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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숙
위의 작품의 “나무”는 생을 다하는 지점까지 대결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자신의 생애가 “하늘만 우러러/걸어”왔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부끄럼이 없을 때 비로소 대결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예는 윤동주의 삶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서시」)라고 고백했다.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애쓴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 “나무”가 대결 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도덕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저기 저렇게/푸른 나뭇잎들이 무리 지어/반짝여주고/아직 가지 않은 숲속 길에서/나무들이 손짓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하는 “나무들”이, 다시 말해 바른 이념이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은 시인이 사회적 존재로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이다. “나무”의 대결 의지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대적인 것이다.
(b)
이상국
위의 작품의 화자는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은/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그걸 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화자의 희망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루쉰이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땅 위에 처음부터 길은 없지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과 같다.”(「고향」)라고 했듯이,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만 품고 있으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화자가 좋은 시인이 되고 싶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나는 아직도/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지 못했”다라는 자세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겸손함은 열등감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결코 희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직 좋은 시인이 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곧 좋은 시인이 되어가는 태도인 것이다. 화자에게 좋은 시인이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결코 “희망은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b)
정온
소련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1991년부터 독립 국가로 운영되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의 지도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서방 국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보고 러시아의 영토로 수복되어야 한다고 인식해온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나토에 가입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지배해온 크림 자치 공화국을 재통합하는 전략을 국가 안보로 내세웠다. 이에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경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가 쏜 미사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자 전 세계인은 전쟁의 참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하고 전쟁 중단을 촉구하고 제재를 가했다.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비롯해 다양한 인도적인 지원도 하고 있다.
전쟁은 거대한 명분을 갖고 있지만, 모두 허위이다. “여기저기 헉, 헉 헐떡이고 억, 억 소리를 지르며 흔”들고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터지고 조각 난 이빨을 뱉으며 흔”드는 광기만이 넘친다. 전쟁은 인간을 몰살시키는 잔인한 폭력일 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이여 “제발 그만!”
(b)
조숙향
위의 작품의 화자에게 “산책길”은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니는 장소가 아니라 “무수한 발길에 떨어진 낙엽마저 굳은살이 배긴” 것처럼 수많은 다짐을 한 곳이다. 또한 “벼랑에 기댄 상처투성이 나무기둥 잡고/미끄러지는 마음을 의지했던 길”이고, “사는 게 춥다고,/추운데 기댈 데가 너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길”이기도 하다.
화자가 “산책길”을 자신이 “기댄 언덕이었”다고 표명한 것은 그만큼 그가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아픔이며 상처를 안고서도 주저앉지 않고 나아갔다. 가는 길이 비탈지고 벼랑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언덕에 뿌리박은 나무의 상처가 불끈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화자의 절박한 심정과 부단한 실천이 하늘까지 올라가 겨울 햇살을 푸르게 만든 것이다.
(b)
최종천
위의 작품은 노동가요를 중심으로 민중 노래를 창작하고 부르는 모임인 ‘꽃다지’와 안치환 가수가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가사가 연상된다. 노래 가사에 따르면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이와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이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을 아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온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가난한 집의 숟가락 젓가락이 밥그릇에 부딪는 소리/기침 소리 가끔 울리는 늙은이의 저음은/어떤 현악사중주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밥그릇이 비어갈수록/소리가 많아”지는데, “어떤 악기도 그 소리는 내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 이유 역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소리는 진정 아름다운 “현악사중주”이다. “아기의 칭얼대는 소리”는 더욱 그러하다.
사윤수
위의 작품에서 “폭우”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다그치는” 존재이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치기도 한다. 화자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폭우”를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품는다. 그가 “인사불성 표류하”고 “만취가 되”어 있지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하면서 달래”고 다독이는 것이다.
“어쨌든 들어오시라”고 안고 “비의 울음을 모”시는 화자의 자세에서 모성애를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성애를 지나치게 여성의 헌신으로 여기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성애의 위대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성애는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인성적인 것이다. 화자가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은 것을 외면하지 않고 품는 것이 그 모습이다.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온 것이다. 울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울음을 품을 수 있다.
