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투리가 좋다 / 이언주대구에 있는 동생가족과 경주로 휴가를 가는 길이었다. 꽤 오랜만에 만난 조카 준이는 중학생이 되고 달라진 학교생활이며,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리아이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준이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한 아이는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을 하고, 다른 아이는 진짜 웃긴다고 놀리면서 티격태격 했다. 그때 창밖을 내다보던 동생이 “여기서 경주 게잡나?”하고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대답을 하는데, 난데없이 준이가 “엄마, 왜 경주에서 개를 잡아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 엉뚱한 질문에 어른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멀뚱한 표정으로 왜 웃느냐고 했다. ‘가깝다’라는 의미로 흔히 쓰이는 사투리를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중학생인 준이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표준어 교육이 강화되면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왠지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드라마에서도 표준말을 쓰는 교양 있는 사모님에 비해 사투리는 부엌데기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자 같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었다. 때문에 오래전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수업시간에 혹여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걱정이 되어 뉴스를 보며 텔레비전 앞에서 표준말을 따라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한 여류시인이 ‘자신이 쓰는 말’이라는 표현으로 출간한 사투리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나도 투박한 사투리로 맛깔나게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표준말을 써야할 곳에서는 몸에 밴 억양으로 촌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고, 정작 사투리로 뭔가를 쓰자니 어릴 때 쓰던 말들이 입에 맴도는데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말도 저 말도 제대로 못 쓰는 박쥐같은 꼴이 되고서야 잃어버린 그 말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사투리 속에는 노래를 하듯 장단이 있고 운율이 있다. 지역의 정서가 억양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평면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지방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뼈가 굵지 않으면 흉내 내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투리로 그 사람의 출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국적불문의 은어와 신조어들이 생활어가 되어가면서 세대를 구분 짓고 있다. 오히려 오래된 사투리가 외국어 취급을 받기도 한다. 거의가 순수한 우리말인 사투리를 잃어 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고향 사투리를 들으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귀에 익은 말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다. 비단 내 고향 말뿐만이 아니다. 눅진한 남도 사투리나 구수하고 순박한 강원도 사투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그전부터 알아온 듯 반가움이 느껴진다. 아직도 고향의 인정이 남아 있을 것 같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더 쉽게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가 좋고, 육자배기를 하듯 걸쭉하게 사투리로 말하는 사람이 좋다.
언젠가 한 여류시인이 ‘자신이 쓰는 말’이라는 표현으로 출간한 사투리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나도 투박한 사투리로 맛깔나게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표준말을 써야할 곳에서는 몸에 밴 억양으로 촌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고, 정작 사투리로 뭔가를 쓰자니 어릴 때 쓰던 말들이 입에 맴도는데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말도 저 말도 제대로 못 쓰는 박쥐같은 꼴이 되고서야 잃어버린 그 말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사투리 속에는 노래를 하듯 장단이 있고 운율이 있다. 지역의 정서가 억양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평면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지방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뼈가 굵지 않으면 흉내 내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투리로 그 사람의 출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국적불문의 은어와 신조어들이 생활어가 되어가면서 세대를 구분 짓고 있다. 오히려 오래된 사투리가 외국어 취급을 받기도 한다. 거의가 순수한 우리말인 사투리를 잃어 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고향 사투리를 들으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귀에 익은 말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다. 비단 내 고향 말뿐만이 아니다. 눅진한 남도 사투리나 구수하고 순박한 강원도 사투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그전부터 알아온 듯 반가움이 느껴진다. 아직도 고향의 인정이 남아 있을 것 같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더 쉽게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가 좋고, 육자배기를 하듯 걸쭉하게 사투리로 말하는 사람이 좋다.