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불교태고종 총본산 서울 신촌 안산 봉원사(鞍山 奉元寺)를 찾아서 ②
- 대방(無量壽閣), 삼천불전과 사리탑-
대방(大房)의 모습
이 대방은 원래 염불수행을 전통으로 해 온 봉원사의 염불당(念佛堂)입니다. 이 건물은 본 래 조선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체 건물을 이건(移建)하면 서 일부 변형 및 축소되어 건립되었습니다. 아소정은 지금의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이었는데 한국전쟁 후 동도중ㆍ공업고등학교 증축공사로 헐려 그 일 부가 봉원사로 이건된 것입니다.
이 건물은 1966~1967년 주지 최영월(崔暎月) 스님, 도화주(都化主) 김운파(金雲波) 스님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팔작지붕 민도리집 형식이며 중앙 대중방과 마루사이는 벽이 없어서 행사시 전 체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17년 전 선자(先慈)의 49재를 여기서 했기에 이 대방은 각별한 감회가 있습니 다. 그때 지금의 주지 마일운(馬一雲) 스님이 집전하시고 많은 스님들이 동참하시어 여법 하게 49재를 지내어 가족들이 비운에 가셨던 애통함을 크게 달랜 적이 있습니다. _()_
봉원사 대방의 편액. 운강석봉(雲岡石峯) 글씨
운강석봉(雲岡石峯)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량수각(無量壽閣) 청나라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선생 글씨
옹방강(翁方綱) 선생은 청나라의 대학자이며 추사(秋史) 선생의 스승으로 유명합니다. 그 는 서예가이며 문학가이자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 추사 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 니다.
『옹방강(翁方綱 1733~1818 ) 선생은 자는 정삼(正三), 호는 담계(覃溪), 만호(晩號)는 소 재(蘇齋). 직례(直隸) 다싱[大興:지금의 베이징 시에 속함] 사람이다. 관직은 내각학사(內 閣學士)에까지 이르렀다. 탁월한 감식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고증을 거친 유명한 제발 (題跋)과 비첩(碑帖)이 매우 많다. 글씨는 구양순(歐陽詢)ㆍ우세남(虞世南)을 사숙했는데, 법도(法度)를 엄격하게 지켰으며, 예서(隸書)에도 뛰어났다. 당시 유용(劉墉)ㆍ양동서(梁同 書)ㆍ왕문치(王文治)와 더불어 명성을 떨쳤다. 시와 문장도 잘 지었는데, 시론(詩論) 방면 에서는 '의리'(義理)와 '문사'(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기리설'(肌理說)을 제창했다.
저서로는 〈양한금석기 兩漢金石記〉·〈한석경잔자고 漢石經殘字考〉·〈초산정명고 焦山 鼎銘考〉·〈소미재난정고 蘇米齋蘭亭考〉·〈복초재문집 復初齋文集〉·〈석주시화 石洲詩 話〉 등이 있다.』 -백과사전에서
청련시경(靑蓮詩境)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 글씨.
청련시경(靑蓮詩境)은 어떤 경지일까? 청련처럼 맑고 향기로운 시의 경지에서 노니는 완 당 선생의 삶을 상상해 봅니다.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ㆍ금석 학ㆍ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ㆍ추사(秋史)ㆍ예당(禮堂)ㆍ 시암(詩庵)ㆍ과파(果坡)ㆍ노과(老果)ㆍ보담재(寶覃齋)ㆍ담연재(覃硏齋)』 -백과사전에서-
추사 선생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은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 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고증 학(考證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제가의 도움으로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 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청나라 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 분들과 만남의 주선은 스승인 박제가 선생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경학(經學) 과 금석학(金石學)을 비롯한 학문적으로 크나큰 영향을 받고 돌아와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개척했는데 일세의 천재로 학문이 깊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배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산호벽루(珊瑚碧樓)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
왼쪽에 완당(阮堂) 이란 낙관이 보입니다. 완당(阮堂)은 김정희 선생의 또 아호로 청나라의 완원(阮元) 선생을 흠모하여 지은 호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이 아미타불은 300년 전 북한 철원군 소재 보개사(심원사)의 불상을 백련사와 몇몇의 사찰 에 모셔 놓았는데 영험이 있다 하여 모셔놓은 불상이라 합니다.
좁은 마루에 금고(金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있습니다.
목어(木魚)의 모습입니다.