강태승
위의 작품의 화자는 무생물인 “전기(電氣)”도 “우화(羽化)”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전기가 날개 있는 엄지벌레로 변한다는 화자의 놀라운 상상력은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미성아파트”의 전기가 들어오려면 지하에 있는 “변압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을, 화자는 지하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전기란 꽃(우화)도 뿌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화자는 이와 같은 이치를 자각하면서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었다. “이십오 년 인쇄 출판 경작하다 다 털어먹고/지하로 내려간 날”은 절망스러웠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더 푸르렀다. 전등도 더 밝았다. 그리하여 “바닥에서 지하로 무너진 것이 오히려/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침침한 내재율/제 몸 달구”는 것이다. “누군가 스위치 올리면 알몸으로 달려가/마른 가지 끝에도 뜨거운 꽃을 피”울 수 있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서수찬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일주일째 금식하”고 있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링거병이/통닭이 되고 삼겹살이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처지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저녁에 잠자는 것이다. 그런데 “가림막 하나 사이”를 두고 있는 병원 침대에서 “한 아주머니”가 “천둥 같은 과자 먹는 소리”를 내고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이가 몇인데/지금도 과자를 먹냐고/가림막을 확 걷어내고 큰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화자는 자신의 화를 금방 누그러뜨리고 아주머니가 과자를 좀 더 맛있게, 많이, 오래, 편안하게 먹기를 응원한다. 그 이유는 “몸 하나 까딱 못하고/혀만 살아 있는 남편”을 힘들게 간호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라고 하소연하는 “남편의 몸 곳곳이 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은데, 남편이 “치료가 끝나고 퇴원하더라도/집이 아니라 요양원으로” 가야 하는 처지를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개월 전에/아들마저 폐암으로/먼저 보”낸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에게 과자는 단맛을 내는 간식거리가 아니다. 과자는 그녀의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쓰라린 심신을 덜어주는 샘물 같은 것이다.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그녀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인 것이다.
박석준
위의 작품의 화자는 “신 살구 같은 유등의 유월 밤비 속을” 걸어가고 있다. “불빛 흘리는 상점들”도 “비에 젖”고 있다. 화자는 걸어가면서 자신은 “돈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은행 앞 우체통 앞에서/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바라보다가 그것에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케이크를 떠올려 가려버린다”. 화자는 그와 같은 소극적인 행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 5만원을 찾고는,/제과점”에 들어가 “케이크를 돈 주고” 산다.
화자가 슬픈 눈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자신이 가난할 뿐만 아니라 “조직에서 소외되”고, “전망이 흐릿”하고, “방 안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할지 막연해 밤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49살”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아직 오십 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가 제과점에 들어가 케이크를 사는 것이나, 밤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권위상
2022년 5월 연세대학교 재학생 3명이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시위로 발생하는 소음으로 말미암아 수업권이 침해되었다고 형사 고발을 했고, 6월에는 640만원을 지급하라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시급 440원 인상, 퇴직한 인원 충원, 샤워실 설치 등이었다. 청소노동자들은 연세대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매일 오전 11시 30분 학생회관에서 팻말을 들고 집회를 진행했다. 이에 학생들이 수업권을 침해받았다며 고발한 것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라고 묻는다. “이 사태를 누가 책임져야 할까”라고 고민도 한다. 화자의 궁금증과 고민은 난제가 아니다. “답이 있는데 답이 없”을 뿐이다. 곧 “답이 있는데 답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우선 사용자인 연세대가 나서야 한다. 하청 회사와 노동자와 학생들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인 것이다.
안명옥
위의 작품의 화자는 서랍에 들어가 있으면 “속도가 사라진” 세상이어서 아늑함을 느낀다. 자신뿐만 아니라 “칼도/서랍 안에서 얌전하”고, “자리를 지키려고 애쓰던 연필 엽서 여권들도/내밀함으로 뒤섞여 서로를 품어준다”. 서랍은 “지켜야 할 침묵도/버려야 할 침묵도” 가르쳐준다.
서랍은 화자에게 편안함을 주고, 기쁨을 주고, 만족감을 주고, 행복을 주는 대상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속도로부터 쫓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쟁에 함몰되어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소란”에 시달리고 “풍문”에 휩싸이고, 결국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화자가 서랍 안에 들어가는 것은 삶의 주소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곧 자신을 준비하고 되살리는 시간이다. “하루만 서랍 안에 있”어 보라, “누군가 나를 또 궁금해” 할 것이다.
