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아침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아침 산책길이지만 녹음으로 무성한 벚나무며 우거진 수풀에 이는 바람이 한결 정겹다. 유월의 바람은 풋풋하고 청초하면서도 가슴 넓은 여인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다.그 바람결에 일렁이는 길섶 수풀에는 쑥대며 장대나물이 솟아있고 개밀이며 다닥냉이가 손을 흔들고 있다. 개망초가 꽃 흐드러진 메밀밭처럼 하얀 꽃 숲을 한창 어우르고 있다. 개망초는 겨우내 땅속에 뿌리를 갊아 두고 있다가 봄이 올 무렵 땅에 바짝 몸을 붙인 채 촉을 내민다. 봄을 지나면서 꽃대를 조금씩 뽑아 올려 여름이 올 무렵부터 꽃대 위에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안은 하얀 꽃들을 앙증맞게 피워낸다. 그 개망초 꽃무리 속에 한껏 익어버린 듯 검붉은 수수 같은 저 꽃대는 무엇인가. 큰 이삭처럼 오밀조밀 덩어리진 짙은 고동빛 원추형꽃차례가 깊어가는 가을 느낌을 준다. 개망초는 꽃이 한창인데, 저 풀은 잎 지는 가을을 살고 있는가. 물기가 있는 땅이면 아무 데서나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소루쟁이다. 소루쟁이도 개망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겨우내 땅속에 뿌리를 갈무리하고 있다가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나온다. 개망초를 비롯한 다른 풀들이 겨우 촉을 내밀 무렵부터 잎을 조금씩 피워내다가 삽시간 훌쩍 자라 제법 넓적한 잎을 돋우어낸다. 여느 풀들이 잎새를 만들어갈 4월쯤이면 소루쟁이는 커다란 잎새 사이로 길쭉한 대궁을 쑥 뽑아 올린다. 5월이 되면 잎새는 손바닥 두어 배쯤 커다랗게 억세지고, 사람 키를 넘을 듯이 솟은 대궁에 작은 꽃들이 열매와 함께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원뿔 모양을 이루며 촘촘히 피어난다.그러다가 다른 풀꽃들이 한창 피어나고 푸름을 더해갈 무렵이면 검붉은 물이 들면서 말라간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잎과 줄기가 서로 갈리면서 ‘쏴아-’하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소리쟁이’라고도 불린다는 소루쟁이는 성질이 아주 급하고 욕심도 많은 것 같다. 남다르게 큰 잎과 대궁을 남보다 빨리 돋우면서 꽃도 다른 것들보다 크게 피우고 열매도 많이 맺어내다가 스스로를 못 이겨 고개가 처지다 못해 부러지기까지 한다. 저 모습 속에 성질 급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이 얼비친다. 남들보다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다른 이보다 모든 것을 더 많이 가지려다가 그 무게가 스스로를 눌러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되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모습들이다. 욕심에만 쫓겨 모든 일을 서둘러 하려다 보면 실수가 어찌 없을까. 신중하게 분별할 겨를인들 언제 가질 수 있을까. 멀리 볼 것 없이, 저 마르고 꺾인 소루쟁이에서 나를 본다. 약속 시간이 정해지면 남보다 먼저 나가 있어야 하고,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발 하나는 항상 차도에 내놓아야 한다. 일을 앞에 두고는 배기지 못해 서둘러 해내려다가 오히려 그르치고는 면괴와 후회에 젖기도 한다. 서두른 판단과 처사가 평생의 멍에로 남아 있는 일도 없지 않다. 노자(老子)는 “일에는 신중하여 추운 겨울에 찬 냇물을 건너가는 것같이, 조심하는 모습은 주위를 둘러싼 적을 두려워하는 것같이[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하라 했고, 공자(孔子)는 “삼군을 통솔한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라는 자로(子路)의 물음에“반드시 일을 대함에 신중하게 하고,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하겠다.”고 했다. 이렇듯 위인의 말씀들은 모두 매사에 신중하기를 권면하고 있지만, 타고난 품성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소루쟁이처럼 꺾이지 않고 여태 살아온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런 소루쟁이지만 천연히 하는 일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소루쟁이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초본이지만, 명은 질기게 타고 났는지 흙 속에서는 80년간 살아 있을 수 있고, 물속에서도 3년 반쯤은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나무도 아닌 것이 짧지 않은 명줄을 쥐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여태 살아있는 것은 소루쟁이 같은 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까. 소루쟁이 애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물로 달이거나, 찧어 즙을 내거나, 물엿처럼 고거나, 술을 담그거나, 가루를 내어 먹으면 강장(强壯)에도 효과가 있고, 해열, 통변(通便), 이수(裏水), 지혈, 기생충 구제에도 효능이 있다고 한다. 버짐이나 피부병, 종기에 날뿌리 즙을 내어 식초와 섞어 환부에 붙이면 좋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소루쟁이가 성질은 급해도 쓸모가 적지 않다. 소루쟁이의 급한 성질을 닮았을 양이면, 다른 성질도 닮아 그 약효처럼 무엇엔가, 누구에겐가 조금의 무엇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지 않으랴. 평생을 돌이켜보아도 무엇을,누구를 위해 이바지해본 일이 별로 있지 않은 것 같다. 소루쟁이 마른 꽃차례가 다시 돌아보인다. 얼마를 더 살아야 세상일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이 즐길 수 있는 마음결을 가질 수 있을까. 실수 없는 듬직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무엇과 누구와 더불어 조금의 위안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번한 마음이 어찌 그리 앉을자리를 찾지 못할까. 오늘 아침도 유월의 부드러운 바람 속을 걸으며 고개를 늘어뜨린 채 말라 가는 소루쟁이를 본다. 나를 본다.♣(2019.6.19.) |
첫댓글 선생님께서는 맑고 밝은 성품이 글에 그대로 담겨서 읽는이의 紀綱입니다. 오늘 아침도 소루쟁이가 제 마음을 다스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릴때부터 많이 보아 온 풀이지만
이름을 몰라 답답했습니다
토끼 먹이로 뜯어주기도 했었는데
이제야 이름을 알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