왼편 대방앞의 석주 시식대(施食帶)
이 석주는 재(齋)를 베풀고 난 후 음식을 일부 담아 아귀(餓鬼)들에게 베푸는 시식대(施食 臺)인 것 같습니다.
오른편 대방 앞의 시식대(施食帶)
대방에서 바라본 삼천불전(三千佛殿)의 모습
삼천불전(三千佛殿)
1945년 화주 김기월 스님과 화주 김운파 스님의 원력과 사부대중의 힘을 모아 46칸의 광 복기몀관을 건립했는데, 1950년 9월 25일 6.25사변 중 한강 도하작전 때 소실되었다고 합 니다. 이때 영조의 친필 '봉원사'와 이동인 스님, 김옥균 선생의 유물 등 문적(文籍)이 소실 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1986년 주지 조일봉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1988년 삼천불전의 복원불사가 시작되 어 주지 김성월 스님, 주지 김혜경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단일목조 건물로는 국내최 대(210평) 건물로 9년여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대들보 무게가 7톤으로 알라스카산 수령 227년 나무들을 사용했으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천불전(三千佛殿) 편액 인전 신덕선(仁田 申德善) 선생 글씨.
인전 신덕선(仁田 申德善) 선생의 약력.
『1946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삼천불전에는 주불로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을 봉안하고 그 뒤 좌우로 삼천불(三千佛)을 모셨습니다. 삼천불이란 장업겁(莊嚴劫. 過去世) 1천불, 현겁(賢劫. 現 在世) 1천불, 성수겁(星宿劫. 未來世) 1천불을 말합니다. 이는 대승불교사상으로 누구든 깨달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법당안에는 49재 의식이 베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재의식의 제일인 도량이 고 보니 그 어산(魚山)의 종장(宗匠)들이 내는 소리는 정말로 맑고 청아하며 유장하였습니 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저절로 숙연해지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었습니다. 많은 의식 범패승들이 실로 장엄하게 의식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의식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염려하 는 마음으로 의식을 지켜보다가 몇몇의 분들이 촬영하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내어 몇 컷 담아보았습니다. 다른 스님들이 오가면서도 아무런 만류가 없었습니다. 우리 법우님들은 바깥에서 지켜보고 계시며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습니다.
천도재 중 천수바라춤
바라춤으로 법당이 크게 장엄되었고 영가를 크게 환희심을 냈을 것입니다.
실로 많은 스님들이 의식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천도재 대령(對靈)의식의 삼현육각(三絃六角)도 장엄합니다.
나비춤
나비춤은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상징하는 무용으로 일명 해탈무(解脫舞)라 합니다. 이는 자비(慈悲)의 발견 및 참는 마음의 발견, 법보(法寶)의 발견을 위하여 추는 춤으로 부처님 의 가르침을 받고 법열(法悅)에 도달하기 위하여 범패(梵唄)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호적(胡 笛), 징 등의 반주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연주하기도 합니다 .
영가는 이 춤을 보고 모든 집착을 끊고 해탈하기를 합장해 봅니다.
이 춤을 보니 조지훈 선생의 승무란 시가 떠오르네요.
마냥 지켜 보고 싶지만 일정이 있어서 법당을 물러나와 연꽃과 주변의 경관을 찍었습니다.
삼천불전 앞의 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석가모니불 진신사리탑(釋迦牟尼佛眞身舍利塔)입니다. 탑 앞에 사리탑비 가 서 있는데 여기에 사리탑 조성연기문이 있어 전문을 옮겨 봅니다.
사리탑 조성연기문(舍利塔造成緣起文)
사리탑 앞에 '석가모니불진신사리탑비'가 있는데 여기에 사리탑 조성연기문이 있어 무슨 내용인가 전문을 옮겨 봅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는 무수겁(無數劫)을 경과(經過)하시며 닦으신 수행(修行)의 결정체(結晶體)로서 곧 부처님의 진신(眞身)이시니 말세(末世) 중생(衆生)의 복전(福田)이시 다. 따라서 불자(佛子)에게 있어 사리(舍利)는 예배공양(禮拜供養)의 대상(對象)이며 모신 곳은 귀의처(歸依處)가 된다. 때문에 경(經)에도 사리탑(舍利塔)을 조성(造成)하고 사리(舍 利)를 봉안(奉安)하는 일은 모든 불사(佛事) 가운데 으뜸이요 공덕(功德) 또한 무량(無量)하 다고 이르셨다.