송경동
위의 작품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선 수만 번의 번개가 치며/한 달째 100여 곳으로 번진 산불”로 “대한민국 서울 면적의 20배를 태우고도/꺼지지 않고 있”다. “브라질 아마존 밀림에서”도, “남극 마람비오 기지”에서도, “북극의 베르호얀스크”에서도, 심지어 “한반도”에서도 다양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작품의 화자는 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원인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들 한다”고 비판한다. 가령 “아마존 우림이 파괴되는” 상황이 “다국적 식량 자본과 소고기 문명을 위한 목축 자본”과 “브라질 신종 독재자/보우소나루 때문이라고” 왜 말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화자는 인간들 스스로 “유한한 삶과/무한한 세계에 대한 무한한 무지에 대해 인정하고/한없이 소박해”져야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무한한 탐욕을 줄여야만 기후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육도, 언론도, 문화도, 자본주의 체제와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우원
위의 작품의 화자는 “세계 전도를 사”서 “양팔 벌릴 정도의 크기로/책상 위 벽에 떠억 붙여 놓”으려고 한다. 세계를 품으려고, 다시 말해 “방문하고픈 나라들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나이 더 들기 전에/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고/오로라도 영접해”보고 싶은 꿈을 당장 실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깃발만 꽂아 두”면 “희망이라는 게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화자가 이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된 것은 “마스크 비대면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접촉을 막고 있다. 그에 따라 기업, 학교, 종교단체 등의 사회 활동이며 개인 생활이 많은 제한을 받아 답답함과 우울감과 불안감 등으로 위축되어 있다.
화자가 세계 전도를 마련해 방안에 붙여 놓고 여행을 상상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즐겁지 않은 처지에서 즐거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김수영 시인이 지구의를 바라보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힘든 기후 조건인 남극에서 “명정한 정신”(「지구의」) 찾았다면, 화자는 “즐거운 놀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애리
“무릉별유천지”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위치하는 관광지이다. 지명에서도 그렇고, 에메랄드빛을 띠는 “청옥호와 금옥호”의 경치에서도 그렇고, 그곳을 별천지라고 여기기가 쉽다. 그렇지만 그곳은 “축구경기장 백오십 배 면적의 석회석 광산”이었다. 광산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고된 노동으로 피와 땀을 흘렸고, “진폐증을 앓”았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창문을 열지 말아야 하는 날이 더 많았”고, 책상 위의 먼지들이 “바람 부는 날엔 더욱 심해졌”고, “어머니가 자주 닦던 장독대 위에 켜켜이 쌓였던” 가루들을 떠올린다. “새벽마다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놓고 기도”를 올리고 “퇴근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석회석 광산 채석장에서 돌을 캐다 땅굴이 무너져/영영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잊지 못한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구하는 데는 노동자들의 헌신이 컸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각종 산업재해 등의 대가로 국가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사회 환경의 급변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의 역사는 지워지고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위의 작품은 석회석 광산 역사의 기록성을 갖는다.
박설희
“아들이 있어요?”
“없어요.”
“그럼 야크가 있나요?”
“한 마리도 없어요.”
“에그, 불쌍한 사람.”
행복의 “척도”는 무엇일까?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인가? 행복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기에 어느 쪽을 선택할 수 없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헐레벌떡 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거리에는/불쌍한 사람들과/불쌍해하는 사람들이/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함석헌도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뻔뻔한 얼굴”, “간사한 얼굴, 얄미운 얼굴”, “실망한 얼굴”, “병에 걸린 얼굴”(「얼굴」) 등으로 그렸다. 아름다운 얼굴이 없다고, 행복한 얼굴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백무산
“인류세”(人類世)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지구의 환경에 가장 영향을 준 시기이다. 대체로 그 시작을 화석연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1800년대의 산업혁명 시기로 보고 있다. 인류세의 개념은 2001년 네덜란드의 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이 창안했는데, 인간이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배출된 가스가 지구온난화와 기후 변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양한 생물이 서식지 파괴로 멸종하고 있다.
