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박은식
이 책은 얼마 전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위서란 소리는 아니다. 그저 지나가면서 이 책을 소개했는데,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의 지은이 김삼웅이 이 <한국통사>에 대한 추천의 글을
책 맨 뒷면에 실었는데,
김삼웅이 한때 "백암의 <한국통사>를 읽지 않는 사람과 1시간 이상의 대화는
시간낭비"라는 오만(?)에 빠진 적이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극찬을 한 책이다.
박은식이란 분은 익히 들어본 이름이고,
<한국통사>란 책제목도 어디선가 들어본 제목이건만,
박은식과 <한국통사>를 매치시킬만큼 나의 상식이 넓지는 못했다.
이번이 <한국통사> 뿐만 아니라 박은식에 대해서도 알게 된 좋은 기회였다.
책날개에서 박은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박은식(1859~1925).
황해도에서 가난한 농촌 서당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巖, 白岩, 白菴).
필명은 무치생(無恥生), 태백광노(太白狂奴)라 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하였다.
박은식의 생애는 제1기(1859~1897) : 주자학을 수학하고 그 가치관에 의해
위정척사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2기(1898~1909) : 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중계몽과
개화자장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3기(1910~1925) : 망명 이후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업적을 남긴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언론인으로서, 구국계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사(1900),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 교장(1909)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겸곡문고>(1901) 등 수편을 저술하고,
수십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번역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박은식은 그 무렵 역사 연구를 통해 1911년에 <동명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등을 잇달아
저술, 간행하였으며, 1915년에는 <한국통사>를 펴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 간행하였다.
이는 <한국통사>와 함께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1884년의 갑신정변부터 1920년의 독립군 무장투쟁까지의 피어린 독립운동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던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기관지염의 악화로 1925년 11월 1일, 독립쟁취를 호소하는
유촉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68년만에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고국에서 영민하게 되었다.
1. 대담
이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가상대담으로 정리 해보았다.
insmile:
<한국통사>의 한자를 보면 韓國痛史로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눈에 들어오는 자가 바로 '痛'자입
니다. 아픔의 역사라... 우리 역사가 아픔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니, 안타깝고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지은이로서 이 <한국통사>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어떻게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까?
백암 :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목격한 최근의 역사는 힘써 볼 만한 일일 것이다. 이에 갑자년(1864년)부
터 신해년(1911년)에 이르기까지 3편 11장을 지어 통사라 이름하니 감히 정사를 자처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우리 동포들이 국혼이 담겨져 있는 것임을 인정하여 버리거나 내던지지 않기를 바
랄 뿐이다.
insmile :
<한국통사>를 쓰시게 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신지요?
백암 :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망하더라도 역사는 망할 수 없다 했다. 나라라는 것은 형체만을 말
하는 것이고, 역사는 바로 신명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형체는 이미 훼손되고 말았으나
, 신명만큼은 고고히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 통사는 바로 이런 뜻에서 쓰는 것이다. 신명이 존재
하여 없어지지 안으면 형체는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이를 편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통사는 갑자년 이후 불과 50여년간의 역사지만, 우리나라 4천년 역사 전체의 신명을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p.42)
insmile:
구한말 대원군의 섭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는 각양각색인
데, 그 또한 조선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국제정세를 바르게 읽지 못했다는 평이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대원군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백암:
대원군은 용맹 과감하여 혁신을 단행함에 있어서 옛일에 구애받지 않고 남의 말에 좌우되지 않았
으며, 권위를 배제하고, 문벌을 타파했으며, 군포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한 등의 일에 탁월한 추
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랜 관습인 동주, 철벽도 손을 대기만 하면 깨는, 실로 정치상 대혁명가
였다. 또 그 당시는 세계 정세가 급변하고 서양 문물이 동아시아에 침투하여 중국은 아편전쟁을 치
렀고 일본은 혁신의 소리가 높을 때였다. 우리나라도 이에 호응하여 만약 걸출한 수완으로 옛것을
바꾸고 새것을 취했다면 국가 민족의 융성을 기대할 수도 있었으며, 또 그 무렵은 오랜 세도정치로
백성이 혁신을 절실하게 기대하던 때였으니 곧 그 지위가 충분하고 그 힘이 충분하며 그 시기도 적
절했던 때였다. 단지 고금을 통할 수 있고 국내외를 관찰할 수 있는 학식이 부족하여 개인의 지혜
를 내치에 치중하니 과격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배척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쇄국정책