본사(本寺) 대중(大衆)과 신도(信徒) 등 75인(人)은 지중(至重)한 불연(佛緣)으로 스리랑카공 화국(共和國) 정부(政府)의 초청(招請)을 받아 불기(佛紀) 2535년 7월 22일(서기 1991년 陰 6월 11일) 스리랑카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캔디의 불치사(佛齒寺)에서 석존(釋尊)의 진 신사리친견법회(眞身舍利親見法會)에 참례(參禮)하는 등 11일간에 걸쳐 스리랑카의 성지 (聖地)를 순례(巡禮)하였다.
석가모니불진신사리탑비(釋迦牟尼佛眞身舍利塔碑)
무엇보다도 큰 성과(成果)는 불은(佛恩)과 콜롬보 소재(所在) 강가라마야사(寺) 그나니사라 대승정(大僧正)의 배려(配慮)로 석존(釋尊)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顆)를 모셔 오게 된 일이다. 본사(本寺)까지의 이운불사(移運佛事)는 불치사(佛齒寺)의 말왓타 종정예하(宗正 猊下)와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총무원장(總務院長) 박서봉(朴瑞峰) 대화상(大和 尙)의 증명(證明)ㆍ본사(本寺) 주지(住持) 김성월(金性月) 스님, 부주지(副住持) 김대운(金大 雲) 스님, 총무(總務) 박인공(朴印空) 스님의 증참(證參)ㆍ스리랑카의 프레마다사 대통령 (大統領) 내외분(內外分)과 라릿페드리스 주한(駐韓) 스리랑카 대사(大使)의 환송(歡送) 그 리고 앰블데니야제 소마파라 참사(參事)의 외호동행(外護同行)으로 원만(圓滿)히 회향(回 向)하였으며 매순간(每瞬間)의 장엄(莊嚴)한 모습은 석선암(石禪岩) 스님의 의 촬영(撮影)으 로 기록(記錄) 보존(保存)하였다.
사리탑 조성연기문(舍利塔造成緣起文)
불사리(佛舍利)를 모시는 일은 본사(本寺) 초유(初有)의 일로 용상대덕(龍象大德)을 위시(爲 始)한 사부대중(四部大衆)은 환희심(歡喜心)으로 영접(迎接)하였고 동년(同年) 음 6월 24일 친견법회(親見法會)를 성대히 봉행(奉行)하였다. 다음은 사리탑(舍利塔)을 조성(造成)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奉安)함이 마땅하나 송구(悚懼)스럽게도 삼천불전(三千佛殿)ㆍ대웅 전(大雄殿)ㆍ명부전(冥府殿) 등 이미 시작되어 진행(進行) 중인 불사(佛事)로 그 시기(時期) 를 정(定)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渦中)에 본사(本寺) 관음회(觀音會) 제9대(第九代) 회장(會長)인 이구품행보살(李九品行菩薩)이 발의(發意)하여 임기(任期) 중(中) 적립(積立) 된 기금(基金)과 뜻있는 신도(信徒)의 동참(同參)으로 본(本) 사리탑(舍利塔)을 조성(造成) 회향(回向)하게 되었다. 이로써 기간(其間)의 송구(悚懼)함을 면(免)하고 불사리(佛舍利)를 봉안(奉安)하게 되었으니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환희(歡喜) 그 자체(自體)다. 이에 관 음회(觀音會) 회원(會員)은 물론(勿論) 사리이운시(舍利移運時) 대화주(大化主) 이형구거사 (李亨九居士) 석등시주(石燈施主) 황정숙보살(황貞淑菩薩) 난간불사(欄間佛事) 송명자보살 (宋明子菩薩)의 공덕(功德)을 함께 기리며 인연(因緣)있는 불자(佛子) 여러분과 더불어 영원 (永遠)한 기쁨을 표(表)하는 바이다.
佛紀 2546년 2月 5日 (음 辛巳年 臘月 24日)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봉원사(奉元寺) 주지(住持) 박인공(朴印空) 합장(合掌)』
사리탑 앞에서 대웅전쪽을 바라보니...
어떤 단체에서 봉원사를 찾아와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은 연꽃 축제가 열리기에 많은 분들이 찾아올 듯합니다.