위의 작품의 화자가 사 온 쥐약으로 쥐를 죽인 것이 그 한 모습이다. 화자는 “갑자기 불어나 거실에까지 제집처럼 극성”인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사왔다. 그렇지만 “마당엔 개도 있고 너구리도 다니고/꼭 그래야 되나 싶기도 해서/뚜껑도 열지 않은 채 다락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극성이던 것들이 종적을 감추”자 “쓸데가 없어진 위험한 쥐약 버리려고 찾았”는데, “봉지가 찢기고 빈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화자는 황당한 장면 앞에서 “그 지경에 많이 먹겠다고 행패/부린 놈 배불리 먹고 떠났을” 것이고, “못 먹은 몇몇은 어쩌면 자책에 시달리다 다 버리고/떠났을” 것을 생각한다. 자책에 시달린 쥐들이 살아남아 종족을 번식시키는 것이다.
화자는 쥐에 비해 인간은 자책을 모르는 존재라고 파악한다. 자책을 모르기에 인간은 멸종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온난화며 기후 변화의 주범은 탐욕에 빠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시켜주는 것이다.
김려원
위의 작품의 화자는 “귤”이 익어가는 시기를 “파란을 버릴 때”라고 비유하고 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 시기를 “속마음과 겉이 같아지는 때”라고, 다시 말해 “마을과 이웃이 모반을 꿈꾸다가/숨긴 생각 모조리 들켜버리는 때”라고 본다. 그리하여 “귤”은 “울타리를 버리고 가시를 버리고/집 바깥을 버리고/밭으로 들어간”다. 울타리를 버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위의 작품에서는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었다. “오래전 야반도주한 우리 집 탱자 울타리가/밭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는/비좁다, 비좁다, 제 구역 늘리며 노래져 왔다”고 좀 더 구체화했다.
화자는 “귤”을 통해 가족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다. “귤은 손을 많이 타는 과일”이어서 “가시울타리를 밀치고 가출한 오빠 같”다거나, “하나로도 둘로도 낱개로는 팔지 않는 귤은/일종의 화폐단위인 봉지들의 속셈”이라고 인식한 것이 그 모습이다. 가까운 혈육들이 함께 생활하는 형태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인류 생활사이다. “가시를 매단 탱자 울타리들”이 “추위 근방을 지”켜 이룬 노란 귤들의 마을은 정겹고 따스하다.
성희직
위의 작품의 화자는 “석탄공사 함백광업소에 입사한 1969년부터/사북광업소 폐광으로 광부 일 마친 2004년까지/막장에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증표를/소중하게 간직해온 전직 광부 최시규”를 소개하고 있다. 화자는 그 일이 아무나 할 수 없기에 그가 모은 “36년간의 임금명세표는 시가” 될 뿐만 아니라 파업 투쟁을 잘한 광부나 오래 일한 광부를 포함한 “수만 광부 대표한 역사”라고 평가한다.
“최시규”가 모아 놓은 임금명세표를 보면 광산 노동자의 월급 내역을 시대별로 알 수 있다. 가령 1969년의 기본급이며 야간 수당, 갑종근로소득세, 배급대, 생활필수품대 등과 실수령액을 알 수 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달라진 후생수당, 입항수당, 위험수당, 생산수당 등도 알 수 있다.
“최시규”가 임금명세표를 모아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저승사자와 사투를 벌이며 버텨낸 막장의 노동이/가족의 밥이 되고 옷이 되고 아이들 학비도 되고/웃음을 주고 행복이 되고 눈물도 배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4년에 폐광한 사북광업소 ‘유물보존회’가 전시한” 그의 월급명세표는 “진짜 광부”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김은정
위의 작품의 화자는 라디오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라는 대중가요를 듣다가 가사의 의미를 반문한다. 노래 가사처럼 꿈꾸는 “여민락”(與民樂)과 “만사성”(萬事成)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화자는 “화분에 풀 한 포기만 나도 냅다 뽑으면서/성장촉진제인 척 숨겨둔 제초제까지 뿌리면서/저 푸른 초원은 시뮬레이션이라 무성해도 되는가?”라고 비판한다. 생명을 중시하지 않으면서 초원 위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꿈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한 “메타버스 평화 나라 국민의 수묵화 같은 주권과/백년손님 헌법의 창과 포 두루마기 닮은 기본권,/파리, 모기, 소와 양에 대한 납세까지 금수회의록”이라고 했다. 사회 구조와 제도적인 면에 문제가 있다고, 즉 국민 주권과 헌법도 가상현실에서나 보장받고, 세금 징수도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하고 유토피아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화자가 생각하는 님은 “푸른 반려 풀밭”이다. 풀들은 “비와 바람”과 “흙”을 믿고 뿌리를 박는다. 화자는 그 “풀과 함께”하고자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지만, 자신의 “초심”을 믿는 것이다.