을 편 탓에 스스로 소경이 되었고, 마침내는 호가 아주 가까운 주변으로부터 미쳐왔으니, 나라가
중흥할 수 있는 시기를 잃게 된 것은 참으로 원통하고 애석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한스런
역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p.76)
insmile: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개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국가들과,
그리고 주변 국가들 간에 수많은 국제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 조약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구가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승인한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조약을 무색하게 하는 행동을
많이 보였는데, 이런 국제조약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백암:
국제조약과 의무라는 것도 전부 자기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가 자
주 자립의 실력 없이 외국인의 감언이설을 믿고 안심하는 것은 스스로 패망을 재촉할 따름임을 명
심해야 할 것이다.(p.118)
insmile:
대원군 뿐 아니라, 젊은 지식들 사이에서도 나라를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
표적인 것이 김옥균, 박영효등이 주동한 갑신정변이었는데요. 그들의 꿈이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
갔는데요.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백암: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나라의 혁명가였지만, 나이가 어려 경험이 적었고, 연구가 깊지 못한데도 급
하게 일을 벌여 실패한 것이다. 무릇 혁명이라는 것은 정치가 극도로 부패한 시기를 맞이하여 애국
지사가, 즉 대들보가 썩고 서까래가 낡아 부득이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방법인데, 실행은 난폭할
지라도 그 시기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일에 맞추는 것이며, 절차와 단계가 있는 법이다. 즉
종교나 학설 또는 선전으로 일반의 지식과 사상을 고취하여 혁명의 기운을 싹트게 한 다음에 정치
방면으로 들어가 벽력같은 수단을 사용하면 찬성자가 많고 반대자가 적어 그 혁신정책이 장애를
받지 않고 성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성공은 하루에 달려 있지만, 그 준비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데, 혁명파는 이러한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일을 추진했고 행동이 잔혹하여 위로는 임금의
신임을 얻지 못 하고 중간으로는 관료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어 사방에서 적이
생기니 어찌 성공을 바라겠는가?(p.125)
insmile:
정부는 동학을 난으로 규정하고 진압하지 못하게 되자 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그 난의 원인을 우
리 백성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백암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백암:
우리 민족은 윤리를 돈독히 지키며 질서를 잘 따라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복종하고 천한 사람은 귀
한 사람에 굴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라, 비록 관리들의 압력이 심하고 가렴주구가 그리치 않
아도 모두들 고개를 숙여 순종하여 그들의 불법처사에 저항하지 못 하고 있을 정도다. 다만 우리
국민이 죄가 있다면 나약하고 유순한 것이며, 사납다는 것은 관리들의 일방적인 표현에 불과할 뿐
이다.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 같으면 어찌 이런 악폐를 받아들여 이런 정부가
하루라도 남아 있겠는가? 호남지방은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많이 나서 백성들은 천연의 생산물만
가지고도 풍족하여 편히 살 수 있어, 괴로움을 참아가며 모험하는 습성이 없으며 윗사람 섬기기를
잘하여 평소 너무 착하다고 놀림을 받을 정도다. 그런데 타국에게 말하기를 민심히 흉흉하여 심성
이 간교하다고 햇으니, 이는 난이 일어나게 된 허물을 정부가 지지 않고 백성에게 돌리려고 하기
때문으로, 이는 같은 말이라도 너무 한 것이다. 탐학과 불법이 누적되어 오늘날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인가? 이처럼 흉악하고 사납다고 하는 것은 정부가 지어낸 죄목으로써 이는 백
성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만든 말이다. (p.141)
insmile:
조선시대는 유학 중심의 사회여서 우리나라는 실용주의 학문을 등한시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백암:
성설과 예론의 차이가 상호간에 논쟁을 일으켜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우니 조정의 붕당은 바로 여
기서 연유한 것이니 이것이 그것의 첫번째 폐해이다. 또한 배우되 허를 숭숭하고 실을 버리니 정치
, 법률, 군사, 농업, 공업, 재정 등 실용적인 학문은 공리적인 것이라 배척하고 배우지 않았다. 이순
신의 철갑선이 모래밭에서 썩어가도 묻는 사람이 없고, 유형원, 정약용, 박지원 같은 이론은 도학
파들로부터 축출당하여 중요성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선비들의 실용적인 것은 없어져버렸고 백성
들은 이런 일을 등한시하여 실력이 없게 되어 빈약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패혜이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태며 물건을 고르게 베풀라"하
였는데,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다.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신체 한 쪽만 위하
고 전체 몸을 돌보기 않는다면 병신이 되는 것이니, 국가도 학문을 장려하되 한 학문만 편중하면
다른 학문은 피폐하고 나라가 병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정치가는 각종 학문을 진보시켜야
되는 것이며, 시무만을 논할 때는 오히려 물질 학문에 중점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때는 부강한 실력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부강함은 물질학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긴급한 사태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162)
insmile: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은 이미 조선시대의 붕당정치가 원인이라고 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습니다. 백
