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는 성장 영화이면서 청춘 영화다. 아이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구나 캄캄한 청춘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혼돈의 시기, 그때의 삶은, 그리고 세계는, 미확인 비행물체 같은 것이다. 성인이 되는 법률적 나이는 만 19살로 조정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비로소 미성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수능 시험을 마치고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그 짧은 과도기는, 아직 대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등학생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불안한 신분이다. [발레교습소]는 바로 그 시기의 혼란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발레교습소]에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알에서 깨어나는 고통은 없다. 어디로 폭발할지 모르는 청춘의 에너지도 없다.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담백하게 묘사된 우리 주변의 특별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개인과 세계의 거대한 단층 사이에 놓인 그들의 일상이다. 이제 겨우 스물, 아직 세상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나이, 그러나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뒤틀린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순수함과 용기와 열정이 있는 나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덕목은, 청춘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영웅적으로 묘사하지도 않고 일방적 지지나 그렇다고 패배적 순응주의로 그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장영화들, 가령 프랑스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나 라세 할세트롬의 [개 같은 내 인생], 빌 어거스트의 [정복자 펠레]처럼, 지금까지 자신을 감싸주던 가족이라는 소우주를 떠나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과정보다는, 성인의 문턱을 넘으려는 불안한 청춘들 서로의 수평적 관계와 가족 내부의 수직적 관계에 관심이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발레교습소]는 스무 살 청춘의 방황과 꿈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나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맞닿아 있다.
동물을 만지는 것도 겁을 내는 수진(김민정 분)이가 제주대 수의학과에 진학하려는 이유는 집을 멀리 떠나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아들만을 우선시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민재(윤계상 분)가 항공기 기장인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것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갈 때 아버지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늘 집을 비우고 가족보다는 일을 더 우선시하는 아버지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수진이와 민재가 각각 자신의 가족 내부와 빚는 갈등은 더 이상 섬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가출했다가 집에 돌아온 민재가 아버지와 야구공을 던지는 라스트씬에서 지금까지의 갈등이 봉합되고 낡은 세계가 닫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가 감동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캐릭터의 구축과 내러티브의 전개가 표면적이었기 때문이다.
[발레교습소]의 위치는 미성년/성년, 고등학생/대학생, 가족/사회의 사이에 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발레교습소]의 어중간한 위치는 감독의 전략적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들은 결핍을 안고 있다. 결핍이 결핍인 이유는 욕망 때문인데, [발레교습소[에서 우리는 내부의 욕망과 외부의 현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측량할 수 없다. 극을 끌고 가는 매력적인 파워는 캐릭터의 개성이나 이야기 구조의 신선함에서 발휘된다. [발레교습소]의 단점은 그것들이 너무나 낯익은 것이라는데 있다. 진정성만으로 우리의 동의를 끌어내기에는 부족하다.
변영주 감독은 그들의 결핍이 삶의 큰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가 원하는 특수한 재능을 갖고 있지도 않아도 인생은 조바심 내지 않고 충분히 살만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영화 속의 핵심공간인 발레교습소만 봐도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곳은 [백야]나 [빌리 엘리어트]에서 볼 수 있던 전문적 공간이 아니다. 구청에서 구민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문화강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발레교습소의 무대는 구민회관이고,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살을 빼기 위해 혹은 싼 수강료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하고 싶은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다. 우리 주변의 낯익은 공간에서 비극적으로 가족을 잃은 요구르트 아줌마, 중국집 배달원, 비디오 가게 아저씨 등과 민재 수진의 친구들이 발레를 배운다.
[발레교습소]의 중심인물은 이처럼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따라서 드라마적 구성도 여러 인물로 파편화되어 있다. 이런 서사구조는 필연적으로 드라마의 힘이 모아지기가 어렵다. 변영주 감독의 민주주의는, 평범한 인물들에게 골고루 관심을 나누어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각각 개성 있게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데 있어야만 했다. 가족을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동네 요구르트 아줌마나 민재 주변의 여러 명의 친구들은 오히려 초점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무 많은 욕심으로 다양한 인물군상을 보여 주려고 했기 때문에, [발레교습소]의 집중적 힘은 약화되고 있다.
[발레교습소]는 매우 진지하고 솔직한 영화다. 이십대 청춘의 문턱을 막 넘으려는 그들을 충동하지 않고 자극하지 않고, 따뜻한 이해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 너희들에게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어, 너무 조급해 할 필요도 없고,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할 필요도 없어.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축 쳐진 어깨를 다독거린다.
세계의 꼭대기에 우뚝 서서 지상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은 성공에의 야망과, 어쩌면 나는 한낱 작은 미생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절망감이 수시로 교차하는 스무살 그 시기의 불안과 혼돈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발레교습소]의 미덕이다. 흡인력 있는 강렬한 내러티브와 눈부신 캐릭터로 번쩍거리지는 않지만, 또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발레교습소]에 애정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방황하는 청춘의 꿈과 좌절을 그린 [키즈 리턴]의 라스트씬에서 [우리, 이제 끝난 걸까?]라고 묻고, [바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라고 대답했지만, 변영주는 이렇게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