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오고, 눈 오고 또 바람이 불면
- 한수산의 음악에세이 -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그리고 모차르트와의 만남은 나에게 음악을 단순한 악기에 의한 음악이 아닌 삶으로 끌어안게 했다. 일상의 삶이 아니다. 숨을 쉬고, 배가 고프고, 피가 뛰는 우리들의 육체, 사고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면서 ‘존엄성’이라는 것을 위해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우리들의 영혼, 그것은 이 두 가지의 만남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음악이라는 것이 내 내면에 의자 하나를 놓고 자리잡는 듯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거기 앉아 황혼을 바라보는, 캔버스 천으로 만든 조그맣고 정든 의자 하나, 그런 모습으로...
그 해였다. 늦은 봄, 나는 그때 살고 있던 제주에서 특수기관원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수산 필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문사건의 시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연재하고 있던 소설의 내용을 문제삼고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황당무계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조작이었다. 공항에서부터 눈이 가리워진 채 나는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리고 세 명의 사내들에게 질질 끌려 들어간 캄캄한 지하실에서, 단지 나를 향해서만 비치는 백열등 아래 알몸으로 벗겨진 채,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구타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경악 때문에 오히려 내 몸을 내 몸같이 느끼지 못하는 비현실감 속에서 첫 기절을 했다. 그리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얼굴에 젖은 수건을 감싸서 질식시키기... 1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서는 고통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비열한 고문행위들이 이어졌다.
그것들은 이겨낼 수도 참아낼 수도 있었다. 인간의 육체에 겪는 고통이란 시간에 의해서 씻겨지고, 망각이라는 벌레에 의해 파먹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문이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비인간화 행위’에 의해 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가능성과 믿음을 잃어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추상명사를 잃어버리는 과정이었다. 우정, 사랑, 명예, 애국, 정의, 연대감... 그런 모든 것, 인간이기에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 무형의 것들을 나는 잃었다. 고문이란 인간에게 자신이 다른 동물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다는 착란을 주입한다. 그렇게 해서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의 모든 차별성을 포기하게 하는 행위이다. 폭력을 통한 모욕감, 폭력을 통한 무력감, 폭력을 통한 좌절, 그 모든 것을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행위이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발가벗긴 다음 거기에 물을 뿌린다. 전기고문을 할 때 전기가 더 잘 몸에 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통해 온몸에 전기를 쏟아 붓는다. 몸이 튕그러지고 기절한다. 그렇게 해서 쓰러진 몸에 물을 뿌려대고, 의식을 회복한 몸을 질질 끌고가 백열등 불빛 아래 세운다. 고문기술자는 장갑낀 손으로 그 몸뚱아리에 매달려서 조그맣게 오그라든 성기를 잡고는 말한다. ‘이 새끼, 이걸 잘라버려야 제대로 불겠어?’ 나는 그 조그마한 살덩어리가 이제부터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필요한 하나의 상징이다. 이제 내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인간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그들이 만들어낸 ‘조서’라는 것을 내가 기르던 강아지가 읽을 수 있었다면 주인의 일이 하도 우스워서 사흘쯤은 밥을 굶어가면서 혼자 캘캘거리며 웃었으리라.
