리에서 오징어 땅콩과 함께 들이키던 물을 쏟아버렸다.
"우우......쿨럭쿨럭!"
"아직 못 믿으시나?"
"쿨럭.......헐........이 자식아. 합성하지마! 쿨럭!"
"이 백프로 맞아 떨어지는 싱크로율이 니 눈에는 안보이나봐?"
"너......너........진짜..........진짜.............? 진짜 서휘한이야?"
"그럼 가짜도 있나"
거짓말처럼. 정말로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할 정도로 놀랍게 늑대의 캠은 서휘한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새까만 머리하며 여고생들이라면 당연지사 동경하는 그 분! 그 분이 내 앞......아니지.......내 방 모니터에
그려지고 있다. 뭔지 모를 음료수를 마시면서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화면을 꼴.......그렇지.......꼴아보시는 서휘한씨.
덜덜덜.........두근두근두근.........떨려서 말도 안 나오네.
"그럼 이제 한유빈 얼굴이나 볼까"
"아,안녕히 계세요!"
"음화고 3학년 5반 31번 여우 한유빈 얼굴. 진짜 궁금하다?"
"............"
나는 그리고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다. 음화고 3학년 5반 31번 한유빈..............그 말이.........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는
그 말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기분을 가진 채........그렇게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꾸지
못한 채.
--------------------------댓글사랑 손팅사랑
첫댓글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