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열 다섯 번째로 구리 동구릉의 휘릉(徽陵)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구리 동구릉
휘릉(徽陵, 인조비 장렬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688년(숙종 14)
왕릉 형식 : 단릉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혼유석(魂遊石)은 봉분 앞에 놓인 넓고 네모난 돌로, 죽은 왕의 혼령이 나와서 쉬고 노니는 자리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왕릉의 봉분 바로 앞에는 보통 혼유석이 놓이고, 그 아래에는 장명등과 문·무인석 등이 배치된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올리는 제사상은 아니며, 혼유석 자체는 왕의 혼령을 위한 공간을 상징하는 석물이다. 겉으로는 커다란 돌판처럼 보이지만 아래에는 고석(鼓石)이라 부르는 받침돌을 두어 받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왕릉에서 봉분 앞에 놓인 커다란 네모난 돌을 보면 “혼유석, 즉 왕의 혼령이 내려와 쉬는 곳을 상징하는 석물”이라고 볼 수 있다.
▷ 휘릉(徽陵) 이야기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석상(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태조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휘릉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翼廊)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장렬왕후 조씨(재세 : 1624년 음력 11월 7일 ~ 1688년 음력 8월 26일)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인조 13)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慈懿王大妃)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1688년(숙종 14)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예송(禮訟)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되어 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계모)가 되는 자의왕대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예로 정하였고, 이로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15년 뒤인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이를 제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첫댓글 이제는 드론샷은 필수여
언젠가 드론 과정 꼭 배우고싶네요
자격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