며칠 만에 풀려나 제주도로 돌아갔다. 공항에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진찰대 위에 몸을 벗고 누웠다. 온몸이 잉크빛으로 파랗게 물이 들어 있었다. 구타와 전기고문으로 살이 전부 타고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진찰을 할 생각도 없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됩니까?” 그는 차라리 명문 서울대학교 의대 출신인 자연과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파괴시키는 특이한 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3주간의 입원생활을 세내고 퇴원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딸아이와 함께 한라산 제2횡단로 곁에 있는 천왕사에 오르곤 했다. 그때 그 아이가 다섯 살이었던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보는 것조차 몸이 떨리게 두려웠다. 딸 아이의 음료수와 과자를 사고 내 것으로는 술을 샀다. 천천히 절 주위를 거닐다가 샘물도 떠먹고 나서, 우리는 숲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이를 위해 풀을 꺾어 모자를 만들기도 하고, 풀각시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술이 깨어 산을 내려오노라면 신이 한 줌의 불티를 집어 바다에 뿌려놓은 듯이 고깃배들의 불빛이 떠 있었다. 고기잡이를 나가 있는 저 배에는 사람들의 생활이 실려 있겠구나. 국한문체로 된 <장화홍련전>을 읽듯이 그 불빛을 보며 삶을 생각했었다. 새벽이면 부두엘 나가곤 했다. 포구로 들어온 고깃배들로 해서 어둠 가득한 바다를 등지고 그곳만이 빛으로 불타올랐다. 갈치들이 희디희게 은빛으로 번쩍였다. 긴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무어라 소리치며 고기를 날랐다. 문 닫은 구멍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생활의 활기라고들 말하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 그것은 움켜쥐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질 낡고 메마른 종이 같았다. 한밤에 바닷가로 나가기도 했다. 바다도, 하늘도, 파도도 밤에는 검다. 모래와 바람마저도 검다. 그 해변에서 돌아오면 손톱 밑에는 모래가 끼어 있었다. 울며 뒹굴며 모래를 움켜쥐기 때문이었다.
한 여름 내내 아침이면 바닷가에 2인용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보냈다.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 술을 마시고 잠이 들고, 잠이 깨면 다시 물에 들어갔다. 저녁이 오면 텐트를 걷어 집으로 돌아왔다. 잠든 아이와 아내를 바라보며 내가 부탁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였다. 기다려다오, 언제가 될 지 기다려다오, 내가 무엇으로든 나를 다시 이어갈 수 있기까지. 가을이 왔다. 아무 것도 치유된 것은 없었다. 늘 등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정서불안, 몇 번씩 잠근 것을 확인했지만 문이 열려 있는 것만 같은 착란증세에 시달리면서...... 나는 하루에 한 곽이면 몇 개비가 남던 담배를 하루 세 곽씩 피워야 하는 '벌레'가 되어 있었다.
여름내 비워 놓았던 서재에 가 보았다. 글을 쓰기 위해 혼자 가 있곤 하던 서귀포 목장 안의 빈 집이었다. 내가 잡혀가던 그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읽다가 간<황금가지>도 펴놓은 채 그대로였다. 다만 곰팡이가 자라 있었다. 내 손이 닿았던 자리에는 그 손자국을 따라서 더욱 무성하게, 청소를 하고, 램프를 닦아 불을 밝히고(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쌀을 씻어 석유 스토브에 밥을 앉혔다. 오래 비워두었던 집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이상했던가. 밤이 되자 목장 안에 방목하고 있는 젓소들이 저벅거리며 다가와 창밖에서 내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큰 눈들을 껌벅이면서. '흙으로 돌아가야겠다.' 앞뒤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흙, 나에게 흙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시골의 농토는 나에게 있어 이미 흙이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흙은 언어가 아니었던가.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라산의 색깔이 변해갔다. 신제주의 아파트 앞 은행나무는 늦게까지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던 어느날 새벽이었다. 문득 잠이 깨어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앉아 잿빛 하늘을 가리며 더 짙은 잿빛으로 솟아 있는 한라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중얼거렸다. 마치 방언을 하듯이. 음악이 듣고 싶다고. 베토벤을 들을까. 그러나 베토벤의 그 인간긍정으로 출렁이는 뜨거움과 장열함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심히 모짜르트의 피아노 LP판을 걸었다. 피아노 소나타 K331, 그 1악장이 다가왔다. 연기처럼, 희고 가느다란 연기처럼. 그리고 나는 오래오래 울었다.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라산에 조금씩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새벽 산정이 뿌옇게 빛으로 감싸이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봄날의 땅을 비집고 올라오듯 새싹이 하나 올라오는 것 같았다. 