암선생은 이 붕당정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암:
선조 이래 소위 동서남북 4색 당파가 정권 쟁탈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혹심한 투쟁을 벌인 탓에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죽어갔고 나라의 근본이 위험에 빠진 지 300여 년에 이르렀다. 그래도 당쟁
은 그칠 줄을 모르고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격심해지기만 하니, 사대부 가운데 국가와 민족
을 위하여 피를 흘린 자는 극히 적지만 당파와 개인적인 원한으로 서로간에 살육을 벌인 자는 이루
다 헤어릴 수가 없다. 족보에까지 기록을 남겨 자손에게 전수하여 보복과 투쟁이 날이 갈수록 더하
니, 갑의 제안을 을이 반박하고 병의 계획을 정이 무산시켜 한 가지 정책도 제대로 시행되는 것이
없고, 동인이 끌어온 것을 서인이 물리치고 남인의 명예를 북인이 헐뜯는다. 인재가 바닥나고 충신
과 역적이 뒤바뀌며, 아침에는 악수하고 저녁에는 공격하여 변화가 무쌍하다. 형제도 천륜을 어기
고 스승과 제자도 의리를 끊으며, 친척도 우의를 상하여 가문이 파탄하는 경우가 흔하며, 심지어
조정에까지 화가 미치고 왕실에도 피해가 미쳤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궁중에서 쫓겨난 일과 사
도세자의 죽음도 모두 당쟁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이 거의 함락되고 임금이 변방의 외진 곳으
로 피난하여 따르는 신하들이 피로하고 숨 쉴틈조차 없는 중에도 당파싸움을 잊지 않고 마사영, 황
득공의 무리가 전횡을 일삼았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 당파와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천한
사람이 재상 유성룡이었으므로 조신 가운데 유성룡을 증오하는 자가 이순신까지 미워하며 그를 죽
이려고 하였다. 당시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백성의 생사가 이순신 한 몸에 달렸음을 잘 아는 조신
들도 불과 당쟁의 간접관계로 국가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려고 했으나 이 어찌된 일인가.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파라는 것은 온갖 악의 근원이요 망국의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p.187)
insmile:
조선이 망해가도 당파싸움만은 더욱 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당파란 것이 이제 외부 열강 세
력을 등에 업으면서 친일파, 친러파 등으로 나뉘어 되는군요. 처음에 일본에 동조 세력이었던 명성
왕후가 친러파와 손을 잡게 되자 일본은 국모를 시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게 되는군요. 일본에 그
책임조차 제대로 묻지 못하게 된 우리 조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직도 다 쓰러진 정권이라도
잡아보겠다고 러시아와 결탁한 무리들이 임금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이 일어
나기도 하였습니다. 이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암:
이번의 아관파천이 복수를 위한 거사인지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계책인지, 이름은 복수
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권력 찬탈이다. 8월 참변에 김홍집이 수상의 신분으로 사정을 알고도 역적
들을 토벌하지 못한 죄를 묻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신의 죄를 논하는 데도 방도가 있는 법인데 일
개 경관으로 하여금 노상에서 타살하게 한 것은 법에 어긋난 것이다. 어윤중은 왕비 시해와는 무관
하고 오히려 복위를 주장한 인물인데 난민에게 피살됐으며, 범은을 붙잡아 처벌하지 않는 것도 역
시 법을 심히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이완용 일파가 국모 복수를 빙자하여 외국 공사관에 국왕을
가둬두고 셋방살이를 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며, 국권을 스스로 팔아
버린 것이며, 국가를 위험스런 상황에 스스로 빠지게 한 것이다. 그 행위가 한(漢)의 최기와 다름
없으니 이완용 일당의 매국 수단은 경술년의 일이 아니라도 아관파천에서 벌써 명백하다.(p.207)
insmile:
1897년 서재필의 독립당과 독립협회가 혁신적이긴 했지만,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
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암:
무릇 사람이 하는 일이란 상식적인 몸가짐으로써 끊임없이 노력하고 면밀히 힘을 쓰면 약자라도
성공하고, 성급한 마음으로 빨리 이룩할 생각만 하여 바쁘게 질주하면 강자라도 반드시 패하는 법
이다. 하물려 당시의 독립당은 원래부터 강한 힘도 없이 빨리 이룰 생각만 했으니 어찌 성공을 바
라겠는가. 내 생각에 우리 민족은 두 가지 병폐가 있는데, 하나는 연약하고 완만하여 용기있게 분
투하는 기개가 없이 모든 일에 위축되고 주저하여 산을 옮길 계획을 감행하지 못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경솔하고 조급하여 견실한 역량도 없이 헛되이 허영만 꿈꾸며 해의 그림자를 쫓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병을 뿌리부터 고치지 못하면 앞날의 사업에 지장이 적지 않을 것이니 우리 동포의 반
성을 희망하는 바이다.(p.217)
insmile:
동학난을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 요청을 했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군개입은 청일 간의 천진
조약 위반 사항으로 일본의 군개입마저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이 두 나라의 군개입은 청일전
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의 많은 이권을 차지하게 되었
고,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러시아가 간섭을 하게 되고, 자국의 이익만을 노린 러시아와 일본은 서
로 의견 타협을 하지 못한 채 결국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만했던 걸까요? 러시아마저 일본에
게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일본은 우리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방해되는 것은 아무것
도 없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 양국은 영국의 인도 점령을, 일본의 조선 점령을 서로
승인하는 조약마저 체결하여 국제적으로 이젠 일본의 조선 점령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아, 우리 조
선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요? 이렇게 유린당하도록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너져야 하는
것인지요?