삼천불전 난간에서의 미소님, 비니초님, 대각화님 사리탑 주변에서 잠시 휴식 중 날씨가 무척 덥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냅니다. 미소님과 비니초님이 가져 오신 냉커피로 더위를 식히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냅니다. 다음은 연꽃 상련의 시간을 가졌 는데 주변의 경관과 전각을 동시에 담았기에 우선 봉원사 전각을 먼저 정리하고 연꽃 세계 로 안내하겠습니다. ☞ 다음은 봉원사 3부가 이어집니다.
|
첫댓글 이렇게 크게 49재 지내는 모습 처음 봤습니다. 시원하게 마셨네요 _()_
미소가 갖고 온 냉커피와 비니초님 갖고 온 냉커피 섞어서 먹었더니 더
49재의식이 참으로 장엄하지요 대부분의 절은 많이 짧은 편이죠. 바라춤이나 나비춤 등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니까요. 천도재는 제일 먼저 시연(侍輦) 의식부터 하게 되지요. 시방에 두루하신 불보살님과 도량을 옹호하는 천룡팔부를 연(輦 가마)에 모시어 영가를 천도하는 법요식의 증명이 되어 주십사 하는 것이죠.거운 시간이었습니다. _()_
재의식이 우리가 공양을 다한 연후에도 계속되었고 산에 올라갈 무렵에 거의 끝났지요.
더운 날씨에 냉커피는 정말 청량한 음료였습니다.
49재 의식이 화려하고 우장해서 인상 깊었던 같아요.
냉커피 맛도 일품이었구요
비니초님 미소님의
범패소리와현육각의 장엄한 소리에 압도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지요. _()_
청도의식에 동참한 유족들은 완판으로 감동적으로 보았을 것 같습니다.
재를 지낸 공덕은 영가(靈駕)와 재를 베푸는 재자(齋者) 중 누가 공덕이 많을까요
언제 한 번 영산재 시현이 베풀어지면 참관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늘 단편적으로만 보았지 전체적인 것은 못 보았네요. 그 소리는 긾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_()_
49재 의식의 규모가 일반 절에서와는 비교가 안 되겠군요. 바라춤에 나비춤까지, 일반 사람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오셨으니 좋은 구경을 하셨네요.
예, 그렇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감동이었습니다. 다른 절에서 이런 화려한 장엄은 없다 하더라도 그 정성에 따라 감동은 있습니다. 저도 49재 의식을 많이 집전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영가를 천도할 능력은 없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고 정성을 다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재를 맡긴 분들이 좋은 꿈과 결과를 얻었다고 말해 주더군요. _()_
비록 남의 49재(천도) 의식 이지만, 동참만 하여도 내 조상님 들도 오셔서 천도 받는다 하셨지요. 불 보살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법회에 참석한 대중을 청정히게 하는 의식 이기도 하지요....나무묘법연화경()()()
대방에 대한 설명과 대방에 걸린 편액의 글씨 설명 감사합니다. 옹방강선생, 추사 선생의 글씨... 이 대방에서 백우님의 선자당께서 49재를 지내셨군요.천불전의 천도재 모습, 사리탑비문을 일일이 올며 적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배경음악은 봉원사 스님이 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들어보니 회심곡 같은데 아닌가요 잘 보았습니다. _()_
정견님도 우리와 함께 순례하는 기분입니다. 대방에서 95년도 벚이 흐드러질 때 49재를 지냈는데 그때 마일운스님이 집전하여 20여분의 스님이 바라춤, 나비춤 등으로 장엄하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배경음악으로 흐는는 회심곡도 했었지요. 천도재에서 회심곡은 빠질 수 없는 대목이죠. 감사합니다. _()_
가는날이 장날!! 천도재 의식이 있있어 넘 좋았구~~ 덕분에 범패 바라춤 까지 감사 합니다....나무묘법연화경()()()
연화십덕 중에 견자개길(見者皆吉)이라는 것이 있지요. 연을 보면 길하다고... _()_
장엄한 천도재 ,,,. 글구 법우님들거운 모습이 그립 습니다. ()()()
바쁜 일정 끝나면 신호를 올려 주세요. 청계산 가게... _()_
봉원사에서 만난 법패 의식은 가만히 듣는 이들조차 극락으로 인도할 것 같았습니다._()_
마음이거우면 이미 극락세계로... _()_
제사있는것을 알고 가셨나요? 좋으셨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