속눈썹을 간지럽히며 눈병이 나듯이. 그 조짐처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들려주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그 1악장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나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음악이었던가. 신의 소리, 생명의 소리, 그 찬가였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1967년 베를린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한 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나를 껴안으며 들려주고 있다. 아직 이 땅에는 네가 살아가며 사랑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네가 모르는 가치가 얼마나 많으며, 네가 모르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아느냐. 내가 들었던 그 LP는 일본에서 발매된 것으로 그 때 제주에 정양차 가족과 함께 내려와 살고 있던 K선생에게서 빌려왔던 것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유배시키다시피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의 외로움에 많은 위안과 도움이 되었던 분이었다. 그 후 그 LP를 구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내가 듣고 돌려준 그 똑 같은 LP를 구할 수가 없었다. 4년 넘게 일본에 사는 동안에도 시간 나는 대로 그 LP를 찾아헤맸다. 같은 곡을 에셴바흐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녹음한 것은 많았다. 그러나 그 LP만은 끝내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파리에 갔을 때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오직 그것을 구하려고 며칠을 묵기도 했었다. 어떻게든 에셴바흐의 그 모차르트를 듣고 싶었지만, K선생 가족은 나보다 먼저 서울로 떠났고, 나는 그분의 주소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 6월이었다. 우연이라는 것은 때때로 이렇게 황홀한가. 그때 대학생이었던 K선생의 따님이 역삼동 계몽문화 센터 옆, 바로 내가 사는 집 부근에서 '사라'라고 하는, 희디흰 디스플레이를 한 웨딩드레스 숍을 경영하고 있지 않은가. 떨리는 가슴을 숨기면서 K선생 사모님과의 전화에서 말했다. 혹시 그 LP를 아직도 가지고 계신지 찾아봐 주시겠냐고. 13년 만의 만남이라면서 다음 날 만난 K선생 사모님은 바로 그 LP, 나를 부축하여 다시 이 '살아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향해 걸어가게 만들었던 그LP를 선물로 주시는 게 아닌가. 인도의 여인들이 사리를 날리며 걸어가고 있는, 윤주영 씨가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 엽서와 함께. 엽서에는 이런 꿈같은 글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제주에서의 일들은 아름다운 잠깐의 꿈이었나 보아요. 또 꾸고 싶은 그런...... 그때처럼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또 바람이 불면.'
그 고문 사건후 몇 달이 지나서였다. 나는 이름을 적지 않은 한 청년의 편지를 받았다. 읽고 또 읽어서 외우게 된 그 편지,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선생님, 그때의 일로 건강을 해치지나 않았을까, 그것이 괴롭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고문하던 그 보안사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까지 끌어다 그런 일을 했던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제 약혼자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그만두었습니다. 달리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저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지야 못하겠습니까. 어딘지 지방에라도 내려가 식당이라도 하기로, 약혼자와 함께 약속하고 있습니다......' 누가 말하는가.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더럽힐 수 있는가. 이토록 고결한 인간의 존엄성을.
-----------------------------------------------
격월간으로 발간되는 '스테레오 뮤직' 32호(중앙일보사 발간) p. 254-257에서 옮겼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잊지 못할 글들을 간혹 접하게 되는데
이 한수산님의 글 역시 제겐 그런 명문 중의 하나입니다.
음악이 제 곁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http://blog.naver.com/korea0999?Redirect=Log&logNo=80031406577
* 위의 링크를 클릭하여 모차르트의 소나타 K.331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첫댓글 위의 링크를 클릭하니 다른 화면이 뜨는군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 중 그 CD가 행방불명이라 링크를 시켰더니 여의치 않네요. 창을 하나 더 띄워서 들으시는 수고를^^
무슨 영화 포스터 같네요
10년전 필름카메라로 찍은 것인데 필름이 있어 스캔을 떴습니다. 집사람이나 저나 10년 세월에 많이 변했습니다. 특히 제 경우엔 움직임이 적어서인지 체중이... 절제가 더욱 필요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