서안나
위의 작품의 화자는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말 자체에 대한 아쉬움뿐만 아니라 말을 사용한 문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봇디창옷”이다. 이 말은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입는 “배냇저고리로 깃과 섶을 달지 않으며, 소매가 아주 길고 삼베로 만들어졌으며,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제주어연구소)는 의미가 들어 있다.
화자는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갔”는데, 그 순간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이 되어 흩어지”는 모습도 떠올랐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호를 입힌 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어머니의 말을 토대로 오랜 시간에 의해 습득된다. 어머니의 말을 기초로 다른 언어들을 점증적으로 터득해가는 것이다. 한 인간이 어머니의 말을 토대로 사회 언어를 익혀 나가는 것은 곧 문화를 계승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어 “콥데사니”는 마늘, “심방”은 신을 모시는 무당, “제물 차롱”은 굿을 할 때 신도들이 바치는 제물을 담는 대바구니, “물애기”는 갓난아기이다.
이상백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조선 세종대왕이 소헌왕후 심 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찬불가(讚佛歌)이다. 세종은 왕후를 위해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수양대군은 여러 불교 서적을 참고해서 석가모니의 일대기(석보)를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생략하는(상절) 방식으로 엮었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편찬해 올린 『석보상절』을 읽고 찬불가를 지은 것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그 “월인천강지곡”을 인유해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죽으면 모두 별이 된다는데/엄마는 달이 되었다”라고 당신의 자식 사랑이 지극한 것을 알리고 있다. 그와 같은 모습은 당신이 “낮달로 떠서/휘청거리던 내가 머리 들게 하고/어둑어둑해지는 날에는/보름달로” 온다고 한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날은 천 개의 강에 그 빛을 나누지 않고/오로지 내 강에만 떠서/앞길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줄어들지 않는다. 화자는 그것을 깨닫고 “월인천강지곡”으로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있다.
윤임수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삼복더위를 경관 좋은 데서 피할 형편이 못 되어 “오징어를 맛있게 볶는다는 오복집”을 찾았다. 화자는 그 자리에서 함께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오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복의 다섯 가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풍요롭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씩 흘”렸다. 사람마다 “오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풍요롭게 사는 것 이상의 복을 기대하는 것이 어렵다. 가령 덕을 베푼다거나, 명예를 높인다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 등은 차원이 다른 복이다.
화자는 “일복은 타고 났다”는 한 일행의 말을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 일할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라고 고마워한다. “취업을 못해 미래를 포기하는 청년들을 생각하면/인력소개소에서 발길을 돌리는 중년들을 떠올리면/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큰 복”이라고 기꺼이 동의하는 것이다.
어느덧 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임금을 올려달라, 근무 조건을 개선해 달라, 복지 시설을 마련해 달라 등의 요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 대신 일을 더 하게 해달라, 밥만 먹게 해달라 등을 호소한다. 컴퓨터의 등장, 기술 개발, 값싼 임금 노동자의 유입 등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일복”이 “오복”의 한 가지인가?
김정원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에서 시인의 자아인 나비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인 바다를 동경한다. 나비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 그 바다를 향해 날아갔지만,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제 강점기의 현실 인식을 나타낸 것이다.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에서 시인의 자아인 나비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광장에 놓여 있다. 나비는 희망보다 상실감과 절망감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좌절하지 않고 신화와 더불어 상황에 맞서 대결한다.
위의 작품은 김기림과 김규동의 나비 인식을 역사의식으로 계승하고 있다. 나비는 분단으로 말미암아 평화가 정착되지 못한 환경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나비에게 “평화 민족으로/통일 나라로” 날아가길 응원한다. “이별이 콘크리트처럼 굳고/소원이 빙산처럼 얼기 전에/본래로 돌아가”길 염원하는 것이다. 통일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이기에 화자의 바람은 간절하고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