백암:
이한응의 죽음은 우리 민족의 최근사에서 가장 빛나는 선혈이다. 대체로 우리 민족은 조상의 신성
한 가르침을 계승하여 삼강오륜을 지키고 예의를 숭상하여 충신 열녀의 선혈이 역사에 끊이질 않
았다. 만일 이런 것이 없었다면 4000여 년 국가의 명맥을 어찌 이어왔겠는가. 그러나 근세에 이르
러 국난이 거듭돼도 순국하는 자가 드물고 사람의 도리는 땅에 떨어졌으며, 풍속이 퇴폐하고 염치
가 없어지고 명예와 절개가 끊어지게 되어 조상이 물려주신 본래의 면목이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
나 광무 9년 5월에 이한응이 국치를 맞아 순국했다는 소식이 해외에서 전해오니 참으로 존귀하고
숭상할 인물로서 우리 민족의 선혈을 끓게 한다. 그후 충정공 민영환, 충정공 조병세 등의 순국으
로 충의 기풍이 되살아나 애국지사가 계속 출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을 세계에 떨치니 이들
이 아니면 우리 민족은 짐승의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육체는 동물과 차이가 없어서 굶주림과 음식, 암수의 정욕은 구분이 없는 것이다. 다
만 특별히 고귀한 점은 천부의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의예지의 덕과 효제충신의 행으로 천지
의 중심이 되어 능히 사물을 다스리고 사물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도리
는 이 영혼을 존중하고 양성함에 있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살신성인이라 했고 맹자는 사
생취의라 하셨다. 인이 어째서 육신보다 중하며 의가 왜 삶보다 중한 것인가 하면, 정신을 다스리
는 혼이 육체의 생명을 다스리는 백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것은 천지의 신명한 지기가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깃든 것이므로 육체의 생사와는 무관하며, 육체는 마치 여관방과 같아서 그
존재나 소멸이 진아의 초연함과는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이름을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무
궁하고, 세상을 떠남에 초연히 승화하여 쾌락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눈 앞의 부귀를 탐하여
매국 화족의 극악을 감행하는 자도 타고난 양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육체의 욕망을 극
복하지 못하고 영혼의 존귀함을 스스로 포기하여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다. 살아서는 악취를
천하에 퍼뜨리고, 죽어서는 영겁으로 몰락하는 보복을 받을 것이니 참으로 크나큰 어리석음이 아
닐 수 없다.(p.311)
다. 오늘날도 을사늑약을 생각하면 울분을 참지 못할 것 같은데, 당시에는 어떨지 눈앞에 보이듯
합니다. 이한응, 민영환, 조병세가 죽음으로써 항거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힘없이 무너진 것은 정부의 책임도 크지만, 우리 백성들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됩니다.
백암:
이제 변고를 만났으니 근심스럽고 두렵지만 이제 회개하기를 바라며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도모
고, 토지와 집, 재산 등이 전부 일본인 소유가 되어 갔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나라를
국의 이익을 앞서 생각하는 강대국들은 우리를 알아봐주지도 않았습니다. 고종은 침묵으로 을사늑
습니다. 그리고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던 와중 중국에서 감격의 소식이 날아왔습니
다. 안중근 의사가 을사늑약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죽인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뿐
만 아니라, 중국, 전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백암:
조선왕조 5백년간은 문치를 숭상하고 무를 물리침이 아주 심하여, 무가 약하게 됐다고 하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